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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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12:47
물빛 39집 원고(남금희)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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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신전
남금희
풀벌레들이 밤새 울어 터를 닦아놓았다
숙연한 나무들 어깨를 낮추면
알밤이 터지고 도토리가 구른다
절로 쌓이는 예물이다
우듬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구름이 흐르고
적막한 마른 향기가 퍼진다
켜켜이 놓인 돌무더기
소리 없는 기원
풀숲도 낙엽도
대지의 온기를 찾아 엎드린다
밤이슬 달빛이
엎드린 것들을 씻기고 있다
겨울 동화
겨울 숲에 고라니 두 마리가 보였는데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남은 한 마리 멈칫, 얼어붙었다가
소리가 사라진 그쪽
목을 빼고 넘겨다본다
비명조차 못 지르는 아뜩한
동물의 세계다
살을 찢고 피를 뿌리는
한밤 내내 눈은 내려
모양이 다른 발자국 몇 점
아침햇살에 선명하다
새들은 허공을 쪼아대고
잠잠히 드러누운 눈밭
바람이 쓸고 간다
시골집
어쩌다 들르는 시골집은
삭아서 뼈만 남았다
어머니 잠결에는 끙,
뒤척이는 한숨 몇 됫박에
중얼거림도 섞여 있었다
딱딱한 방바닥이 불편하다던
도시 며느리는
한창 고개 내민 부추를 잡풀인 줄 알고
뽑아버렸다
어머니 가시고
밭작물은 뒤틀려 억세졌다
갈무리할 엄두를 못 내는
며느리도 나이 먹었다
어머니 등 대시던 그 자리에 누워
선잠 들며 끙,
마디 곱은 그 손을 더듬어 찾는다
창호지 문이 달빛에 젖어 있다
말 나무
말은 마음밭에서 돋아난다
마음결이 다르면 말결도 다르다
바람에 사라지는 말
구르다가 찌르는 말
열매처럼 살진 말
말의 뿌리는 웅숭깊다
땡볕도 폭우도 고드름도
빨아들인다
마침내 말 나무는
주검을 입히는 목관이 된다
썩어 다시 살아
새로운 말 나무를 키운다
말꽃이 나부낀다
붉고 푸른 그늘막이 줄지어 선다
노안(老眼)의 새벽
웅이네 가구 간판을 옹이네 가구로 읽고 다녔다
유장한 아무르 강도 아모르 강이라 기억했다
여름 수련회 민박집 한 방에 누워
철썩이는 파도에 실리는 얘기들
몸 뒤척이며 듣는다
누가 때 묻은 천사의 날개라는 말을 흘릴 때
때 묻은 것은 천사일까 날개일까
궁금증은 접는다
인생이 왔다 갔다 한다는 그의 내력도
나의 내력에도 백태가 끼었다
우리 기억은 너와집, 옹이가 많다고
잘 못 알아들어도 아무르 강은 바다로 흘러든다고
깊은 새벽은
실눈썹 달 아래 빛나는 샛별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바위처럼 앉아
조용히 그림자가 되었다
백련사 동백숲은
너무 꿋꿋해서
서로를 곁눈질할 틈이 없었을까
잔물결 치는 바다를 등지고
눈보라 이겨낸
동백나무숲이 야무지다
동박새가 울 때마다
젖이 돌아 멍울지던 가슴
겹겹 꽃등 달더니
울컥 울컥, 각혈하는 난장
피꽃 냄새 어질어질하다
견디지 못하는 만덕산 바람은
저 혼자 뒹굴다가
산비탈 내리달려 고꾸라지다가
끝내 어둠 속에 잠기고 만다
잘 가라, 피아노
반백 년 함께 살던 너를 떠나보내네
나, 가난해도 꿈의 날개 버리지 않았으니
바람의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던 멜로디
사랑의 아픔마다 고이던 멜로디
알뜰히 접어 보낼 수 있네
가거라, 피아노
죽음의 계곡을 건너 무사히
월광의 바다로 흘러가라
함께 떠나지 못해도
남겨진 기억은 따뜻하리니
이제 맨발로 춤춘다 해도
넘실대며 흥얼거리는 저 세월
두렵지 않네
삐걱거리는 몸, 노 저어
나도 흘러 돌아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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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39집 원고(남금희)
꽃나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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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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