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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의 수필 세계
- 차맛 같은 여운과 촉촉한 그리움 -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수필은 한마디로 ‘인간학’이다. 그래서 수필을 일러 ‘정의 문학’이라 했다. 정이란 인간의 영혼이 응결된 심성의 꽃이다. 맑은 영혼을 드러내는 투박한 그릇이요, 풋풋한 향기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애, 그것이 없는 수필은 이미 수필이 아니다. 인간학의 명제에 바로 답하지 못하는 작품은 이미 수필로써 실패한 것이다. 최영주가 자신의 수필 속에 자신의 이야기보다 이웃 사람과 나눈 따스한 교감을 수필의 소재로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사람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그녀는 수필을 통해 그리움을 길러 올리면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정임을 말하고 있는 휴머니스트 작가다. 수필의 핵심은 원시의 정, 바로 수필의 향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최영주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을 수필이라는 따스한 동네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최영주는 부산 출신으로 십여 년 전 「문예사조」로 등단하여 울산문인협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필가다. 그녀의 수필은 자연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정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글은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인연의 소중함을, 모성과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최영주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움'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속에 있는 흑백 사진처럼 아련히 남아있는 인정을 오늘날의 건조한 풍요와 대비해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한다. 대단한 필력이다. 다소 안정된 공간에서 최영주가 마주하는 수필적 공간은 유칠십년대의 애환을 담은 애련한 사진으로 인식된다. 하늘을 안고 들어온 햇살이 모인 과거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녀 수필의 주제적 지향성은 크게 두 범주로 나뉜다. 첫째 범주는 최영주 수필의 거대한 물줄기로써 이웃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의 소중함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글이고, 두 번째 부류는 모성적 그리움과 진한 가족 사랑을 담고 있는 글들이다.
II. 최영주의 수필 세계
1. 인연의 자락에 핀 그리움의 노래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글이다. 수필의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을 때 그 글은 향기를 지닐 수 있다. 수필을 인간학이라 부르는 소이도 수필의 내용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최영주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웃의 인연과 만남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최영주가 인정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가슴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필은 사람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더하여 문학성까지 확보하고 있어 금상첨화다.
양식이 없어 밥 한 그릇이 아쉽던 시절은 아득한 옛 일로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한 편에선 늘 따뜻한 밥이 그리운 이들이 있다. 길 위를 떠돌고 있는 노숙자들이나 운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독거노인 같은 이들은 뜨거운 국과 김이 나는 밥 한 그릇이 끼니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다. 더 나은 교육을 시키겠다고 아내를 딸려 자식을 외국으로 보낸 기러기 아빠는 가족과 오순도순 둘러앉아 먹던 밥 한 그릇이 못내 그립다. 부모가 늦은 저녁에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이는, 땅거미가 지는 놀이터에서 엄마목소리에 불려 들어가 먹는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이 많이 생각난다. 출세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겠다고 바쁘게 뛰는 이들에겐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과 얼굴을 보며 얘기도 하면서 먹을 시간이 없다. 밥은 그저 건강을 위한 기능성 음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밥 한 그릇> 중에서 -
위의 작품은 작가에게 올해의 작품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궁핍하던 5,60년대 시대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최영주 수필의 작법적인 특징은 전 작품에 동일하게 드러나는데, 최영주 작가가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위해 자주 활용하는 전략은 주제 관련성이 높은 자료의 인용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소설이, 어떤 작품에서는 영화가, 또 다른 작품에서는 시가 인용된다. 인용된 사례가 주제를 간접화하고, 구체화하는 데 매우 적절하다는 데서 최영주 수필가의 문학적 역량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김훈의 소설 ‘강산무진’에 나오는 가족 이야기를 삽화로 끌어들이고 있다. ‘밥 한 그릇’의 의미는 보릿고개를 넘어온 한자 세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별하다. 작가는 서두 첫 마디를 ‘끼니 때가 다가와 시장기가 돌 때 맛깔스럽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으면 먼저 마음부터 따스해진다’라고 적었다. ‘밥’ 한 그릇이 밥 이상의 의미를 지난다는 것을 말하고는 전개부 첫 문장을 ‘궁핍하던 5,60년대, 사람들은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도 밥으로 했다.’로 시작했다. ‘밥’이 인정의 상징임을 짐작케 한다. 인정을 베푼 경험의 기억보다 인정을 받은 흔적을 남기는 일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 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인정의 샘물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밥’을 의미화하는 작가의 문장력은 일단 수준급이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은 그 사람과 정신을 교감하는 일이다.’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은 삶을 향한 긍정적 말걸기이다.’ ‘일상으로 먹는 한 그릇의 밥은 무엇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라는 진술은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아침밥과 점심밥 그리고 저녁밥에 담긴 각각의 의미를 실체화하면서 작가는 ‘밥’이 가지는 의미를 과거와 현대적 차원으로 비교 분석하고, 인정을 잃어버린 시대, 현대인들에게 ‘밥’ 한 그릇의 가치를 전해주고자 한다. ‘가족의 손으로 정성을 들여 차린 밥상으로부터 멀어진 그의 모습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작가는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을 독자들이 잘 찾도록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작가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아니겠는가.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의 이효석 님은 낙엽 타는 냄새 속에서도 커피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커피를 퍽 좋아하는 그가 상상이 된다.
깊은 밤 불을 켜고 책을 읽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 커피의 향은 나를 가만히 잡아 주곤 한다.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마시는 커피는 가슴을 글썽글썽 파고든다. 몹시도 바람이 부는 날엔 그 향기가 내 마음을 어디론가 자꾸 민다. 가사 일에 지친 하오의 햇살 속에서 커피는 또 내게 힘내라고 속삭인다. 11월 일몰의 광경을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 커피 한 잔을 타노라면 커피향은 또 울먹울먹 저 먼저 가슴을 무너뜨린다.
커피를 좋아하는 이를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왠지 반갑다.
- <커피 이야기> 중에서 -
‘커피 이야기’는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커피에 대한 작가의 유별난 기호를 독자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밥 한 그릇>과 마찬가지로 주제 구체화를 위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를 인용해서 주제적 양식인 수필의 특성을 살리고, 관련 삽화를 삽입해 메시지의 설득력을 강화시키는 등 주제 의미화를 위해 전략적 접근을 구사하고 있다. 수필의 문학적 향취는 입체적인 묘사를 통한 체험의 구체화에서 풍겨나는 것이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 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드는 것이다. ‘돌아보면 커피는 내 시간과 공간을 많이도 함께 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커피는 작가의 삶에 늘 그렇게 따라다녔다. 이 정도면, 이 작품의 마지막 멘트, ‘커피를 좋아하는 이를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왠지 반갑다’는 진술에 힘이 실린다.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인용된 예문을 읽으면, 작가에게 있어, 커피는 철학이고, 삶의 동반자임을 알 수 있다. ‘커피 향은 나를 가만히 잡아주곤 한다’는 표현이나 ‘커피 한 잔을 타노라면 커피 향은 또 울먹울먹 저 먼저 가슴을 무너뜨린다.’는 표현 역시 무정물에 인정을 담는 것으로써, 작가의 따뜻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고요한 밤에 잔잔한 물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안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절 초입에 고추밭이 가지런히 가꾸어져 있다. 골짜기 골골이 알뜰하게 밭을 일구어 놓았다. 이런 사람 냄새는 언제 어디서나 반갑고 마음을 빗질해 준다. 저만치서 석불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맞아 준다. 어찌나 정겨운 지 발길을 멈춰 마음으로 정성껏 인사를 드린다. 어느 날 T.V.에서 운주사를 본 뒤 들판의 석불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정호승 님이 쓴 동화 ‘연인’의 푸른툭눈이를 만났다. 푸른툭눈이는 운주사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의 물고기다. “봄날에 꽃바람이 불어오면 나의 소리에는 진달래 꽃잎 냄새가 난다”고 소곤거리는 그 푸른툭눈이도 보고 싶었다. 어느새 운주사는 그리운 곳이 되어 멀고도 아득한 이 길로 나를 불러 들였다. 방금 지나온 일주문을 뒤돌아본다. 산뜻하게 단청한 일주문은 이 고즈넉한 곳에 저혼자 치장하고 물색 없이 뛰어들어 서 있는 꺽다리 같다.
- <운주사 골짜기엔> 중에서 -
이 작품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사람 냄새는 언제 어디서나 반갑고 마음을 빗질해 준다’는 표현이다. 마음을 빗질해 주는 사람 냄새는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냄새를 풍길까. 이 작품을 쓰면서도 작가는 어김없이 체험으로 내재된 기억의 저장장치에서 ‘스키마’를 불러낸다. 정호승의 동화 ‘연인’을 끌어들인 것이다. ‘연인’을 거꾸로 하면 ‘인연’이 되지 않는가. ‘시간이 여유롭게 살고, 맑은 자유가 순하게 머물러 있다. 그래서 아늑하다’는 문장은 열린 언어다. ‘시간’, ‘자유’ 같은 관념을 활유법을 써서 곧잘 구체화한다. 사물에 정을 놓는 이러한 인간화 기법은 가슴이 따스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수필이 주는 가치는 등불로서의 교훈적인 가치 말고도 미적 쾌락을 안겨 준다는 데 있다. 적절한 삽화의 인용은 주제의 간접화를 돕는다. 마지막에 정호승의 시, ‘풍경 달다’란 시구 역시 매우 적절한 인용이다. 와불은 푸른툭눈이에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다”라고 이른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냄새는 ‘사랑의 풍경소리’다. 이 작품은 공감도의 측면에서도 성공하고 있는데, 결말에 앞선 전개부 말미 쯤에서 작가의 시선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갖는 작가의 모습은 바로 진정한 수필가의 본 모습이라 하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책을 읽다 생각에 잠기는 한 여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도록 그려내는 글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이 수필의 백미는 마지막 결구 문단에 있는 자기 성찰 부분이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가장 독자의 공감을 받는 부분이 성찰의 자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자기 아닌 다른 인물을 묘사하더라도 전개부 마지막 쯤에 가서는 자기에게 필발을 겨누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별엔 그리움이 박혀 있다. 그 그리움은 끊임없이 자맥질하며 부채살처럼 사랑의 속살을 일깨워 놓는다. 그렇게 돋아난 사랑은 이별을 배운 뒤의 만남을 소중하게 건사할 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이별은 만남의 시작이고 또 다른 모습의 은은한 사랑이다. 이별은 홀로 흐느끼게 하고 그 흐느낌으로 자기성찰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이별은 사랑과 자기성찰을 동시에 만나게 하며, 눈치채지 못하게 새로운 만남들을 그윽하게 껴안을 줄 알게 한다.
이별은 헤어짐만으로 끝내지 않는다. 이별을 알뜰히 배운 이는 만남을 견고히 한다.
- <전화선을 스친 사람> 중에서 -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최영주는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이웃의 미덕이나 미담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수필가로서 돋보인다. 그리움과 모성 원리로 대별되는 두 줄기의 큰 흐름을 가지는 최영주의 수필세계는 작가의 독서 체험과 인연이 주가 되어 나타나면서 주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 인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을 기억의 저장 창고에 쌓아두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최영주의 수필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고요한 호수 같이 평화로운 분위기요, 위대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이미지다. 그러기에 이 수필은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별과 만남의 의미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인생 체험적 이야기는 그녀의 독서 체험이 용해됨으로 인해서 더욱 튼실해진다. ‘이별을 알뜰히 배운 이는 만남을 견고히 한다’는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와락 안겨든다. 공감의 획득이다. 명제를 빛나게 하는 단정적 진술이지만, 정서적 감화를 준다. 이별의 미학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기에 그녀는 이별을 헤어짐만으로 끝내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방을 들고 십릿길을 걸어서 재를 넘고 외딴집 내 시골집에 들어서면 사랑채 댓돌 위에 하얗게 놓여 있던 할아버지 단정한 고무신. 장죽으로 놋재떨이 땅땅 치며 가래침 카악 뱉던 그 더럽게 느껴지던 소리가 가슴이 아리도록 그립다. 장날 첫 새벽에 외출복 차림으로 안채에 올라오셔서 뜨끈한 장국을 드실 때도 잠속으로 빠지는 동생과 나를 일으켜 꼬옥 상 앞에 앉혀 놓으시던 그 이해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가 참 많이도 그립다. 매월당 김시습이 ‘산에서 높은 것을 배우고 물에서 맑음을 돌에서 굳음을 달에서 밝음을 배울 줄 안다면’ 했듯이 나는 이런 모든 것을 내 할아버지의 그 귀찮기만 했던 사랑 속에서 배웠음을 이제사 깨달아간다. 이제사…… .
- <나열할 수 없는 이 그리움을> 중에서 -
위 인용문은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났듯이 작가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이다. 작가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을 문학적으로 간접화하면서 진한 그리움의 향기를 낸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도 여식아이가 다리를 걷어 올리고 단정하게 앉지 않는다고 불호령이시던 할아버지가 내게 없었다면, 영화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그 명장면에 그렇게 빨려들어 갈 수 있었을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그 영화를 한숨을 안으로 녹여 삼키며 그렇게 느낄 수 있었을까. 이미지 모음이라 할 수 있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을, 그 스며드는 영상미를 그만큼 당겨 안을 수가 있었을까. 박경리의 ’토지‘를 그토록 몸과 마음을 디밀어 나의 체험으로 아우를 수 있었을까.”하며 가정법 과거의 설의법을 써서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해준 할아버지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작용했던 전통적인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다시 조명해 보게 한다.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다시 보기‘를 통해 사랑으로 변환시키고, 조부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는 정의 교류가 아닐 수 없다. 정감이 흐르지 않는 인간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최영주 수필가는 따뜻한 구도자적인 자세로 과거를 통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 휴머니스트 수필가이자, 패밀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삼대를 오르내리며 가족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장죽‘과 ’고무신‘으로 상징되는 할아버지의 엄숙주의를 가슴으로 껴안게 하는 작가의 인간미와 문장력은 그녀에게 올해의 작품상을 안겨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내 눈에도 명퇴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퇴직금을 들여 식당을 차렸으리라. 잘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기딴엔 손님들을 잘 살펴 서비스를 하는 것이리라. 그는 식당 안에서도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지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가 다 먹고 나올 때도 출입문까지 따라 나와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내 마음에 비애가 스며왔다. 문을 나서며 그 식당이 잘되길 진심으로 빌었다. 그 젊지도 않은 아저씨가 앞치마를 입고 말없이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모습이 떠올라 며칠 전 그 식당에 가서 굴국밥을 먹고 왔다.
- <지금 그들은> 중에서 -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지금 그들은>은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트럭 운전수들, 명퇴자들, 노숙자들은 우리 사회의 그늘에서 외롭게 고개 떨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인정어린 눈길이 사랑스러운 수필이다. 명퇴자로 보이는 굴국밥 집 주인에게 보이는 연민과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곱기만 하다. 직장을 잃고 가장으로서의 자리에서 쫓겨난 명퇴자들을 건설, 수출의 주역으로 추겨 세우며,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사방을 온기로 가득 채운다. 인간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수필의 향기다. 무엇보다도 큰 감동을 주는 요소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무 연도 없는 사람의 전도를 걱정하는 작가의 훈훈한 인간애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심성이 착하다 해도 거리의 난폭자로 낙인찍힌 트럭기사를 감싸고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역할이든 희생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맑은 마음 속에 목련을 피워낼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에 우리는 안도할 수밖에 없다. 앞치마를 입고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던 국밥집 아저씨가 생각나 일부러 다시 국밥집을 찾아가는 이 여인이 흘리는 정의 향기를 맡으면, 아름다운 성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최영주의 수필은 한마디로 정으로 짜여진 천이다. 그녀는 다양한 인간 관계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인연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아름다운 인생이란 한 필의 비단을 짜고 있는 직녀인 것이다. 건조한 현대적 인간관계를 사랑의 빛깔로 채색하면서 그 위에 신록의 향유를 발라 부드럽게 하는 그녀는 성자적 삶의 태도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늘진 곳에 대한 연민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런 사랑의 자세가 아닐까. 이 수필은 정이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동포애적 인간애를 호소한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그녀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우쭐거리기도 현학적인 언변으로 뽐내도 않는다. 마음을 열고 이웃과 호흡하며 맺은 인연을 삽화로 엮어 그려가는 일에 충실하기에 감동을 주는 수필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2. 끈적한 그리움과 모성의 원리
모성과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이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은 언어적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여성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최영주 수필은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의 전통적 지위와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모정의 원리가 뜨겁게 솟구친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돌아다보면 아무래도 나의 친정 어머니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온 것 같다. 그러면서 기억 저편으로 흘깃흘깃 그 귀옥이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음을 기억해 낸다.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다가와서 나를 휘감아 옥죄이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 지나가기도 하였다. 크고 작은 일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해도 내 능력 밖으로 버둥그러져 튀어 나가는 것도 많았다. 그런 것들에게 떠밀려서 내 마음과 일상들을 귀천없이 내던져 버리고, 되는대로 흘러갈 뻔 했던 순간들 사이사이에 나의 친정어머니나 귀옥이 엄마가 생각났다. 의지력도 약한 내가 삶이 버거워 어깨를 비틀어 털어버리고만 싶을 때도 나름대로 감당되는 최대치의 의지와 노력을 기울이며 애써 왔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그 흐릿하고 남루한 삶이지만 정신만은 초라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신의 푸른 의지가 귀옥이 엄마 일상의 생활을 그렇게 처신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눅눅하고 헐벗은 내 삶 또한 귀옥이 엄마처럼 나를, 그리고 내 주위를 귀하게 건사하며 살고 싶다.
- <낮 하늘의 쪽달> 중에서 -
이 수필은 작가에게 문인의 자격을 준 신인상 등단 작품으로 모성의 원리가 주제의식을 감싸고 있는 작품이다. 어린 날, 어린 몸에 지나간 기억들을 주워 모아서 한 편의 수필로 만들었다. 이 작품 역시 시대의 밑그림이 잘 그려져 있다. 작가가 열두 살이 되던 60년대 초반의 사회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수필은 작가 자신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친정 어머니, 헌신과 희생을 훈장처럼 달고 어머니의 자리, 아내의 자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했던 한국 여인들의 삶을 작중 인물 ‘귀옥이 엄마’를 통해 전해주고자 한다. 누구나 사람이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겪게 되는 것은 이별의 예감과 그것으로 받는 충격의 아픔이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을 하나 하나 내려놓으면서 작가 역시 조금씩 아픔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기에 이러한 과정은 남은 자의 영혼을 살찌게도 한다. 작가는 살림이 어려워도 반듯한 정신으로 살다 간 고인의 모습을 반추하며 자신의 삶도 반듯하게 세우고자 한다. 마음이 고운 분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보내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이다. 만남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운명으로 수용해서 보편화하지만 생각하면 야속하게 느껴져 가슴에 거센 물살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생명의 끊어짐이 그러하다. 감성이 풍부한 작가이기에 더욱 절절한 표현은 눈물에 젖은 절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암에 걸려 죽게 되는 귀옥이 엄마의 장례식에 나온 이웃 사람들의 대화를 스케치해서 그 시절 여인의 굴곡된 삶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이 작품을 읽으면, 눈앞의 사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그 흐릿하고 남루한 삶이지만 정신만은 초라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신의 푸른 의지가 귀옥이 엄마 일상의 생활을 그렇게 처신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 삶의 스승으로 새김질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옥이 엄마와 같이 모성의 원리로 헌신의 삶을 살아온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한 여인의 인고적인 일상사를 긍정적인 인생관과 버물어 탄생시킨 휴먼 수필이다. 무조건적인 가족사랑은 모정의 신비함이다. 귀옥이 어머니의 반듯한 삶에 대한 이웃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 퍼센트 감동을 만끽한다. ‘낮 하늘의 희미한 쪽달 같던, 내 마음에 쪽빛으로 남은 여인’으로 기억하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작가 자신도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모성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부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어머니가 아랫목에 앉아 뜨개질을 하시노라면 동생과 나는 우리 방으로 가지 않고 어머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책도 읽고 숙제도 하는 것이었다. 온종일 추위도 아랑곳없이 밖에서 뛰어 놀다 모처럼 차분해지는 것이다. 집안일로 분주한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도 들추어 살펴보기도 하고 버짐이나 안 피었는지 동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시게 되는 것도 그럴 때다. 어린 우리는 얼굴을 디밀고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받곤 했다.
아버지의 근엄하고 든든하신 모습은 안방에서도 대하게 된다. 아버지는 바깥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아랫목을 차지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우리를 아랫목에 앉히곤 아버지는 늘 윗목 방석에 앉아 신문을 보셨다. 언제나 당신이 최고이며 당신밖에 모르시는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말없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항상 윗목에서 꿋꿋하고 듬직하게 앉아 아버지의 방법으로 아랫목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아버지의 모습이 철없이 어린 우리에겐 실한 의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 <아랫목> 중에서 -
‘아랫목’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쓰기만 해도 따스함이 전해지는 말이다. 이 수필은 온돌방의 ‘아랫목’을 작가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의미화한 작품이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연민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최영주의 이 수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맛에는 인연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진한 모성의 향기도 있다. 작가는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받곤 하던 ’아랫목‘을 그리워하며 온돌방 시절의 아랫목에 자신이 발견한 몇 가지 의미를 투여하여, 주제 의미화를 이룬다. ’아버지는 아무리 추워도 아랫목을 차지하지 않으셨다‘는 진술을 통해 작가는 아버지의 말없는 사랑도 전해주고자 한다. 아랫목은 가족 간의 배려와 양보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기 때문에, 작가는 아랫목을 가옥의 은유였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행복과 평화의 상징으로 존재했다고 적고 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어머니는 자식들을, 자식들은 또 어머니를, 형은 아우를, 오빠는 여동생을, 서로 아랫목에 앉게 했다’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그리운 것은 현재가 그렇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닌가. 이 작품은 어려운 시대, 가족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아랫목’을 제재로 해서 잘 반추하고 있다. 누구든 모든 인간에게 과거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어머니는 더욱 그렇다. 어머니의 뱃속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잔병치레를 했다. 어머니는 자주 내 손을 잡거나 이마를 짚어보곤 열이 있으면 나를 곧잘 업곤 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이 넘도록 늘 업혔던 것 같다. 학교에서 일제고사시험을 치르고 온 날도 나는 열이 올라 어머니에게 업혀 있었다. 어머니의 등은 언제나 아늑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이상하게도 한밤중에 나는 자주 배가 아팠다. 잠을 자다가 어머니가 약을 먹이고 배를 쓸어 주셨다. 그래도 계속 아프면 어머니를 주무시게 하고 아버지가 나를 업고 온 밤을 보내셨다. 유모가 고향에라도 다니러 가고 없을 때, 안하무인으로 황제같이 사시는 아버지가 어머니만은 그토록 아끼셨다. 어린 마음에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내려달라고 하면 ‘괜찮다, 아버지는 힘이 세다’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긴 밤이 지나 아침이 오고 병원 문을 열 때까지 아버지는 나를 업고 가만가만 흔들어 주셨다. 그 등에 업힌 채 나는 조금씩 얕은 잠에 들 수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등은 한없이 든든하고 따뜻했다.
- <잊어버린 등에 표정이 스민다> 중에서 -
최영주의 수필에서 어머니의 ‘등’은 아프고, 힘들 때, 달려가는 피안의 세계였다. 이런 ‘등’을 제재로 이 수필은 사랑을 주제화했다. 삼단 구성이 확연이 드러나게 단계별로 소주제를 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단조로운 구성에 변화를 노려볼 만하다. 글에 탄력성을 주기 위해 이런 작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이 수필의 서두는 결혼을 하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딸애가 낳은 아들, 작가에게 손자가 되는 아이를 등에 업고 작은 무게감을 느끼는 작가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런 작가에게도 잊지 못할 등이 있다. 할머니의 등, 어머니의 등, 아버지의 등, 유모의 등이다. 그리움으로 가득 찬 심사를 유년기 체험을 통해 유감없이 토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누구나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등’이다. 세상에 나오기가 두렵고 무서운 아이에게 어머니의 등은 안락한 둥지와 같다. 최영주의 수필에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않은 비중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친이 그녀의 가슴 안에 뚜렷한 사랑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삶이 버거워 가슴이 휑뎅그렁해질 때 그 분들의 아늑하던 등은 작가의 마음 속 버팀목이 되어 따스하게 들어앉곤 한다.
“아이구 지랄하게 곱고 이쁘제…….”
옛날에 어버이 날이나 생신날에 장미나 백합 등을 한 다발 사다 안겨드리면,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다. 머릿수건을 쓰고 장독대를 돌보거나 마당을 씻어내고 있다가 바가지와 빗자루를 던져두고 꽃 속에 얼굴을 파묻고 소녀처럼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욕을 모르는 어머니가 왜 꽃을 보면 ‘지랄하게’라고 하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런데, 꽃을 예뻐하고 좋아했지만 살다가 문득, 어느 때부터인지 내가 꽃을 보면 가슴이 자지러지게 녹아드는 것이었다. 중년여자의 가슴에, 자연의 신비, 사랑, 그리움, 추억, 애달픔의 향기로 현깃증마저 휘몰고 들어차는 꽃을 ‘지랄하게’라고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던 그 표현을 어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 같다. ‘지랄하게’는 어머니의 절절한 가슴을 뚫고나온 최상의 표현이었다.
- <꽃이야기> 중에서 -
꽃과 관련된 삽화를 모아 제목을 ‘꽃이야기’라 했다. 수필은 대체적으로 전부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창작된다. 이 글에 작가는 왜 이야기란 토를 달았을까. 작가들이 제목 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는데, 최영주는 수필의 제목을 달 때, 내용뿐만 아니라 수필의 구성적 특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수필은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아 구성했기 때문에 ‘꽃’에 ‘이야기’를 부쳤다. 꽃에 대한 여성들의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잘 보여주면서 도입부는 어머니와 꽃을, 전개 부분은 전혜린과 꽃을, 마지막은 자신과 꽃의 관련성을 들려주는데,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아내로서의 위치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꽃이란 전제를 달고 소개되는 신혼 시절의 꽃 이야기, 아름다운 부부애가 펼쳐진다. “니 하고 처음으로 떨어져 지낸 밤인데......”하며 남편이 건네는 그 꽃을 받아들고 꽃을 사러 다녔던 길을 상상으로 쫒아가는 여심이 눈에 밟힌다. 꽃을 화소로 해서 삶에 있어서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당연히 감동을 준다. 이 작품을 읽으면, 꽃을 사랑했던 전혜린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만날 수 있다. 그녀들이 좋아한 꽃과 작가가 좋아한 꽃의 의미는 다르다. 그녀에게 꽃은 눈물방울이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의 은유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전해줄 꽃을 사러 갔던 그 길은 언제나 그녀에게 꽃길인 것이다. 작가 자신이 가슴 속에 그리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인식이 주제의식으로 잘 처리된 수필이다.
말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성립된다. 상대가 있으므로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곧잘 내 말을 듣고 있을 그 상대는 무시해 버리고 내 입장에서만 말하고 내가 해야 할 말만을 생각하며 불쑥 말해 버리곤 한다. 낯선 사람을 생전 처음 만나서 나를 1분만에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것은 ‘말’이다. ‘말’ 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또 자주 만나거나 전화로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라도, 때론 가슴에서 우러난 아름다운 말로 상대의 가슴에 감동을 툭 던져 주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결속되는 것도 ‘말’이다. 그 만큼 말의 힘은 강하다. 그 강한 말로써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안하게 하거나 사람을 보잘 것 없이 만들어 버려선 안 되겠다.
- <말> 중에서 -
지금까지 읽은 수필이 서정적이라면, 이 수필은 약간 칼럼적이다. 언어인 말은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누구나 말 속에서 산다. 마치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홍도의 계란 같은 조약돌처럼 꾸밈이 없는 듯이 기교를 부려서 글을 쓴다면 분명 독자들을 감동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폭과 깊이는 자신이 지닌 어휘의 깊이와 폭을 넘을 수 없다. 화장하는 것이 자신의 외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면, 외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인 말을 ‘우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하는 생활이다. ‘상대는 무시해 버리고 내 입장에서만 말하고 내가 해야 할 말만을 생각하며 불쑥 말해 버린다’면 독자를 정서적 감화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문학하는 생활은 자신의 정신을 변형시키는 내면의 화장이다. 외면인 육체는 다만 정신의 하수인일 뿐이다. 언어의 변화는 곧 그 사람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이 작품은 체험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동화의 원리’를 강조하는 글이다. 문예미학을 위한 수사적인 전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사상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필에도 기교가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의 한 장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바,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없는 듯한 기교가 내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기교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게 되면 수필답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은 수필의 생명이요, 최대의 강점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된 부분에서 작가는 ‘말의 힘은 강하다. 그 강한 말로써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안하게 하거나 사람을 보잘 것 없이 만들어 버려선 안 되겠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부림에 있어서 정서의 객관화, 지성의 정서화를 강조하는 말이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은 생명이다. ‘말’이 언어화되면 문장이 된다. 말에 대한 작가의 인식만큼 이 작품은 기교가 없는 것 같은 기교가 내재되어 있는 관계로 특별한 맛이 없는 듯하면서도 은근한 향방이, 즉 꽃다운 향기가 입술 속의 그 언저리에 감도는 듯한 차맛이 느껴진다.
III. 나오며
이상으로 수필 감상을 통해 최영주의 수필세계를 비교적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좋은 문학은 삶의 횃불이고, 등불이고, 수레여야 한다는 것이 평자의 주장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영주 수필의 소재가 되고 있는 과거 회고적 그리움의 흔적들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스승의 한 자리로 남아 작가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이나 관념의 노래라기보다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에서 인연의 가치를 건져낸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향기가 풍긴다는 게 좋다. 최영주의 수필의 가장 큰 강점은 무엇보다도 체험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정의 넉넉한 품이 있어 또 좋다. 그녀의 수필은 그냥 스쳐 지나는 인연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만남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삶에서 영원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인연을 향한 그리움은 자기 존재의 성찰과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완성에 이르는 구도의 길에서 찬연한 꽃으로 피어난다. 모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삶의 열정은 그녀의 수필을 포근한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따스하게 한다.
우리의 좋은 전통, 미풍양속을 긍정하는 한국적인 수필들을 써왔기에 그녀에게 올해의 작품상이 안겨졌다. 이제 수상작가라는 깃발을 당당히 들고 수필의 길에 나섰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차근차근 좋은 인연을 발견하는 데 더욱 전념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십여 년의 문단 경력으로 이만한 품격을 갖춘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수필은 수필적인 생활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사람들과 인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휴머니즘의 수필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수필 영토를 작가적 삶에 연계시켜보면 그녀의 인생관과 삶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로서 그리고 모범적인 주부로서 누구보다도 깨어있는 자세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족사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작가의식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등 그녀는 작가의 사회적 책무도 다하고 있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은 아니다. 어쩌면 완성을 향해 가기 위해 우리는 수필을 쓰는지도 모른다. 주제적 장르로써 수필은 무엇보다도 주제의 내면화를 요구한다. 최영주는 수필의 제목을 제재로 정하고, 수필의 결미를 여운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본격수필이 요구하는 작품 외적 조건을 나름대로 충족시키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모자람이 없다. 일상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일상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시선을 삶에 겨눔으로써 언제나 이웃의 그늘을 포착한다. 인연의 법칙으로 가족과 이웃에 그리움을 흘리는 일이나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최영주 수필가가 걷는 인생의 길은 깨달음의 길이니만큼 더욱 더 좋은 작품을 써내리라 확신해 본다. 본격수필의 잣대를 들이대어도 하나도 속아내어야 할 작품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 크게 성장할 작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아무쪼록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해서 더 큰 작가로 울산문단에 우뚝 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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