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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강 – 언약
Summary 요약
대부분의 기독인은 ‘언약’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개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특히 개혁주의신학이 언약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전 구속사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키워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언약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Covenant of Redemption 구속언약
2. Covenant of Works 행위언약
3. Covenant of Grace 은혜언약
언약이란 둘 혹은 그 이상의 개인 또는 집단 간의 약속 혹은 개인을 의미한다.
성경적 언약에서 첫 언약에 사람의 노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첫 번째 언약은 신학적 개념으로서,
삼위하나님께서 각 위격끼리 구속의 전 과정에 있어 완전한 동의agreement를 하신다는 의미이다. 삼위의 구분 자체가 구속에서의 기능에 의한 구분이다. 물론 구속의 전 과정에서 삼위 하나님 모두의 참여가 있으나 교회 역사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이 완전히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서로를 설득해야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을 방어하기 위해 이 언약은 강조되어졌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아담와 하와와 맺으신 약속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였다. 이에 대한 시험이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것이었다. 그들의 결과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결국 피조물 쪽에서 불순종하여 언약을 어긴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아담과 맺은 언약은 대표성을 띤 것으로서 전 인류와 맺은 언약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언약을 무시하고 신경쓰지 않으려 할 수는 있으나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곧,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 언약 아래 있다)
세 번째 언약은
아담이 두 번째 언약을 준수하는데 실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을 보여준다. 모세와 아브라함 등을 통해 두 번째 언약을 다른 방법으로 성취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계속해서 약속을 주신다. 어떤 신학자는 구약과 신약의 구원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는 바울의 로마서 3~5장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언약이 깨어졌을 때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은혜’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완벽함으로 두 번째 언약을 다시 해결하고자 하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공로work’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설명은 세 번째 언약과 두 번째 언약이 구분되어져야 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의 ‘공로’는 아담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해본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worker을 보내셔서 두 번째 언약을 해결하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따라서 우리는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 ‘오직 칭의’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의 구원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언약은 창세기 3장 이후 계속해서 구원의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진 것이다!
Thoughts 더 생각하기
개혁주의를 알게 된 이후 계속해서, 그리고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단어가 바로 ’언약’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영어에서 covenant의 위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어에서 ’언약’이라는 말은 기독교적으로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계약이라던지 약속이라던지 하는 단어들을 병행해서 사용합니다.[1]
그런데 사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시간에 목사님들께서는 언약을 약속과 완전히 동의어로 사용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약속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신다는 방향으로 설교하시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현대 강단을 비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언약이 가진 고유한 신학적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짚어보는데서 그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강의 요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약은 명확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영어로 된 신학서적들을 보다보면 조금 애매한 부분이 나옵니다. 바로 Covenantal Promise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만약 언약을 단지 약속의 조금 더 고급스러운(?) 표현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 표현은 동어반복이 되어버립니다. ‘약속적 약속’, 또는 ‘언약적 언약’ 이렇게 되는 것이죠. 영어에서 언약(Covenant)이 약속(Promise)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은, 언약과 약속을 명확하게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 하나 같은 맥락에서 쉽게 경험하는 하나님의 약속(또는 언약)은 모두 나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무언가 주시겠다, 해주시겠다,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약속이나 언약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이든 약속이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면 모두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당신의 나라를 회복하시겠다는 가슴뛰는 약속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 또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함된 약속입니다.
이렇게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특성을 표현한 고유한 신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책을 읽을 때나 강의를 들을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강의를 통해서 언약은 1.구속언약 2.행위언약 3.은혜언약으로 나눌 수 있는, 하나님께서 삼위 내적으로 또는 인간들과 관계하시는 방법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적인 관계를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구속언약은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나머지 두 언약과 구분될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 전과 후에 인간과 관계하시는 방법에 차이가 생긴다는 측면에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구분될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알아도 우리는 신약과 구약의 구분, 율법와 은혜의 구분, 타락 전과 후에 대한 이해가 전체 언약적 구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타당성은 차차 배우고 터득하더라도, 언약에 대한 개념이 개혁신학 내에서 중차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이 글들은 예전에 요약해둔 것을 기반으로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들어도 잘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이해가 되면서 정리하니까 더 큰 도움이 되네요. 얼른 다음 강의도 올리겠습니다.
제7강 전적 타락(1/2)
Summary 요약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의 후대들 간에 논쟁이 발생했다. 도르트 신경에 논쟁이 집중되었는데, 이 신경을 통해 알미니안 교리는 정죄받았고 개혁주의 교리는 재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주장되었다.
이들은 외우기 쉽게 TULIP이라는 머릿말로 불리운다.
여기서 첫 시작점인 전적 타락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어지는 네 가지를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중점이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고, 명하신 것을 주신다.Command what Thou wouldst, and grant what Thou dost command’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전반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후반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도덕적으로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전적 타락’ 교리는 개혁주의가 원죄를 어떻게 보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죄는 첫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담의 첫 죄로 말미암아 인류가 짊어지게 된 첫 죄의 결과를 의미한다. 첫 죄의 결과로 인류는 타락했고, 그것은 인간 본성 전체가 죄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원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타락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다.
전적 타락은 극도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할 대로 악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적 타락은 인류가 직면한 타락이 육체와 정신과 의지, 전 인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전 인격이 죄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R.C.Sproul은 전적 타락을 ‘극단적radical 타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비록 TULIP과 같은 멋진 첫글자 조합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용어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간은 원래 착하다고 생각하며 죄는 인간 본성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타락은 인간의 중심, 곧 마음 자체의 상태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작은 조정이나 교육, 행위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으로부터의 변화,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극단적인 타락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중심이 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나는 것이 죄를 한 순간에 완전히 쳐부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완전하게 죄를 죽이게 되는 마지막은 천국에서의 영화의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Thoughts 깊이 생각하기
대학 시절 저는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으로 세계 모든 것을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에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제임스 사이어의 책들이나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신국원 교수님의 책 등을 많이 봤었죠. 그 때 세상 보는 눈이 정말 많이 바뀌었는데, 가장 많이 바뀌게 한 것이 바로 ‘타락’ 부분이었습니다. 전적 타락에 대해 이해하고 나자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지상의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깊이 생각해볼 때마다… 이 교리가 너무나 많은 진리들을 빛나게 해주는 배경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지성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아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히 분석이지 못하고 충분히 종합적이지 못합니다. 충분히 보편적이지 못하고 충분히 개별적이지 못합니다. 겉과 속을 모두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적절한 질서 가운데 그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최고가 되고, 때론 자연이 최고가 되고, 내가 최고가 되고, 내가 자연이 되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단지 인식 영역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은 고장나버려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무엇보다 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것은 참 탐탁치 않습니다. 하물며 보기에도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힘들 겁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영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일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영영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없는 것 취급해버립니다. 그리고 영적 교제의 즐거움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는 존재와 더 이상 아름답고 즐겁게 여겨지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겠죠.
지적으로 타락하고, 입맛만 싸구려가 되버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육신은 참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해낼 수 없습니다. 능력이 저급해져버린 것이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 병들고 지칩니다. 욕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고 절제가 불가능하며 용솟음칠 때마다 욕구를 채움으로 육신을 달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타락해버린 인간은 온전히 지각(지각의 대상이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할 수 없고, 지각해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도 못하거나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되었으며, 어떤 것을 행할 능력도 없거나 불완전해졌습니다.
이 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됩니다. 이 교리를 인정할 때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겸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마음밭이 됩니다. 나 자신의 순종을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게 되며, 다른 사람의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아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아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잘나가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아무리 못났고 불완전해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가난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며,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인정하고 즐거워하며 기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자명한 사실은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나머지 네 가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첫 번째가 인정이 되면 나머지 네 가지는 비교적 쉽게 인정됩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제8강 전적 타락(2/2)
Summary 요약
전적 타락 교리를 다룰 때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자유의지에 대한 내용이다. 자유의지 논쟁은 두 가지 관계에 대한 논쟁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우리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는 타락과 인간의 자유의 능력 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17세기 영국 개혁주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은 완전히 자유를 잃었다고 천명한다. 인간은 영적 선을 원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를 도덕적 무능력(Moral Inability)라고 부른다. 펠라기우스는 은혜가 없이도 인간은 완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세미-펠라기우스주의는 은혜는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은혜 없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며, 은혜 외에 타락 후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인간의 의지가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부패한 본성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하지만 원의(origianl righteousness)의 잔재가 인간의 의지 속에 남아 있다고 본다. 그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조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타락과 죄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여 사람의 마음(영혼)의 경향은 오직 하나님만 바꾸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 문제에 핵심은, 과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원하는 도덕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인간이 ‘제가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인간의 영혼을 재창조하시는 사역을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시작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unilaterally),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독적으로(monergistically), 독립적으로(independently), 그리고 절대적으로(sovereignly) 죄인의 영혼을 변화시키신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께 나올 힘을 가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단독적 중생(Monergistic Regeneration)이라는 용어는 중생(= 거듭남)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사역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진다. 인간이 거듭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65에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누구든지(No man)’는 논리학적으로 ‘전칭 부정 명제 universal negative proposition’라는 것인데, 모든 사람에 대해 부정하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없다(can)’는 능력이나 힘을 이야기한다. 그 누구도 이런 능력이나 힘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게 올(come to me)’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하시면(unless)’는 필수조건을 보여준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It is granted to him by My Father)’가 바로 필수조건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인간은 여전히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선택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문제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원함의 노예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관한 것에 대한 원함이 없다. 그런 원함을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거절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원함 자체를 바꿔주시기 전에 우리는 결코 그분을 선택할 수 없다.
Thoughts 깊이 생각하기
대학 시절 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도 잃을 뻔했죠.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절대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인간의 손을 들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많은 고뇌 끝에 신앙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매꿀 수 없어 보이는 자유의지와 절대주권의 간극을 매꾸기 위해 지극히 인간중심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은 존 파이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설교와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를 새롭게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유가 인간 본질의 가장 밑바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 밑에 한 레벨이 더 있다고 알려준 것이죠. 그 이름은 ‘경향성 dispostion’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는 이유는 인간에게 모든 조건과 환경과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율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그러니 사실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문제는 인간론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내가 원하니까 고른거죠.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결코 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의지는 철저히 속박되었고 죄의 노예인 것이며 도덕적으로 무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는 사실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라기보다 인정하기 쉽지 않은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의지 논쟁에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함으로 논점을 피해간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저 자신의 경험들을 돌이켜 봄으로서, 무엇보다 성경을 보면서 이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갸우뚱했지만 한 번 이해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건 쉬웠습니다.
무엇보다 이 교리를 받아들이기 쉽도록 예비 작업들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 존 파이퍼의 ‘하나님을 기뻐하라’ ‘하나님이 복음이다’ 등 저서들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며, 당신의 영광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진행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믿게 된 것이 그 계기였죠.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통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려면? 인간의 역할은 최소화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역할이 극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일말의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을 조금이라도 사용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만큼 영광을 덜 받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완전한 무능함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모든 과정을 홀로 행하신다면,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만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십니다. 브루스 웨어의 책 제목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설명을 하는 것은 ‘더 큰 하나님의 영광(부흥과 개혁사)’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 갈취하여 스스로 높아지는 것보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저는 無가 되는 교리를 옹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의 행복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가져가시는 것은 저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는 만큼 제 행복은 줄어들 것입니다. 제게 있어 의지의 속박을 인정하게 해주는 가장 근원에 놓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제 의지와 지성이 완전히 타락하여 전혀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원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은 제가 가진 경험으로서도, 신학적 체계로서도, 무엇보다 성경적으로도 일관성을 지녔다고 믿습니다.
제 9강 무조건적 선택
Summary 요약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분은 어떻게 선택하시는가? 어떤 이유로 선택하시는가? 조건 선택은 하나님께서 미래를 미리 아심을 통해서 선택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는 누가 믿음을 가질 지 아시고 그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절대주권적 결정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이를 선택하셔서 구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9:10~13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약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에게 상속권이 넘어가는 전통을 뒤집으시고 동생에게 상속권을 주신다. 바울은 이것이 분명 야곱이나 에서의 행동의 선함이나 악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는(R.C.Sproul) 신학생 시절 비록 인간은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을 믿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는 믿기 힘들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이 너무나 공평해보이지 않았다. 에드워즈나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읽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가르쳐야 한다는 강한 확신에 의해 가르칠 뿐이었다.
우리는 바울이 13절까지 자신의 논지를 밝힌 뒤에 14절에서 반론을 예상하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이 교리를 싫어하고, 이 교리를 들은 뒤에 ‘불공평해요!’라고 말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우리에게 ‘그렇다고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한다. 언제, 누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실 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 권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무리에게 은혜를 주기로 결정하시고, 다른 무리에게는 주지 않기로 결정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그룹은 공의를 받고, 다른 한 그룹은 은혜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불의를 얻는 사람은 없다. ‘불공평’은 없다.
9:16~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구원은 의지를 기초로 한다. 물론 그리고 그 의지는 자유의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기초한다. 만약 나의 의지 위에 은혜가 서 있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를 구원하게 한 나의 의로운 행위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어쩌면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다 결정하셨다는거잖아!? 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결정’이라는 단어에 너무 목숨을 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우리가 ‘결정’이라는 단어에 예민한 이유는 ‘자유’라는 말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범당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예민합니다. (또는 계몽주의 이후 더 예민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이 세운 지성적 기준에 따라 의지를 행사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유라는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유는 결코 침해당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해서 개인을 개인이게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많은 ‘권리’들이 난무하게 된 것도 결국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의 자유는 이제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망가뜨릴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신봉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펴도, 어느 누구와 잠자리를 함께 해도, 마약을 해도, 술독에 빠져 지내도, 이 말로 다 용서가 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그냥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라면서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는 멋진 어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참으로 합리적이며 동시에 짜릿한 자유에 대한 신봉은 사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또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오대강령 TULIP의 시작이 T(전적타락)입니다. 논리적으로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믿지 않는다면 무조건적 선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다음은 위에 언급한 제 사고방식의 문제점들입니다.
1.전 제게 자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자유란 없었습니다. 제게 선을 행할 자유는 없었습니다. 전 죄인이었기에 죄를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전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 책임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책임질 수는 있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죄인이라면, 죄의 삯은 사망이니(롬6:23), 내 상태를 책임지는 궁극적 방법이 죽음밖에 없는데.. 책임을 진들 나의 존재가 사라지니 책임을 지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3.전 자유가 가장 큰 가치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자유라고 믿었던 그 자유를 주장함으로 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내가 가장 높은 가치를 둔 것이 자유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 가장 높은 가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싫었다는 뜻입니다.
4.저는 제가 자유로우면 제가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일단 저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고,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실 가장 큰 충돌은 여기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자유를 피를 흘리며까지 지켜내려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분 사실입니다. (오늘 마침 5.18이네요. 이 자리를 빌어 자유를 위해 피흘린 선배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런데 자유 자체가 우리의 행복을 담보해주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정’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느끼기 전에, 다시 말해 U로 넘어오기 전에 T에 충분히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폭력으로 느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자유를 축소시켜서라도 우리의 자유를 자유롭게 하길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까지도 완전히 타락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죄의 삯으로 사망을 마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그냥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드러나며 그분의 죄를 미워하시는 공의가 돋보이게 됩니다. 내가 건짐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해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공의로 죽음에 처하게 내버려두었어야 했을 저를 은혜로 건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복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죽어 있었고, 우리는 불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떠함에 전혀 상관없이 죽었어야 할 나를 살리시기로 결정하시고 정말로 살려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회귀합니다.
주여, 홀로 영광받으소서.
제 10강 제한적 속죄
Summary 요약
제한적 속죄는 칼빈의 오대강령 중 가장 논쟁이 치열한 부분이기도 하다. 제한적 속죄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미치는 효과나 가치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충분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속죄의 모든 효과가 완전하고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이들에게 충분하지만, 일부에게만 유효하다. 즉, 믿는 이들에게만 구원은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바로 보편구원론과 차이를 가지는 부분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는 사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의 원래 목적, 계획, 디자인에 대한 문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계획하셨는가?
OR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 계획 속에서 속죄하여 구원하는 방식으로 계획하셨는가?
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R.C.Sprould은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용어보다 절대적 구속definite 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 사역을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한 관점에서만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에 대해서는 많은 반대가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사망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에서 굉장히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벧후3:8절 이하에 등장하는 내용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만 다루어보기로 한다.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부분을 보면 우리가 제한적 속죄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른 내용을 베드로가 가르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현을 영어로는 모두 will로만 번역한 데서 오는 문제다.
이 구절에서는 ‘원하시느니라 willing’과 ‘아무도 any’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영어로 will이라고 번역된 말씀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
주권적 하나님의 뜻 The decretive will of God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달성하신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베드로가 여기서 이런 의미로 ‘원하시느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 구절은 정확히 보편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교훈적 하나님의 뜻 The Preceptive will of God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들을 뜻한다. 십계명과 같은 것들이 여기 속한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원하시느니라’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라면 해석이 매우 어색해진다.
의향으로서의 하나님의 뜻 God’s will of Disposition
–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사용된 ‘원하시느니라’는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말씀에서 만약 ‘아무나’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면, ‘원하시느니라’는 의향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으로밖에는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맥락에서 ‘아무나’는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영어에서 any라는 단어는 단독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으며, 사용될 때는 생략된 어떤 그룹이 있어서 ‘어느어느 그룹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9절을 살펴보면,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문법적으로 이 문장에서 ‘아무도’는 ‘너희’와 상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말한 ‘아무도’는 ‘너희 모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이 ‘너희’는 여기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이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TULIP의 다섯 송이 꽃잎 중 우리 마음이 본성적으로 가장 거부하는 꽃잎이 아마 이 L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TULIP은 아름다워야 할 것 같은데, L만은 그다지 아름다워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백성들만을 구원하신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운명론적인 것 같고,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R.C.Sproul은 짧은 강의를 통해 존 오웬의 논의를 빌려와 제한속죄 교리를 방어합니다. 그래서 논의가 구원론이 아닌 신론으로 넘어가버리는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실제 그렇습니다. 3번에서 설명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또는 의지)에 대한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세 가지 다른 의미와 더 깊은 논의는 R.C.Sproul의 무료 ebook인 Can I Know God’s Will?에 잘 나와있습니다. 로고스는 여기서, Kindle용은 여기서 받을 수 있습니다. 책은 $4 네요.) 이렇게 세 가지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나서 보편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요 근거 구절인 베드로후서 3:8-9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향을 의미하는 것이지 주권적으로 세계를 다스리시며 결코 변하지 않는 그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론 논의를 신론에서 해결한 것 같지만, 구원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논증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뿐만 아니라 신학함에 있어서 모든 논증이 탄탄한 신론 위에서 전개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짧은 강의 시간 탓인지 R.C.Sproul은 여기서 베드로후서 3:8-9를 통한 입증만을 시도할 뿐 논의를 더 밀고나가지는 않습니다. 아쉽죠.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매우 길게 제한속죄 교리를 논증해나가는 것은 이 포스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교리를 조금 더 심도있게 소개하는 것은 다음 기회에 다른 포스팅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말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저도 TULIP 중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다른 네 가지 요소와 왜 필연적 연관성을 지닌 것인지 이해를 못한 부분이 바로 이 제한속죄 교리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요소와의 필연적 연관성을 이해하게 되고, 이 요소 역시 다른 네 가지 요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하는데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오히려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제한속죄에 대해 다루게 될 포스팅에서 이런 제 생각의 변화가 잘 반영될 수 있기를 바래야겠네요.
제 11강 저항할 수 없는 은혜
Summary 요약
앞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들을 더 알맞는 단어로 계속 바꾸어 왔는데 여기서도 그래야겠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아닌가? 따라서 ‘효과적 은혜 effectual grace’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의 저항을 이길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가 의도하신 그 효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에 대한 논점은 사실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 개혁주의 신학과 다른 신학을 역사적으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바로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면 거듭남은 믿음에 앞선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필연적 우선순위가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다. A가 B에 시간적으로 앞선다면, A는 B가 등장하면서 그 효과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믿음과 거듭남의 선후관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믿음과 거듭남은 동시에 일어난다. 시간적 차이는 없다. 그러니 거듭남이 믿음에 앞선다는 것은 믿음이 중생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중생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더 보편적인 관점은 믿음이 거듭남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 ‘만약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믿는다는 거다. 이는 세미펠라기우스적 관점인데,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기신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본성적 능력이 남아있다고 보는 것이다. 타락을 인해 본성이 약해졌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문제의 해결책은 부패의 정도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3:3에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엡2:1 이하에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영적 부활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을 발로 차고 윽박지르고 소리질러서, 그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거슬러서 당신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대로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의 경향성을 바꾸셔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원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온다. 하나님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하셔야만 하나님을 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영혼에서 일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일방적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만 일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의 경향을 바꾸실 수 있는 힘을 지닌 유일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이제 칼빈의 오대강령 TULIP도 거의 끝나가네요. 다음 포스팅이면 모두 종료됩니다. TULIP은 사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말 그대로)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동시에 인간의 죄악됨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인정한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신학적, 그리고 성경적 전제를 인정한다면 여러 꽃잎이 한데 뭉쳐 아름답게 한 송이의 튤립을 이루는 것처럼 TULIP이라는 다섯 꽃잎은 꽤나 단단한 체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교리였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 안에서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절망 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나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일으키신다는 교리는 저에게 생소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저의 책임을 무시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저의 의지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폭력적인 교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항상 역설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해야하는데, 동시에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결코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거룩한 삶을 이미 이룬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수 엘리트로만 보였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특별합니다.)
그러다 이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목사님들의 책과 설교를 통해서 완전히 설복당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영혼의 구원과 같은 중대한 일이 나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평안하게 됩니다. 저는 구원이 저처럼 불완전한 인간에게 맡겨진다면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게 된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100% 일하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감사해집니다. 나에게 0.0001%라도 구원의 책임이 주어진다면, 그러니까 0.0001%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할 수 있다면… 전 불안에 떨며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여기는 어느 날 밤 날 죽여달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구원의 확신을 가졌지만 내일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 12강 성도의 견인
Summary 요약
성도의 견인은 성도가 스스로 끝까지 무언가 견뎌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물론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인내하고 견딘다. 하지만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견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견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인Perseverance라는 단어보다는 보호하심Preservation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견인은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은 아버지로 부터 택함 받고, 그리스도로 속죄함을 받았으며, 성령으로 거듭남을 받은 이가 영원히 구원받으며, 단 한 명도 중도에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그가 완성하신다. 빌립보서1:6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만약 구원받았다면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잃었다면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요일2:19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즉, 외적으로 함께 할 수는 있으나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 보이지 않는 교회에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가룟유다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마7:23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른 이를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요17:12에서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은 한 명도 멸망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심을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죄에 빠진다. 심지어 심각한 죄에 빠진다. 나는(R.C.스프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제외하고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고 본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 이는 우리가 은혜에서 심각하게 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우리의 구주인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배신자였다.
이런 성도의 현실적 상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들이 심각하게 죄에 빠졌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의 교훈과 훈련은 반드시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데리고 가신다. 성령은 구원을 시작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보호하신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계약금 같은 분이다. 가계약금을 지불하고 나면 계약금은 반드시 지불될 것을 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통해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반드시 영화의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에 인을 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다.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매일매일 하나님께 중보하신다. 나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라고 하셨지만, 베드로에게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하셨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이제 TULIP의 마지막, 성도의 견인입니다. 저는 성도의 견인을 말할 때 주로 롬8:38,39절을 인용하길 좋아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힘있는 사도 바울의 선포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요. 아마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에 은혜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인간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최종 구원에 대해 미치는 영향있다면, 과연 이렇게 힘있게 이 말씀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조건과 단서들을 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정도 선행을 한다면’이라던지, ‘만약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과 같은 조건들 말입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타락하였던 우리를 택하심으로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매듭도 지으심으로, 당신의 선택이 틀림이 없으며 당신의 뜻은 결코 좌절되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새로운 근거를 찾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굳건히 믿는가가 내 구원의 확신의 근거일 때가 많았지만, 성도의 견인 교리를 통해 구원의 확신의 가장 확고한 디딤돌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또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의 계획에 있으며 구원의 적용이 성령 하나님을 인해 이루어진 것이고 구원의 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치루어졌기에, 다시 말해 제가 얻은 이 구원이 참으로 일방적인 것이기에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날 구원하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이는 없으며 더 위대한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현재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을 좌우합니다. 내 구원이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면 항상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으며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생활에 확고한 기쁨은 확고한 구원의 확신에 있으며, 확고한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데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내 구원의 모든 근원이 시작부터 완성까지 하나님 그분 안에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고 기쁩니다.
R.C.스프롤 목사님의 ‘개혁주의 신학이란?’ 강의 요약이 드디어 끝났네요. 이 강의를 요약하는 긴 기간 동안 저에게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진짜배기도 악명인지 유명인지 몰라도 하여간 많이 알려지게 된 것 같고요(웃음). 항상 부족한 것 같아 강의 요약으로 분량을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리즈도 다 우려먹었으니 다른 다시물을 우려내든지 뭔가 창작해내든지 해야겠네요. 좀 더 알찬 글을 계속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