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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05. [역경의 열매] 안정복 (1-14) 우여곡절 많았던 내 삶, 하나님과 만남이 최고의 열매
40년 넘게 매일 새벽예배로 하루 시작
성공 밑돌이 됐던 ‘미가엘 찬양반주기’
음향 기기 인력 부족한 목회자에 도움
11일 서울 은평구 EM미디어에서 만난 안정복 대표. 안 대표는 “크리스천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사업을 벌였다”며 “내가 이룬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말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매일 새벽 2시면 눈을 뜬다. 물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고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뒤 교회로 향한다. 40년 넘게 출석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도착하면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은 새벽 4시쯤. 예배당에 앉아 기도를 드리면서 새벽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1950년대에 태어나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겪은 내 또래 대다수가 그렇듯 내 삶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성공과 실패가 떨어질 수 없는 짝패처럼 여겨질 때가 적지 않았다. 뭔가를 이뤘다고 생각할 때 고난이 찾아왔고 절망이 삶을 집어삼킬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 희망이 움트곤 했다.
사업가로 성공을 거뒀지만 그것은 내 힘으로 일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역사였다. 성공의 밑돌이 됐던 제품은 ‘미가엘 찬양반주기’였다. 1991년 개발한 이 제품은 음향 기기가 없거나 인력이 부족해 사역에 어려움을 겪던 개척교회 목회자, 해외 선교사에게 요긴한 물건이 됐다. 찬양반주기를 볼 때마다 이런 상념에 젖곤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품으로 성공을 거뒀으니 크리스천 사업가로서 이보다 더 큰 보람은 느끼기 힘들 것이라고.
내 고향은 전남 화순이다. 청풍면 대비리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는데 그야말로 두메산골이었다. 100가구 정도가 살던 이 마을에서 부모님은 사시사철 농사를 지었다. 고구마 보리 쌀….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이 굶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해는 6·25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이었는데 동네엔 먹을 게 없어 배를 곯는 이가 많았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은 끼니 걱정을 하진 않았다.
유년기에 나는 동네에서 첫손에 꼽히는 문제아였다. 마을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내 이름이 용의 선상에 첫 번째로 오르곤 했다. 수박 서리나 참외 서리를 하다가 들켜서 야단을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안의 큰아들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는데 주말이 너무 싫었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항상 소 꼴을 베러 들판에 나가야 했다. 아들을 일꾼처럼 부린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자식 교육이 우선인 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산학원이 생겼는데 어머니는 나를 이곳에 보냈다. 어머니의 이런 교육열 덕분에 공부도 제법 잘할 수 있었다. 우등상도 간간이 탔는데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과학이었다. 훗날 전자 제품을 고치고 만들면서 밥벌이를 하게 된 것도 이때 생긴 관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년기를 회상할 때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교회에 다닐 수 없었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불교 신자였고 내가 살던 동네에서 반경 4㎞ 이내엔 교회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교회에 나갔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그랬다면 더 빨리 하나님을 만나고 잊지 못할 추억도 더 많이 생겼을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흘러간 과거를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대신 하나님은 훗날 결국 나를 찾아오셨다. ‘역경의 열매’ 코너의 주인공이 된 뒤 생각해봤다. 내가 역경 끝에 거머쥔 열매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단 하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약력=1953년생, 여의도순복음교회 사회사업선교회·실업인선교연합회·장로회장 역임, 굿피플 회장 역임, EM미디어 대표
* [역경의 열매] 안정복 (1) 우여곡절 많았던 내 삶, 하나님과 만남이 최고의 열매
* [역경의 열매] 안정복 (2) 신앙의 씨앗 뿌린 미션스쿨… 늘 마음속엔 예수님 존재
* [역경의 열매] 안정복 (3) TV 수리 잘한다는 소문에 손님들 발길 이어져
* [역경의 열매] 안정복 (4)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은 아내를 만난 것"
* [역경의 열매] 안정복 (5) 큰 빚에 죽을 결심… 조용기 목사님 설교 이끌려 교회로
* [역경의 열매] 안정복 (6)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던 시절, 교회는 내 마음의 안식처
* [역경의 열매] 안정복 (7) 교도소 찾아오신 하나님… 놀라운 은혜와 신앙의 힘 확인
* [역경의 열매] 안정복 (8) 오병이어 기적 꿈꾸며 미가엘 찬양반주기 '5025' 출시
* [역경의 열매] 안정복 (9) 해외선교 나갈 때 필수품 1호가 된 '미가엘 찬양반주기'
* [역경의 열매] 안정복 (10) 소외된 이웃에 나눔 실천하며 하나님 사랑 전해
* [역경의 열매] 안정복 (11) 장로 된 후 나눔 더 실천… 교회에도 최선 다해 헌신
* [역경의 열매] 안정복 (12) 굿피플 회장 취임… 나눔의 뜻 실천하며 보람과 기쁨 커
* [역경의 열매] 안정복 (13) 미가엘 찬양반주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성물'
* [역경의 열매] 안정복 (14·끝) 꿈 향해 우직하게 달려온 70년 삶 "온전히 하나님 덕분"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역경의 열매] 안정복 (2) 신앙의 씨앗 뿌린 미션스쿨… 늘 마음속엔 예수님 존재
행상으로 학비 마련한 어머니 덕에
어려운 환경이지만 숭의실업고 입학
채플 참여하고 약식 세례도 받으며
어슴푸레하게나마 예수님 알게 돼
안정복 EM미디어 대표가 광주 숭의실업고등학교 재학 당시 찍은 증명사진.
유년기의 골목대장 기질은 10대가 돼서도 여전했지만 문제아로 살진 않았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 중 몇몇은 담배를 피웠지만 나는 아니었다. 종종 말썽은 부렸으나 큰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덩치가 큰 편이었고 힘도 셌지만 친구들과 주먹다짐을 하지도 않았다. 화가 나면 종잡을 수 없는 내 성격을 잘 알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참으려고 했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광주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들어간 학교는 숭의실업고등학교. 당시만 해도 내가 나고 자란 전남 화순에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다들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니 고교 진학은 언감생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농사만으로는 자식들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광주 금동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외삼촌으로부터 저렴하게 옷을 사서 그것을 되파는 일을 했다. 세상 많은 사람이 그렇듯 어머니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큰 행운 중 하나는 숭의실업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선생님이 한 분 있는데 바로 김영근 선생님이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얼른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야 했지만 선생님 탓에 자주 버스를 놓치곤 했다. 선생님의 기도 때문이었다. 제자들을 신앙인의 길로 이끌기 위해 선생님은 종례를 할 때마다 5분 넘게 기도했다. 때로는 오랫동안 설교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선생님이 미워서 친구들과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기도 했다. 학교 인근 야산으로 소풍을 갔을 때 일이다.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헹가래 친 뒤 땅바닥에 떨어뜨리기로 했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선생님은 곧바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나는 친구들과 줄행랑을 쳤다. 선생님은 다쳐서 다음 날 수업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그때 한심하게 우리를 쳐다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기억한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 텐데….
어쨌든 그렇게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당시엔 많은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는데 나는 치과에서 일했다. 막연하게 치과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이것이 그때 내 장래희망이었노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고등학교도 힘들게 다니는 주제에 의사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고교 시절이 내게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만 꼽자면 바로 신앙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채플에 참여했고 약식이었지만 세례도 받았다. 불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기에 기독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지만 미션스쿨에 다닌 덕분에 어슴푸레하게나마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것은 아니다.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때 내 마음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것 같다. 훗날 숱한 고난 끝에 서울로 상경했을 때 교회부터 떠올랐던 것은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알게 된 예수님의 존재 때문이었다.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내가 그렇듯 그때의 경험이 훗날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3) TV 수리 잘한다는 소문에 손님들 발길 이어져
상고 나왔지만 은행 일 적성 맞지 않아
전자제품 수리 학원에서 1년간 수강 후
외삼촌 제안으로 전자제품 수리점 열어
안정복 EM미디어 대표가 과거 어머니와 찍은 기념사진. 그의 어머니는 20여년 전, 76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미래는 막막하기만 했다. 나 같은 실업계고 상과 졸업생은 은행에 입사해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쪽에서 밥벌이를 하는 건 내 적성과 맞지 않다고 여겼다. 고민 끝에 각종 전자제품의 원리와 수리법 등을 배울 수 있는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광주에 있는 ‘광주RTV학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 외갓집엔 소니(SONY)에서 만든 라디오가 있었는데 그 라디오를 갖고 노는 게 정말 행복했다.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이런 쪽에 나의 달란트가 있음을 일찌감치 알았다.
광주RTV학원은 4년제 대학 전자공학과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1년간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곳이었다. 학원에 다니는 내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오전 8시30분까지 학원에 가서 오후 4시까지 공부를 했다. 진공관 앰프나 라디오를 만들었다. 내 손을 거친 앰프나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할 땐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그때를 생각하면 항상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옷가게를 하던 외삼촌한테서 의류를 넘겨받아 이웃들에게 팔았다. 칼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도, 푹푹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도 어머니는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을 나서곤 했다. 큰아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신념이었다.
학원에서 1년간 공부한 뒤 비슷한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학원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금동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외삼촌한테서 연락이 왔다. 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사업 아이템은 전자제품 수리점. 학원에서 갈고 닦은 내 실력 덕분에 가게는 금세 자리를 잡았다. 어떤 제품이든 깔끔하게 수리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소문을 듣고 가게를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엔지니어였다. 학교에 음향 시설을 설치하는 일까지 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 할 순 없었다. 국방의 의무를 져야 했다. 혈압이 높았던 탓에 현역이 아닌 방위로 군 생활을 했다. 그리고 병역 의무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광주 광산구 지산동에 전자제품 수리점을 열었다. 사업 비용은 아버지가 소를 팔아 번 돈에 외삼촌이 지인에게 보증을 서서 준비한 돈을 보태 마련할 수 있었다. 가게는 장사가 잘됐다. 그 무렵 우리나라엔 흑백 TV 보급률이 치솟고 있었다. TV를 수리해주거나 서울 도매상에서 TV를 구입한 뒤 그걸 되팔아 돈을 벌었다. 결국 외삼촌한테 빌린 돈을 개업 8개월 만에 갚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일군 작은 성공 스토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준 달란트 덕분이다. 당시 나는 내 실력을 믿었기에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가게를 차리고 1년쯤 흘렀을 때 또 다른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광주의 한복판인 금남로에 가게를 열기로 했다. 돌아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던 시기였다. 진짜 재밌었던 시절이었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4)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은 아내를 만난 것”
학원 다니던 시절, 옆방에 살던
한 동갑내기 여성이 만들어 준
가지나물을 인연으로 연애 시작
집안 차이로 반대 있었지만 극복
안정복 EM미디어 대표가 1977년 12월 4일 광주의 한 예식장에서 찍은 결혼 사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원에 다니던 시절 광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내가 살던 곳 옆방에도 자취생들이 있었다. 어느 날 그중 한 동갑내기 여성이 내게 가지나물을 주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자연스럽게 반찬을 준 그 여성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우리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그 여성이 바로 지금의 내 아내다.
또래 친구들보다 결혼을 빨리 한 편이었다. 생활이 안정돼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결혼 준비를 할 때 어머니가 반대하셨다. 예비 며느리가 전남 장성의 잘나가는 집안 막내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집에서 자란 여성이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내게 시집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나는 어머니를 설득했고 결국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백년가약을 맺은 날짜는 1977년 12월 4일. 돌이켜 보면 아내를 만난 것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내는 꼼꼼한 사람이고 집안의 맏며느리의 역할도 충실히 했다. 자식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요리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음식을 잘하는 아내를 둔 탓에 아무리 유명한 식당에 가도 만족하지 못하게 됐으니까 말이다. 내겐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이 최고의 밥상이다. 아내를 생각하면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우리 부부는 광주 광산구 지산동에 있던 내 가게의 단칸방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1년 뒤 아들이 태어났고 그즈음 광주의 중심인 금남로로 가게를 옮겼다. 장사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직원도 2명이나 뒀다. 서울 도매상에서 전자제품을 구입해 되팔고 TV 라디오 전축 등을 수리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금남로에 매장이 자리를 잡아갈 때쯤 잊지 못할 사건이 터졌다.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얼룩을 남긴 그 사건의 한복판에 내가 있었다.
그때 금남로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총이나 수류탄을 들고 다니던 앳된 얼굴의 청년들, 헬리콥터에서 울려 퍼지던 계엄군의 목소리, 사람이 가득했던 버스 안에서 터진 최루탄….
정말 너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세상을 등졌다. 신산했던 그 시절, 세상을 떠난 사람 중엔 내 친구도 있었다. 총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시민군이었던 그 친구는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계엄군에게 잡혀 머리에 곤봉을 맞고 한 달 뒤 뇌출혈로 숨을 거뒀다. 내가 더 강하게 만류했다면 그 친구는 죽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렇게 폭풍 같던 1980년의 봄이 지나갔다. 나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경으로 오직 일에만 모든 것을 집중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만약 지금 청춘의 터널을 통과하는 이들이 있다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도전하라는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꿈을 꾸라는 것이다. 목표를 정하고 우직하게 그 길을 걸어가면 언젠가는 누구든 꿈을 이루게 된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5) 큰 빚에 죽을 결심… 조용기 목사님 설교 이끌려 교회로
동네 형 보증 문제로 막대한 빚 안아
아내 위로에 마음 다잡고 서울 상경
새로운 삶에 자신 없어 절망하던 중
TV에서 보던 조 목사님 설교 떠올라
안정복(왼쪽) EM미디어 대표가 아내와 함께 1979년 큰아들이 돌을 맞은 것을 기념해 찍은 가족사진.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광주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내 인생의 첫 번째 고난이 찾아왔다. 광주 금남로에서 전자제품 매장을 운영하던 시절, 자주 어울리면서 무람없이 지낸 형들이 있었다. 나보다 두세 살 많은 형들이었는데 어느 날 형들이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워낙 친했던 사이였기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부탁을 들어줬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결국 내가 덤터기를 쓰게 됐다. 아파트 한 채 가격 정도 되는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됐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 덕분에 간신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내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다 정리하고 새로 시작합시다. 서울로 갑시다.”
서울은 내게 너무 낯선 도시였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광주에서는 신용을 잃은 사업가로 전락했으니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이들은 전남 화순 본가에 맡기고 아내와 서울로 상경해 종로구에 집을 구했다. 1981년 2월쯤이었다.
당시 지인이 세운상가에서 전자제품 조립 매장을 운영 중이었는데 나는 거기에 직원으로 들어갔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셈이었다. 과연 내가 재기할 수 있을까.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광주에서 사업을 할 때 나는 여동생이 모아놓은 돈까지 내 사업 자금으로 끌어다 썼다. 한데 여동생이 결혼을 앞둔 시기가 왔고 오빠로서 도움은커녕 빌린 돈도 갚지 못하는 처지가 되니 얼마나 스스로 한심스러웠겠는가. 나는 용산역에서 청량리역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한강이 보이면 기차에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한강이 나오지 않았다. 용산에서 청량리로 가는 길엔 한강이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시골 촌놈인 탓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시절 나는 정말 외로웠다. 절망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6개월쯤 흐른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생각이 났다. 그즈음 주일 아침이면 TV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가 방송되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함께 30-1번 버스를 타고 교회로 향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것 같다. 허튼 생각을 할 수 없게 하려고, 도전하는 삶을 다시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조 목사님을 통해 나를 교회로 부르셨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서 새벽 기도는 집 근처에 있던 하나로교회에서 드렸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아주 높은 곳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소리였다.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기에 너를 실패하게 만들었다. 율법과 계명을 지켜라. 말씀을 지켜라. 만약 이 약속을 지킨다면 나는 네 삶을 창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 음성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잠깐 기도를 드린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예배당엔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시간은 1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다. 나는 다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니 담대하게 내 인생을 다시 마주할 용기가 생겨났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6)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던 시절, 교회는 내 마음의 안식처
쉬우면서 힘 있는 조용기 목사님 말씀
엄청난 영적 감동으로 큰 위로 받아
안정복 EM미디어 대표를 신앙인의 길로 이끈 조용기 목사. 안 대표는 조 목사에 대해 “항상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목회자였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처음 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많은 성도가 한날한시 같은 장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금방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예배당에 앉아 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말씀 하나하나가 전부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목사님이 선포하는 말씀은 쉬우면서도 파워가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영적 감동이 어마어마했다. 힘이 됐고 위로가 됐으며 희망이 됐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절 많은 사람이 목사님의 말씀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교회의 모판과도 같았다. 나를 포함해 그 시절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조 목사님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내 마음엔 여전히 조 목사님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내 휴대전화에는 조 목사님의 설교 120편을 정리한 녹음 파일이 담겨 있는데 지금도 틈틈이 이 말씀들을 찾아 듣곤 한다.
그즈음 내 신앙이 지금처럼 굳건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닫게 됐다. 사도신경에 담긴 뜻이 성경 전체를 관통한다는 것이었다. 사도신경의 의미를 되새기니 성경 속 숱한 기적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성령 충만’의 뜻을 깨닫진 못했다. 갈급한 마음에 기도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때때로 금식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던 시절, 내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믿음 덕분에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었다. 광주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서울에 온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나의 밝은 표정을 보고 의아해 했고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줬다.
“너 예수님 안 믿지? 예수님 믿으면 다 알게 돼.”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만 이때부터 내 삶이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내 앞엔 내 생애 가장 큰 역경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주민등록증 갱신을 하러 파출소에 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내가 사기 혐의로 기소 중지 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광주에서 사업을 하던 시절 상호신용금고에서 받은 대출금 일부를 갚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그길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고 다음 날 미결수 신분으로 광주로 이송됐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광주로 향하던 날 아침, 면회를 온 아내가 말했다.
“여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러셨어. 모든 걸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내의 말이 큰 힘이 됐지만 앞날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광주로 내려가면서 성경책 하나를 챙겼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기 전, 사나흘 정도 광주의 한 경찰서 유치장에서 생활했는데 당시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부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제발 나를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구해 달라고. 나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7) 교도소 찾아오신 하나님… 놀라운 은혜와 신앙의 힘 확인
텃세로 분위기 살벌한 감방 생활이지만
첫날부터 “함께 기도드리자” 예배 인도
며칠 만에 수감자 모두 동참하는 은혜
안정복 EM미디어 대표의 20대 시절 증명사진.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낸 그는 20대 시절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수감 생활의 시작은 비참했다. 미결수 신분인데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고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예닐곱 명이 함께 생활하는 감방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텃세에 시달렸다. “고개 숙여”라는 고함과 함께 그릇이 날아왔다. 내 자리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변기 옆이었다. 그런 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이 됐다. 나는 함께 수감된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함께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다들 황당해 했다. 그런데 수감자 3명이 나와 함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새벽이면 홀로 일어나 기도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며칠쯤 흐르고 나니 수감자 전체가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에도 동참하게 됐다는 점이다. 내가 있던 감방은 광주교도소의 ‘기독교방’으로 알려지게 됐다. 신기해하는 교도관과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혹시 목사님이신가요?”
“아뇨. 저는 집사도 아닙니다. 그냥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교도소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문제는 내가 계속 방을 옮기게 됐다는 점이었다. 4번이나 방을 옮겼는데 그중엔 10대 수감자만 있는 곳도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다들 덩치도 크고 인상도 무서웠는데 나는 그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야, 다 모여! 우린 앞으로 함께 예배를 드릴 거야.”
처음엔 아이들 모두 어이없어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하나둘씩 예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면서 신앙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1심에서 나는 징역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변호사도 없이 나 혼자서 항소심을 준비했다. 하나님만 믿고 가보자고 생각했다. 항소심 전날 꿈에 예수님이 나왔다. 화려한 거리에 하얀 옷을 입은 예수님이 나를 보면서 물을 한 잔 따르라고 하셨고, 나는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나는 꿈에서 본 그곳이 천국이라고 확신했다.
좋은 꿈을 꾼 덕분인지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할렐루야”를 3번 외쳤다. 8개월간의 수감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정리를 위해 교도소에 돌아오니 교도소 전체가 그야말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축하 메시지가 쇄도했다. 내가 있던 감방을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이도 많았다. 나는 수감자들에게 외쳤다.
“봐라. 기적이 일어났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다.”
교도소 생활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그중 으뜸은 내 신앙의 크기와 두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됐다.
출소한 뒤 나를 사기 혐의로 고소한 상호신용금고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교도소에서 정말 큰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나의 말에 직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8) 오병이어 기적 꿈꾸며 미가엘 찬양반주기 ‘5025’ 출시
제품 설계 마쳤으나 돈 없어 금식기도
여동생과 지인 도움으로 첫 제품 탄생
주님께 영광 드리는 일 하겠다고 결심
미가엘 찬양반주기의 초기 모델 모습. 오병이어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품에 ‘5025’라는 글씨를 새겼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각종 전자제품을 조립하는 세운상가 매장에서 일하던 시절 내겐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은 꿈이 있었다. 직접 만든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회사를 차렸고 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첫 번째 목표는 이동용 앰프였다. 설계까지 마쳤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나는 너무도 가난한 사업가였다. 무작정 기도원에 들어가 3일간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곤궁한 처지에도 표정이 밝은 나를 동생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형님, 금식하면서 저 모르게 밥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거니 기쁠 수밖에.”
실제로 기도원에 열심히 다녔더니 돈이 생겼다. 처음엔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이 어느 날 사업에 보태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오빠를 위해 보험을 해지해서 마련한 돈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트랜지스터 같은 부품을 살 돈이 부족해 다시 기도원으로 갔다가 돌아오니 이번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너 앰프 만든다며? 내가 다 사줄게. 얼마면 되는 거야?”
그렇게 사업가로서의 내 삶은 서서히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옥탑방을 전세로 얻은 뒤 절반을 공장으로, 나머지 공간은 가정집으로 사용하다가 서울 은평구 신사동 2층짜리 주택을 매입했다. 서울에 처음으로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문패를 내걸게 된 것이다.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서울에 집을 살 만한 여윳돈은 없었다. 무리해서 대출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내가 갚을 수 없는 돈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든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거란 믿음이 있었다.
당시 만든 제품은 디스코 룸바 차차차 같은 다양한 리듬이 탑재된 ‘리듬박스’였다. 시장에 내놓자마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다른 회사에서 만든 리듬박스와 달리 우리 회사가 만든 제품엔 묵직한 베이스 소리까지 가미돼 있었다. 리듬박스의 인기 덕분에 8개월 만에 대출금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은행 직원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즈음 한 업체의 요청을 받아 노래방 반주기를 만들어 큰돈을 벌기도 했다. 로열티로만 수억원을 벌었다. 한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크리스천이 대중가요 연주 기계를 만드는 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세상의 물건’만 만들면서 재물만 탐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기도할 때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너무 괴로웠다.
결국 나는 로열티를 거절하고 제조 기술을 전부 이전해줬다. 그러면서 크리스천만이 할 수 있는 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민 끝에 떠오른 것이 찬양반주기였다. 개척교회 목회자와 해외 선교사에게 든든한 동역자가 돼줄 도구, 음향 기기나 반주자가 없어 애를 먹는 목회자들에게 가장 요긴한 물건이 돼줄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미가엘 찬양반주기다. 제품명에 ‘5025’라는 숫자를 넣었던 것은 이 제품이 성경 속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일들을 만들어나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찬양반주기를 만들었다. 1991년의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9) 해외선교 나갈 때 필수품 1호가 된 ‘미가엘 찬양반주기’
제품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오지에서 사역하는 목사님들께 선물
좋은 품질 알려지며 공전의 히트 기록
24시간 찬양 반주에 한 생명 살리기도
안정복(오른쪽) EM미디어 대표가 1990년대 중반 극동방송 라디오 부스에서 찬양반주기를 사용하기 전 선곡표를 검토하고 있다.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만들어 우선 국토 최남단 제주도와 마라도에서 사역하는 목사님과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에게 각각 한 대씩을 선물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만든 물건이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미가엘 찬양반주기는 사업 아이템으로도 훌륭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케 한 제품이기도 했다. 가령 마라도로 보낸 찬양반주기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다. 그 교회 인근엔 낭떠러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남성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에서 24시간 흘러나오는 찬양 반주기 소리에 호기심이 동해 교회를 찾았고, 그는 교회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보다가 예수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환상을 보게 됐다. 너무 두려워 그는 교회 사택 문을 두드렸다. 목사님은 사업 실패 탓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그 남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함께 기도합시다. 찬양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남성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사업에 매달려 재기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영접한 것은 불문가지다.
이렇듯 미가엘 찬양반주기 덕분에 내가 경험한 은혜의 에피소드는 한두 개가 아니다. 나는 찬양반주기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국민일보를 포함한 교계 매체에 꾸준히 광고를 실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극동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사용되면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됐다. 당시 극동방송에서는 평일 정오에 국내 목회자들이 참여하는 ‘라이브 찬양’ 코너가 있었는데 이때 반주를 맡았던 것이 미가엘 찬양반주기였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대단해 방송이 전파를 탈 때면 방송국 전화기가 쉴 틈 없이 울리곤 했다. 찬양반주기의 인기도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이 제품을 선교지에 보내고 싶다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후원도 이어졌다.
물론 제품을 내놓자마자 판매가 잘 됐던 것은 아니다. 꾸준히 광고를 하고 이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찬양반주기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다. 많을 때는 한 달에 500대 이상 팔리기도 했다.
명품은 세월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계속 다듬고 고치면 그 제품은 언젠가 명품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미가엘 찬양반주기가 그런 경우다. 그것은 한국에만 있는 독보적인 제품이었다. 언젠가부터 선교사들은 이 제품을 이렇게 부르곤 한다. 해외 선교를 나갈 때 챙겨야 할 필수품 1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찬양반주기를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직접 만든 제품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나의 꿈을 실현할 도구였다. 밤낮없이 나는 이 제품에 매달렸다. 주야장천 찬양반주기 생각만 하면서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보따리 싸서 그냥 집에서 나가라고 타박하기도 했었다.
찬양반주기를 만든 뒤 심지어 이런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다. ‘이 제품은 세상에 내놓기 싫다.’ 왜냐하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만 보고 싶고, 나만 즐기고 싶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10) 소외된 이웃에 나눔 실천하며 하나님 사랑 전해
어려운 이웃 섬기겠다는 약속 지키려고 사업 초창기부터 나눔의 뜻 실천 노력
선교회 회원들과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결핵원 나환자촌 등 찾아 봉사활동 펼쳐
안정복(왼쪽) EM미디어 대표가 1996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에 피택된 뒤 여의도 교회 앞에서 아내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미가엘 찬양반주기 덕분에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국내 많은 업체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때도 우리 회사만큼은 건재했다.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됐다. 해외 한인교회나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수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달러의 가치가 갑절이 됐으니 1대를 팔면 2대 값을 벌 수 있었다. 미국 교포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야말로 불황 속 호황이었다. 꾸준히 제품을 업그레이드했고 새로운 모델을 내놓을 때마다 반응이 엄청났다.
다른 업체에서 미가엘 찬양반주기 같은 물건은 아예 내놓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미가엘 찬양반주기가 거둔 성공의 이유로는 여러 개를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멜로디였다. 멜로디가 뚜렷하게 들리는 게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화음이나 전반적인 소리를 꾸미는 여타 사운드라고 생각했고,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현재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작업은 끊기지 않고 반주가 흘러나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A라는 곡과 B라는 곡이 있을 때 그 사이에 어떤 여백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듣는 이의 감흥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게 지금의 목표다.
과거 찬양 반주기 작업에 몰두하면서 동시에 다른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사업에만 모든 것을 집중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다. 광주에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1981년 서울로 상경했을 때 나는 ‘밑바닥의 삶’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다. 땡전 한 푼 없이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었다. 그때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사업 초창기부터 나눔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교두보가 돼준 곳은 내가 출석하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시작은 교회에서 국내 선교를 담당하는 기관 중 하나인 사회사업선교회였다. 선교회 회원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보육원이나 양로원, 나환자촌을 찾아다녔는데 그중 잊을 수 없는 장소가 경기도 고양의 벽제결핵원이다.
그곳엔 결핵 환자가 50명쯤 있었다. 매주 가서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물질을 나누었다. 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과거 결핵원을 방문한 이들은 행여나 결핵에 감염될까 조심스러워 했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팀원들은 아니었다. 함께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때론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격의 없이 어울리니 환자들도 우리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4년 가까이 벽제결핵원을 수시로 방문했다. 언젠가 그곳에 갔을 땐 환자들과 의료진이 내게 감사패를 선물하기도 했다. 나는 다른 물건은 다 버려도 그 감사패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들과 나눈 사랑과 위로의 시간을 잊을 수 없으니까, 잊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사회사업선교회 부회장과 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나눔의 기쁨을 실감하고 선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사업이 얼마간 어려움을 겪던 때에도 봉사 활동엔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96년 장로에 피택된 뒤에는 더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11) 장로 된 후 나눔 더 실천… 교회에도 최선 다해 헌신
작은 교회 세우는 데 도움,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사랑·복음 전하는 등
봉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물질 나누면서 하나님 뜻 전하며 내 믿음 크기도 커져
2016년 9월 5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순복음쌍파울로교회에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새 성전 헌당 감사예배. 당시 예배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연합회 회장이던 안정복 EM미디어 대표도 참석했다.
봉사를 통해 조금의 물질이라도 나누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봉사를 통해 주님을 향한 내 믿음의 크기가 커지는 느낌도 받곤 했다. 꾸준한 활동 덕분에 보건복지부로부터 표창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가 나와 같은 귀중한 경험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하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경기도 동두천에 작은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이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교회 인근 텃밭을 구입해 선물한 적이 있다. 봉사를 하러 갔다가 그곳 성도들이 온갖 나물을 가지고 준비한 식사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난다.
혼자 살던 한 노인의 집에 가서 어르신과 함께 자주 예배를 드린 시기도 있었다. 그 어르신은 자신이 언젠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집 인근 야산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그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성도들과 함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르신의 관을 들고 산을 올랐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 날이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미끄러졌다. 우리는 하지만 끝까지 산을 올라 어르신의 유언처럼 산 중턱에 그의 시신을 묻었다. 나이가 든 지금도 이상하게 그때 생각이 자주 난다. 그 어르신은 지금쯤 천국에 계실까. 하나님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봉사의 장소는 나환자들이 있던 동네다. 한때 천형처럼 여겨지던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우리는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성도들과 대우자동차에서 나온 작은 승용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면 항상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여름엔 엉덩이에 땀띠가 날 정도로 힘들 때도 있었지만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없는 사람, 얼굴 형태가 망가진 사람, 다리가 불편한 사람…. 우린 그들과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느끼곤 했다.
시간이 흘러 1996년 장로가 된 뒤에는 나눔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더 몰두했다. 장로라는 직분은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 자리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가 되고 나는 교회에서 벌이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사회사업선교회 회장을 맡았고 실업인선교연합회 회장으로도 일했다.
장로라면 교회에 물질을 후원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님이 해외 성회를 인도할 때면 동행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 몫의 항공권이나 숙박료 등을 부담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신기한 것은 제법 큰 비용을 들여 해외에 나갔다 오면 그만큼의 돈을 하나님이 곧바로 채워주셨다는 점이다. 가령 일주일 정도 해외 선교를 위해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면 평소보다 매출액이 크게 늘어있곤 했다. 그런 경험이 한두 번 쌓이면서 교회를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물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어차피 하나님이 다시 채워주실 것을 믿으니까, 하나님의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역경의 열매] 안정복 (12) 굿피플 회장 취임… 나눔의 뜻 실천하며 보람과 기쁨 커
지구촌 소외된 이웃 돕는 단체 굿피플
아동 보호, 청소년 교육, 긴급 구호 등
지구촌 곳곳 누비며 다양한 활동 참여
안정복(오른쪽) EM미디어 대표가 굿피플 회장이던 2014년 9월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이영훈(가운데)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와 함께 우리 쿠트만(왼쪽) 주한 이스라엘 대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13년 국제구호개발 NGO인 굿피플 회장에 취임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99년 설립한 굿피플은 지구촌의 소외된 이웃을 돕는 단체로 아동 보호, 청소년 교육, 긴급 구호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곳이다. 나는 회장 취임 이전부터 이 단체의 수석부회장을 맡았던 터라 굿피플을 이끌게 된 것에 어색함을 느끼진 않았었다.
회장에 취임한 뒤 굿피플 이름이 새겨진 조끼를 입고 지구촌 곳곳을 누볐다. 세계의 소외된 이웃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더 커지게 됐다. 기억에 남는 지역이 한두 곳이 아니다. 가령 쓰나미로 쑥대밭이 된 필리핀 지역을 방문했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곳곳에서 진동해 깜짝 놀랐다. 나는 굿피플 임원들과 주민들에게 쌀과 각종 생활용품을 전달했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을 찾아 이 지역 사람들을 상대로 백내장 치료를 후원하는 사역에 동참한 적도 있다. 정말 열악한 곳이었다. 영양실조 탓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수술 도구도 부족했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빛’을 선물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많은 이가 굿피플의 도움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백내장 탓에 양쪽 눈이 모두 보이지 않던 한 아이가 떠오른다.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많은 탓에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한쪽 눈만 치료해줬는데 조손가정에서 살아가는 그 아이의 사정이 너무 딱해 양쪽 눈을 다 치료해주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을 했을 때 그 아이를 키우던 할머니가 기뻐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 손자가 이제 앞을 볼 수 있게 됐네요.”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거 같아요.”
“왜요?”
“손자 학교 보내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1년간 굿피플 회장으로 일했던 시기는 나눔의 뜻을 실천할 때 생기는 보람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실감한 시간이었다. 필리핀에 학교를 세운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100여년 전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와 세운 학교와 병원들이 그렇듯 우리가 세운 시설이 필리핀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이곳의 많은 이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해 달라고.
이와 동시에 국내에서는 홈리스(노숙인) 사역을 전개했다. 주거 지원 사업을 벌이면서 홈리스들을 많이 만났다. 짐작과 달리 그들 중엔 한때 세상에서 잘나가던 사람이 수두룩했다. 의사도 있었고 박사도 있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 큰 좌절을 경험하고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누군가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들은 전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나눔과 봉사를 통해 나는 많은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엄청난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역경의 열매] 안정복 (13) 미가엘 찬양반주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성물’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만들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물건이기 때문
33년간 누적 30만대 넘게 판매하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으로 여겨
미가엘 찬양반주기 최신 모델 모습. 안정복 EM 미디어 대표는 1991년 이 제품을 출시한 뒤 그동안 꾸준히 업그레이드하면서 반주기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나는 내가 만든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제품이면서 동시에 성물(聖物)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만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미가엘 찬양반주기는 밴드 사운드부터 오케스트라 분위기까지 낼 수 있는 독특한 제품이다. 그 어떤 회사도 이 제품의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고 자부한다.
처음 이 제품을 만들 때는 그야말로 중노동, 그 자체였다. 기계에 악보에 적힌 계이름을 하나씩 입력해야 했다.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됐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KBS 악단장을 역임한 김기웅 장로님이 당시 큰 힘이 돼주셨다. 그는 기계에 들어갈 반주의 편곡을 도맡았다. 실력파 뮤지션인 김 장로님이 이 일을 하셨기에 옛날에 만든 반주기에 들어간 반주를 지금 들어도 촌스러운 부분은 발견하기 힘들다. 다행히 나 역시도 음악적인 재능이 얼마쯤 있는 편이어서 반주 사운드를 완성하고 나면 틀린 부분은 없는지, 추가할 소리는 없는지 등을 판단할 정도는 됐다.
물론 처음엔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위탁 판매가 일반적이었다. 기독교 용품을 파는 매장 등에 일단 제품을 납품한 뒤 그것이 팔리면 한참 뒤 판매 대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처음 전국에 있는 기독교 백화점 등지에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납품할 때부터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물건 가져가고 싶으면 돈부터 주시오!”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가엘 찬양반주기는 많은 이가 인정하듯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히트상품이 됐다. 누적 판매 대수가 30만대가 넘는다. 33년간 이 제품을 만들면서 나는 항상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었고 그 사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하셨다.
오로지 제품을 파는 일에만 전념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려운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도시의 개척교회나 두메산골의 작은 교회를 방문해 반주기를 선물하고, 작동법을 가르쳐드리고 그다음엔 함께 기도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곳에 갈 때면 목회자 중엔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
“반주기가 정말 필요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곤 했어요. 그런데 반주기를 만드신 분이 저희 교회에 와서 반주기를 선물하는 일이 생기니 정말 가슴이 벅찹니다. 너무 놀라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열악한 환경에서 주님을 섬기는 교회들을 찾아가 반주기를 선물하는 일을 다시 해보고 싶다. 그리고 요즘엔 사업가로서 새로운 꿈도 꾸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전자 오르간을 만드는 것이다.
반주기도 되고 하나의 악기로서 다른 악기와 합주도 할 수 있고 예배와 관련된 많은 사운드를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제품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내가 그런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는 일이니까, 그동안 그랬듯 하나님께서 분명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게 분명하니까.
***[역경의 열매] 안정복 (14·끝) 꿈 향해 우직하게 달려온 70년 삶 “온전히 하나님 덕분”
가장 큰 힘 돼준 이는 힘들던 시절
위로와 격려 전해준 조용기 목사님
하나님 찬양하는 반주기 만드는 삶
인생 돌아보면서 하나님 은혜 실감
안정복 EM미디어 대표가 서울 은평구 EM미디어 사무실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있다.
70년 넘는 삶을 살면서 많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숱한 고난에 좌절하지도 않으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 덕분이다. 신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게 불문가지다.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 나는 술 마시길 좋아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났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고 꿈을 향해 우직하게 달려갈 수 있었다.
꿈을 품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삶을 사는 데 가장 큰 힘이 돼준 이는 조용기 목사님이다. 조 목사님의 말씀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한국의 많은 교회 중에서 조 목사님이 시무하던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내 삶의 크나큰 섭리였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힘들던 시절에 조 목사님의 말씀은 내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그는 항상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했다. 언제나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나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이가 조 목사님 덕분에 삶의 의지를 다졌을지, 절망의 터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됐을지는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정말 많은 사람이 조 목사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조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나는 그를 깍듯이 모셨다. 아버지처럼 생각했다. 조 목사님은 가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안 장로, 건강 잘 챙겨야 해. 나는 교회 부흥에만 몰두했더니 이제 힘이 다 빠졌어(웃음).”
지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님은 내가 가장 의지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 목사님이 카리스마가 넘치는 한국교회의 영적 거물이었다면 이 목사님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회자다. 화를 내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참아내시는 걸 자주 봤다.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목회 철학을 본인의 삶에서 구현해내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회장을 맡았었다. 남들이 보기엔 초대형 교회의 장로회를 이끄는 자리가 근사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낮아져야 하는 자리, 항상 교회부터 생각해야 하는 자리, 누군가를 만나면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해야 하는 자리, 누구보다 먼저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자리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회장이라는 자리였다.
‘역경의 열매’ 코너를 통해 내 삶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내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게 됐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사업가로서 좌절을 겪고 억울한 수감생활을 한 뒤 하나님을 찬양하는 반주기를 만들게 된 삶. 이런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항상 곱씹고 되씹는 성경 말씀을 소개하고 싶다. 바로 그 유명한 시편 23편 1절 말씀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실제로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셨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해놓고 계신 은혜의 열매들을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