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에서는 시전을 설치해 상인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일정한 세금을 거둬들였고,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도 공급받았어요. 따라서 시전에는 정부가 허가를 내 준 상인들만 들어와 장사할 수 있었지요.
조선 중기가 되자 시전 가운데 장사가 잘되고 좋은 물품을 공급해 유명세를 떨치는 큰 상점들이 생겨났어요. 주로 비단을 파는 '선전', 명주를 파는 '면주전', 무명을 파는 '면포전', 모시를 파는 '저포전', 종이를 파는 '지전', 생선 등을 파는 '내외어물전' 점포였는데 이러한 여섯 종류의 물품을 파는 큰 상점을 가리켜 '육의전'이라고 불렀답니다. 한양 시전의 여러 상점들 가운데 으뜸가는 여섯 전이라는 뜻이지요.
◇육의전과 금난전권
정부는 육의전 상인들에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특정 상품을 오직 그 점포에서만 팔 수 있도록 독점권도 줬어요. 또 정부에 허가받지 않고 물건을 파는 상점인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도 줬지요. 이를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고 해요.
조선 중기 이후 한양 곳곳에는 시전 외에 많은 시장이 생겼어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이 늘었고, 한양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금의 서소문, 종로4가 부근에 관청 허가 없이 물건을 파는 가게인 난전이 크게 늘어난 것이지요. 이에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지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도성 안팎에서 난전을 금지하고 시전 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을 주게 됐답니다.
하지만 금난전권이 확대되면서 특정 물건을 파는 사람은 적은데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많아지자 물건 값이 크게 올라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어요.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마구 휘두르며 난전 상인들을 상대로 심한 행패를 부렸지요.
1791년 22대 임금 정조에게 좌의정 채제공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어요.
"전하,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무리하게 단속해 억울한 피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금난전권 때문이니 금난전권을 폐지해야 하옵니다."
그러자 정조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어요. "지금부터 시전에 육의전만 빼고 금난전권을 없애 누구나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하라!"
이처럼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다른 상인들에게도 상업 활동을 허용한 조치를 '신해통공(신해년에 내린 결정)'이라고 해요. 그런데 어째서 육의전만은 금난전권을 빼앗지 않았을까요? 당시 왕실과 정부에 물건을 싸게 납품해 온 육의전의 영향력과 역할이 워낙 크고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육의전의 특권도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답니다.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대거 들어오면서 육의전 상인들이 사실상 판매 독점권을 잃었고 근대화에 앞선 나라들이 만든 값싼 상품이 물밀 듯 들어오자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지요. 1895년 갑오개혁으로 누구나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되자 육의전과 시전 체제는 붕괴하고 말았어요.
[지방에 들어선 '장문']
지방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 행위가 '장문'이라는 장터에서 이뤄졌어요. 15세기 후반 등장한 장문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모든 지역에 퍼져 나갔지요. 처음에는 10일이나 15일 간격으로 사람들이 길가나 공터에 모여 곡물, 채소, 약재, 농기구, 그릇 등을 사고팔았는데,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날짜 간격을 좁혀 5일마다 여는 '5일장'이 되었답니다. 이런 지방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전문 상인들을 '보부상'이라고 해요.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