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부산의 포구 이야기
- 황포돛배 하단포구 … 멸치 잡던 운촌포 … 소금 굽던 분포 …
[ 50년대 용호동의 모습 ]
부산은 포구입니다. '부산항'이기 전에 '釜山浦'였습니다.
동해와 남해로 둘러싸인 부산에는 수십여 개의 크고 작은 포구가 있기 때문에 포구의 역사만 살펴봐도 부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마을에는 높이 15m, 수령 400년이 넘은 소나무(망부송)와 바위(망부암)가 있습니다. 이곳엔 갓 시집 온 여인이 고기잡이 나가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기다리며 수년을 눈물로 보냈다는 사연이 전해옵니다. 여인을 가엾이 여긴 용왕이 푸른 뱀(靑蛇)을 보내 용궁에서 이들 부부를 만나게 했다고 합니다. 참 고마운 용왕님이죠? '청사포 설화'에 의하면 원래 청사포(靑沙浦)는 모래(沙)가 아니라 뱀(蛇)을 뜻하는 청사포(靑蛇浦)였는데 이 설화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해운대 일대에는 포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육지와 동백섬을 잇는 동백교 일대는 원래 운촌포(雲村浦)가 있던 자리입니다. 조선 말, 이곳에 사는 김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다른 선비들이 '남촌', '북촌' 출신이라며 으스대기에 '해운대'의 가운데 글자를 따 '운촌' 출신이라 말했다고 합니다. 운촌이란 이름은 김 선비의 임기응변이 탄생시킨 지명인 셈입니다. 이곳은 특히 멸치잡이로 유명해 한때 부산 멸치 어획량의 70%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 자리에는 승당포(僧堂浦)가 있었습니다.
1601년 사명대사(1544~1610)가 부산진성 수축을 위해 부역을 나온 스님들의 거주용으로 이 일대에 집을 지었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한편 1930년께 승당포 앞 수영만에서 그물로 인어를 잡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인어가 슬피 울어서 바다로 돌려 보냈더니 그해에 멸치가 큰 풍년을 이뤘다고 합니다. 지금 동백섬 해안가에 있는 인어상이 세워진 배경입니다.
해운대구 재송동에도 재송포(裁松浦)라는 포구가 있었습니다. 현재 부산지방검찰청동부지청 위 골짜기를 '조선골'이라 불렀는데, 이름 그대로 배를 만들던 곳입니다. 東萊府 東下面 古文書[조선 후기 동래부 동하면(지금의 해운대구 일원)의 지방자치행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서]에 따르면 장산에서 베어낸 소나무로 조선골에서 전선(戰船)을 만든 뒤, 재송포에서 띄워 좌수영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로 조엄이 일본에 갈 때 조선골에서 만든 배 2척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부산에도 염전이 있었다는 거 아시나요? 지금의 남구 용호동 LG메트로시티 자리는 염전이 있던 포구였습니다. 이 지역을 원래 분개라 불렀는데, 소금을 굽는 동이(盆)가 있는 개(浦)라는 뜻입니다. 용호동 북쪽 해안, 분포(盆浦)는 오랜 세월 동안 천일제염의 요람지였다가 일제 강점기에 용호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부산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포구 이야기 속에도 일본이 자주 등장합니다. 영도구 대평동 앞바다인 대평포(大平浦)는 대풍포(大風浦)로 더 잘 알려진 곳입니다. 1900년대 초 일본 어선들이 풍랑을 피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피난처로서는 물론 연안어업기지로서도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남포(南浦)는 지금의 중구 남포동 앞 자갈치 바닷가 지역입니다. 1932년부터 8년간 매립공사로 인해 뭍으로 바뀐 지금의 자갈치시장 일대는 자갈밭이 펼쳐진 해수욕장이었습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남포를 통해 양식을 들여왔고, 대마도를 거쳐 생활용품도 수입했습니다. 남포는 1934년 영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영도와 육지를 잇는 나루터 역할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부산의 옛 얼굴이 어렴풋이 그려지지 않나요?
▣ 낙동강의 포구들
"웅어회 한 접시 드시고 가이소."
낙동강 끝자락 하단어촌계에서는 2006년부터 매년 웅어축제를 열고 있다. 어촌계가 자리 잡은 곳은 아파트 숲에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하단포구. 낙동강 하구둑 위쪽에 들어앉은 작은 포구다. 부산의 몇 안 되는 강 포구 중 가장 활발하게 포구 기능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이다.
하단포구는 부산항 개항이전 부산으로 들어 온 물품들이 낙동강 뱃길로 운송되기 위해 모여들던 곳.
이곳을 통해 명지의 소금, 젓갈, 갈대를 이용한 죽세품 등이 서울과 상류지역으로 보내졌다. 이들을 싣고 간 배는 다시 강 유역에서 생산된 나락을 싣고 하단에 와서 쌀로 도정돼 부산이나 일본으로 팔려갔다. 흔히 이르는 '낙동강 700리'는 이곳에서부터 뱃길이 끝나는 경북 상주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1980년대 초반 하구둑이 생기기 전엔 150여척의 어선들이 드나들며 민물장어와 숭어, 도다리, 전어 등을 잡았으나 지금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70여척의 배들이 포구의 명맥을 잇고 있다.
하단포구가 낙동강 끝단을 맡았다면, 경남 김해 불암과 부산 대저·구포지역의 물류운송을 책임지던 곳은 구포다.
구포는 조선중기인 17세기부터 세곡 운송로로 이용된 곳으로 남창이라는 큰 창고가 있었다. 조선시대 경상도지역의 주요 지역에서 조달된 세곡이 모여 뱃길로 운송된 곳이다. 자연히 낙동강 일대 포구 가운데 가장 번성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이때부터 형성된 장터가 지금도 구포 5일장(3일·8일)으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부산 북구 화명동 부산어촌민속관에 가면 낙동강을 터전으로 한 서민들의 생생한 삶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낙동강을 드나들던 황포돛배와 장터 풍경, 배를 수리하고 물건을 하역하는 모습들을 재연해 놓은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 금곡동의 동원진 나루터와 김해의 불암진 나루터가 호포 일대의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주요 포구로 볼 수 있다.
첫댓글 오사장,부지런하네!즐독했소.
볼라카이 까네 글자가 넘 작다 좀 키워주기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