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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2편 9절-53편 4절.
52편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53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에 맞춘 노래.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2편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앞에서 살펴본 도엑과 다윗에게 하신 역사를 주님께서 주격적으로 하셨다는 거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격적으로 하셨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은 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억지로 하도록 했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네 마음이 그러냐?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 봐라’ 하고 허락을 했다는 의미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떼를 쓸 때 어머니로서는 그 말을 들어주면 안 되겠지만 아이가 계속 떼를 쓰니까 ‘할 수 없다.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로서는 원하지는 않지만 아이가 경험을 해서 깨달으라고 허락을 하는 식이다.
이 세상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놓여있고 주권 섭리 안에 놓여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을 억지로 꺾느냐? 그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죽겠다고 하면 그 말을 듣고 죽으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부모형제와 친구가 다 말리는데도 아무도 모르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으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참새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아래로 떨어지면서 날개를 펄럭이면 공중으로 날아갈 수 있는 거지만 사람은 날개가 없으니 몸이 그대로 땅으로 박히는 거다. 이게 법칙이다. 그러니 자기가 새가 아닌 이상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고 마음도 먹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굳이 하겠다고 하는 인간 자기의 생각을 꺾지 않고 허용을 하신다.
그러면 이 허락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순간순간마다 하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하는 허락이냐? 그건 아니다. 다 영원 전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계획된 속에 들어있는 거다, 그러면 이 말이 영원 전서부터 뛰어내리도록 계획을 짰다는 거냐? 그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는 거다. 자유가 있다는 것은 내가 뛰어내릴 수도 있고, 안 뛰어내릴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니 이 자유는 내가 손해를 안 보도록 알아서 하라는 면에서의 자유다.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속에서 나의 구원에 대한 내용을 알고 현재적으로 그 효력을 보았기 때문에 영영히 주께 감사를 드리는 거다. 나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게 하나님의 언약이고 계약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이 약속을 믿고 진리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부모님을 사랑하면 부모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거고, 부모님을 싫어하면 부모님의 말을 안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을 부모 마음대로 자기 각본대로 기르면 안 되고 하나님의 각본대로 길러야 한다. 부모 자기 기준대로 기르면 부모 자기 생각대로 훌륭하게 되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자식이 아무리 올라가 봐야 세상밖에 없다. 어린아이라도 부모가 워낙 억압 강압을 쓰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면서 달려든다. 그런데 아이들을 보면 대개가 잘못된 것을 하겠다고 하는 타락된 고집이다. 이건 옳은 말을 안 듣겠다고 하는 자유다. 옳은 소리를 듣겠다는 자유가 아니다.
차가 달리다가 급하게 서면 이 차가 앞으로 더 가려고 하느냐, 안 가려고 하느냐? 더 가려고 한다. 가만히 서 있는 차를 시동을 걸어서 급하게 출발하려고 하면 이 차가 앞으로 가려고 하느냐, 안 가려고 하느냐? 안 가려고 한다. 사람에게도 이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하라, 마라’ 하는 식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잘 풀어서 알아서 스스로 하게 해야 한다. 말씀의 이치를 잘 깨닫게 해 주면 듣는 자기가 비교를 해서 자기에게 손해날 짓을 안 하게 된다. 설교 속에는 이게 들어있어야 한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사람이 영특해지고 가치판단 평가가 빨라지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도덕성이요, 하나님의 능력성이다. 목사님이 이것들을 말씀으로 잘 풀어서 전해주는 것이 설교다. 이런 면에서 내가 혹시 노망이 들어서 다른 소리를 하면 다 도망가야 한다. ‘아이고, 불쌍하다’ 절대로 그러지 말아라. 우리교회에 수 년을 다녀도 별 이득이 없다면 다른 교회로 가라.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가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현재적으로 구원에 대한 효력을 봐야 한다. 구원에 대한 효력이란 말씀을 깨닫고 자기가 영특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몰랐는데 한 이치 두 이치 깨닫고 보니 마음이 밝아진다. 아니까 기분이 좋다. 아니까 입을 열어서 증거를 하게 된다. 그러나 모르면 멍청하니까 입도 뻥끗 못한다.
세상적으로도 자기의 계획이 미래적으로 분명히 이뤄질 거라고 생각을 하면 이 사람이 기쁠까, 슬플까? 기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살아날 방도가 없구나’ 하게 되면 마음이 슬프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깨달으면 기쁘고 행복한 거다.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면에 효력을 입고 있다면 누구에게 감사할 일이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자기가 말씀의 사람으로 된 것을 생각하면 참 감사한 거다. 이런 면에서 만일 나를 주님을 믿지 않도록 내버려뒀다면 지금쯤 어찌 되어있을까? 나를 예수 믿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모저모 성격도 성질도 잘 다듬어서 영모의 미모성을 가꾸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 심모도 예쁘게 만들어 주시니 몸으로 나오는 활동도 그렇게 예쁘다. 사람이 씩씩하고 용감하고 부지런하다면 얼마나 시원시원하냐? 이런 사람을 다 좋아한다.
가정적으로 보면 남편은 그 중심사상이 옳은 것으로 서 있어야 한다. 지식이나 지혜가 비뚤어져 있으면 얼마 안 가서 그 가정은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한다. 남편이 먼저 옳은 진리 지혜지식으로 딱 서고, 그 다음에 아내나 자식에게 의로운 옳은 명령이 들어가야 한다. 그 다음에 아내나 자식들은 옳은 명령에 순종해야만이 그 가정이 평화롭고 옳은 사람으로 성장이 되는 거다.
사람이 옳은 말씀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람 되기 힘들다. 워낙 안 들으면 개로 취급이 들어간다. 개로 취급이 들어가면 몽둥이가 날아가는 거다. 우리는 옳은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고,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을 아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일을 위해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을 위해 해야 한다. 집을 짓더라도 사람을 위해 지어야 한다.
뭐가 감사할 일이냐? 자기에게 감사할 일이 있느냐? 예수 믿고 오늘날까지 자기에게 감사할 일이 있느냐? 있어야 한다. 한 이치라도 깨달았다면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도 하나님 앞에 영원히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한 이치도 못 깨닫고 간다면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입은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선한지, 안 선한지 어떻게 아느냐? 선하다는 것은 사람에 관계되는 말인데, 이 선은 도덕성에 속한 성품이다. 선, 사랑, 거룩, 진실의 이 도덕성은 상대성이 있다. 상대와 관계를 짓는 거다. 하나님 당신 자체가 선한 분인데, 이 선한 분이 우리에게 선한 생각, 선한 활동을 하게 하신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선한 것처럼 우리를 당신처럼 선한 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거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선하다고 하는 거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이름은 ‘진실’인데 하나님 앞에 진실이 아닌 거짓된 사람일수도 있다. 자식의 이름을 성경의 이름을 따서 ‘바울’이라고 지었는데 바울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 자식도 있다. 그러니까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게 중요한 거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자기를 발견하면 ‘아, 주의 이름이 선하시구나’ 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믿는 자기가 움직이고 활동을 할수록 누구의 이름이 선하다는 것이 자꾸 퍼져나가느냐? 하나님이다. ‘아무개야, 예수를 믿으려면 저 사람을 본받아라. 너는 수십 년 교회에 다녀도 어째 그 모양이냐?’ 이렇게 되는 거다. 주님의 이름이 선하다. 이 예수를 믿었느냐? 이 분의 말씀을 받았으냐? 그렇다면 자기의 마음 속에 선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말씀의 이치의 사람으로 되는 것이 선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게 선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이 넓다. 마음만 넓으냐? 가슴이 따뜻하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님의 이름이 선하다고 하는 거다. ‘저 학생이 교회에 다니더니 저렇게 선해졌구나’ 이렇게 되는 게 주의 이름이 선한 거다. 주님의 선한 것이 그 학생으로부터 나오는 거다.
도엑은 하나님 앞에 심어지느냐, 뽑히느냐? 뽑힌다. 도엑은 뽑히고 의인은 보호 인도를 하시는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자타 속에 도엑의 성격과 성질을 발견해서 고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도엑의 성격과 성질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난다. 사람들 앞에서,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 없다. ‘다 내가 할 일이다’ 하며 솔선수범할 때 사람관찰, 자기 환경의 관찰, 이런 습성이 길러지게 되고, 이러면 자기의 살림살이도 잘 돼 나간다. 교회에서 선한 일을 배워라. 옳은 일을 한다는데 누가 말리겠느냐?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까? 어떻게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할까?’ 라고 하면서 선한 일을 찾아서 하면 모든 사고방식이 넓어지고, 가슴도 넓어지고, 따뜻한 사람이 된다. 사람을 배울 수 있는 기준 된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안 믿는 사람은 바로 선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오직 우리 주님뿐이다. 이 주님을 기준으로 하고 사람을 배워야 한다.
성도들은 주님의 생각을, 주님이 하시는 일을 교회 앞에서 나타내고, 사람들 앞에서도 나타내야 한다. 성도들이 주님의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면 누구의 일이 잘 될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나타내니 누구의 일이 잘 될까? 주님의 일이 잘 된다. 주님의 일은 자기의 일이면서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살림살이가 자기의 살림살이다. 주님의 사고방식이 자기의 사고방식이다. 믿는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살면 굶어죽느냐? 아니다. 2대 3대로 내려가서 봐라. 어떻게 되어있나? 영원으로 끌고 가 봐라. 어떻게 되어있나? 말씀이 약속한 대로 되는 거다.
도랑물은 굉장히 요란하게 흐른다. 이런 낮은 물 속에는 작은 물고기가 살지만 깊은 물은 잔잔하게 흐르는데, 잔잔하게 흐르는 깊은 물 속에는 큰 물고기들이 산다.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네 속에 옳은 진리이치만 차곡차곡 넣어 놔라. 그러면 깊은 물 속에는 큰 고기가 살고, 이 물로 인해 많은 식물이 살듯이 깊은 물과 같은 네 속에서 생산적인 것이 많이 발굴이 된다. 자기 속에서 지혜지식, 도덕성이 생산이 된다.
주님의 일이 잘 되게 하려는 정신으로 살다보면 이 사람을 통해 시간성으로, 또는 물질성으로, 또는 기도로, 또는 몸으로, 또는 생활로 주님의 선이 나온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한 식구라는 정신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협조하게 된다. 자기가 된 대로 나오는 거다. 그리고 주님의 명예나 주님의 지위나 신분에 행여나 누를 끼칠까 싶어서 아무리 험악하더라도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생명 길로 간다. 진리를 붙잡고 간다. 결국에는 뽑혀지는 도엑의 성질로 살지를 않는다.
53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에 맞춘 노래.
‘마스길’이란 ‘교훈의 시’라는 뜻이고, ‘마할랏’은 악기의 이름인데, 이 말의 의미는 ‘병이 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악기가 병이 들었다는 거다. 기타 줄이 병이 들면 어떤 소리가 나느냐? 사람이 병이 들면 무슨 소리가 나느냐? 앓는 소리가 난다. 앓는 소리도 여러 가지다. 몸이 안 아픈데도 앓는 소리가 있고, 일이 잘못돼서 마음이 안타까워서 끙끙 앓는 소리가 있고, 처녀총각이 시집장가를 못 가서 마음 속으로 끙끙 앓는 소리가 있고, 일을 했는데 돈이 안 들어와서 끙끙 앓는 소리가 있고, 학생이 공부를 못해서 끙끙 앓는 소리가 있고, 목사님이 교회가 안 돼서 끙끙 앓는 소리가 있다. 앓는 소리의 종류가 여러 가지다.
악기가 무슨 병이 들겠느냐? 악기가 병이 들었다면 그 악기는 망가진 악기인데, 망가진 악기가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겠느냐? 음색이나 음량이 제대로 날 리가 없다. 그런데 ‘마할랏에 맞춘 노래’ 라고 했으니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 악기의 음에 맞춰서 시를 읆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병든 악기를 위해서 시를 읆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악기소리는 정상적으로 나오는데 시를 읆는 사람이 마음이 상해서 병든 것처럼 힘없는 소리로 읆는다는 말인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지고 시를 읆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고 믿어지느냐? 자기가 어디에 있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확실한 거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항상 하나님께서 다 보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생활을 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열심히 하는 척하고, 없을 때는 대충하고 이런 식이 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거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안 믿는다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입에 붙은 말뿐이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다? 부패한 자들이다. 썩을 자들이다. 그리고 또 뭘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느냐? 가증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부패한 자요 악을 행하는 자다. 하나님의 선을 행치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을 행치 않는다.
2절-4절: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지각이 없는 자들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지각이 뭐냐? 깨달음이 없는 거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는 거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다. 그 다음에 천국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그 다음에 성도에게 환난 핍박을 주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이 모든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인데, 어리석은 자는, 첫째는 아예 기본신앙도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불신자다. 두 번째는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이 있다고는 하는데 제 고집대로 믿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데 제 고집대로 믿으니 말씀으로 자라지 못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닮지 못한다. 이런 자들은 제 생각대로 믿다가 제 생각대로 앙화를 당하고 재앙을 당하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