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한 장례식 기행 –
22기
최정식
월요일 아침 일찍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화면에 장인 어른이라고 뜬다. ‘이른 아침에 왜 장인 어른께서 내게
전화를 다 하실까?’ 전화를 받으니 인사 후 바로 “집 사람
바꾸라” 하신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전화 받는 아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니나다를까 아내 할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마음에 준비를 하라 한다. 서울에서 두 삼촌들이 내려와 최종 수술 할지 말지를 가족 회의를
거쳐 결정하신다 한다.
지금 당장 내려 가야 하나? '오늘
글쓰기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인데… 애들도 도서관 그림 그리기 수업 있는데… 집사람은 손년데, 호들갑
떨 필요 없겠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아내 오빠도 임종이 오래 걸릴 수 있으니 급하게 내려올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 표정을 보니 안절부절이다. 아내는 아무일 없는 듯 노력하지만 일이 손에 잘 안 잡히는 게 보인다. '돌아가시면 끝일 텐데, 이렇게 그냥 있을 필요 있겠나. 일단 내려 가는 게 맞다'. 나는 그렇게 마음 먹고 있었다. 그때
전화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KTX를 타고 급하게 대구로
내려가고 계신 아내의 삼촌께서 “최서방 일단 내려와야 할 것 같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자 마자 곧장 싸 논 짐을 차에 싣고 대구로 향했다.
정말 어떻게 대구에 도착했나 모르겠다.
얼마나 밟았는지 남양주에서 대구까지 3시간 밖에 안 걸렸다. 엔진오일 좋은 걸로 바꿔서 차가 잘 나간다고 하면서 쉬지 않고 달렸다. 경북대
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하니 장인 어른이 계셨고, 벌써 서울에서 두 분의 작은 삼촌 내외 분들이 내려와
계셨다. 그리고 옆에는 아내 오빠와 형수님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친정 모든 식구들이 결혼식 이래 처음으로 다 모인 것이다. 죽음을 앞둔 시점이라 그때와
사뭇 다른 표정이었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면회시간이 되자 가족들은 차례대로 병실에 누워계신 할머니를 뵈었다. 요한이는 나이가 어려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아내와 함께 할머니를
뵈었다. 아내는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것 말고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신 할머니 손을 쓰다듬으며
“할머니,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짧게
말을 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숙이며 크게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냈다. 나는 아내를
안아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하나님,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슬픈 순간이지만, 할머니에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뵐 너무나 흥분되고 기쁜 순간인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할머니께 "빨리 가시면 더 좋으시겠지만, 저희를
위해서 잠시 그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을 미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밖에 나갔다. 5살 난 첫째
아들은 “아빠, 누가 아파요? 왜 아파요? 무슨 일이에요” 나는 첫째 아들에게 외증조 할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은 자기에게 잘해주신 외증조 할머니께서 곧 돌아가신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나는 아들에게 “아빠도, 엄마도, 우리 가족
중에도 다음에 죽는 날이 온단다.”라고 말하며 아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면회를 마치고 가족 회의를 마친 후 늦게 장인어른 댁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장모님이 돌아가셨기에 장모의 역할을 해야 했다. 장인 어른
먹을 것을 챙겨드리고, 아이들 잘 준비를 한 후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내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수화기 소리에 아내 삼촌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생생한지 지금도 귀에 아른거린다. 모두 다 아침도 안 먹고 급하게 옷을 차려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마자 아내는 장례식 일을 돕기 위해 병원에 남았고, 나는
두 아들을 보기 위해 경산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방향을 옮겼다.
곧 아내 할머니 장례식이 삼일 동안 열렸다. 아내는 손녀임에도 상주이신 장인어른의 아내, 즉 친정 어머니의 역할과
손녀 역할을 하며 문상객들을 만났다. 찾아오신 친척, 친지들에게는
상주 아내의 역할, 여러 잡일에 있어서는 손녀의 역할을 하면서 바쁘게 장례식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경산에 도착한 아이들은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열이 나고 아팠다.
병원에 가니 둘째가 중이염이라 한다. 그래서 장례식 첫 날은 함께 하지 못하고 둘째 날에
합류해야만 했다.
둘째 날, 장례식장을 찾았다. 결혼식을 빼고 이렇게 많은 친정 식구들을 만난 적이 없다. 슬픈
장례식이었지만,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즐거운 날이었다. 어떻게
장례식이라는 슬픔의 자리, 온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기쁨의 날이 될 수 있는가! 장례식은 이렇게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는 모순되는 자리였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장은 많은 문상객들로 붐볐다. 내가 할 일은 크게 없었지만 문상 오신 친지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음식을 나르거나 잡일을 하면서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가족 친지들과 앉아서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마지막 삼일 째날 매장을 위해 교회 묘지로 갔다. 삼일 동안 눈물 흘릴 틈도 없었지만, 막상 아내 할머니가 고운 옷을
차려 입고 무덤 아래에 뉘인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손으로 직접 흙을 퍼서 그 위에 부을 때는 모두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 중에서도 아이를 등에 메고 슬피 우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다 쏟아지듯 보였다. 당장 달려가 아내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친정 식구들이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내를 위로하고 있어서 그냥 두었다. 아내의 어머니는 8년 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렇게 또 다시 자신을 키워주신 할머니께서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잘 받아들였다. 예전에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위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받은 충격이 컸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야 할지를
이미 소화한 상태라서 그런지 할머니의 죽음을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예배를 끝으로 삼일 동안의 장례 예식이 다 끝이 났다. 분주한 장례식 일이 끝나고 이제 진짜로 가족을 잃은 슬픔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아내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슴 속으로 묻어 두어야만 한다. 그
기억을 가슴에 묻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요하고,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거친 통로를 거쳐야 할 것이다. 모두가 돌아갔다. 장인 어른과 두 삼촌께 인사를 드리니 우리만 매장지에 남았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아내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을 가슴에 묻고서 덤덤히 남양주 집으로
돌아왔다.
첫댓글 아내는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것 말고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신 할머니 손을 쓰다듬으며“할머니,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짧게말을 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숙이며 크게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냈다. 나는 아내를안아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하나님,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는 너무나슬픈 순간이지만, 할머니에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뵐 너무나 흥분되고 기쁜 순간인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
- 차분함과 안타까움이 함께 한 장례식 기행 잘 읽고 감동받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머문 곳에서 이토록 섬세하게 풍경을 담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식형님의 글에서 따스함을 느낍니다.
몇주가 지나고 아내분은 어떠신지 생각합니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아내분은 저보다 훨씬 성숙한 자세로 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꼭 한번 뵙고 싶네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