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미술의 원리 - 추상이론-순수형체의 이론
저자 허버트리드(1893-1968)는 영국의 시인이며 미술비평가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당시의 영향력있는 비평가로 활동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서구에서의 초기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의미를 어느 정도 가늠해보게 해준다고 생각되고, 뒤이은
입체파에 대한 텍스트와 교차시켜 볼 수 있다고 생각되어 요약하게 되었다.
허버트리드도 추상미술을 “관례적으로 어떤 미술 작품이 외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미술가의
자각에서 출발하였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대상에 기반하지 않는 독자적이고 일관적인 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작품”을 일컫고 있다.
참고로 이 책도 번역에 좀 문제가 있다.
저자는 먼저 추상미술의 ‘주관’과 ‘객관’의 차원을 설명한다.
전통적인 회화의 재현의 방법-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꾀하는 정신적 또는
지적인 구성력에 의존하는 방법-은 현대의 예술보다 더 객관적이지 않다.
원근법에 의한 재현은 눈이 실제로 보는 것과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의 법칙
이나 사물의 ‘실재’를 어떻게 보는가를 찾아내기 위한 고안도 아니다.(도울레스 박사의 실험 논문을 인용)
과학적인 원근법은 지성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직접적인 지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지성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를 천진무구한 눈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기 이전의 눈으로 돌아가
(1) 예술가가 대상의 실재적인 성격을 재현하는 것은 지성적 또는 객관적 구성력이며
(2) 눈에 보이는 유일한 직접적인 경험인 현상상의 형상이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였
을 때 다음의 두 가지 방향이 있게 된다.
하나는 그의 활동의 지성적 또는 객관적인 성격을 긍정하지만, 이 수단에 의해 대상의 ‘실재적’인 성격이
나 눈에 보이는 장면을 재현하고자 하지 않고, 다른 선험적인 원리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대상은 단지 출발점 또는 자극이다.
(추상이론) 또 하나의 방향은 그의 활동의 주관적인 성격을 긍정하여,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얻어진 어떤 형체도 재생하려는 온갖 시도를 포기하고, 근원상 순전히 주관적인 것, 스스로 창조적
인 법칙에 따라야 하는 선과 색채의 배치를 투영시키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동성의 이론) 저자는 이 두개의 방향으로 사실상 현대미술에 남겨져 있는 일체의 표명을 포괄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저자는 추상이론의 선험적 원리를 플라톤에서 끌어온다.
그는 예술에서 ‘모방이론’을 포기하였으며, 그의 <필레부스>에서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의 대화
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미의 개념이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선과 곡선 혹은 콤파스나 자, 직각자
등을 사용해서 만드는 면이나 입체”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대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임을 강조한다.
추상이론에 대한 세잔의 접근
허버트 리드는 세잔의 예술을 추상이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예술의 고유한 특성을
한계로 결론 짓는다.
세잔은 고유한 형체를 드러내는데 모든 것을 걸었지만, 르네상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선험적인 형체관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형체관념은 외부로부터 예술에 부여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잔의 원통과 구와 원추는 플라톤의 ‘면과 입체’에 대단히 가깝지만 그는 양감을 윤곽에서
기하학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대조적인 색채 속에서 인식했다.
세잔다운 특징은 색채로 표현된 형체에 대한 감수성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세잔의 그림은 어떤 점에서 대상의 본질을 재현함으로,-어쨋든 세잔은 대상의
본질에 의해 주어진 감각작용을 재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구성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사적인 미술이라고 평한다.
입체파
저자는 입체파화가들이 작품이나 방법마저도 상당히 큰 변화를 나타내고 있지만, 하나의 일관된 미술
이론을 예증하고 있다고 하고, 그 이론이 플라톤과 거의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입체파는 대상으로부터 그 속에 본래부터 있는 직선이나 곡선, 면이나 입체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저자가 파악하는 입체파 범주의 화가들은 피카소, 브라크, 그로스뿐만 아니라, 들로네, 레제, 메쩽제 등
그 당시 외관상 비슷한 형태를 띠었던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추상의 과정에서 보이는 기계적 과정으로 인해 예술가 개인의 감수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이 추상의 과정은 현실적인 것에 내포되어 있는 감상적인 가면을 제거함으로써 예술가의 개성이
뚜렷이 발휘된다고 보고 있다.
이 예술가들의 개성은 다시 크게 경파-단단한 마음을 가진 쪽-와 연파-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쪽-로
나뉘는데,
연파는 브라크나 그리스와 같은 이들로, 이들의 그림에 유기적인 세계에 대한 암시, 생명작용에 배음
倍音을 띠게한다.
또한 경파에는 레제, 메쩽제, 뒤샹, 뒤샹비용으로 그들의 그림에는 비유기적, 기계적인 감수성sensibility
의 세계가 있다.
기계는 감수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감수성이 대립되어 있는 것이다.
즉 유기적 감수성과 함께 기하학적인 감수성도 있다.
그리고 이 기하학적 감수성은 오늘날 특별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 근거의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 수많은 기계가 존재하고, 그 선이나 볼륨이 어떤 기능적인 완전성을
표현하는 대상으로서의 기계이다.
(완전하게 기능하는 기계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러나 보다 깊은 이유에 대해 보링거를 인용하며 심리학적으로 접근한다.
원시인은 “... ‘그때 그때의 지각적’ 이미지 대신에 ‘고정된 개념적’ 이미지를 얻기 위하여 창조한다. ...
즉 원시인의 미술은 자기보존에서 온 직접적인 충동의 산물이지, 자연계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거리낌없는 사치의 산물은 아니었다.”
저자는 이러한 보링거의 시각이 기하학적인, 추상적 성질을 가진 온갖 유형의 미술을 어느 정도 적절
하게 설명한 유일한 이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원시인과 매우 다른 정신능력을 가졌지만, 이와 비슷한 정신적인 태도를 일으키는 여러
조건이 현대생활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추상은 외계의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혼돈의 상태에서, 어떤 정신적 실재, 안정감에로 도피하고 싶어
하고, 이러한 충동이 고정된 개념적인 근거로 기울어져서 정신적인 만족으로의 지향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그 밖의 어떤 것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성질에서
그 스스로 고유한 기쁨을 낳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성주의 - 순수조형미술
저자는 입체파가 두서너 가지 유형의 기하학적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그 유형들은 기원을 같이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판이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절대주의는 독립된 미적이상을 열망했던 한에서, 두개의 분리파 중 ‘구성주의’는 그들의 목적을 새로운
현실창조, 즉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인 요소만을 사용하는 활동의 산물임을 지적하고자 원했던 바에서,
또 나머지 ‘데 스틸De stijl’의 몬드리안이 주장했던 ‘신조형주의’에서 사물의 표면배후에 숨겨진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드러내고자 한 그의 이상이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창조에 있었다는 것에서 추상이론 하의
연관성을 찾고 있다.
기하학적 미술의 사회적 의의
그러나 저자는 기하학적 미술이 단지 도피의 미술이 아니며, 과거의 기하학적 미술이 정신적인 충동에
반응하여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임에 반해
오늘날의 기하학적 미술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지성에 의해 고취되고 지성에 의해서만 감상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현대의 예술가들은 공동체의 생활에서 필수적 또는 적극적 기능을 다하지 않으며 자기자신에게로
물러서서 스스로의 주관의 상태대로 표현을 부여하고 이 표현을 자기자신에게 국한시키며, 표현이 의사
전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미술의 정서적인 요소의 존재에 대한
앞서의 설명과의 모순을 제거하며, 예술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미술의 목적은 예술가 개개인에 의해 성취될 수 없을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난 250년간에 있었던 모든
미술은 개개인의 예술가가 만든 산물이다.
그것들은 정신생활 그 자체에 - 국가에서의 종교의 위치, 인간에 있어서의 종교의 실천과 관계가 있으며,
그보다 더 파고들면 그것들은, 만일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지성과 직관사이에 지식과 신앙사이에 개성과
규율사이에 언제나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저 미묘한 균형과 관계가 있다는데 기인한다.
어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미술은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단순한 반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미술의 질(質)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산물과 마찬가지로 아주 일정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술의 질과 그것을 행사하는 경우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1. 회화의 역할
19세기 과학적 발견들과 이론들은 또 하나의 시공간적 의식을 낳게 하는데 이 의식은 조형적 측면에서,
회화의 일루젼 능력을 희생시키고 미술작품의 유기적 실재를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개념과 합해진다.
그림이 재현이기 이전에 오브제objet인 이상 화가는 점차 자신이 어떻게 작업하는가를, 즉 창작의 절차,
작품의 진화과정, 작업시간과 재료들을 드러내 보여주게 된다.
모네의 실험은 지오토 이래 서양회화의 기본이 되었던 명암의 대조를 점차 ‘따뜻함과 차가움’의 조화로
바꾸어 나가는데 그 결과 병치혼합으로 옮겨감으로써 점묘화법을 탄생시킨다.
화면을 덮고 있는 각각의 터치는 자율성을 갖는다.
색채를 통해 빛의 분해현상을 재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하나의 실재réalité로 제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성요소의 하나인 색채를 강조한다.
쇠라와 신인상파 작가들은 색채의 체계적 사용을 통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물질화시키는데, 쇠라의 그림
들은 비구상이 아님에도 방식만은 완전히 추상적이다.
과학적인 회화상의 색채법칙 발견에 따라 형태상의 과학적 방식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는 쇠라의
동료, 앙리Charles Henry에 의해 구체예술Art Concret에 영향을 미친다.
1890년대 모네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며, 주제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색채를 고양시킨다.
그러나 실재형태를 희미하게 그리면서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오히려 좀더 진짜와 같이
보다 즉각적으로 정확히 자연을 분석하기 바랐기 때문이었다.
자연을 색채로 치환한 모네의 방식은 <건초더미> 연작을 통해 칸딘스키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치며,
1945년 이후 따시즘과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적 위치를 자치하게 된다.
회화가 일루젼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회화수단에서 표현적 가능성을 발견하며 전개되었다.
조형예술가에게 음악가의 자유를 주장한 고갱 이래, 칸딘스키와 클레 등은 그들의 추상작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음악의 자율성을 되풀이 원용한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에 힘입어 “하나의 그림이란…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의해 모여진 색채들로 덮혀
있는 평면이다.”라는 모리스 드니의 논고가 발표되었으며, 후세대의 ‘공식’이 되기에 이른다.
회화에서 주제를 초월하는 데 있어 세잔느의 방식은 더욱 분명하다.
세잔느는 “예술은 자연과 동등한 하나의 조화이다.”라고 선언하며, 이로써 자연과 회화의 의존관계는
완전히 깨지게 된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세잔느의 태도를 “그는 ‘감각’과 ‘지성’의 차원이 아닌 보고 느끼는 일반적 사물의
‘자연적 질서’와 사고 및 과학이라는 ‘인간의 질서’를 구분하고자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잔느는 회화의 구성요소인 선, 면, 공간과 구성, 그리고 색채를 통해 자연의 수많은 가능성을 표현하며,
동시에 대상에 대한 해석과 표현방식에 문제점도 제기한다.
회화의 방법 자체가 갖고 있는 표현성에 주목한 마티스, 입체주의 화가들에 의해 변화는 가속된다.
야수주의 화가들은 사물이 불러일으킨 충격과 동일한 충격을 관객에게 주고자 하여, 색형의 조화를 통해
감각의 종합물을 한정된 화폭 속에 집약시킨다.
마티스는 형태가 연상시키는 것이 무가치해질 정도로 형태와 색채간의 균형을 얻고자 실험한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흑인미술을 접한 후 입체주의의 ‘분석적’ 단계에 이르며 회화에 미치는 구성의 근본적
중요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대상이 조형적 시도의 출발점이었으며, 주제에 있어 정물의 선호는 그들 예술이 구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러한 주제로 인해 시각적 공간보다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을 더 가까이 하게 된다.
조형적 리얼리티는 일루져니즘을 완전히 대체했고, 곧 실재의 사물을 화면에 도입하기에 이른다.
꼴라쥬는 발전과정상 불가피한 결과였으며, 입체주의는 ‘종합적’ 단계에 접어든다.
즉 보이는 것의 분석적 해석에서, 조형적 가능성을 바탕으로 감각의 총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브라크와 피카소가 꼴라쥬와 아쌍블라쥬를 통해 조형언어의 혁명을 일으켰
다는 점이다.
그들은 통일성과 공간의 유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유화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그림이란 시각이 포착하는
것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회화와 실재와의 자명한 전통적 관계를 새롭게 하면서 실재의 사물들로 ‘오브제
회화tableau-objet’를 만들어 낸 것이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악보와 신문을 그리는 대신 직접 갖다 붙이는 방식을 쓰는 등 형식signifiant과 내용
signifié 간의 관계를 혼란에 빠뜨리며, 실재와 재현된 것과의 거리를 없앴다.
“회화의 실재는…만들어진 회화적 오브제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림은 자체의 논리, 질서, 독립성을 부여받았다.
형태의 암시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암시는 그 암시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과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화는 그 자신에게서 존재이유를 찾는다.”(브라크)
2. 회화의 리얼리즘
브라크와 피카소는 ‘회화적 사실’이 갖는 리얼리티를 주장함으로써 재현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에 의문을 던지며, 이는 자연의 근본원리는 시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면서 강화된다.
이에 대한 이론적 결론의 천착은 레제에 의해 “회화의 사실주의란 세 가지 주요 ‘조형물질’인 선, 형태,
색채의 동시 배열이다.”로 정의되어졌다.
이러한 주장은 감수성의 변화와 변화된 감수성이 현대성이라는 문제에 부딪치면서 즉각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교통수단의 발전과 속도감은 새로운 감각의 특징적 요소인 색, 리듬, 재료들을 부각시키게 된다.
R.들로네의 <순환형태>나 <동시원>은 빛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대상의 외양과는 별개의 형태들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기초한 세분, 혹은 확대된 자연적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들로네의 시각이 전통적 지각방식을 벗어나자 그의 그림들은 구상을 포기한 것이 아님에도 추상적으로
보여진다.
쿠프카 역시 색채의 리얼리티를 발견해낸다.
그는 색채를 점차 형태에서 분리시키면서 ‘주제가 없는 회화’에 이른다. 색을 색면과 색터치로 분해하며
작업을 진행시키며, 결국 구상적 대상이 사라진 순수색채와 형태의 관계만이 남게 된다.
민코브스키에 의해 연구된 4차원의 세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리듬’에 관심을 갖게 한다.
4차원적 시간의 도입은 동시성과 같은 복합적 관점을 실험하고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우리가 가진 감각의 한계를 깨뜨렸다. 현대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미래주의 선언 가운데 잘 드러나 있다.
“세계는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더욱 풍요로워졌다.
그것은 바로 속도의 아름다움이다.…
시간과 공간은 이제 죽었다.
시공을 초월한 속력을 창조한 이상 우리는 이미 절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구상적 회화방식에 움직임이 도입됨으로써 관점은 변모한다.
즉 공간은 행위의 장이 된 것이다.
“우리가 화폭 위에 재현하고 싶은 것은 역동적 세계의 고정된 한 순간이 아니라 세계의 역동성 그
자체이다.”(미래주의 화가 선언)
미래주의 화가들은 고속촬영 등의 과학지식들을 활용하면서 구상에서 벗어나게 되며, 시각적인 것을
초월해 소리나 냄새까지도 작품에 융합하고자 한다.
카라의 간섭주의 꼴라쥬는 인간의 모든 지각활동과 그림을 상호 융합시키려 한 시도로 이질적인 재료들의
조립을 통해 각 구성 요소를 대비시키고, 움직임의 강조를 위해 색채를 첨가하며,
특히 ‘명목상’ 구상에 호소한다. 즉 실재의 사물은 시각화되었다기보다 인용되었으며, 필치를 대신한
활자는 그 모양과 굵기 변화로 인해 음향과 같은 효과를 낸다.
뒤샹과 피카비아 역시 움직임의 표현에 열중하는데, 구체적 대상을 역설적으로 변모시키면서 또 다른
유형의 추상에 도달한다.
다다의 전 단계에서, 이들은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입체주의, 미래주의가 제기한 문제에 독창적이고
냉소적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미래주의 화가들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표현언어에 차갑고 기계적이며 비개성적인 표현으로 대항하면서
무명의 오브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피카비아는 기계를 통해 인간을 은유적 표현하며 전통적 주제를 초월하고, ‘제2단계’ 추상에 접어든다.
‘제2단계’ 추상에 대해 뒤샹은 “달리 말해서, 회화는 오로지 시각이나 망막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회화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두뇌, 즉 우리의 인식욕구에도 관련되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부조리와 아이러니는 낡은 전통적 이상에 대항하기 위한, 그리고 과거를 보다 철저하게 비판하기 위한
피카비아와 뒤샹의 가장 공격적인 무기가 되며 고의적인 반미학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전적 주제들을 기계로 대신함으로써 ‘실재’와 ‘재현’은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미지란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하나의 대상에서 출발한 자유구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칸딘스키와 추상의 창안
근본적으로 추상을 불가피하게 한 것은 경제, 기술․과학분야에 걸친 문명의 발전이었다.
실재는 더 이상 인식 가능한 것이 못되었다.
동시에 ‘현대적 스타일’의 확립과정에서 선과 색은 자율성을 얻었다.
마티스는 야수주의의 생성으로 순수회화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입체주의자들은 만들어진 오브제 자체의
리얼리티를 입증하기 위해 일체의 일루져니즘을 거부했고, 미래주의 화가들은 비시각적 요소들을
표현하는데 몰두해 있었으며, 표현주의자들은 내부 반응의 투사에 열중해 있었다.
이러한 성숙과 더불어 추상은 인간이 전통적으로 자기 주변환경과 맺었던 관계를 뒤엎게 된다.
칸딘스키는 비재현적 회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당화시키며, 위와 같은 미술행위의
진보에 철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모네의 작품에서 색채의 전달 및 표현기능의 가능성을 발견한 후, 수학차 뮌헨에 간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접한 사상에 감명을 받게 된다.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회화는 색채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주관적 울림’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주제는 그 중요성을 잃었고, 많은 예술가들은 그들의 창작범위를 확산시켜 미술을 일상에 응용하는데
몰두해 있었다.
유겐트스틸Jugendstil 운동이 탄생해, ‘장식적’ 미술의 측면에서 추상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즉 일체의 재현의 요구에서 벗어나 조형요소들 자체의 발전을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음향세계와 시각세계 간의 수많은 유사점도 지적되었는데 칸딘스키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주의 깊게
받아들였다.
원시미술과 회교미술의 발견으로 화가들은 그림의 구성적 요소들이 갖는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힘에 관심
을 집중했다.
1905년 이후 프랑스에서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독일에서는 그룹 다리의 표현주의 화가들에 의해 아프
리카 미술이 흡수된다.
1910년 회교미술대전은 이슬람 미술전파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
칸딘스키 역시 동시대인들처럼 ‘이국적인’ 것들을 발견해내는데 매료되었으나 심미적 면보다 정신적 면
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내적 필연성’ 없이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심화시킨다.
1908년 보링거Wilhelm Worringer는 『추상과 감정이입』을 발표해 철학적 측면에서 추상을 논하며,
추상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라고 말하였다.
즉 추상은 인간과 세계와의 단절을, 반면 사실은 양자간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 “순수한 추상은 복잡하고 어렴풋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휴식을 주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는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기하학적 추상”을 만들어 낸다고 밝힌다.
이는 바로 칸딘스키가 열망하던 추상이었다. 보링거와의 교우 후 칸딘스키는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
적인 것에 관하여』를 통해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예술작품은 알 수 없는 통로로 예술가에게서 태어난다.
예술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작품은 자율적인 생명을 얻어 하나의 실체가 된다.”
“예술가는 전달해야 할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형태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형태를 통해 내적 표현을 반영하기 위한 것
이기 때문이다.” (칸딘스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1912)
그에게 있어 작품은 표현으로 남아야 하며 결코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물…과 비교되는 것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점차 그는 자신의 유일한 테마인 ‘삶의 변형과 공간의 무한함’을 부각시키게 된다.
“…예술가는 여러 높낮이인 건반의 덕택으로 영혼으로부터 정확한 진동을 얻어내는 연주가의 손이다.
따라서 색채의 조화는 효과적인 접촉의 원리에 의거해야 함이 명백하다.
가장 민감한 부분이 움직여진 인간의 영혼은 화답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근본원리를 우리는 내적 필연성의 원리라고 부르려 한다.”
1908년 재현회화로부터 우연히 내적 필연성을 깨달은 이후, 칸딘스키는 ‘비객관성’에 몰두하게 된다.
1910년 최초의 비구상적 그림을 통해 형태와 색채를 서정적으로 사용한다.
이후 자동기술법의 시도로 인한 긍정적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이론적 실제적으로 자신의 직관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작업은 인상, 즉흥, 구성의 세 단계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 현학적인 면모마저 지니는 내재된 느낌의 표현, 이것을 나는 ‘구성
composition’이라 부른다.
여기에서는 이성, 의식, 확실한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계산이 아닌 느낌에 의해 이루어진다. (…)
하나의 예술작품은 두 가지 요소, 즉 내부와 외부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예술가의 영혼 속에 있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관찰자의 영혼에 그와 유사한 감정을 일깨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육체와 연결된 영혼은 감각의 중개로 감동을 받게 된다.
감정은 감각된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감동받는다. 감각된 것은 따라서 비물질적인 것(예술가의 감정)과
물질적인 것과의 물리적 관계를 맺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며 그 관계로부터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그리고 감각된 것은 또다시 물질적인 것(예술가와 그의 작품)과 비물질적인 것(관찰자의 영혼 속의 감정)
의 다리역할을 한다. 이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예술가의 감정→감각된 것→예술작품→감각된 것→관찰자의 감정 작품이 성공하면 할수록 이 두 개의
감정은 비슷하고 같아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회화가 결코 노래와 다르지 않다.” (칸딘스키, 『폭풍』, 1913)
4. 러시아 화가들과 대상의 부재
칸딘스키가 비대상회화를 시작한 최초의 화가이기는 하지만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자연에서 받은 감동
이나 느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추상회화는 러시아에서 시작되며 전위운동은 격화되게 된다.
당시 러시아는 1900년에 이르러서야 의식있는 문예학술 애호가들에 의해 일단의 예술가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대중미술의 상징이었던 토착민족미술인 성상과 연결되며, 이 토착미술은 흑인미술이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처럼 해방자적 기능을 수행한다.
러시아에서의 창작은 새로움, 변화와 동의어가 되었고 개념화된 주지주의는 대담한 이론들을 낳았다.
라리아노프와 공챠로파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선구적 개념들을 강화시키며 최초의 전위운동을 전개
하며, 1913년 <과녁>전을 통해 광선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들은 순수색채를 ‘지배적 법칙’으로 삼으면서 공백과 공간의 표현에 몰두한다.
“광선주의 회화의 목적은 선택된 다양한 대상에서 발산되어 다시 반사된 광선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생겨난 공간형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광선은 통상 색선으로 표현된다.
회화의 본질은 채색된 부분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전체적으로 강렬함을 주는 최선의 색채들 간의 결합에
있다.” (라리오노프와 공챠노파의 선언, 1913)
라리오노프의 강렬한 성격과 통찰력은 말레비치와 타틀린에 의해 계승된다.
절대주의 이론은 1915년 페트로그라드의 <0, 10>전시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그때까지 ‘추상한다’는 것은 시각세계에서 주어진 것을 단순화하고 정화하는 것이었다.
말레비치로 인해 추상은 새로운 진보를 하게 되며 공식적인 논리가 된다.
그가 출품한 사각형은 대상의 부재에 대한 느낌의 표출이었다.
그는 ‘의지와 재현의 세계’를 버리면서 ‘감수성 이외에는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미지의 지평’을 연다.
“중요한 것은 단지 감수성밖에 없다.
바로 이 길을 통해 예술, 즉 절대주의는 재현을 벗어난 순수표현에 이르게 된다.
예술은 감각 외에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는 ‘사막’에 도달한 것이다. (…)
절대주의의 사각형 및 그 이념에서 생겨난 형태들은 원시인의 기호와도 비교될 수 있다.(…)
(말레비치,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에서 절대주의로, 회화의 사실주의, 1915)
구상적 회화를 포기하면서 그는 직관을 해방시키게 된다.
“직관에 의해 창조의 원칙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재현적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기호들을 창조해야 하며, 구상회화의 문제점들은 새로운 예술 형태인 사진, 영화에 떠넘겨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인 기술적 방식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미술에 있어서 완전한 대상의 제거에 이르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교육을 통해 창조적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미술이라는 밧줄 위에서 대상을 유희하는 위험한 곡예는 피해야 한다.
(말레비치, 세잔느에서 절대주의로, 1920)
재현미술이 극복되면서 작은 책자, 선언서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 흐름은 너무나도 격렬해 이론과 실제의 전통적 관계조차 변화시킨다.
“자연의 대상을 곧바로 빌어오지도 변형시키지도 않은, 단지 회화 자체의 공간 분배에서 비롯된 형태가
화폭 위에 출현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창조라 할 수 있다.” (말레비치, 1915년 선언문)
회화적 공간을 화폭 자체로 한정시키고 기본적 형태들과 색채들만을 도입함으로써 말레비치는 회화의
‘백지상태 point zero'를 넘어선다.
즉 인간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자연의 손에서 세계를 빼앗으며 과거를 백지화시킨다.
<0, 10>전시에서는 말레비치와 타틀린을 대립하게 만드는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타틀린은 ‘실재공간’에 ‘실재의 물질’을 가지고 구성한, ‘반부조’들을 공중에 매달아 전시하면서 회화의
‘가공성fiction’이라는 말레비치의 이론과 혼동되기를 거부한다.
타틀린은 구성주의 이론으로 화폭과 회화의 전통적 재료를 버리고 실물 자체를 위한 ‘구성’을 위해 회화의
‘추상’과 결별한 것이다.
타틀린의 반부조는 전통적 장르의 붕괴를 선언하면서 특히 예술과 삶의 종합을 지향하는데, 후에 ‘생산성
지상주의productivisme’를 제창하면서 실현을 보게 된다.
색채는 러시아인들의 조형적 사고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다.
말레비치는 이미 “채색된 평면은 곧 살아있는 실재 형태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절대주의란 색채문화 발전의 머나먼 여정이라 말할 수 있다.
회화란 색채의 혼합, 즉 심미적 원칙에 따라 색을 뒤섞어 만든 색채의 가공이다.
그리고 위대한 화가들에게는 채색된 대상 자체가 회화의 원천이었다.
나는 ‘회화’라는 현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대상을 파괴하여 그 정체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회화법칙에 걸맞는 새 규범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순수 색채회화의 새로운 원천은 바로 색채 자체가 요구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명백해
졌다.
그리고 색채는 회화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단위였다.
복합적 체계 속에서 작용하기는 하나 개별적인 독립요소였던 것이다.
하나의 독립된 체계는 여하의 미학적 규범도 경험도 유행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체계는 차라리 ‘색채의 철학적 총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 체계는 점차 나의 생각을 일관성 있게
정형화시키고 있다.”
(말레비치, 모스크바 제2회 국가 대전시회에서 발표된 선언문, 1919)
그의 색채에 대한 편력은 그를 모든 색채의 근원인 흰색으로 몰고 가고, 이 전시에 <흰 바탕 위의 흰 사각형>
을 전시한다.
그것은 회화행위에 색채의 순수함과 신성함을 부여함과 동시에 절대 넘을 수 없는 일종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로드첸코는 같은 선언문에서 자신의 작품 <검정 위의 검정>을 소개한다.
“나의 이러한 비약은 회화가 이때까지 겪어왔던 일체의 ‘이즘’의 파괴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지금 색채회화의 임종, 곧 모든 이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마지막 희망과 사랑마저도 열기처럼 사라진 죽어버린 진리의 시대와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1921년 <5x5>전에서 그는 이 단계를 넘어서 빨강, 노랑, 파랑의 모노크롬 작품 세 점을 전시한다.
회화는 이 시점에서 한계에 다다른 바, 타라부킨은 ‘최후의 그림’이라는 주제의 강연회에서 이 점을 인정
하기에 이른다.
타틀린, 로드첸코 및 그들과 이념을 같이 하는 일군의 화가들에게 회화는 더 이상 새로운 인간의 감성을
갈고 닦기에 충분하고 적절한 대상이 아니었다.
예술은 삶 속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려 하지 않고 도시, 집, 실용적 물건과 같은 일상을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대중의 모범으로 대중과 어느 곳에서나 만나며, 서로의 긴장이나 대립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평등주의적 이상형을 각자에게 심어주고자 한다.
“이 시대의 화가란 자신의 삶과 일 그리고 자신을 조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삶을 위해 일해야지 결코
궁전이나 교회, 묘지 그리고 미술관의 위해 일해서는 안된다.”(로드첸코)
철저한 추상을 통해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재현이 아닌 새로운 기능을 회화에 부여했다.
그러나 회화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5. 몬드리안과 탈자연
몬드리안의 발전과정은 입체주의에서부터 러시아 절대주의까지의 추상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칸딘스키처럼 그는 창조란 정신적 계시를 담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불변의 질서에 관한 신념은 신지학자 쇤마커스Schoenmaekers의 이론을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우리들은 자연을 철저히 파악함으로써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자연은 그렇게도 활기있게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절대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쇤마커스)
이 미지의 법칙에 관한 연구를 위해 몬드리안은 외부세계의 반영인 재현을 떠나 근본적인 실험을 시작한다.
한편 세잔느와 입체주의 화가들의 전시를 보며 전위미술에 대한 충격을 받아들인다.
이는 ‘순수구성’의 길을 제시하지만, 그는 또한 그들과 구별되고자 한다.
“나의 작품들은 수년간의 작업 결과 점점 외부세계의 자연적 형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업과정 중에 이루어졌다.
나는 현대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전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몬드리안, 자전적 수필, 1941)
“공간에 부피를 표현하고자 한 입체주의자들의 생각은 기존의 공간이란 버려야 한다고 믿는 나의 추상
개념과 반대였다.
그리하여 나는 평면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정 풍경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체계적으로 변형시켜가면서 그는 진정한 조형적 변주에 이른다.
자연을 초월하여 보편적 조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된다.
단순화 단계에서 몬드리안은 ‘의지’의 상징인 수직선과 ‘휴식repos’의 상징인 수평선이라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요소들의 대비로 우주를 요약한다.
그는 화면 전체에 이러한 작업을 확산시킨다. 그는 세부를 중시하는 국소적 시각에서 본질에 접근하는
확대된 시각으로 넘어간 것이다.
어떠한 모티프라도 철저히 단순화시키고 나면 똑같은 조형적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에서 그는 회화의
재현적 기능을 버리고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지닌 가능성만을 추구한다.
1917년 연작 <백과 흑>에서 수직과 수평을 독립적으로 분석하면서 캔버스 평면을 하나의 실재로 받아
들이기 시작한다.
하나의 자명한 실재로 받아들여진 화폭은 화폭에 들어갈 형태들의 크기를 결정하게 된다.
그 화폭들은 무색이건 또는 원색이건 자연적으로 그 효과를 드러낸다.
즉 그들은 튀어나와 보이기도 들어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반대요소로부터 새로이 균형을 추구하며 몬드리안은 수없이 작은 면 분할에서부터 몇 개의 요소로
농축된 구성에 이르기까지, 채색된 혹은 비어 있는, 또는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 다양한 화면효과를 체계
적으로 실험한다.
그는 후에 이 ‘선과 색채의 관계 표현만을 요구하는 회화’를 신조형주의라 명명한다.
1917년 10월 네덜란드에서 몬드리안은 판 되스브르그, 판 데어 레크와 함께 잡지 『데 스틸』을 발간하며
그의 대부분의 이론을 발표한다.
“작품은 집단적 사고에서 태어나야 하며 여러 가지 원칙을 통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제부터 예술작품은 제반 조형예술의 종합으로서 일상생활 속에 등장해야 한다.”
(몬드리안, 양식과 소리, 1953)
데 스틸운동은 비록 상반되는 원칙에 의해 움직이긴 했으나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처럼 예술의 용도를
바꾸고자 한다.
즉 구성은 서정성을, 기계는 수공업을,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를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몬드리안은 이미 회화를 인간의 환경에 의해 부과된 불가피한 실험적 체험으로
여기지만 더 이상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균형 잡힌 조형은 인류를 충만하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예술의 종말이 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벌써 예술은 자기파괴를 시작했다.…삶에 의한 예술의 혁신은 아직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예술을 필요로 한다.…낡은 재료를 가지고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몬드리안은 선과 표면, 색채의 효과에 열중해 1919년부터 바탕의 흰색은 건축적 토대를 이루며 선은
표면을 구성한다.
차 있고 비어 있는 것의 관계는 그의 목표인 ‘이원의 균형’을 물질화시킨 것이다.
화면이 점차 커지며 그것은 곧 그려야 할 부분을 결정짓는 캔버스의 형태를 문제삼게 한다.
결국 화면의 형태를 모방한 구성요소들을 확장시킴으로써 심리적으로는 연장될 수밖에 없는 화면을
독단적으로 자르는 순간 화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로 넘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회화가 한정된 화폭에 외부세계를 농축시켜 놓은 것이라면 몬드리안의 회화는 회화의 구성
요소들이 그 화폭의 형태를 결정한다.
이러한 논리를 발전시켜 최소한의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몬드리안은 이 세상의 무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미술의 목적으로 삼았고, 이는 탈자연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진정 새로운 회화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적 형태가 나타나는 식의 구성은 사라져야만 했다.
조형요소들을 통해 하나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순수직관’에서 출발해 고도의 감수성과 뛰어난
지성을 결합시킨 ‘순수한 관계 사이의 균형’을 이룬 구성에 도달하곤 했다.
실상 이 관계들이 자연과 우리의 정신 속에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동일한 원칙에 의해 형성되기는 하지만
오늘날 미술작품은 자연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술작품에는 단지 자연과 인간의 근본적인 것, 즉 보편적인 것만을 표현하고자 노력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 뤽 다발
(몬드리안, 미술수첩, 1926년 9월호)
추상표현주의와 정치: 수정주의 관점 다시 읽기
1. 서언
1970년 뉴욕근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로 약칭)에서 열린 《정보
Information》전에서 한스 하케(Hans Haacke)는 개념미술의 일환으로 미술관 관객에게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지 않은 당시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를 다시 뽑아줄 것인지를 묻는 투표를
실시했다 .
Hans Haacke, [Poll of MOMA Visitors], 1970.
결과는 투표자의 68.7 %가 록펠러의 재선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투표결과는 1960년대 기존의 권력구조를 거부하고 급진적 대안의 제시를 요구한 민권운동, 여권
운동, 반전운동 등 다양한 사회, 정치 개혁 운동을 반영한 것이다.
사회, 경제적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1969년 결성된 미술 노동자 연합(The Art Worker's Coalition)에서 알 수 있듯 이러한 변혁의 열기는 미술계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제도권 미술계에 대한 공격은 주로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거부 및 다양한 개성적 표현의 추구로 나타났다.
미술사학계에서도 형식주의 이론에서 벗어나 전후 미국 모더니스트 미술을 당시의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미국 정부기관이 추상표현주의를 냉전의 도구로 이용했고, 추상표현주의의 성공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영의 결과라는 수정주의 사가들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에 주목한 수정주의 사관은 정치적 도구로서의 추상표현주의라는 고정관념을 형성시킬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수정주의 사가들의 주장은 불충분한 증거와 확인되지 않은 추측의 나열로 그후 많은 반론에 직면
하였고, 현재는 그 이론적 근거가 많이 약화된 상태이다.
특히 최근 미연방수사국(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이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에이돌프 고틀립(Adolph Gottlieb), 리크래
스너(Lee Krasner)와 같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을 좌익 정치활동을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분류, 감시했었
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정주의 사가들의 입장은 더욱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 글은 지난 30년간 추상표현주의와정치의 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살펴본 뒤 1950년대의 두
전시회를 통해 수정주의 관점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두 전시회는 1953년 런던에서 열린 "무명의 정치수 the Unknown Political Prisoner"라는 주제의 국제
조각 공모전과 1957년 유럽과 아시아에서 열린 《미국현대8인작가전》으로 한국미술사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수정주의 논쟁
전후 미국미술과 정치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막스 코즐로프(Max Kozloff)가 1973년
5월호 『아트포름 Artforum』에 실은 「냉전기 미국회화 American Painting During the Cold War」라는 글에 나타난다.
이 글에서 코즐로프는 미국 정부기관이 해외로 보낸 추상표현주의 회화는 미국이 정치, 경제적 위신에 걸맞은 문화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였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미국 해외 정보국(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이하 'USIA'라 약칭)과 MoMA 산하의 국제 위원회(International Council)의 역할을 강조
하였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미국미술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처럼 정부기관의 대변자 역할을 한 적이
없고,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강조한 실존적, 개인주의적 자유와 냉전의 수사학으로서의 자유도 우연의 일치
에 불과한 것이었다.
반면 뒤이어 나온 「추상표현주의, 냉전의 무기 Asbtract Expressionism, Weapon of the Cold War」
라는 글에서 에바 코크크로프트(Eva Cockcroft)는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미술 운동이 성공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후원자나 권력층의 이념적 욕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우연적 관계를
제기한 코즐로프의 논리를 반박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는 공적인 미술의 후원자로서의 MoMA의 활동, 정부 내 록펠러 가문의 인맥, 해외로 보내진 추상표현주의 작품전 등을 상세히 열거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코크크로프트는 냉전과 추상표현주의 사이에는 MoMA의 국제위원회를 매개로 한 긴밀한 정치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문화선전의 관점에서 볼 때 정부기관과 MoMA의 국제위원회의 기능은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이후 나온 수정주의 사가들의 글은 코크크로프트의 주장을 반복, 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사피로는 문화선전을 위해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하 'CIA'라 약칭)이 추상
표현주의의 수출을 적극 지원했다는 주장을 폈고, 세르주 기보(Serge Guilbaut) 역시 앞선 수정주의 사가
들의 주장을 인정하며 냉전의 수사학과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담론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였다.
기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수정주의 사가들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 즉 논쟁적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자유, 액션 페인팅으로 상징되는,
어떠한 구속도 없는 상태에서의 미술가의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상징되는 자유의 표현이었다. 근대주의자들(바 Barr, 소비 Soby, 그린버그 Greenberg)이 보수주의자들(단드로 Dondero, 테일러 Taylor)로부터 지키
려했던 것이......이 자유였다.
해외에서 국내의 이러한 대립은 미국의 체제에 고유한 자유의 상징으로,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미술가에게
부가된 제약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비춰졌다.
1970년대를 풍미한 수정주의 관점은 그후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의 제시를 통한 논리적 반박으로 그 근거가 많이 약화되었다. 예컨대 프란시스 폴(Frances K. Pohl)은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어떻게 사회적 리얼
리즘 미술가인 벤 샨(Ben Shahn)의 작품이 보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검토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양식만이 미국의 문화선전의 목적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비엔날레를 위해 작성된 홍보자료와 샨 자신의 글을 분석하며 폴은 샨의 작품이 선정된 것은 그의 억압받는 계층에 대한 관심, 노동조합에 대한 동조,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경쟁할 수 있으면서도 민주적이고
미국적인 사실적 작품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넓게는 인본주의적 주제, 좁게는 이탈리아와의
관련성 때문에 샨의 작품도 문화선전의 도구로 인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마이클 키멜만(Michael Kimmelman)은 MoMA의 활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 수정주의 사가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특히 그는 MoMA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각종 비엔날레의 미국 전시를 전적으로 책임진 것이 아니며,
MoMA가 기획한 경우에 있어서도 추상표현주의가 지배적 양식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MoMA의 관장이던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의 글을 묶어낸 어빙 샌들러(Irving Sandler)도
바가 추상표현주의보다 유럽 모더니즘 회화를 더 선호했으며, 1958년경에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한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을 후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함으로써 MoMA와 추상표현주의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였다.
다음에 살펴볼 두 개의 전시회는 수정주의 사가들이 주장하는 추상표현주의 미술, MoMA, CIA, USIA
그리고 기타의 단체가 관련된 경우로 전시기획과 준비과정 등에 대한 검토는 수정주의 관점의 한계를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줄 것이다.
3. 사례 분석
1) 국제 조각 공모전
"무명의 정치수"라는 주제의 국제 조각 공모전은 1953년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Institute of Contempor
ary Art, 이하 'ICA'라 약칭)에서 열렸다.
공모전 기획은 스톡홀름 미대사관의 문정관을 지낸 안소니 클로만(Anthony Kloman)이 익명의 기부자가
기탁한 £11,500의 상금을 ICA에게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공모전은 3,500점의 작품이 응모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고, 최종 선정된 145점의 작품은 1953년 3월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y)에 전시되었다.
공모전을 알리는 설명서를 통해 ICA는 그것이 국제적인 성격의 것이고, 어떠한 국적의 미술가도 배제되지
않을 것이며, 무명의 정치수라는 주제는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를 희생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밝혔다.
그러나 냉전의 상황에서 공모전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공산진영을 염두에 두고 채택된 것으로 믿어졌다.
그 결과 아르프(Hans Arp), 엡스타인(Jacob Epstein),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로랑(Henri Laurens), 립시츠(Jacques Lipchitz), 마리니(Marino Marini), 무어(Henri Moore)와 같은 유럽의 주도적 조각가들은 다양한 유형의 정치수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해석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
으로 흐를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불참을 선언하였다.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도 공모전의 주제가 도발적이며 냉전을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참가를 거부하였다.
유럽의 조각가와 공산권 국가의 의심은 로버트 버스토우(Robert Burstow)에 의해 정당했던 것으로 드러
났다.
공모전 기획자간에 오간 비밀서신을 검토한 버스토우는 공모전 자금을 제공한 익명의 기부자가 클로만과는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시절부터 알고 지낸 미국의 석유재벌 존 헤이 휘트니(John Hay Whitney)이고, 기획자간의 비밀서신에 등장하는 실제 자금주인 제3의 인물은 CIA의 비밀첩보활동을
관장하던 정책협의실(Office of Policy Coordination)이었음을 밝혀내었다.
버스토우의 자금 출처 확인으로 결국 공모전의 주제는 보편적 인류의 이상을 위해 희생된 사람이 아닌 공산국가의 정치수를 의미한 것이고, 전체 기획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CIA의 전략의 일환이었음이 드러났다.
한편 전란을 치르던 한국이 이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러한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
인다.
공모전이 기획단계에 있을 무렵 판문점에서는 전범 처리 문제로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따라서 공모전의 주제와 관련해서 한국은 그 정치적 의도를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나라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국이 공모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뉴욕타임스 The New York Times』의 관심을 끈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참여 조각가 중 김종영이 장려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김종영, [무명의 정치수], 1953.
당시 심사위원은 알프레드 바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를 포함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비평가,
미술관 관장, 미술사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심사위원이 현대미술을 선호했기 때문에 수상작의 대부분은
추상작품이었고, 수상자도 주로 서독, 영국, 미국,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따라서 렉 버틀러(Reg Butler)의 대상 수상작이 짓이겨지는 수난을 당할 정도로 심사결과에 대한 항의는
대단했다 .
Reg Butler, [Working Model for the Monument to the Unknown Political Prisoner], 1952.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구상조각가의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미적 판단보다는 정치적인
고려가 더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2) 미국현대8인작가전
《미국현대8인작가전》(이하 '8인전'이라 약칭)은 USIA가 후원하고 시애틀 미술관이 기획한 해외순회전
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전시가 유럽과 아시아로 보내졌으며 한국에서는 1957년 4월 9-21일 덕수궁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다.
아시아 전시는 마트 토비(Mark Tobey), 모리스 그레이브스(Morris Graves), 케네스 칼라한(Kenneth
Callahan), 가이 앤더슨(Guy Anderson)의 회화 30점, 그리고 리 카판(Rhys Caparn), 데이빗 헤어(David
Hare), 시무어 립튼(Seymour Lipton), 에지오 마티넬리(Ezio Martinelli)의 조각 10점으로 구성되었다.
이 전시의 기획의도에 대해 1957년 6월 22일자 『타임 Time』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비록 토비의 섬세한 서체적 양식과 북서부 화가들의 작품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오리엔탈리즘과 신비주의는 극동에서 호평을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작품은 결코 일반대중을 위한 것은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미술을 알릴 목적으로 이들 전시회에는 다행스럽게도 큐레이터들이 동행한다.
이 전시 계획은 USIA가 정치적인 이유로 몇 개의 순회 미술전에 대한 후원을 취소하여 미술계를 들쑤셔
놓은 뒤에 발표된 것이라 흥미롭다.
먼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Sports Illustrated』라는 잡지가 기획한
《미술 속의 운동 Sport in Art》이라는 전시는 USIA의 후원 하에 국내전을 거쳐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호주를 순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가 텍사스주의 달라스 미술관에 도착하자 달라스 애국 위원회
(Dallas Patriotic Council)라는 극우단체가 벤 샨(Ben Shahn), 윌리엄 조락(William Zorach), 야스오
쿠니요시(Yasuo Kuniyoshi) 같은 몇몇 미술가들의 공산주의 전력을 문제삼으며 관련 작품의 철거를
요구하였다.
미술관측은 그 전시를 옹호했으나 USIA는 의회로부터의 비난이 두려워 결국 호주로의 순회계획을 철회
하였다.
미국미술협회(American Federation of Arts)가 기획한 100점의 20세기 미국회화전이 준비되고 있을
때도 USIA는 정치적인 이유로 몇몇 미술가의 작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미국미술협회가 "미술은 미술가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가 아닌 미술작품의 가치로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서자 USIA는 결국 전시계획 자체를 취소하였다.
이 두 사건은 당시 미국사회의 반공이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당시 USIA의 철회발표에 대해 미술계는 강한 반발을 보였다.
미술잡지 『아츠 Arts』는 9월호에 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자유세계는 현재
인류의 마음과 정신을 구하기 위한 중대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의 가장 훌륭한 자산은 우리의 문화적 유산과 업적이다.
이것이 억압될 때 우리는 창조적 예술을 질식하고 다른 나라의 국민들로부터 외면 당한다"고 주장한 뒤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검열로 인해 말살되지 않도록 대통령이 나설 것을 촉구했다.
『아트 뉴스 Art News』도 철회된 전시회를 둘러싼 논쟁을 자세히 소개한 뒤 "미국정부가 1917년 이후
에 제작된 회화가 포함된 해외전시는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미술가에 의해 제작
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후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후 USIA가 《8인전》에 대한 전시계획을 발표하자 『아트 뉴스』는 그 계획을 환영하며 "이것은 아마도 USIA가 1917년 이후의 작품전시 금지안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직면하여 다시 한번 방침을 바꾸고, 처음
시작했던 자세로 돌아가 책임 있는 노력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의미한다"라는 논평을 냈다.
그러나 시애틀 미술관 관장인 리처드 풀러(Richard E. Fuller)가 1956년 8월 1일에 가이 앤더슨에게 보낸
편지는 『아트 뉴스』의 주장이 근거 없는 소문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USIA가 우리 미술관에게 하나 또는 두 개의 해외 순회전을 기획하도록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전시에는 귀하와 함께 마크, 켄, 모리스 그리고 동부지역의 조각가인 데이빗 헤어와 리 카판의 작품이
포함됩니다. USIA는 유럽전에는 작가 일인당 6, 7점 정도를, 일본,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순회하는 극동전에는 그보다 적은 수의 작품을 원합니다.
이 편지는 1956년 9월호『아트 뉴스』에 실린 1917년 이후의 작품전시 금지에 관한 기사가 근거 없는
것이었음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8인전》의 기획, 규모, 작가선정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USIA가 주도
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USIA 내에는 조형예술에 관한 자문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8인전》에 작품을 대여해준 소장
가이자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조형예술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로렌스 플라이슈만(Lawrence Fleischman)은 자문위원으로서의 경력에 대해 "거기에서 나는 항상 전시 검열에 맞서 싸웠다.
나는 그러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마침내 내가 자문위원이 되었을 때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였고, 드디어는 검열을 폐지하였다"라고 회상하였다.
플라이슈만의 회상은 USIA가 8인전 기획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풀러의 편지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기획단계에서의 극동전 순회일정에는 한국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순회를 떠나기 전인 1957년 1월에 시애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때에도 『시애틀 타임즈 The Seattle Times』는 극동전의 순회일정으로 일본,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4개국만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한국은 극동전의 첫 번째 개최국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을 일정에 포함시키는 결정은 대략 1957년 2월에서 3월 사이에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갑작스런 일정변경은 한국이 원래 첫 번째 개최국인 일본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8인전》에 대한 충분한 사전 홍보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한국의 언론이나 대중의 반응
도 미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하원 교육, 노동 위원회 문화교류 소위원회에 출석한 USIA 부원장 애벗 워시번(Abbott Washburn)은 각국의 미공보원(USIS)이 홍보활동에 쏟는 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미국 미술가나 공연단체 또는 무역박람회의 대표단이 방문하더라도 현지국민들이 미리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 행사를 라디오,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충분히 알리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이 하는 일의 효과는 몇 배 더 증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극동전에 갑자기 한국을 집어넣는 과정에서 서울의 미공보원은 한국어로 된 자료를 만들고 홍보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8인전》의 도록이 3달이나 지난 7월에 『신미술』의 특집호 형식으로 출판된 것이나 개막일인 4월 9일에 어느 일간지도 이 최초의 본격적인 미국미술전에 대한 소식을 싣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8인전》에 대한 보도는 4월 11일자 『한국일보』에 처음으로 나왔다. 냉담한 반응에 당황한 미공보원은 서둘러 한국어 홍보자료를 만들어 배포했을 것이고, 일주일 뒤 거의 동시에 나온 3편의 전시평은 유사한 내
용을 담고 있어 미공보원의 홍보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미국작가 8인전], 어네스트 디트릿히 설명, 서울 1957년 4월 14일
먼저 57년 4월 16일자 『조선일보』에 「동양적 환상의 작용」이라는 평문을 기고한 정규는 전시에 대한
인상을 "미국미술이 이제는 서구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자기의 주제와 자기의 양식을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과 그 이메지가 대단히 상징적"이라고 적은 뒤, 미국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오늘날 미국문화에 대한 각성은 일종의 세계적인 풍조임은 틀림없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오늘날의 세계의 정치경제 형세로 인한 파생적인 시대형태라고만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판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의 문화가 세계문화에 관여할 수 있다는 그들의 자부는 어디까지나 그네들이 쌓아올린 문화적인 특질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다음날인 4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경성의 「미국현대미술의 의미」는 "서양미술의 중요한 일부
로서 크게 움직이고 있는 미국미술의 존재"에 대한 한국화단의 무관심에 대한 질타로 시작된다.
이어 그는 미국미술의 형성과정을 "오늘의 세계미술의 이대조류, 즉 초현실주의 미술과 더불어 생장한 추상주의 미술의 본류는 구라파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조형적 완성과 인간생활과의 연결이라는 과제
속에 오늘의 미국미술의 주류가 되었다......
오늘의 미국화단이 있기까지에는 인상파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하는 각종 미술운동이 격동과 미적 혁명 속에 단시일 내에 그들 미술사를 엮었고 이러한 미술사적 격동 속에서 미국적 전통이 서서히 머리를 들어 현대미국미술 속에는 국제적 요소와 미국적 요소가 서로 대립, 교차된 상태로 미적 질서를 이룩하고 있다"고 요약
한 뒤, 미국미술의 특질을 "단순, 소박, 정력적, 즉물적, 창의적, 현실적" 등의 용어로 정리했다.
이경성의 미국미술의 형성과정과 미국미술의 특질에 대한 설명은 존 바우어(John I.H. Baur)가 쓴 『현대미국미술 속의 혁명과 전통 Revolution and Tradition in Modern American Art』에 토대를 둔 것으로 아마
도 미공보원의 홍보자료가 이 책을 기초로 해서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같은 날 『평화신문』에 영문자 'R'로 표기된 익명의 기고자가 쓴「미술에 있어서 미국적인 것」이라는 글은 처음부터 "현대미국미술에 있어서의 극도로 다양한 성격은 씩씩한 에네르기와 생명력을 나타
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라는 바우어의 말로 시작한다.
'R'의 현대 미국미술의 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은 "추상주의의 합리의 영역과 초현실주의의 비합리의 영역은 현대미국미술에 형식의 혁명을 마련하여......미적 현실을 절충과 종합(인터나쇼날리즘), 반발과 저항(낭만적 환상파)의 두 가지 입장에서 전통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추상의 일반적인 범주는 '뉴욕파'를 중심으로 비구상주의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국제성을 띄우며 하나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의 인간 대 우주관은 '낭만적 환상파'를 중심으로 북서부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로 정리해
볼 수 있다.
'R'의 글은 대체로 바우어의 책에 근거하고 있지만 바우어가 사용하지 않은 '뉴욕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또 바우어가 미국 고유의 전통 중의 하나로 본 '낭만적 환상파'를 《8인전》과의 관련성을 의식한 듯 미국
미술의 2대 조류의 하나로 격상시키고 있다.
이는 'R'이 미국미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던 인물로 아마도 《8인전》 홍보자료를 만든 미공보원 관계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R'의 글은 앞선 두 글의 토대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8인전》을 통해 한국미술계는 미국미술작품을 실견하는 기회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는 관점까지 제공받은 셈이다.
4. 결언
앞서 살펴본 두 전시회는 수정주의 사가들이 주장한 MoMA, CIA, 추상표현주의간의 삼각관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예컨대 국제 조각 공모전은 CIA가 정치적 목적으로 미술을 이용하고 있는 사례를 보여주지만 CIA가
사용했던 도구는 MoMA가 아닌 ICA이고, 추상표현주의가 아닌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이었다는 점에서
ICA, CIA, 유럽 추상조각이라는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더구나 버틀러의 추상작품을 서베를린에 건립하려던 계획은 그의 작품이 "너무 현대적"이라는 이유로
CIA가 자금지원 약속을 철회함으로써 백지화되고 만다.
『8인전』의 경우 시애틀 미술관, USIA, '낭만적 환상파'라는 전혀 다른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순회일정의 급작스런 변경, 홍보자료의 급조 등은 미국의 문화선전 활동이 그렇게 체계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인상을 던져준다.
또 홍보자료에서 뉴욕파 대신 '낭만적 환상파'가 부각된 것은 추상표현주의만이 아닌 다양한 미술이 선전
활동의 도구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8인전』기획에 참여하고 작품도 대여해준 플라이슈만도 그 전시에 대해 "오늘날의 정치선전 전쟁에서
러시아의 취약점은 미술가들이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들 전시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우리의 미술가들은 자신이 느끼는 대로 그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자유를 상징한 특정 양식이 아닌 다양한 양식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검열의 철폐에 앞장섰던 플라이슈만의 이 말은 미국미술의 해외전시가 반드시 정치적인 동기에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유롭고 문명화된 국가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를 알리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많은 미국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정주의 사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들은 다양한 양식의 미술을 다양한 정부기관, 미술관, 화랑,
미술단체를 통해 해외에 소개하였다.
수정주의 사가들이 추상표현주의, MoMA, CIA의 삼각관계에 집착했던 것은 전후 추상표현주의의 부상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나의 양식의 성공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연계시키려는 시도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
행위(gesture)든 색면(Color-Field)이든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개방성이야말로 조셉 스탈린(Joseph)이나
조셉 맥카시(Joseph McCarthy)가 주도한 폐쇄적 사회에 대항할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일레인 드 쿠닝
(Elaine de Kooning)의 주장이나 앞서 언급했듯이 FBI가 추상표현주의자들을 요주의 인물로 분류, 감시
해왔다는 사실은 추상표현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와 상반된 이념적 색채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
적인 사례라 하겠다.
수정주의 사가들은 추상표현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편협한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그것이 생산된
사회, 정치적 맥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후 추상표현주의의 부상이 MoMA와 정부기관의 야합에 의한 정치적 도구화의 결과였
다는 식으로만 설명하려 함으로써 또 다른 편협함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였다.
비록 수정주의 사가들의 논리적 근거는 약화됐다 하더라도 추상표현주의를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
보려 했던 시각만은 마이클 리자(Michael Leja)나 데이빗 크레이븐(David Craven)의 연구로 이어져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다양한 이해에 공헌하고 있다.
정무정(현대미술사/ 홍대강사)
. 참고문헌
「미국현대회화, 조각 8인작가전 개막」『한국일보』 1957년 4월 11일.
이경성. 「미국현대미술의 의미」 『동아일보』 1957년 4월 17일.
정규. 「동양적 환상의 작용」 『조선일보』 1957년 4월 16일.
R. 「미술에 있어서의 미국적인 것」 『평화신문』 1957년 4월 17일.
"Art News International." Art News 55, 6 (October 1956), p. 13.
Baur, John I. H. Revolution and Tradition in Modern American Art, 3 ed.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Burstow, Robert. "The Limits of Modernist Art as a Weapon of the Cold War:
Reassessing the Unknown Patron of the Monument to the Unknown Political Prisoner."
The Oxford Art Journal 20, 1 (1997), pp. 68-80.
Cockcroft, Eva. "Abstract Expressionism, Weapon of the Cold War." Artforum XII, 10 (June 1974),
pp. 39-41.
Congressional Record-Appendix, 84th Congress, First Session, July 16, 1955, A5492.
"Contemporaries Abroad." Time 70, 4 (July 22, 1957), pp. 56-7, 61.
Craven, David. Abstract Expressionism as Cultural Critique: Dissent During the McCarthy Perio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Cummings, Paul. Tape-Recorded Interview with Lawrence Fleischman, February 28, 1970.
The Archives of American Art, New York.
Devree, Charlotte. "The U.S. Government Vetoes Living Art." Art News 55, 5 (September 1956),
pp. 34-5, 54-6.
"Editorial: A Modern 'Ecce Homo'," The Burlington Magazine XCV, 603 (June 1953), pp. 179-180.
Fuller, Richard E. Letter to Guy Anderson, August 1, 1956. The Archives of American Art, New
York: Guy Irving Anderson Papers, Roll 2786 (0445).
Gonzales, Boyer. "Uniformly High Quality Marks U.S.I.A. Show at Museum." The Seattle Times, January 20, 1957.
Guilbaut, Serge. "The New Adventures of the Avant-Garde in America." October 15 (Winter 1980),
pp. 61-78.
_________ . How New York Stole the Idea of Modern Art: Abstract Expressionism, Freedom, and the Cold Wa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83.
International Sculpture Competition: The Unknown Political Prisoner, American Preliminary Exhibition (New York, 1953). The Museum of Modern Art Archives, New York: International Program Records, SP-ICE-3.53 (VII.142.2).
Kimmelman, Michael. "Revisiting the Revisionists: The Modern, its Critics and the Cold War." In John Elderfield, ed., The Museum of Modern Art at Mid-Century at Home and Abroad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1994), pp. 38-55.
Kozloff, Max. "American Painting During the Cold War." Artforum XI, 9 (May 1973), pp. 43-54.
Leja, Michael. Reframing Abstract Expressionism: Subjectivity and Painting in the 1940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3.
Lewis, Anthony. "Red Issue Blocks Europe Art Tour." The New York Times, June 21, 1956.
Louchheim, Aline B. "11 Sculptors Will Represent U.S. at International Contest in London."
The New York Times, June 28, 1953.
Marshall, Jonathan and James N. Rosenberg. "An Open Letter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the Honorable Dwight D. Eisenhower." Arts 30, 12 (September 1956), p. 11.
Nairne, Sandy and Nicholas Serota, eds. British Sculpture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Whitechapel Art Gallery, 1981.
Pohl, Frances K. "An American in Venice: Ben Shahn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at the 1954
Venice Biennale." Art History 4, 1 (March 1981), pp. 80-113.
Saarinen, Aline B. "Art Storm Breaks on Dallas." The New York Times, February 12, 1956.
Sandler, Irving and Amy Newman, eds. Defining Modern Art: Selected Writings of Alfred H. Barr,
Jr. New York: Harry N. Abrams, 1986.
Shapiro, David and Cecile. "Abstract Expressionism: The Politics of Apolitical Painting." Prospects
3 (1977), pp. 175-214.
Tagg, John. "American Power and American Painting: The Development of Vanguard Painting in t
he United States Since 1945." Praxis 1, 2 (Winter 1976), pp. 59-79.
허버트 리드, 김윤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