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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유해발굴(초기 동부지역 작전(야양-강릉, 정동진.임원진)2-1 수정중
제 6 장 동부지역 작전
제 1 절 개 요
동부지역 작전은 국군 제8사단이 기사문리(주문진 북서쪽 12km), 내현리, 공수전리, 귀둔리, 하추리 , 원대리 방향에서 내륙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제38경비 제1여단과 제5사단 제10연대, 그리고 동해안을로 상륙한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의 침공에 맞서 25일부터 4일간 강릉지역을 사수하는 방어작전이다.
개잔 당시 동부지역 작전을 담당한 국군 부대는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이었다. 강릉에 사령부를 두고 2개 연대 밖에 갖추지 못한 제8사단은 제10연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삼척에 예비로 제21연대를 집결보유하고 있었다.
국군 쩨8사단의 책임구역은 제6사단과 협조점인 진흙동(양양 서남쪽 15km)에서 동해안의 잔교리에 이르는 26km였다. 사단의 방어계획은 유사시 예비인 제21연대를 좌일선에 투입하여 2개 연대로 방어작전을 수행하여 강릉을 고소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은 38도선 남쪽의 고지군에 경계진지를 편성하고 광원리와 연곡천을 연하는 선에 주저항진지를 구축하였으며, 그 남쪽 운두령과 사천선을 예비진지로 선정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6월 중순에 침투한 북한군 비정규전부대 토벌작전에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식 차출하여 오대산과 계방산에 투입했기 때문에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할 당시는 4개 대대만이 가용했고, 특히 제10연대의 경우는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된 연대의 좌일선 제1대대가 연대 예비인 제3대대와 교대 중에 있었다.
한편 국군 제8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를 제1경비여단에 배속시켜 동해가도로 주력을 투입해 구군 제10연대를 정면공격 하고,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시켜 국군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남진하는 육사부대와 합류하여 강릉 북쪽의 연곡천 지역에서 국군 제10연대를 협공하려 하였다.
양양 적 5사-11/12연대
동부지역 작전 상황도
공수전리 적5-10연대
적경4대대 적경1/5대대
하답 상답 적경2대대 내현리 적경3대대 적경7대대
------38선-----------------------------------------------------------------------------------------------------------------------------------------------------
서림리 북분리
우탄리 9-6
3=1 1=2
현리 어성전리 화상천
2연=10연 10-2대대
광원리 10-1대대 연곡천
공병대대 10-3대대 10-2대대
6사=8사 사천
계방산 21-6중대
매봉 21-7중대 강릉
10연대/3대대
제21-2/4/6/10중대
하진부리 군선강
21-2대대
적945
정동진
적766
임원진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제8-10연대는 화상천에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너 주저항선인 연곡천으로 철수헤 된다. 제8사단은 제21연대를 광활한 지역에 분산배치하였다가 동해안에 상륙한 부대를 색출격멸하고 적으로부너 남북협공의 위협에 직면하자, 일부를 안인리-언별리를 연하는 선에 투입하여 북한군 상륙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한편 연곡천과 사천의 제8사단 주력은 포병과 공병이 전투를 치룰 수 밖ㅇ에 없는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면서 27일까지 강릉을 사수해 북한군의 초기전투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제8사단은 작전지역내 공공기관과 군인가족을 포함한 주민을 피난 소개 및 소개시키는 등 장기전을 대비한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27일 대관령으로 철수한 제8사단은 재편성을 마치고 다음날 강릉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여 강릉부근까지 진출하던 중에 타부대와의 전선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철수명령에 따라 반격을 중단하고 대관령-대화-제천으로 이동하게 된다.
비록 강릉사수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북한군의 동해가도를 통한 부산공격 기도를 좌절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 2절 북한군과 군군 상황
1. 북한군 상황
국군 제8사단이 담당한 동해안에는 북한군 제1경비여단고ㅑㅏ 제5사단 예하 제10연대, 그리고 제766부대와 해군의 제945육전대였다. 제1경비여단은 7개 보병대대와 대전차포중대 등이, 제5사단은 3개 보병ㅇ연대와 포병연대 예하의 3개 포병 대대, 대전차대대, 중기관총대대,기동정찰중대 등이 편제되었다.
제766부대는 유격부대로서 3개 보병대대, 포병대대, 강.표대대로 편성되고 , 이중에 2개 대대가 상륙부대로 나머지는 내륙침투에 운용될 수 있도록 편성되었다.
해군의 제945육전대는 3개의 상륙 경보병대대와 1개 통신중대 1개 후방근무대로 편성되었다.
동부지역 북한군 주요지휘관은 제2군단장에 소련군 중위출신 소장 김광협, 제1경비여단장에는 제88여단 출신 오백룡 소장이, 제5사단은 주로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편성되며 사단장에는 김창덕 소장이었다. 제766부대장은 총좌 오진우로 그는 제88여단 출신이었다.
북한군 제1경비여단은 1일차 목표가 퇴곡리, 동덕리를 점령, 강릉북쪽에서 육전대와 합류하는 것이고, 제5사단은 제2군단의 제2제대로서 제12사단을 따라 진격하여 홍천지역에서부터 횡성, 원주 방면으로 전과확대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1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 및 자주포 포대는 동해 연안지역의 공격을 담당하게 되는 제1경비여단을 보강하기 위해 제10연대가 투입되었다.
제945육전대는 원산에서 기차로 이동해 양양에 23일 도착했으며 766부대는 6월 12일 회령을 출발, 23일 양양에 도착했다. 제945육전대는 강릉 남족 10km지점에 상륙하여 국군의 증원병력이 남쪽으로부터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고, 제1경비여단 부대들과 합류하여 강릉 북족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임무가 붕여 되었다.
제766부대는 3월 말경 함경북도 유선에서 부대훈련을 실시한 후 5월 13일 원산 호도반도로 이동하여 상륙전 훈련을 1개월간 실시하였다. 주로 남로당원 및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 구성되어 2개 대대가 삼척부근에 상륙하여 무장폭동을 유발하고, 철도와 수송시설을 파괴, 국군의 퇴로 및 증원부대를 차단 하는 것이 임무였다.
2. 국군 상황
국군 제8사단은 1949년 6월 20일, 제6사단 예하 제10연대(48.5.1 강릉에서 창설)와 제5사단 예하 제21연대(49.2.1 광주에서 창설)를 기간으로 강릉에서 창설된다. 38도선 경계를 제10연대가 담당하고 제21연대가 오대산 남족의 광활한 지역에 침투한 게릴라 소탕 및 침투로를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고근홍 중령이 지휘하는 제10연대는전쟁 발발 이틀 전 예비인 제3대대와 제1대대간 38도선 경계임무를 교대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 발발로 진지교대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용배 중령이 지휘하는 제21연대는 8개월간 오대산 및 태백산 지구 일대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전개하다 50년 5월에 작전을 일단락 지었다. 그런데 북한군의 기관총 게릴라부대가 다시 남파되자, 제21연대는 50년 6월 13일 제2대대를 진부리로 출동시켜 게릴라를 소탕하도록 하고 제3대대의 1개 중대를 배속하였다. 이에따라 제21연대는 제1대대만이 건제를 유지한 채 북평에 위치하였으며 제2대대와 제3대대는 병력이 분산된 채 일부병력만 삼척에 위치하였다.
제8사단은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적을 38선상의저지진지에서 저지하다, 진지가 돒파되면 작전의 중점을 동해안에 두고 인구리-어성전리에서 적에게 타격을 주고 다음 연곡천 변으로 적을 유도하여 격멸함ㅇ르ㅗ서 어떠한 경우라도 강릉을 확보, 공세이전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단포병인 제18포병대대는 장병 대부분이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교육수준과 반공의식이 높은 대대로서 105mm 포 15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다만 새로 도입된 GFT사법 교육을 위해 포대장 및 선임하사관급이 대부분 포병학교에 파견중이었고, 대대장도 육본에 출장 중이라 부대지휘는 대대부관과 전포대장들이 담당하고 있엇다.
특히 이지역은 전쟁 발발 15일전부터 야간에 남하하는 차량이 목격되고, 일주일 전에 귀순한 북한병사가 남침준비를 알리기도 했다. 이에 사단은 상급부대의 외박 외출 실시 지시에도 전 부대에 경계태세를 계속 유지하도록 조치 하였다.
제 3 절 양양- 강릉 전투
1. 전투 개요
양양-강릉 전투는 북한 제1경비여단의 공격에 맞서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가 주축이 되어 6월 27일 대관령으로 철수하기가지 강릉을 사수하기 위해 치룬 방어전이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을 받게 된 제10연대는 사전에 마련된 저누배치도 해보지 못한 채 대대와 중대간의 통신두절 상태에서 분산철수하게 된다. 특히 적의 주공이 지향된 제2대대 지역은 제10연대장이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대대 주저항선인 화상천에서 적을 저지하고자 적에게 밀리어 사단 주저항선인 연곡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연곡천으로 물러난 제2대대는 사단 공병대대와 포병의 지원아래 결전태세를 갖추었다. 이후 제1중대와 제4중대, 제21연대 혼성 제1대대가 이곳에 합류하여 연곡천 방어에 임하게 된다. 여기서 적의 도하작전을 무리친 후 대대는 연곡천건너 천마보을 기습하여 탈취하였다.
27일 04:00시에 적이 천마봉을 공격하여 제2대대는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적의 압박으로 측방이 위협받게 되자 공병 1개 중대를 빼내 측방으로 이동시킨 것이 철수명령으로 오인되어 주저항선이 조기에 붕괴되느ㅏㄴ 결과를 가져오나. 이에 따라 연대는 거의 분산된 채 14:00시에 대관령으로 철수하게 된다.
2.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가. 북한 제1경비여단의 기습공격
북한군은 전투대형을 2개 제대로 편성하여, 주문진-강릉 축선에 주공을 지향하였다. 제1제대는 경비여단 소속 7개 보병대대를 편성하고, 제2제대는 제5-10연대로 편성하였다.
제1제대는 경계진지 상에서 아군의 최초진지를 돌파하고, 제2제대인 제5-10연대가 동해안을 다라 진격하여 전과를 확대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양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제1경비여단은 주공이 주문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조공은 서림리와 장리의 계곡 접근로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 하였다.
나. 잔교리-연화동 지역의 경계진지 전투
연대 우일선으로 경계임무중인 제2대대는 주문진에 대대본부를 두고 제7중대가 우일선으로 북분리에, 제5중대가 중앙지역인 명지리에, 제6중대가 좌일선으로 장리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제3대대가 좌일선 담당으로 제10중대가 배속이 해제됨에 따라 24일에는 제7중대가 우일선을 인수하고 제10중대는 주문진의 대대본부에 집결하였다.
한편 제10연대의 예비인 제3대대는 강릉비행장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제10중대가 제2대대에 제9, 제11중대가 제1대대에 배속 중이어서 실제로 대대는 제12중대만이 있었다. 더욱이 제3대대는 26일부로 제1대대의 진지를 인수받도록 되어 이동 준비 중에 있었다.
제2대대가 담당한 잔교리-연화동 지역은 24일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시계가 매우 불량하였다. 적의 기습공격에 전방 중대들은 혼전의 회오리 속으로 말려 들었다. 당시 제2대대장은 연대계획으로 광원리로 이동하는 제10중대를 출발시키기 위해 훈시 중에 있었다. 대대는 제10중대에 제8중대 기관총소대를 배속시켜 화상천 남안의 인구리로 출동시켰다. 제10중대가 인구리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시간이 06:00시경인데 전방 중대와의 통신이 불량하게 되어, 제10중대에 286고지(북분리 남족 2.5km)를 확보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하고 반격거점으로 삼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미 적의 직사포화가 집중되어 더이상 진출이 불가하였고 이대 연대로부터 축차 철수하여 주문진을 고수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 무렵에 제10중대와 교대하여 대대에 배속키로 되어 있는 제2중대가 주문진을 거쳐 하월천리에 진출하였다. 이 당시에 제5중대는 통신두절로 독단으로 철갑령을 넘어 후퇴하고 나머지 중대들은 연곡천 전방 화상천의 예비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다. 정족산-진흑동 지역의 경게진지 전투
연대 좌일선으로 38선 경계임무를 담당한 제1대대는 광원리에 대대본부를 두고 제3대대로부터 배속된 제9중대와 제11중대를 각각 서림리와 우탄리 지역의 경계임무에, 그리고 예하 3개 중대를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하고 있었다.
당시 제1대대는 6월 23일부터 26일가지 제3대대와 작전임무를 교대하도록 명열을 받고 있었다. 이에 24일 제4중대가 강릉으로 이동하였으며, 재2중대가 두로봉-복룡산-철갑령을 수색하면서 주문진으로 이동, 25일 제2대대에 배속된 제10중대와 교대할 예정이었다.
정족산에서 진흑동까지 12km에 이르는 정면을 담당한 제1대대는 북한군 제1경비여단 제2보병대대가 서림리의 제9중대 정면을 돌파해 산간계곡을 따라 구룡령으로 급진하였다. 제9중대는 일진일퇴의 혈전을 전개하며서 철수를 하게 된다.
한편 제11중대는 본부를 우탄리에 두고 경게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정면으로로는 포탄이 한발도 낙하하지 않고 공격도 없어 개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는 대대본부와의 통신두절 때문이었다. 중대는 대대와는 통신이 두절되고 제9중대와는 SCR-694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 받았으나 제9중대가 연락을 미처 안하고 철수하여 제11중대는 그대로 최초진지에 남아 있었다.
라. 주요 조치
당시 사단 작전참모 정진 소령을 비롯한 주요 참모들은 6월 20일부터 계속된 육군본부의 교육검열을 마치고 전날 밤 육본 작전국차장 박임항 중령을 반장으로한 검열반을위하여 주연으 베풀고 강릉여관에 투숙하고 있다가 급하게 전화를 받고 05:30분에 사령부에 출두하였다.
육본과의 상황두절에 사단장은 제10연대로 현 전선에서 적을 적극 저지하고, 제21연대를 강릉으로 집결시킬 것과 사단 방어는 연곡천-사천 선에서 적을 격멸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강릉을 고수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육본과의 연락을 통해 전 전선에서 북한군의 도발을 확인하고 즉시, 지구전에 대비하여 모든 군수품을 대관령 너머 진부리로 이동시키고, 사단전투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경가족(군인가적에게 6개월 분의 봉급과 식량 지급)을 후방으로 철수시키도록 했다. 나아가 민사부를 설치하여 행정을관장하고 모든 금융기관을 철수 시키고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토록 하였다.
3. 연곡천과 광원리의 주저항선 전투
연곡천 전투
주문진 제10-2대대지휘소
적 5-10연 적 경보병7대대
121 천마봉 제10-2대대 영진리
방내리 연곡천
동덕리
행정리
대관령 연곡천 제10-3대대 제10-2대대
공병대대 사천리
제21-1대대 판교리
석교리 미노리
제18포병대대
제21-3대대 사천 제21-3대대 산대원리
사단/제10연 전술지휘소
운계봉 공병대대
사기막
가. 연곡천-사천선 진지 점령
(1) 제2대대의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 점령
계엄령 선포, 군인가족과 필요한 인원 소개, 물자 소산 조치 등을 마친 제8사단은 11:00ㅅ6ㅣ에 지휘소를 사천초등학교로 추진시켰다. 15:30분경 적의 SU-76자주포 3대가 동해가도를 따라 응호 부근에 출현하였다. 로켓포 공격에도 끄덕않던 자주포가 파괴된 교량 앞에선 진출하지 못하고 정지했다.
적은 다시 18:00시에 다시 포격을 시작으로 진출하여 고근홍 연대장은 연곡천의 사단 주저항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제2대대가 연곡천을 도하할 당시에 이미 주저항선에는 제3대대의 12중대와 사단 공병대대를 주축으로 한 사단 예비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제18포병대대의 제1포대가 석교리에, 제2포대가 미노리 사천초교에 각각 포진하고 있었다.
(2) 제18포병대대와 사단 공병대대의 주저항선 추진
개전 당일에 포병대대장 장경석 소령은 서울 육군본부에 출장 중이었고, 각 포대장과 참모장교, 그리고 하사관 10여 명이 포병굥에 파견 중이었다. 대대는 08:00시에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111:00시에 사천초등학교로 추진되엇다. 20:40분에 제2대대가 연곡천의 주저항선으로 철수를 개시하자 이들을 엄호하였으며 자정무렵부터는 주문진으로 포격을 집중하여 적의 공격을 견제하였다.
한편 사단 공병대대는 통신중대, 병기중대 병력을 포함하여 3개 중대를 편성하여 10:00시에 연곡천 주저항선에 도착하였다.
나. 제1대대의 광원리 주저항선 진지 점령
제1대대에 적의 침공사실이 보고된 것은 08:00시경이였다. 정족산-서림리 정면을 담당하고 있던 제9중대장은 무전기로 대대에 상황보고를 했으며 대대장은 통상적인 적의 게릴라 침투로 생각을 하고 9중대와 11중대에 군수품 추진보급을 위해 직접 진두지휘하여 광원리를 출발 10:00시경 구룡령을 넘어 갈천리에 이르렀을 때에 피난민으로부터 적의 남침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에 대대장은 오대산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하던 제3중대를 광원리 주저항선으로 점령토록 하고 수습되는 제9중대 병력이 계방산 남안 석대동의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다. 연곡천의 주저항선 전투
동해연안을 따라 공격하는 북한군 제1경비여단 주력은 18:00시경에 광진리-향동지역을 점령하지만 아군의 조직적인 공격을 받아 25일 밤 늦게가지 그들의 1일 목표인 동덕리선까지 진출은 실패했다.
26일에는 적의 공격이 아침에는 주춤하였다. 이에 제10연대는 주저항선에 대한 진지편성을 견고히 하고 있엇다. 13:00시경 적 1개 분대가 방내리로 공격을 개시하는 것을 신호로 적의 포격이 집중되고, 이에 석교리에 위치한 제18-2포대가 16:00시에 사천초등학교로 철수하였다.
한편 주문진으로부터 남하한 적이 영진리-방내리선에 이르게 되자, 제10연대장은 제2대대자에게 이를 격퇴하고 교두보를 확보하라고 명하였다. 계속되는 공방전 속에 주저항선이 유지되면서 사단은 천마봉을 확보하도록 명령하여 제2대대는 23: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27일 01:00시에 청마봉을 무혈입성하였다.
이에 연대는 계속공격으로 주문진을 탈환하려 27일 05:00시에 공격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04:00시에 적ㅇ 집중포격으로선제공격을 감행해 옴으로서 주저항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라. 광원리 전투
계방천 남안의 799-795-767고지에 이르는 주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대대는 연대 및 사단과 통신이 두절된 채로 25일 밤을 보냈다. 26일 새벽에 제9중대를 직접지원하는 제4중대의 81mm박격포 2문이 복귀하였다. 09:00시에 이르러 적 1개 대대 규모가 공격을 해왔으나 아군의 노력으로 세차례의 거듭된 공격은 무력화 되었다.
이 당시에 우탄리 정면을 담당한 제11중대는 연락이 두절되어 적에게 포위된 거승로 판단했으나 사실 제11중대는 우탄리의 38선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25일 20:00시에 연대로부터 연락장꾜가 도착하여 에비진지인 운두령으로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4. 주저항선의 붕괴와 강릉 철수
천마봉을 무혈입성한 제2대대는 27일 04:00시경 적의 제2제대인 제5-10연대를 투입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 속에서 중과부족으로 제2대대는 철수를 개시하게 된다. 철수는 하류족으로 하지 못하고 상류족으로 하게 되는데 적의추격이 강하여 제대로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분산 철수하여 이날 저녁에 대관령에서 병력을 재편성하게 되었으며 이 당시에 사천초교 앞 감자밭에 포진한 제18-1.2포병이 대포병사격으로 지원하였다.
주저항선에 위치한 제3대대는 처음에는 적의 공격을 견뎌냈지만 적의 계속적인 압력에 결국 08:00시에 무너졌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제3대대는 사천을 건너 10:00시에 산대월리로 진출한 제5중대의 엄호하에 병력을 수습하고 부근 능선에 급진지를 편성하였다.
한편 공병혼성부대도 계속적인 적의 공격으로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09:00시에 사천선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강릉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적의 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사단은 제21-3대대(26일 삼척을 출발하여 백봉령을 넘어 27일 09:00시에 강릉 사단사령부에 도착)에 사천선 공격을 명하여, 바로 09:50분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반격이 강하여 13:00시ㅐ에 유천리에서 병력을 수습하게 된다.
이 당시에 제18포병대대는 바로 앞에 주저항선이 무너지는데도 철수히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고 맹렬한 포사격을 기하게 뙨다. 당시에 제18포병대대는 장병의 80%가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굳게 뭉쳤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해안선으로 침투한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사단장의 명령으로 제3포대는 강릉으로 이동하고, 제1,2포대는 계속하여 연곡천을 유린한 적을 판교리-석교리선에서 일단 저지하였다, 10:00시에 이르러 적은 모든 화력을 포병진지에 집중하면서 우회공격을 감행하여 왔으며 제18포병대대는 50m 근처까지 포탄이 덜어지는 상황에서 적의 일부가 진내에 침투하여 백병전으로 결국 철수하게 되는데 , 제1포대의 2문만 빼내지 못하고 13:00시에 오죽헌부근으로 철수하여 다시 분산 철수하는 아군을 위한 포사격을 계속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사단자은 육본과의 통화두절과 퇴로차단의 위험을 고려하여 14:00시에 대관령으로 철수를 개시하게 된다.
제 4 절 정동진. 임원진 전투
1. 전투 개요
이 전투는 동해안으로 상륙한 북한군의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가 강릉으로 북항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제10연대 일부병력과 제21연대 개 대대가 군선강을 중심으로 치룬 방어전투다.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상륙한 적 2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유격대는 삼척-강릉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밤재를 점령한 후 1개대대가 강릉을 향해 북항하고, 또 다른 1개 대대는 옥계방향으로 남하하였다. 또한 임원진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1개 붇대가 태백산으로 침투하고, 1개 부대가 삼척방향으로 북상하였다. 이에 제8사단자은 제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켰다.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적의 후방상륙에 대처하기 위해 57mm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때를 강릉 남족 안목-안인진에 급파,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던 적의 선단을 격퇴하였다. 특히 북상 중이던 적 1개 중대 규모의 적을 안인진 북족 대포동 방어진지에서 격멸하여 이기 국면을 타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단장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적을 대처하기 위해 군선강에서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제10연대장에게 명령하게 된다.
한편 제21연대는 강릉으로 이동하기 위해 25일 18:00시에 삼척을 출발, 북평-백봉령-삽당령-구산동으로 우회하여 26일 10:30분 주력이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였다.
2. 북한군의 상륙과 안목.옥계전투
(가)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의 상륙
동해안의 북한군 상륙부대는 오진우 총좌가 지휘하는 제766부대 2개 대대와 해군 소속의 제945육4전대 2개 대대였다. 제766부대는 6월 21일 저녁 8시에 어선을이용하여 호도반도를 떠나 속초 부둣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6월 24일 저녁에 출발하여 6월 25일 05:30분에 주문진 앞바다를 통과하여 07:00시경 강릉 남쪽 임원진으로 상륙하였다. 해변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무방비상태의 마을을 휩쓴 후 일부는 태백산맥으로 침투하고 일부는 삼척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제945육전대는 1개 중대가 03:00시경 정동진 해안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2개대대가 축차적으로 상륙하였다. 상륙한 육전대는 길원팔 대좌ㅑ의 지휘아래 1개 대대는 강릉을 목표로 산두곡쪽으로 북항하고, 1개 대대규모는 밤재를 차단하고 읿가 지역의 트럭과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보급품을 하역하고 옥계를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해안선 바어는 청년방위대와 경찰에만 의존한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다만 삼척에 사령부를 둔 제21연대가 적의 적의 공격시 해안선 방어를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21연대장 김용배 중령은 연대본부를 삼척 봉황동에, 제3대대가 정라진 유지공장에, 제1대대가 북평 삼화제철 사택지대에, 제2대대가 6월 13일 삼척 시멘트회사 사택지대에서 진부리로 진출하여 하진부리에 대대본부를 두고 제10중대가 대관령-진부리 도로를 확보하고, 제7중대가 매봉-대궁산에서, 제6중대가 계방산에서 각각 소대별로 게릴라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북한군은 어뢰정 4척과, 1,000톤급 무장수송선 1척의 엄호아래, 발동선 30척, 범선 40척, 그리고 견인용 화물선 4척으로 2개 선단을ㄹ 이루어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다.
(나) 안목. 옥계전투
적의 상륙사실이 제8사단에 보고된 것은 05:40분이었다. 당시 강릉 경찰서장이 알려주엇다. 이에 사단은 제10연대장에게 적 상륙부대를 저지하라고 명령하게 되고,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1개 소대로 증강똬ㅣㄴ 제4중대를 대포동-247고지선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게 하였다.
3시간이 경과ㅑ한 11:00시를 전후하여 1개 중대 규모가 접근하여 집중사격으로 적 40여 명을 사살하고, 소총 8정.기관단총 3정 등을 노획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대전차박격포중대 주력을 출동시켜 제4중대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연대로부터 박격포중대가 출동하여 안목 도착하고 있을 때는 적의 선발대가 상륙하고 있었다. 따라서 화력을 집중한 결과 적은 상륙에 실패하였다.
한편 25일 이른 새벽 옥계면 현내리에서는 산성우리 강릉광업소 사무원이 북한군의 상륙을 옥계지서에 전하였다. 이 보고를 받고 묵호경비부는 해군 수색대를 도직리에 파견했으나 북한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2명이 전사하면서 옥계지서로 철수하였다.
한편 밤재를 점령한 북한군은 국군 제21연대의 강릉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하지 않고 있었다.
옥계전투 상황도
금진리 등명동
적945대대 적945대대
낙풍리
현내리
옥계 도직리 아21-1중대
망운산 아21-1중대
묵호
아21-1중대
12:00시경 제21연대 제1대대 수색대가 옥계지서에 들어갔으나 이때는 해군 수색대가 묵호로 복귀한 후였다. 이 무렵 제21-1중대는 망운산에서 그 북쪽의 233고지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21-제1대대 수색대는 옥계지서에서 적정을 설명 받은 후13:00시경 현내리 뒤산을 거쳐 교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적의 대열을 낙풍리에서 발견하여 기습함으로서 이들은 대항 한번 못하고 도주했다. 이들은 바로 도직리에 상륙하려다 실패한 제945부대 일부였다.
이후 대대 수색대는 북평으로 복귀하고 제1중대는 도직리 233고지에 급편 방어중 적이 옥계지서을 다시 기습하게 되자 바로 화력을 집중하여 이들을 격퇴하였으며 적은 후퇴하여 밤재로 돌아갔다.
제21-1중대는 날이 저물자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대대와ㅑ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대대가 강릉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묵호로 철수하였다가 26일 백봉령을 넘어 임계리에서 연대 후발대에 합류하였다.
3. 군선강 전투
제21연대가 도착하기 전가지ㅐ 군선강에 방어선을 편성하여 적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제10중대장과 사단 예비대(공병대대주축) 제2중대가 연대에 배속되자 제3대대장에게 이들을 통합지휘하여 안인리-모전리-언별리를 연하는 진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혼성 제3대대는 사단예비대 제2중대가 안목을 확보하여 해안선을 경비하는 가운데 제4중대를 군선강 북안에 배치하여 강릉에 이르는 주접근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21연대 제10중대를 140고지(모전리 서남쪽 1.5km)에 배치하여 적의 상륙부대가 우회공격하는 것을 대비하였다.
군선강 전투
안인리
아21-4중
아21-2중 대포동 아10-4중
아21-10중 군선강 적945연대
아21-6중
언별리 정동진
피래산
밤재
낙풍리 적9451개 대대
망운산
아21-1중
한편 강릉을 출발한 제21-10중대는 14:00시에 모전리에 도착하여 적 1개소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어서 적이 디시 2개 중대규코로 공격하였지만 이를 격퇴하였으며, 이대 계방산에 게릴라 소탕작전을 하던 제21-6중대가 복귀하여 모전리-언별리 간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개전 당시에 제21연대는 제2대대 주력과 제10중대가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진부리에 출동중이었고, 제3대대는 산업시설 경비를위해 장성-임계리에 각각 제9.제11중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1대대만이 건제를 유지하고 있고, 제2대대의 제5.8중대, 제3대대의 제12중대만이 각각 대대본부에 남아 있었다.
6.25일 15:00시에 제1중대가 도직리 망운산 일대에서 접근하는 적 1개 중대를 격퇴하였다. 한편 연대는 사단으로부터 10:00시경 강릉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삼척 광산지대의 차량을 징발하고, 제1대대장에게는 적과의 접적을 피하여 북평으로 집결하여 강릉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00시에 삼척을 출발한 제1제대는 북평에서 제1대대와 합류한 다음 백봉령을 넘어 구산동으로 밤샘 강행군하여 26일 10:30분에 강릉 사단사령부에 도착하여 군선강 전투에 투입된다.
25일 모전리 일대로 침투하려다 실패한 적은 26일 02:00시에 증강된 1개중대로 모전리-언별리를 연한 국군 방어정면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4시간의 전투끝에 06:00시 적은 소총 8정, 기관총 1정 등과 시체 10구를 남기고 도주하였다.
한편 강르에 제21연대가 도착하자 사단자은제21연대로 군선강으로 올라오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여, 제21연대장은 연대지휘소를 운산리로 추진하여 군선강 방어선을 재편하도록 한다.
27일 사단의 주문진 공격계획에 따라 제21연대장과 제1대대장이 제3.5.7중대로 편성된 혼성 제1대대를 지휘하여 연곡천 주저항선으로 진출하게 되어 군선강 지역의 작전지휘는 제2대대장이 2.4.6.10중대를 지휘하여 북상하는 북한군 제945유전대를 저지하게 된다, 연곡천 주저항선이 붕괴되자 적은 강릉 협공을 위해 2개 중대규모로 공격을 해왔지만 제18-3포대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국군은 이들의 공격을 격퇴하게 되고 적은 군선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였다.
제 5절 대관령 철수와 강릉 역습
1. 제8사단의 대관령 철수
제8사단의 강릉 철수
난곡동
제10-3대대
제21-1대대
남대천
제21-3대대
유천리
제8사단 지휘소
강릉 횡계리로 철수 27일 18:00분
장안동
제8사단(27일 14:00시부로 철수) 제21-4중
제21-2중
구산리
유천리로 철수 제21-10중
오봉산 642 구정리 군선강
대관령 제21-6중
제21-5중
제211-11중
27일 18:00시에 횡계로철수
임계로 철수
가. 강릉 북쪽 방어부대의 철수
천마봉에서 주문진으로 공겨하려던 제10-2대대가 적의 선제공격으로 분산된 채 대관령으로 물러서게 되고, 주저항선이 붕괴된데 이어 제21-제3대대의 공갹마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육본과의 통화는 불통익엇다. 이로인해 사단은 작전회의를 거쳐 일단 대관령으로 철수히기도 결정하고 14:00시를 기해 소송차량을 선두로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둟고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이 김새를 알아채리고 공격을 재개하여 사단은 서로 앞 다투어 강릉을 빠져 나갈려고 하는 바람에 차량과 병사들이 뒤범벅이 되었다.
이 철수과정에 우선 전방에 추진 배치되었던 제10-5중대와 제21-11중대에는 철수 명령이 하달되지 못했다. 도한 철도관사지대에 있던 야전병원과 도립병원에 수용중인 부상병중 보행이 불능한자에 대한 후송조치가 소흘한 치명적인 과실을 범하게 된다.
철수명령을 받지못한 5중대와 11중대는 구산동을 거쳐 임계리로 독자 철수하게 되었다.
나. 군선강과 광원리 방어부대의 철수
제21연대 혼성 제2대대는 18:00시에 강릉을 우회하여 박월리-장현리-제비리-구산동에 이르는 논길을 따라 제2.4.8중대가, 제6.10중대는 새재-마수리재를 넘어 대관령으로 향하였다.
이때 제18-3포대는 직접 대대장이 지휘하여 강릉을 경유하여 철수하는데 적이 별로 없어 무사히 대관령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25일부터 줄곧 광원리를 방어하고 있던 제10-1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으로 18:00시에 운두령을 넘어 하진부리로 철수하엿다.
사단은 사단지휘소와 제10연대를 유천리에, 제21연대를 횡계리에 집결시켜 재편성에 들어갔다. 반면 적은 28일 04:00시에 경보병여단 주력이 강릉에 진입한다
2. 제8사단의 강릉 공격
북한군 제1경보병여단 주력이 04:00시경에강릉에 무혈입성하게 도닌 시간에, 국군 제8사단은 강릉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8일 08:00시에 제21연대를 주력으로 강릉을 공격하고, 제10연대는 일부병력으로 오봉산을 확보하여 공격부대 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제1연대는 04:00시에 횡계리로 기동하여 08:00시에 구산동의 공격 개시선까지 약진하였다. 적은 아군의 역습에 별다른 대책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포격이 집중되자 각종포로 응사하기 시작했다. 연대의 우일선인 제2대대는 강릉시내를 굽어보는 홍제동으로 돌진하여 66고지일대를 확보하였다.
한편 죄일선의 제1대대는 별저항없이 경포대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주공인 제2대대가 점점 적의 반격으로 혈전을 거듭하게 되자 강릉 돌입 시간이 지연되어 가는데 이때 원주의 제6사단을 방문한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으로부터 전화로 원주로의 철수명령을 받고, 사단장은 전 전선의 상황을 알고 무모한 공격으로 병력 손실을 자초할 것이 아니라 전군이 전선재정비에 기여하는것이 당면임무라 판단하고 제21연대의 즉각 철수를 명령하였다.
철수중에는 적이 따라붙어 격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대 육본에서 각 사단에 통신유지차원에서 1개 소대장갑차를 지원하게 되어, 제8사단에는 장갑대대 제1-3소대가 26일 08:00시에 한남동을 출발하여 28일 14:00시에 횡계리에 도착하여, 장갑차 3대를 강릉 방면으로 출동시켜 관음리에서 고전하고 있던 국군을 위해 37mm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지원하여 무사히 철수하게 된다.
3. 육군본부의 제천 철수 명령
제8사단장은 28일 14:00시에 경찰 경비전화를 통하여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으로부터 제8사단은 28일 중으로 원주로 철수하여 2곳을 확보할 것이라는 육본의 작전지시를 전달받았다. 그러나 강릉을 공격중인 상황이라 사실 불가능한 상화으로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제6사단이 충주로 이동하니 무조선 오늘 28일 중으로 원주로 이동해야한다고 했다.그러자 제8사단장이 명일 중으로 이동할테니 제6사단은 1개 연대를 차출하여 원주를 확보하면서 제8사단의 이동을 엄호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제6사단장이 장창국 작전국장을 바꿔주어 29일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에따라 제8사단은 6월 29일 06:00시를 기하여 300대의 차량종대로 원주를 목표로 진부리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행군속도가 5마일에, 잦은 사고등이 겹치고 이대 피난민으로부터 횡성이 적의 수중에 곧 들어갈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사단장은 원주까지의 이동거리와 행군속도를 감안 목적지를 제천으로 변경하였다.
제 6절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나는 차를 몰아 강릉 사천리로 향하고 있다.
2000년 5월의 어느날, 제8사단 제18포병대대 용사님들이 집단으로 국방부에 탄원서를 냈다.
왜 사천국민학교에 매장되어 있는 포병용사를 현충원에 안 모셔오는냐의 항의성 탄원이었다.
국방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의 박인영중령과 사계전문가인 해병대 출신 2명과 동행하여 제18포병의 회장단과 만나기로 한 것이다. 차는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들어섰다.
이지역을 방어한 제8사단은 당시에 2개 연대를 가지고 1개연대는 전방지역을 경계하고 1개연대는 삼척에서 예비로 집결보유하고 있었다.
사단은 제6사단과 협조점인 진흑동에서 동해안 기사문리까지 장장 26km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전에 이미 제1권에서 밝혔듯이 적은 10여회의 유격대를 직접 남파하여 아군의 후방을 교란함은 물론 병력의 집중을 못하도록 분산을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제8사단도 각 연대에서 각 1개 대대씩 차출하여 오대산이나 계방산등에 침투한 유격대를 토벌하게 된다.
그러니 사단의 전면 경계부대인 제10연대는 좌일선에 1대대로 진흑동에서 서림을 우측은 제2대대로 서림부터잔교리를 방어하게 하였다.
작전지역은 크게 3등분 되어 우선 좌일선은 백두대간이 한계령-조침령-갈전곡봉으로 이어지고 행정구역을 인제군과 양양군으로 분리하게 된다.
산맥의 우측으로 양양 서림에서 구룡령-홍천 내면에 이르는 56번도로가 종으로 달리고 있다.
다른 하나는 양양 현북 고지군에서 올라서 1,000m고지 능선을 타고 남으로 내려가면 백두대간의 응복산이 나오는 험준한 지맥이 살아 있고 그 우측 계곡에 어성전계곡이 59번도로와 418번 도로를 안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현북면 잔교리 복분리쪽에서 올라서 동해안과 각을 세우며 달려내려가는 300~600고지군이 주문진읍 삼교리 북쪽 산악지대인 900m과 만나고 이 능선은 바로 동해안 지경리에서 서쪽으로 뻗어 백두대간 복룡산에서 만나며 강릉시 연곡면과 주문진읍을 구별하게 된다.
동해안을 따라서는 7번도로가 남북으로 해안선을 달리고 연곡, 주문진 남쪽에서 진부리로 횡단하는 6번도로가 발달 했으나 전반적인 지세가 해안을 제외하고는 산악지형이다.
여기에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1경비여단이 제5사단의 제10연대를 배속받아 정면 공격을, 제945,766육전대가 강릉 남쪽의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상륙하여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하여 남북에서 강릉을 협공하려 했다.
북한군은 6월25일 04:00 공격준비사격으로 38도선을 돌파 사단의 주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곳 동부전선, 강릉지역의 전투는 3가지 관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하나는 공병대대가 보병대대처럼 최전선에 배치되어 방어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포병대대가 또한 최초로 직접조준사격으로 진내에 접근한 적을 격멸함은 물론 진내에 들어온 적과 백병전으로 승리하여 포를 차후진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전무후무한 역방향 방어로 적의 육전대가 사단 후방에 들어와 강릉으로 올라 오는 상황에 방어부대가 군선강 일원에서 남쪽으로 방어를 하여 강릉 포위를 방어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유해발굴은 주로 전사에 근거하여 서림의 정족산(869m)과 연곡천의 남안인 사천리-판교리-석교리-신왈리의 주저항선 그리고 천마봉을 발굴하고 이어서 사천강 남안의 미노리 일대를 집중적으로 발굴하여 20여구를 발굴 하엿다. 특히 신왕리에서는 신원확인 유해를 1구 발굴 하였다.
1. 전쟁 초기 전투지역
제8사단은 2개 연대로 6월 중순에 침투한 적의 유격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을 오대산, 계방산에 투입하고 있었다.
제10연대가 경강도로 북쪽의 오대산일원을 담당하고 제21연대가 그 남쪽의 광활한 지역에서 게릴라 소탕임무를 수행하다 '50년 5월에 소탕작전을 일단락 지었으나 연이은 게릴라 침투로 6월 13일 제2대대를 진부리로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부대들이 계속되는 적 유격대의 침투에 따른 토벌을 위해 수시로 부대교대가 이루어지고 너무 광정면인데다 특히 좌일선의 제 1대대는 3대대와 임무교대를 하려다 말고 전쟁이 발발하고 고지대로 제대러 통신망도 확립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북한군은 주력을 해안선을 따라 제2대대정면에 집중하고 육전대를 후방에 침투시켜 전후방을 교란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사단은 직할부대인 공병이 보병화 되어 연곡천변을 방어하게 되는 초유의 기록을 만들게 되며 실제 우리는이곳일대에서 유해발굴 작전간 공병마크를 발굴하는 기록을 남겼다.
제18포병은 대부분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반공의식이 매우 높은 상태였으며 사천 미노리에 추진하여 사격임무를 하다 말고 앞의 보병이 먼저 철수하는 바람에 포를 놓고 백병전을 수행하며 초기 전쟁사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게 되었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아군의 최초진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데 잠시 당시의 부대실정을 알아보면 정말 전투부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우측의 제1대대는 광원리에 대대본부가 있었고 제3대대로부터 배속된 2개중대를 받아 경계임무를 하고 예하 3개중대는 공비토벌 작전을 하였으며 6월 23일부터 6월 26일 사이에 제3대대와 작전임무를 교대하도록 되어 24일 제4중대는 강릉으로 제2중대는 주문진으로 이동, 25일 제2대대에 배속된 제10중대와 교대할 예정이었다.
우일선의 제2대대는 주문진에 대대본부가 있었고 3개 중대를 전방에 배치 하였다.
연대 예비인 제3대대는 강릉 비행장에 배치하였으나 제10중대가 제2대대에, 제9, 제11중대가 제1대대에 배속 중이어서 실제는 제12중대와 대대본부만 잔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26일부로 제1대대의 진지를 인수받도록 되었다.
그러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잔교리에서 연화동 지역의 경계진지를 방어중이던 제2대대는 전방에 추진중인 3개 중대중 제7중대만 분산 철수중이라는 보고가 있었을뿐 제5, 제6중대와는 통신소통이 두절 되어 08:00경 주 방어선인 화상천으로 후퇴시켰다.
따라서 우측의 제7중대는 화상천으로 축차 이동하고 좌측 제6중대는 어성전리에서 화상천으로 이동하게 되지만 중앙의 제5중대는 어성전리에서 하진부리로 자체 이동하게 된다.
좌측의 제1대대는 정족산-진흙동 지역의 경계진지에 우측은 제9중대 좌일선은 제11중대로 경계근무를 하다 기습공격을 받고 제9중대는 적과 일진일퇴의 방어작전을 수행하고 축차 철수하게 되는데 9중대로부터 상황을 전달 받게 되어 있는 제11중대는 아무런 전달을 받지 못해 전쟁이 난지도 모르고 그 자리를 확보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적의 계속적인 압력에 자체적으로 철수해 축차적으로 광원리로 내려가고 주방어지대인 제2대대는 6번도로를 연하는 화상천에서 주방어를 하려 했으니 바로 밀려 내려가 사단의 주저항선인 연곡천으로 내려서고 좌측에는 공병대대가 투입되어 진지를 급편 방어하게 된다.
이때 예비연대인 제21연대의 혼성 제1대대가 참여하여 연곡천 방어선을 강화 하였다.
이에 적이 26일 몇 차례의 도하 공격이 있었지만 격퇴되고 오히려 국군이 강을 건너 지대내 가장 양호한 감제고지인 천마봉(121m)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탈환하게 된다.
그러다 적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27일 14:00을 기해 대관령으로 철수하게 되며 여기서 제18포병이 미노리일대에서 백병전을 하고 축차 철수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아니 부대건제는 어디가고 대대의 중대들을 교차 배속하여 정신없이 해놓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적 게릴라를 소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방부대를 이렇게 운용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듯이 아마 전투력의 집중을 못하게 누군가 지휘부에 침투한 세포조직의 흉계가 아닌가 한다.
"용사님 용사님, 우리 용사님"
지금 우리가 민원을 해결하려 달려가는 곳이 바로 이곳으로 사천초등학교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학교안에 포병용사의 무덤이 있다.
우린 학교에 들어가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고 현장으로 안내 되었다.
6.25전쟁 50주년이 지나 얼마 안되어 묘소에 조화가 헌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우린 잡초를 손으로 제거한 후에 간단한 약식 제례를 치른 다음 참전용사님과 학교 선생님, 그리고 마을의 이장 되는 분과 함께 묘소에서 열띤 공방을 벌였다.
내가 나서서 주로 질문을 던졌다.
"정확하게 이곳에 묻혀있는 전사자의 이름과 유해가 맞습니까?"
"처음부터 이 자리에 당시 용사님들이 묘소를 만들고 후퇴했습니까, 아니면 후에 마을에서 지역주민에 의하여 매장된 곳입니까?"
"혹시 모든 뼈는 매장 되었던 곳에서 발굴 되어 다른 곳에 2차 매장되면 훻씬 그 썩는 속도가 몇배나 빨라져 대부분 흔적조차 없어진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의 유가족 동의는 얻었습니까? 아니면 유가족이 없어 용사님들이 하려고 합니까?"
"혹시라도 발굴하여 아무것도 없다던가 했을 때에 이곳에 봉분은 의미가 사라지고 맙니다. 학생들이 '파보니 아무것도 없단다'라는 소문을 듣고도 매년 이곳에서 추모식이 되겠습니까?"
그동안 50년을 이곳에 묻혀계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지역 주민들에게도 호국안보의식을 함양하고 있는 곳이며 모두의 추모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발굴하여 설령 뼈가 있다 하여도 현충원에 들어가면 감식단 유배보관 센터의 중성자 박스에 보관 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못한다. 유가족과의 DNA 감식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현충원 묘지에 안장을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재 법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로써 잘 계신 용사님을 왜 발굴하려는 것인지 회장님의 답변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아무말도 없으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 것이 더 추모의 상징성이 있는지 다 알 문제인데 이제와서 발굴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다른 문제가 아니다. 그 무수한 세월을 다 지나 이제 유족도 찾을 길 없는 실정이다.
감성적으로 새로 구성된 회장단이 뭔가 한건을 이루었다는 업적을 만들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책이 없으면서 국가를 지키려 희생당한 용사님은 국립묘지에 와야 한다는 논리로 무작정 파선 안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산하에 내버려진, 지금 우리가 발굴하고 있는 유해야 정말 머리털 한 오라기, 발톱 하나라도 찾아서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잘 모셔져 있는 것을 업적을 쌓으려 파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결국 참석한 모두가 나의 발언에 동의하고 그날의 토의는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적으로 일부 애국용사님이라 하는 분들과 그 순수한 학교에 언젠가 들어온 전교조라는 허울을 쓴 선생이라는 사람이 심심찮게 민원을 내서 학교에서 묘를 파내라고 한단다.
조소를 금할 길 없다. 50년의 세월도 역사며 약속이다,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북한군의 공격 양상이다.
북한군은 제1경비여단으로 사단의 정면을 밀어 붙이고 동해안으로 먼저 이동한 육전대 제945연대를 정동진에 제766연대를 임원진에 상륙시켜 삼척에 있는 사단의 예비인 제21연대의 전방 지원을 차단하여 2개 연대를 각개 격파하는 동시에 강릉을 남북에서 포위하려 하였다.
동시에 이미 사전 태백산맥에 침투하여 은거중인 유격대와 연결을 기도하였다.
"웃기는 육전대의 침투와 주민들의 어리둥절한 지원"
지금도 북한군의 남침이 과연 몇일 몇시인지 정확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시란 것과 04:30분이란 설, 그보다 더 훨씬 앞에서 이미 침투가시작되었다는 설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다.
이곳 제8사단 지역도 전방 부대에서의 공격과 후방지역으로의 침투는 상이하다.
제945 육전대들은 당일 04:00에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마을 옆 해안에 접안한 수송선에서 내린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옮기었다.
그렇다면 과연 도대체 몇시에 38도선을 넘어서 이 침투부대들은 내려왔다는 것인지?
내가 다녔던 곳 중에 전남 영암은 한달 전에 북한군이 소형 배를 이용하여 선발대가 들어왔다고 하고, 경북 영덕 해안가에서는 며칠전에 북한 해군이 상륙하여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곳 정동진에 내려가 지역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국군이 도와 달라고 하는지 알고 그러했으며 산에 올라가니 이미 개인호도 구축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제7번도로를 따라 북상하여 제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국군 예비부대들이 전방에 투입되는 것을 차단하여 포위 섬멸하려 했다.
반면에 제766육전대는 6개대대중 2개 대대를 삼척지역 임원진으로 상륙하여 후방교란과 철도와 수송시설물 파괴, 국군의 퇴로 및 증원부대를 차단하려 했다.
특히 이 부대는 대부분 남로당원 및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전쟁전 월북한 두명의 대대장인 표무원과 강태무의 성을 딴 '강.표 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 투입했다.
2. "88여단 출신의 오백룡과 오진우의 비밀"?
북한군 제1경비여단의 여단장은 오백룡이며 제766부대장은 오진우였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88여단이란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빨치산)을 하다 일본군에 쫒겨 소련으로 들어가 망명한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들로 '42. 7~'45.9월까지 활동하게 되는데 김일성이가 여기에 있고 바로 북한의 혁명 1세대들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오백룡과 오진우 또한 바로 이 혁명 1세대들로 김일성의 핵심 동지들이다.
오백룡은 함북 회령출신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영국주재 북한공사관을 하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태영호의 부인 오혜선이 바로 오백룡의 손주라하며 오백룡은 온갖 특혜를 다 누리다 '84년 자연사 하였다.
그리고 오진우도 다 같은 '33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고향이 함남 북청으로 나오며 마찬가지로 온갖 특혜를 다 누리다 '95년도에 죽었다.
그런데 내가 포항 연일읍의 홍계리에 들어가 '50년 9월초 안강전투와 포항전투의 분수령이 되는 안강 곤재봉전투와 형산강 동안의 사리재와 운제산을 탐사하는 과정에 신라시대 문무대왕 수중 능이 있는 감포지역을 가 본적이 있다.
바로 감포는 경주시이고 그 위가 포항의 구룡포로써 전쟁사에 중요한 비행장이 여기에 있다.
하루는 오천읍의 오어지로 들어가 지역주민을 탐문을 하고 오전에 오어사 절에 들어가 역사를 소개 받은 다음 운제산을 오르기 위해 점심을 오천읍 지역에서 먹었다.
그런데 마을 주민이 운제산을 경주의 화산리 청수골 지역에서 오르면 차량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하여 그 코스를 이용하여 운제산을 올랐다.
산을 탐사하고 내려와 감포지역으로 달려 수중 능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묵념을 올리고 임금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도록 한 그 호국정신에 감사드렸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일부 나이드신 어른이 발굴단 단복을 입고 경례하는 모습에 반하여 나를 칭찬하고 이것저것 묻더니 오진우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은 모르고 북한군의 원수까지 했고 김일성의 절친이었으며 6.25전쟁의 원흉이라 하였더니 잘 알고 있다며 고향은 아느냐고 묻는다.
"북한이겠지요" 하였더니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사실 이곳 감포 사람이란다.
"네~, 어떻게 남한 사람이 거기가서 박헌영이도 도중에 다 역도로 몰려 죽었는데 그 위치까지 올라갔느냐고 의구심을 나타내니 대부분 안 믿으려 하는데 여기 오씨들이 많은데 다 알고 있는 사실이란다. 바로 혁명 1세대인 북한의 박성철도 경주사람인데 경주 사람이 어찌 북한에 가서......
나는 더이상 알아야할 것이 없어 자리를 떠나 안강 곤재봉으로 향하면서 할아버지께 인사를 올렸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
3. 연곡천과 광원리의 주저항선 전투
사단의 우일선 대대인 제2대대는 적의 자주포를 앞세운 파상공격에 6.25일 당일 23:00에 연곡천 남안으로 진입하고 다리를 파괴하였다.
이 당시에 이미 예비대인 제3대대의 1개 중대와 사단 공병대대를 주축으로한 사단 예비대가 배치 완료 된 상태였다.
또한 제18포병대대의 제1포대가 석교리에 제2포대가 미노리의 사천초등학교에 포진하였다.
26일 아침에는 전날 삼척을 출발한 제21연대 제1대대가 전날 북한군 945육전대가 점령하고 있는 동해안 도로를 회피하여 내륙으로 우회하여 백봉령을 넘어 구산리로 해서 26일 10:30분에 강릉에 도착하여 사단의 예비가 되었다.
이에 따라 연대장은 제2대대장에게 연곡천을 넘어 들어가 적을 기습하도록 하여 결국 천마봉을 27일 01:00에 무혈점령하게 되자 사단장은 주문진을 05:00에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적이 04:00에 집중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연곡천선이 08:00에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포병이 백병전으로 진내에서 북한군을 물리쳤다!"
진지내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제18포병의 대포병사격과 보병이 후퇴하여 혼자 도출된 포병진지로 적이 진입하여 백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부대원들은 15문의 포중 2문만을 유기한체 안전하게 진지를 이탈하여 13:00경 오죽헌으로 진지를 점령하여 임무를 계속하였다.
개전초기에 포병이 대포를 쏘다말고 진내로 진격한 북한군을 맞아 포반이 갔고 있는 곡갱이와 야전삽, 그리고 1:1 육박전으로 북한군을 물리친 기록은 아마도 최초이자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제18포병 구성원이 대부분 서북청년단으로 이들은 해방직후에 벌어진 북한내부의 무자비한 인명살상과 쏘련군의 몹쓸짓에 분개하여 내려온 자유의 투사들이었다.
이 인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놈보다도 조선놈이 나쁘고 조선놈보다도 쏘련놈이 더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을 북한 공산당이 방조하거나 그런 분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보라, 얼마전에 서울 한복판의 세종로 거리를 재정비 한답시고 세종대왕을 이순신 장군을 옆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한맺힌 농성천막은 거두워 졌는데 아니 북한 창설의 주도적 임무를 수행한 항일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독립유공자 대열에 서훈하겠다는 발표가 났다. 사실 조소앙이 그렇고 여운형이 그렇다.
그 시대적 배경만를 가지고 논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나는 외가가 대한민국에 없다. 모두 일제의 학정에 못이겨 그 누구들 처럼 전남 구례에서 북만주로 떠나 버렸다. 우리 어머니도 그래서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다시 돌아왔다.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주에서 살고 있을 때에 가장 무서운 것이 일본놈이 아니라 한국인 마적단이었다 한다.
고향을 등지고 와서 사는 것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한번 나타났다하면 집에 있는 먹을 것은 모두다 가지고 가버린다.
그 마적단이 말이 마적단이지 누구는 항일운동하는 독립군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여러가지 독립군 파벌이 만주에 활동하였다. 그 뿌리는 조선인이었지만 사상이 다르고 이념이 달라진 것이다.
그 왕주에 절대 충성하며 하늘처럼 모시던 시절에서 "서자들이 받았던 설움을 보복이라도 하듯 힘이 있으면 누구도 대장이 되고 왕이 된다"는 식의 신 좌파의식이 유럽에서만 1900대 초반에 범람한 사조가 아니라 우리도 있다.
아니 일본도 1920년대에 군국주의와 천왕제도에 반기를 들고 동경대 학생들이 데모를 하지 않았나. 우리도 그때에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에 들어가 있었고 이미 그 이전에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 운동이 있기전 일본에서 먼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선언이 있었다는것 다 알고 있다.
이래서 일본은 바로 그 핵심멤버들인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 조선땅에서도 검거활동이 만주땅에서도 검거활동이 있었다.
그럼 그때 노력한 이광수등은 왜 친일세력에 넣고 누구는 괜찮다는 것이 하필이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칭송하는자가 그 정부 수립에 기여한 자들이란 말인가.
우리 외작은 아버지 한분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진짜 만주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장군의 흑백사진 오른쪽인지 왼쪽인지에 서 계신 분중에 한명이다. 우리 어머니 살아계실 때에 들은 이야기로는 북한의 김일성은 마적단으로 항일운동한 사람이고 실제 김일성장군은 조선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살고 있는 집에도 어쩌다 한번씩 외삼촌과 들려 우리 외할아버지, 그러니 삼촌입장에서 형님과 무슨 말을 나누고 떠나곤 했다고 한다.
그 자식들중에 누군가가 얼마전까지 그쪽 국민학교 교장인지 선생님인지 하였고 그 자제들 중에 한분이 서울에 왔다가 우리 집을 찾았지만 이미 다 돌아가신 분들이고 그렇게 썩 잘 살지도 못한 모습을 보고 돌아간는데 벌써 10년이상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고명딸이셨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자식인가. 그래서 춥고 가끔씩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총칼을 차고 나타나는 모습에 질려서 살기 싫다고 하는 바람에 조선땅으로 다시 돌아 오신 것이다. 그러니 떠날때 다 처분하던가 남에게 주어버린 것을 되돌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겠는가. 우리 엄마 한분을 살리기 위한 선택의 길이였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데딜사위로 들어갔고 우린 지금도 형님이 외가 제사를 모시고 있다.
누가 공산주의자였느냐의 문제는 결과로 논하는 것이지 과정으로 논하면 대한민국 5천년 역사가 아름다운 역사가 아니라 삼천리 금수강산이 950여회의 외침속에서 풀뿌리처럼 근근히 살아온 민족인데 무슨 백의민족이라고 하며 한 혈통을 주장하는 것은 현대인으로써 너무나 큰 난센스다.
가까운 일제 36년사의 비극만을 가지고 너무 광분하는 것같아 하는 말이다.
좀 수치스럽고 분통스런 일이 어디 그뿐이랴.
역사에 명백한 한나라의 침범이 가져온 문화의 반전, 당나라 군대의 한반도 유입에 따른 그 피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혈투와 소정방군대의 인간싹쓸이 못된 짓을 역사는 숨키려 한다.
어디 그뿐이랴 고려때는 원나라에 몸팔아 남편 출세 시키는 치졸한 모습에서 생겨난 "몽골놈 0으로 맹그러분거"라는 비참한 속아가 살아 있었던 시대며, 심지어 왕이 내 고려 여인을 왕비로 못 맞아 들이고 원나라 공주를 맞이 했다.
어디 또 그뿐이랴.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받쳐진 환향녀의 역사를 잊었단 말인가.
그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압록강을 건너 갔던가!
돌아와서 저 홍제천가에 앉아 중요한 곳을 싯고 나면 환생했다고 하고 그래도 창피해서 고향으로 못가고 그 여인들이 모여살던 촌을 환향녀촌이라 했거늘 지금 그 일대가 홍대거리며 미아리 거리며 양동 거리며 장안촌 아니던가.
여기에 7년의 임진왜란, 그 후에 후금의 병자호란을 격으며 우리네 역사에 여인들은 그 모든 것을 몸으로 받쳐 여여히 나라의 운명을 지탱한 비열한 남자들의 나라였다고 비판하면 매국노일까?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옳바른 선택을 해서 미래 지향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감정에 치우치고 민족감정에 치우치고 내로남불로 당리당략으로 엃매인 이 나라의 운명은 항상 흔들리는 등불이라면 틀리다고 할것인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리고 진실은 아랑곳 없이 패거리지어 내 편은 잘못도 한순간이고 남의 편은 조그만 잘못도 패륜아로 몰아 구렁텅에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당은 공산당이고 자유당은 자유당이고 그것이 민족이란 단어로 색칠될 일이 분명 아니다.
지금 6.25전쟁의 서두를 지난 20년간의 유해발굴 역사에 견주어 가면서 그 사실적 실체를 더듬어 보는데 결국 던져진 결론은 당시 대한민국 군대는 프락치의 농간에 녹아난 준비된 전쟁이었다.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이기는 전쟁이었는데 그 자리마저 대부분 강제로 외출외박을 보내고 총을 빼앗아 입고 시키고 차량을 괜스레 입고 시켜 발을 잘라버린 통에 전방으로 예비대를 보낼 수 없던 차고 친 전쟁이다.
그런데도 자유를 지킨 것은 첫째는 북한군이 너무나 자만과 한심한 전투지휘에 우린 살았다.
둘째는 우리 선배들중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1/3의 병력이 그 목숨으로 자유를 지켰고 그 대부분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서북청년단과 같은 공산당이 뭔지를 알았던 분들의 분투정신이 귀감이었다.
물론 과정에 민간인 피해라는 것을 빼놓을 수야 없지만 그래도 초전에 이분들이 나라를 지켰다.
셋째는 우방국, 특히 미군이 헌신적으로 좋아주지않았으면 우리나라는 없다. 누구는 병주고 약주고 가지고 놀았다고 비판히지만 그건 너무한 비판이다.
아니 우리는 내나라를 지키는데도 군대에 안가려 손가락을 자르고 호적을 지우고 양잿물을 마지고 병신 짓하고 다리를 부러트려 온갖 병무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마당에 그들은 이억만리 조국을 떠나 자유평화를 수호하러 남의 나라에 들어와 무려 5만4천이 죽어나갔다.
그들은 바보인가, 죽음을 모르는 수호천사인가. 한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 미국은 우리보다 몇십년 앞선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 명예로운 기사도 정신에 오블리스 노블리제의 정신으로 세계평화를 지키는 군인인 것이다.
누구는 말하기를 강대국의 헤게머니 싸움이라 하지만 그건 공자맹자시대 이야기이다.
어차피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였고 강자만이 살아어 생존하는 자연 법칙이다.
그러니 힘을 길러야 하고 힘이 없으면 멸망하던지 일제36년처럼 창피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개 돼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이를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있는 자는 내려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공생의 관계이지 누구나 같이 일하고 같은 밥을 먹는 다는 것은 인류역사에 없었다.
공자도 남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어도 여아의 가슴팍을 도끼로 찍어 나오는 생간을 먹었다는 비아냥 소리를 당대의 가장 유명한 도적인 도척의 일화에 나오지 않던가!
우리 제18포병의 위용은 군에서 다시금 전 용사들에게 교육이 되어야 하는 엄청난 교훈이다.
한편 사단의 좌일선인 제1대대는 연대나 사단과의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높은 고지군의 잇점을 활용하여 주저항선에서의 적의 공격을 연속적으로 방어하였다.
하지만 우측 중대인 제11중대는 이때도 연락을 받지 못하고 최초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대대는 26일 연대로부터 연락장교가 도착하여 20:00에 운두령으로 철수하게 된다.
결국 사단은 강릉에서 27일 14:00에 엄호부대와 포병의 지원하에 대관령으로 철수를 개시한다.
4. 이곳에서의 유해발굴 비화
나는 어떻게 보면 복이 많아 보인다.
이 말은 바꾸어 보면 지질이도 복이 없다거나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어쨌든 나는 미쳐 있었으니 지금이야 별별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랬다.
지도를 펴놓고 동해안을 따라 눈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르고 달려가는 용사님을 그려본다. 그러나 적탄이 나르고 무자비한 포탄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물러서지않는, 연곡천을 지키려는 그 장렬한 모습에 잠시 묵념을 하였다.
이곳은 나는 대대장 시절과 인사참모 시절에 지인이 이곳에 살고 있어 년에 한 두번을 외박시에 이곳에서 보냈는데 정말 그때는 아늑하게 멀고 먼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그 수평선에 아른 거리는 배들의 불빛에 젖고 어느날은 집더미 만한 파도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웅얼거리는 바다의 매력에 빠지곤 했다. 그러니 천마산이며 연곡천변 화상천변을 이미 거닐어 보았지만 그때는 바다의 낭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해발굴을 하러 다니다 보니 만나야할 사람도 많고 알아야 면장할 일도 많았다.
이곳은 처음 초전은 전쟁도 아예 못해보고 최초 경계진지를 적에게 내주어 잔교리 일대는 그리 많은 제보도 없고 동네분들도 요란해서 눈떠서 밖으로 나오니 임 북한군 세상이고 아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더라 한다.
좌일선의 서림지역 정족산은 그래도 개인호라도 있고 조봉을 거쳐 응복산에 이르는 구간은 평균고도 1,000m의 워낙 고지대라 사실 북한군도 이곳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 우리 11중대는 2일동안 전쟁이 난지도 모르고 정족산 우측에 있다 소대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각개 다른 방향으로 철수해 내려간다.
우리가 탐사하면서 가장 멋지게 싸운 곳은 공병대대가 점령한 연곡천 강변이고 포병부대가 싸운 사천초등학교 주변의 낮은 고지군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이었다.
우리가 사천 초등학교에서 학교 교정 뒤에 남겨진 제18포병의 용사님 묘소를 옮기지않고 학교에서 계속 괸리하며 보호하기로 약속을 받고 역전의 용사님들은 섣부른 판단 이었다고 말씀하시고 강릉으로 이동하여 서울로 향했다. 우린 몇일을 이곳에서 탐문활동을 하기로 하고 판교리와 석교리, 신왕리로 들어가 집집마다 사연을 들어 보았다.
사단 예비대로 사전 진지를 점령한 공병등 제8사단 인원들은 연곡천 남안에 정말 개인호를 잘 구축하였고 바로 남쪽에 있는 사천천 남안에도 개인호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이런 것만가지고도 북한군의 진군 속도를 지연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분석 되었다.
그러니 서부전선의 제1사단이나 제7사단의 방어태세와는 구별되는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병력이 휴가나 외출 외박을 많이 가지않아 주저항선에서의 전투력 발휘가 용이했다.
둘째는 좌일선이 오대산을 끼고 완전 산악지대로 북한군 유격대도 사실 기동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셋째는 공병의 살신정신 정신과 포병의 구성원인 서북청년단원이 진내에서 백병전을 하면서도 대포병전을 수행하고 화포를 15문중 2문만 유기한체로 다음 진지로 탄약과 함께 이동시킨 필사즉생의 정신이 경계진지가 바로 무너졌어도 제8사단을 구해냈다.
넷째는 다른 사단보다 군 내부에 프락치가 없어서 예비인 제21연대 예비 병력이 우회기동으로 주저항선부터 투입되는 효과로 비록 북한군 육전대가 정동진과 임원진에 먼저 상륙하여 기동로를 차단하고 포위섬멸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빗게 만들었다고 본다.
"일병 김재홍을 발굴하다."
탐사하는 과정에 신왕리 마을회관에 들어가니 마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니 기막히게 우리가 행안부와 협조한 반상회보에 유해소재 제보와 유가족 찾기관련 내용을 가지고 이장이 설명을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은 바로 우리를 알보고 반가워하며 전쟁관련 이야기를 하는데 국군들이 운계봉(530m)에 들어갔고 북한군도 뒤를 따라 올라가 전투를 2차례 하였고 그 다음에는 전쟁은 없었다 한다. 그런데 이 운계봉 전투에는 원래 대대가 아닌 삼척에서 올라온 제21연대 병력이 전투를 했으며 사기막쪽으로 철수해 갔다고한다.
그리고 이동네에서 군에 들어간 김재홍 일병이 있었는데 판교리에 있는 제10연대 3대대원으로 전투에 직접 함여 하였다 한다.
휴가를 나와서 있었는데 전쟁이 터져 바로 현장으로 가서 이곳 사람들의 지원을 받으며 죽도록 싸운 김일병,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
지금 미노리에 가서 사천초등학교에서 연곡천으로 조금 이동하면 우측으로 교회가 하나 있고 바로 그 우측이 60 여m 되는 조그만 낮은 야산인데 바로 교회 옆이 동산처럼 약간 뚝 불거져 있다.
그곳은 원형으로 교통호가 무척 깊게 파있고 개인호도 많은걸 보아 소대 지휘소로 보이는 곳이다.
운계봉은 우리가 올라가 가보니 정말 마을 사람들 이야기처럼 전투흔적이 별로 없었는데 조그만 이 동산이 훨씬 전투 흔적이 많아 우리는 발굴 계획에 포함 하였다.
당시는 마을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군인을 지원하러, 지게지고 남자들이 노무자처럼 참여하여 탄약을 나르고 여자들은 밥을 해서 날랐는데 동네 아저씨들이 김재홍 일병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국군이 물러나고 북한군이 주둔하면서 부역자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즐비하게 죽어있는 강변의 군인들과 피난을 나가가 포격을 맞고 숨져간 민간인들을 치우는 작업이 시작 되었다.
해안가에는 원래 모기들이 유명한데 그해 여름은 유독히 비도 많이 내리고 덥기도 하고 해일이 자주 일어나 하늘이 무슨 조화를 부리는 것 같았다 한다. 뜨거운 햇빛에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 그리고 그걸 다른 곳에 옮겨 가매장 하는데 어떤 시체는 다리가 떠러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터져 골이 업슨데 그 소게 벌레가 가득 차 있는 모습등 이건 지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 당시가 지옥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시체를 옮기려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데 동네 아저씨 눈에 확 들어오는 얼굴이 있었으니 비록 까맣게 색은 변했지만 분명 재홍이었다.
가슴이 벌렁벌렁 하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아저씨는 다가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이 캄캄 했습니다. 분명 재홍이가 맞은데 이걸 몰래 빼내다 들통나면 북한군한테 즉시 즉결 처형이 되는데......
하지만 동네 아저씨는 모르는체 할 수 없었다. 그 아버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인간으로써 도저히 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묻는 곳에 표식을 해 놓고 선 어느날 칠흙같이 어두운 날에 지게를 지고 가마니를 가지고 가서 재홍이를 발굴하여 담았다.
이제 걸리지않게 재홍이 집으로 가야한다.
북한군 끄나풀들이 득실대는 세상에 자칫 여럿이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사실 어마어마한 사건을 지금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과연 들키지 않고 도착할 것인가.
더운 여름날 비는 내리고 여기에 땀까지 흘러 만신창이처럼 달리고 달린다.
미노리에서 이곳 신왕리까진 거의 20리의 거리다. 족히 2~3시간은 걸어야 한다.
북한군이 모르게 하기위해 나무토막도 몇개 넣어 가지고 가는 이 운구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밤 10시가 넘어 시작된 일이 다음날 2시경에 도착하고 집안에서 아직 석지않은 옷을 보고 위 호주머니에 있는 수첩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바로 한 곳에 묻어야 했다.
어르신은 담대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기절하고 그 동생은 나이 12살에 그렇게 감각도 없이 바라만 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휴전이 되어 다시 김재홍의 묘는 파내어 정상적인 안장이 일루어 졌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유족연금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없다.
그런데 그 동생이 장성하여 이제 동네에서 아저씨가 되고 그 사연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마침 유해발굴을 하고 DNA 감식으로 신원을 확인한다 하니 "정말 내 형님인지 알고 싶다"는 거였다.
"이유는 그 당시에 하도 거짓부렁으로 유해가 자가봉송 되었다고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발굴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어쨋든지 6.25참전 전사자 집안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발굴 팀을 투입하여 집에서 말해주는 곳을 발굴하니 유해가 나왔고 DNA 감식결과 일치하여 현충원에 모셨다.
해당 집안에서는 유해가 집에 들어온 날을 제사날로 하였는데 우리 전사자 카드에 나와 있는 일시로 바꾸어 제사도 드리겠다고 한다.
이 동생분은 자신의 아들 한명을 양자를 보내 평생 형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는데 이는 부모님께서 죽기전에 유언을 그렇게 하였다 한다. 의로운 형제들이다.
"안동길,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미노리의 작은 야산을 '08년도에 전면적으로 발굴하기로 결정하고 이 석교리와 판교리 일원을 탐문하여 확실한 정황을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강변은 다 걸어 보았고 지뢰탐지기로 개인호는 다 체크하였지만 크게 반응을 보이는 곳이 없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수해가 나서 일부 지형이 바뀌고 밭으로 사용되는 지역도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언제는밭을 갈라보면 지뢰가 나오기도 하고 수류탄이나 총알은 많이 주어냈다고 하니 격전지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하루는 강너머에 무려 90이 다된 노인이 살아계신다 하여 그 집을 방문하여 자리에 누워 계시는 어른을 만나 뵈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 본인 당시에 시체를 치우러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북한군을 주로 처리하였고 아군의 시신은 본 적이 없다며 사천국민학교 주변에 가서 물어보면 그 일대에 아군이 죽어 있을거라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학교근처로 나와 이장등을 활용하여 나이드신 분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미노리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대박이 났다.
우린 마을이장을 대동하고 식당에 들러 맛있는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들어가 보니 사람이 꽉 채워져 있다. 면사무소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을 나와 어쩔수 없이 허름한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 시래기 국밥을 신청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나이가 좀드신 분 몇 명이 우리 뒤를 따라 왔다.
그래서 어르신들께 우리가 여기온 이야기를 했더니 무슨 소리냐뭐 그중 한명이 장소를 안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곳에서 시계도 한개 습득하여 사용하다 버렸다는 것이다.
"혹시 어르신 식사 후에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어요?"
"뭘 식사 후에 가, 지금 차를 이용하면 식사나오기 전에 갔다올 수 있어요."
그래서 신속하게 운전을 담당한 승현이가 차를 준비하고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갔더니 바로 우리가 예전에 올라가 교통호와 개인호를 많이 찾아낸 그 작은 동산이었다.
비록 발굴 하기로 결정을 한 곳이지만 확실한 제보자까지 확보했으니 얼마나 기쁜지......
"아니 그걸 지금 60년이 다 되었는데 발굴해서 뭐합니까. 무슨 혜택이 있나요?"
"특별한 혜택은 없습니다. 다만 늦긴 했지만 나라 위해 싸운 분들의 목숨을 이제는 우리도 미국과 같이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적 사명감을 국민앞에 다짐하는 것이 가장 큰 혜택입니다."
"하기야 미국놈들은 정말 대우가 좋다고 하더만요. 그런데 우린 너무 늦었어요. 이곳만 하더라도 내가 한 12살인가 됐는데 죽은 국군이 강가에 널려있고 그러다보니 여우들이 와서 물아뜯지를 않나 동네 개들이 허벅다리 한쪽을 물고 서로 먹으려 주둥이가 씨뻘겋게 해가지고 돌아다니고 참 비참했어요. 전라도에서는 부모형제들이 죽은 사람을 찾겠다고 일꾼을 대동하고 다닌 사람도 있었어요."
어느새 차는 다시 식당으로 오고 우리는 맛있는 시래기국밥을 먹었다.
그리고 발굴 날짜에 여기 어르신을 오시도록 알려주어 입회한 가운데 발굴 작전이 진행 되는데 교통호가 모래로 되어 있어 매우 깊었다.
한나절을 거의 파내려 가는데 드디어 유해의 모습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철모가 나온다"
"판쵸우의가 나온다"
"전투화가 나온다"
"팀장님 도장입니다."
"뭐야 도장, 조심해 기스나면 큰일난다."
함구도 나오고 m1도 나오고 약병도 나오고 온작 전투유품이 쏟아졌다.
"유해가 또 있습니다."
"유해가 또 있습니다."
"유해가 또 있습니다."
와 교통호 한 곳에 유해가 4구가 묻혀있었다. 분명 다른 곳에서 유해를 옮겨와 가매장한 모습이다.
주방어선에 결사항전한 용사님은 누구일까, 나는 도장을 들고 강릉시내로 들어가 가장 이름있는 도장집에 들어거 이름을 확인했다. 그 이름 "안길동" 용사님이다.
전사자 명단에 확인결과 제10연대가 맞고 정읍이 고향이며 지금 형님이 살고 있고 누나가 살고 있고 동생이 살아 있었다.
"정읍에서 올라온 형제들, 그러나 차후 DNA 검사에 일치하지 않았다."
우리는 해당 집안에 사실을 알렸더니 바로 그 다음날 현장에 오신다며 3남2녀의 형제중 한명을 제외한 모두가 오셨다. 현장을 보고 오열하는 모습, 그 철모에 구멍이 난 모습을 보며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겠는가 우리도 함께 울었다.
감식을 곡 진행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는데 이게 어떻게 되었는지 맞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과학이 아니라는데 누가 뭐라 알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용사님 죄송합니다. 우린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제8군단의 협조하에 강릉 MBC에서 촬영하여 방송을 하겠다 한다.
아니 유가족이 아직 일치하지 않았는데 그걸 방송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유가족의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내용을 거짓으로 하지말고 제한사항을 잘 방송해 달라고 당부하며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지역 방송이 되었다.
"고구마 밭에 잠들어 계시던 공병 용사님"
전사 사실과 같이 이곳 강릉지구는 최초 경계진지 주변에는 발굴을 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38도선을 따라 우일선은 개활지라 제대로 방어화기에 부적합하여 바로 주저항선으로 빠진 느낌이고 대신 좌일선의 정족산을 연하는 곳에 일부 개인호가 남아 있지만 이곳 또한 그렇게 심한 전투없이 산악능선을 따라 구룡령을 지나 광원리로 철수해 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우측 연곡천변의 사단 예비대인 공병이나 제3대대가 먼저 진입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북에서 내려오는 부대들을 엄호하면서 벌어진 전투는 진내에서 백병전을 불사하며 적의 진출을 몇번씩 막아낸 곳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속에 주변이 많이 변하여 논밭으로 경작지화 되면서 전사자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다. 우린 이 일대 민가는 거의 다 찾아가 탐문을 했지만 전쟁은 있었으나 유해 매장지는 모른다는 답변이 전부였다.
그런 어느 가을날이었다.
고구마를 캐다가 수류탄이 나온다고 대민신고가 파출소에 들어가고 파출소에서 출동해 보니 6.25전쟁 당시 것으로 판명되어 우리에게 연락이 왔다.
달려가 보니 고구마를 캐다말고 농부는 놀라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밭이라 파기도 쉽고해서 주변의 흙을 긁어내니 유해가 선명하게 보인다.
"앉아서 전사한 모습"으로 개인호에서 전투를 한 모습 그대로다.
그러니 얼마나 파야하겠는가. 쉽다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엄청 깊게 땅을 굴토해서 겨우 전면 모습을 알아내게 되었는데 신기한 철재 마크가 나왔다. 꼭 해병대 마크같은 것인데 모두가 의아하게 눈이 커져 갔다. 이곳에 해병대 인원이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완전하 흙을 다 제거하고 전문감정을 의뢰한 결과 공병의 뺏지였다. 그러니 이곳에 진지가 공병이었던 것이다. 발굴 사상 부대 마크를 발굴 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우린 지금까지 당시의 부대마크를 제1사단(연천 북방), 제7사단(백석산 전방), 해병대(진동리)등에서 발굴한 적이 있다.
사실 전사에는 이곳 일대는 보병 제10연대의 3대대와 2대대가 점령한 것으로 나오고 공병은 그 안쪽으로 도식 되는데 부대들의 방어 책임구역 도식이 조금 수정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도 그렇 것이 사실 신왕리에 들어가 탐문결과 별로 전투도 없이 운계산으로 넘어 갔다는 것은 그 당시에 들어온 예비연대인 제21연대 제3대대가 동해안쪽으로 2km이상 옮겨지고 공병이 다시 2km이상 동해안쪽으로 점령하고 제3대대가 해변가에 배치되는게 아닌가 싶다.
어젯밤 늦게 비목 작사자이신 한명회 교수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교수님은 내가 만난 몇 안되는 교수님이며 어르신 가운데 가장 믿고 의지하는 분이다.
"아니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화천에 산다고 했던가?"
"철원 신술리 양지말이라는 곳입니다. 광덕산이 있고 각흘봉이 있고 47번 국도가 지나갑니다."
"아 이동 위로 자등현이 있고 와수리가 나오는데......"
"그렇습니다. 그 중간에 상해골 이 있는 동네 맞습니다."
"그래 요즘은 봄이라 농사준비에 바쁘시겠네. 한 2년 하셨나?"
"네 2년차 입니다. 하루에 농사일 반, 교수님이 말씀하신 기록을 남기기 위해 유래발굴과 전사 그리고 지역주민과 참전용사님의 제보 및 증언내용을 정리하는데 반의 시간을 할애하여 일과를 보냅니다. 하지만 얼마나 기대에 미칠지 두렵습니다."
"아니지. 대한민국에 이과장처럼 한 20년을 고급장교가 직접 산과들에서 눈과 발과 가슴으로 체험한 분이 어디있겠어요. 정말 훌륭한 과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교수님 너무 과찬입니다. 국가가 저에게 준 헤택이 더 많습니다. 다행히 살아서 그래도 뭔가 하나를 남보다 열심히 정성을 다하고 정의롭게 하려 했다는 것이 보람입니다."
"그래요. 언제 봄이 익으면 한자리에 만나서 텁텁한 막걸리 한 잔하며 세상 이야기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때는 권장군(권태오 중장)도 함께 연락해서 모이겠습니다."
교수님은 어느날 전화를 하셔 덕소에 볼 일이 있으면 오는 김에 한 번 만나자고 말씀하셨다.
나는 비목이란 노래를 좋아는 하지만 교수님은 전혀 모르는 입장인데 정중한 초청에 혼쾌히 가겠다고 답변을 드리고 '07년도 6월 초에 살고 계시는 곳으로 갔다.
가는 길은 우리가 양평의 용문산과 가평 설악의 선천리등 '51년도 5월 중공군 춘계2차 공세시 격전지를 탐사하고 발굴하기 위한 사전 조사활동이기에 바로 찾아 뵈었다.
조금 마르신 체구에 선명한 눈이 나를 사로 잡으며 이 유해발굴 사업의 취지와 어느 곳을 발굴하는지의 질문에 답변을 드렸더니 정말 이 시대에 해야할 가장 큰 역사적 숙제를 풀어가는 것이라며 무척이나 칭찬을 하신다.
이런 날은 힘이나고 즐겁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비목"탄생의 비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교수님은 ROTC장교로써 소대장을 제7사단 우측 연대지역 GP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으니 당시의 철책안이란 아주 허술한 철조망으로 경계대책을 하고 제대로된 소대장 막사도 없고 나무로 만들어 놓은 토치카같은 곳에서 생활을 했다.
나는 교수님을 직접 모시고 그 당시 소대장을 했던 초소에 올라가 소대원들을 만나보고 격려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곳은 매우 양호한 감제고지로 그후에도 우리의 HID요원들이 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요충지다.
이런 거점은 6.25전쟁 당시 금성천지구 전투시에는 피아간에 서로 확보하려 수없는 쟁탈전을 벌여 많은 용사님들이 전사했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곳이다. 이곳의 전투는 '53년도 휴전 막바지인 중공군 최후공세시 우리 제6사단과 제8사단 그리고 중공군이 주로 했다. 물론 좌우측으로는 수도사단과 제7사단, 제3사단과 5사단이 죽도록 전투를 했다. 그러니 산천은 나무하나 없이 다 불타버려 검게 그을린 거목이 계곡에 쓰러져 있고 잡목들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일어서려 바둥거리는 싯점에 소대장을 나갔다.
지금도 이른 아침에는 금성천변과 북한강변을 연하여 강물이 흐르는 물줄기 위로 하얀 안개가 은하수처럼 앉아 있다가 동쪽의 해가 오르는 아침 10시가 넘어야 벗겨지는 그런 곳이다. 바로 앞에는 북한군 소초가 둔탁한 북방색으로 퇴색한 물감이 흐려진 것처럼 서 있고 어색한 모양으로 북한군이 움직이는 것이 다 육안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는 큰 비가 내린 뒤에는 철책을 보수하고 점검한다는 이유로 금성천강변, 휴전선에 내려가 쌍방이 악수를 하고 담배를 바꾸어 피우던 그런 시절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허니 이곳에서 숨져간 용사님들의 유해는 누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소대장이 머무는 집은 나무로 만들어 원시인이 사는 그런 집이었다.
지피 내의 일과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밤이면 근무하고 낮에는 일반적인 근무와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비가 온 뒤에는 휴전선의 목책이 빗물에 휩쓸려 나간다던가 무너지는 ㅁㄴ제를 점검하려 쌍방간에 연락을 취하여 공동 점거을 하는데 무슨 통신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성으로 불렀다.
그런데 작전지역이 모두 불타버려 나무가 없으니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것은 대부분 전쟁 유품이 다수다. 철모부터 수통 반합등 개인유품이 있는가 하면 기관총이나 박격포같은 무기들도 보이고 수류탄 박격포탄등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뭐라해도 안타까운 것은 죽은자들의 모습이다.
불과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되다 보니 골짜기는 시체가 모여들어 그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그 밑으로 흘러가는 물은 아무런 느낌이나 불평없이 그저 세월을 담아 흘렀다.
가끔은 여우들이 나타나 '여우'하며 목소리를 내고 가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달빛이 그믐날이면 몹시도 마음이 아파온다.
처음 몇일이냐 설레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젊은 기백에 어찌 이렇게 죽는자들을 내팽게친단 말이냐며 분통도 터뜨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려니 되어갔다.
오히려 더 관심은 북한군과의 대화이며 오늘은 무엇을 맞교환할까가 때로는 더 관심거리였다.
"이 한방의 총소리에 조국은 두동강이고 잘려진 허리에 놀가지는 뛰어 노는데 하얀 달빛아래 멍하니 두 눈 뜨고 계신 저 용사님은 누구의 자식이며 조국은 어디에 있는걸까!"
"바람소리 휭하니 부는 겨울날에는 그 눈속에 파묻히고 곰발이 덥썩덥썩 내딛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면 멧돼지 주둥이가 발가벗은 몸을 물어뜯고 있는 산하"
"이 주검은 나라를 위한 운명이니 찬란한 은하수처럼 알알이 내나라 내 백성 편하길 빌고 빌어 왔다. 철조망으로 허리는 묶여 있고 살벌한 지뢰밭이 갈 길을 막고 있느니 누운 곳이 내 땅이란다."
"칡넝쿨 굽이굽이 등성을 넘는데 졸졸거리는 계곡에는 여름이 익어가고 돌틈에 숨어 있는 능구렁이 한마리 일어서 해빛을 먹는 곳"
"살아서 돌아 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 들리는듯 저 골짜기로 메아리는 사무치는데 진정 사무치는 사랑하는 여인의 입맞춤은 꿈이였다."
"저녁놀이 수평선에 아른 거리고 산모퉁이 돌아 훔칫 뒤돌아서는 노루 한마리,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고향은 저기 함경도요 저기 전라도라, 아니아니 고향은 경상도요 저기 평안도라. 용사야 용사야 너는어디서 왔니 물어보려 다가서려니 그만 발병이 나서 걷지 못단다."
"미워도 한세상 좋아도 한세상이라더니 한 50년 머문 이자리가 고향이요 친구려니 너는 서울 깍쟁이 나는 평양 박치기, 나는 강원도 감자바위 나는 제주도 조랑말이다."
"어머니 아버지 어디 계신교, 얼마나 불렀더니 서산 해는 지고 요단강 건너던 배에 나부끼는 손수건, 그 쌓아논 눈물이 강물되어 철썩철썩 이 한밤을 지키고 나는 또 다시 피눈물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내 어머니."
"한강물 대동강물, 압록강물 두만강물, 낙동강물 섬진강물, 삼천리 금수강산에 비 내리는데 어이 백두산 천지못은 볼 수 없고 백록담에는 어니 하얀 사슴 뛰노는지 알고 싶다."
"원효대사 불러 내 몸을 주어라, 자장율사 모셔와 지팡이를 꽂게 하라. 황해를 건너던 그 청룡을 타고 철조망을 넘어 남과 북을 꽃무지개 하나로 연결해."
"잊은 것은 아닌데 왜 눈물이 날까. 한 없는 기다림은 눈물로 씨앗이 되어 오늘도 광야에 내리리니 조국아 나를 잊지마오, 형제야 나를 기억해."
교수님은 정말 어느날 한 순간에 번쩍 눈이 트였다.
하얀 백골이 나가와 소초장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소대장님, 물 한모금 주구려.금성천에서 일어나 올라섰더니 목이 마르는구려"
"여기 있습니다. 어찌 이 어두운 밤에 혼자 오셨습니까. 함께한 전우는 없습니까?"
"모두가 따라오겠다들 했지요. 하지만 너무 많이 가면 우리 소대장님 힘들테니 내가 가서 문인인사 올리고 오겠다고 다독거리고 홀로 올라 왔답니다."
"선배님은 어디서 싸우다 전사하셨습니까?"
"백암산에 올라 만세 부르고 금성천으로 달려와 교암산 수도고지 바라보며 816고지 밑으로 내려서 중공군과 싸워 이겨 마지막이 되었지요."
"그럼 훅운토령도 알고 등대리도 알고 우두산 황병동도 알겠습니다?"
"저 북한강 물이 핏물로 되던 북한강 교량 폭파도 알고 제5사단 수색대원들이 방탄조끼 입은 체로 강물에 뛰어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던 그 칠흙같이 어둡던 날 하늘에 천둥서리 알고 있지요."
"눈물이 나지않습니다. 만세부르며 흘렸던 그 눈물이 이제는 영원한 후회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를 알고 부활시킬 소대장이 오셨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니 서로 오려고 했지만 내가 대표로 왔습니다. 놀라지는 마십시요. 우리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충성, 선배님 죄송합니다. 그 높은신 뜻 잊지않겠습니다. 한치도 적에게 이 땅을 넘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요."
"우린 바램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목숨으로 지킨 이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 주시고 젊은 우리 병사들 나약하지않게 용기를 살려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여기 수통에 물이 들어 있는데 이걸 가지고 가셔서 기다리는 선배님들께 한 모금이라도 드리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으르렁 꽝, 으러렁 꽝 백암산에 천둥이 일고 한소대장은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보니 멀쩡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심상찮은 느낌에 개인총기를 휴대하여전령을 대동하고 지피 울타리선을 점검하러 나갔다.
그런데 웬일 지금까지 뵈 못했던 하얀 물체가 소초 가까이에 보이는 것이다.
다가서서 보니 진골이었다.
지금까진 한소대장은 어디서 보였던 해골 1점을 소초장 들어오는 문 앞에 모셔놓고 있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국적도 피아도 모른다.
그저 보이기에 싫지않아서 모셔와 수호신처럼 나올 때에 경례 올리고 임무를 마치고 들어오면서 경례를 올려왔는데 어이 오늘 아침의 느낌은 고향이 그리워지고 부모형제가 그리워지는 애절함이다.
교수님 고향은 함경도다. 일제가 함흥 원산을 발판으로 만주공화국을 위성국으로 점령하려 그 군사 경제적 받침이 되는 군수산업을 이곳에 융성시켜 잘 살았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쏘련군이 들어오고 북한군이 진입하면서 광복이란 꿈은 사라지고 소비에트연방의 부속물처럼 세계공산화를 위한 혁명의 한 축으로 전락하는 모습에 실망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런 세월이 벌써 70년이 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