요엘 2,22-24.26ㄱㄴㄷ; 묵시 14,13-16; 루카 12,15-21
+ 찬미 예수님
한가위 명절을 맞아 우리 노은동 본당의 모든 교우와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또한 명절을 맞아 우리 본당을 찾아주신 가족 여러분께도 주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합동 위령 미사를 지내며 우리가 기억하는 부모님, 가족, 조상과 친지들께서 주님 안에서 평화의 안식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추석(秋夕)은 ‘가을 저녁’이라는 뜻인데요, 요즘 날이 너무 더워 앞으로는 ‘여름 저녁’ 즉 ‘하석’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달이 밝은 음력 8월 보름에, 한데 어울려 놀기도 하고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며 추수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 추석의 본래 의미였다고 하는데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기 때문에, ‘크다’라는 의미의 ‘한’과 ‘가운데’라는 의미의 ‘가위’를 합쳐 한가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추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제1독서에서는 요엘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엘서는 종말과 심판의 날인 ‘야훼의 날’을 예고했는데, 우리가 회개를 통해 이날을 잘 준비하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실지를 1독서에서 노래합니다. “나무들이 열매 맺고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야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종말의 날이 더 이상 무서운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로 그려지고 있는데요, 우리가 추석 때에 염원하는 것과 비슷한 희망이, 주님의 약속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 역시 세상 종말을 추수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께서 계셨는데, 천사가 그분께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라고 외치자 그분께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고, 땅의 곡식은 인류입니다. 세상 종말 때에, 우리가 맺은 삶의 열매가 곡식이 되어 수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복음 역시 추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가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내가 수확할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하고 고민하다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추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 추수가 종말과 연결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긴 여름 동안 뙤약볕에서 고생하듯 삶의 여러 굴곡에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아픔도 마지막 추수 때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 주님께 봉헌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1독서와 2독서 말씀에 비해 복음의 추수 이야기는 부정적인 결말로 끝이 나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자의 혼잣말을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고서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너는 여러 해 동안 사용할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너에게서 네 영혼을 되찾아 가리라.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이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말 성경에 ‘나 자신’ ‘너’라고 번역된 말을 직역하면 모두 ‘영혼’입니다. 부자는 ‘내 영혼’이라 표현하며 영혼이 자기 것이라 간주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너에게서 네 영혼을 되찾아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부자의 영혼의 본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올해 우리 본당 사목 지표가 뭘까요? “하느님, 이웃, 피조물,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숙해가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우선 부자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많은 소출을 거두었지만 하느님께 어떠한 감사 기도도 드리지 않고, 또 이 소출을 갖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하느님께 여쭙지도 않습니다.
둘째, 부자에게는 이웃과의 관계도 없습니다. 많은 소출을 이웃과 나눌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추수는 물론 농사일 전부를 일꾼들이 했을 텐데, 그들의 수고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셋째, 피조물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그에게 곡식과 땅은 하느님의 거룩한 피조물이 아니라 자기 재산일 뿐입니다. 더 큰 창고를 지으면 곡식이 그 안에서 썩지 않을까요? 곡식의 존재 이유가, 쌓아두기 위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실패했습니다. 부자는 자기 자신에게만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멸망하게 합니다.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하는 일일까요? 하느님, 이웃, 피조물과의 관계를 올바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니, 이 부자가 우리 노은동 본당의 사목 지표만 알고 있었더라도 멸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무척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지난 주일에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의 편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1845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신 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실 때까지 21년간 한국에 사시면서 목숨 바쳐 사목하시면서 많은 글도 쓰셨는데요, 이 중에는 가족과 동료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습니다.
박해 시대인데 편지가 어떻게 전달되었을까요? 다블뤼 주교님의 편지는 교우의 손에 의해 우선 백령도로 배달됩니다. 거기에서 몰래 접선한 중국 배에 실려 상하이를 거쳐 홍콩과 마카오로 갑니다. 거기에서 큰 배에 실려 인도 봄베이를 거쳐 이집트 수에즈 항에 가고, 기차에 실려 알렉산드리아 항으로 갑니다. 다시 배에 실려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으로 간 뒤, 고향인 아미앵으로 전달됩니다.
영상통화를 하는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이 오랜 여정을 거치게 되는데, 우편 요금도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다블뤼 주교님은 부모님께, “우편 요금 걱정하지 마시고 편지를 좀 더 자주 써 달라”는 부탁까지 하십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편지에는 정말 중요한 내용만 담게 되는데, 다블뤼 주교님은 당시 우리나라의 풍속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계십니다.
“조선에서 자선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이를 거절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러 그를 위해 밥을 다시 짓기도 합니다. 또한 일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기 밥을 나눠주며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을 초대해 모든 것을 나눠줍니다. 여비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조선인이 가진 덕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왜 그렇게 급속도로 전파되었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살아가던 삶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또한 “이웃에 혼례가 있거나 장례가 나면 자기 일처럼 돕고 화재를 당한 집이 있으면 집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공짜로 일을 해 주는 형제애를 지니고 있다”는 말씀하시고, 조선인들이 “무능하고 타락한 왕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인간사회의 토대를 형성하는 원리들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면 조선 사회는 쉽게 건실한 사회가 될 수 있고 또한 필연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판소리라는 조선 역극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연극보다 자연스럽다”고 하시는 한편 “조선인들의 단순하고 솔직한 미덕에 많은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의 편지를 읽으며 자연스레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의 삶이 떠 올랐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늘 나눔을 실천하신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삶의 열매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하느님 품에 안기신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과 조상님들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님의 추수 밭에서 기쁘게 수확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열매가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 나누어질 수 있도록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알렐루야의 말씀을 다시 듣겠습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재작년 추석 때 찍은 달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