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5]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④
1885년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했는데, 두 선교사의 행보가 달랐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말을 타고 한양으로 가서 입국 첫날밤을 보낸 반면, 아펜젤러는 인천에서 첫날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교롭게도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지역으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그리고 대상으로는 지배층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선교를 하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인천을 중심으로, 일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천과 강화도에는 감리교회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습니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한 달간 지내면서 예배를 드렸고 그곳에서 내리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강화도는 서양 세력이 통상을 위해 개항을 요구하면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났는데, 그만큼 조선의 중심 한양으로 들어가기 쉬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 사건을 통해 강화도 사람들은 피해도 많이 당했고 마을들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선교 요충지가 되었고, 감리교회가 특히 많이 세워진 지역이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특히 성경번역에 힘을 썼으며, 배재학당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선구자 역할도 했습니다. 성경 외에도 가르친 분야도 많았는데, 영어, 한문, 천문학, 역사, 지리, 생리, 수학, 수공 등을 가르쳤습니다. 정규 과목 외에도 연설, 강연, 토론 활동이 있었고, 운동으로는 야구, 농구, 축구, 정구 등을 가르쳤습니다. 배재학당을 통해 ‘협성회’라는 토론모임도 생겼고, 아펜젤러는 독립협회 서재필과 윤치호를 강사로 세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나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