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집 한쪽에 앳된 얼굴의 수녀님이 앉았다. 아마도 갓 여고를 졸업했음 직하다. 그녀와 테이블을 마주한 중년의 아주머니는 튀김 종류가 담긴 접시를 수녀님 쪽으로 들이민다. 어서 먹으라고, 많이 먹으라고 하는 것 같다. 그 나이 또래들이 한창 즐길 음식이다. 가만히 보니 아주머니는 그 나이 수녀님이먹는 모습만 바라보며 자신은 한젓가락도 입에 대지 않는다.
얼굴이 닮았다. 체격이 튼실한 수녀님에 비해 바싹 마른 아주머니는 입고 있는 세월이 다를 뿐이다. 어린 수녀님을 튀김 접시에 코를 박은 채 한쪽 볼이 팽팽하도록 맛나게 먹고, 아주머니는 안경 속으로 자꾸 눈물을 흘린다.
벚꽃 비를 맞으며 온천천을 걷다가 들른 어느 분식집 안 풍경이다. 점심도 저녁때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손님은 단 세 사람, 건너편 자리에서 꼬마김밥 일 인분을 시켜 놓고 앉은 여자는 괜스레 가슴이 울컥한다. 이제 막 피어날 꽃봉오리인 소녀는 왜 하필 수녀가 되기로 했을까. 세상의 휘황하고 찬란한 것들을 검정 색 수녀 옷으로 가린들 견뎌내야 할 것이 얼마나 더 많을까. 화사한 꽃 봄에 꽃 같은 소녀의 수녀복과 아주머니의 눈물 때문인지 흩날리는 벚꽃이 애잔하게 닿는다.
봄이 심란하다. 빛나는 새봄이건만 어둡고 우울한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인기, 돈, 권력, 쾌락에 도취되어 일으킨 마약, 탈세, 도박, 성폭력, 경찰 유착 비리에다 동영상 불법 촬영과 유포 등. 사회를 충격에 빠트려 놓는다. 놀랄 일이 허다하지만 가장 푸르러야 할 청년들이 벼랑 끝으로 향하는 길에 가담했다니 이들의 앞날은 어찌 될지, 문제의 답과 속 시원한 해결책을 누가 내놓을 수 있을지.
지구촌 어디에서 총구를 들이대며 터뜨리는 싸움만 전쟁이던가. 지금은 태어나고 사는 일, 오죽하면 사는 일이 전쟁이라고들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가슴 깊숙이 꽃잎 하나씩은 묻어 두고 산다. 꽃피는 계절이면 꽃잎 닮은 사람들이 마음 앞세워 길을 나서는 이유다. 청빈 정결 순종을 서약한 누군가는 수도자의 길로 향하고, 풀꽃 같던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눈엔 맑은 눈물이 맺힌다. 곱고 선하고 여리고 순함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흐려진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사람의 본성이기도 하겠다.
꽃빛이 아쉬운 향춘객들이 온천천의 난 분분 하는 낙화 속에 있다. 황홀하게 피어나 몽환적으로 지는 것에, 벚꽃만 한 것도 없으리라. 이맘때면 세상사 접어 두고 잠시 잠깐 풀숲에라도 앉아 풀꽃이었으면 싶다. 꽃은 여리고 고우며 평화이니까.
산다는 건 전쟁과 평화의 연속이다. 긴 전쟁, 짧은 평화인가. 시시각각 소용돌이친다. 치열한 경쟁과 울끈불끈 주고받은 상처들로 심신이 화끈거린다. 소통의 부재는 가혹하도록 외롭고, 이질적인 여럿 안에서 보편성을 찾아 타협과 화합에 이르기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꼿꼿한 개별성이 부딪치고 깨어져 통증은 위로받을 곳마저 없으니 몸인들 무사하랴. 그렇다고 또 갈등과
생채기도 없다면 살았다고 하겠는가. 봄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생명체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일, 게다.
카톨릭 미사에 ‘평화예식’이라는 것이 있다. 미사 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다. 산다는 전쟁판에서 마음과 몸의 평온함이란 모두의 회원인 터다. 자신의 평안으로 타인도 위할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여전히 ‘긴 전쟁 짧은 평화’로 하루를 접었다 편다. 이런 처지에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까지야 언감생심, 다만 겸허한 목숨이 옷깃을 여미고 간절히 무릎 꿇는다. 사는 일이 전쟁이어도 삶은 감동적이어야 한다고.
벚꽃 구경 끝머리에 우연히 길가 분식집에 앉은 여자가 혼자 읊조린다. 사방이 꽃 천지인 날에 수녀의 길을 선택한 어느 소녀의 경건한 시간을 위하여. 그런 수녀님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한 아주머니의 애달픔을 위하여. 여기 부실하기가 짝이 없는 또 한 여자를 위하여. 그리고 흩어져 가는 벚꽃들을 위하여 두 손 모은다.
“평화를 빕니다.”
기도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성실한 눈물이 되는 일이라 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이제 벚꽃이 망울을 터트릴 시기가 왔나 봅니다. 염선생님도 벚꽃처럼 글문이 활짝 열리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