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나는 지게차 조종사 자격증 하나들고 서울의 모 중기업체에 입사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코스 몇 번 돌아 본 게 다였던 시절이다. 그땐 지나가는 지게차만 보면 탱크처럼 어마어마하게 커보였고 그 운전자가 그렇게 대단하게 보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나는 배차사무실 겸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까마득한 선배님들이 배차를 받고 나갈 때면 날 데려가 주지 않을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다 소장님께서 “강 기사 좀 데려가“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선배님 옆에 앉아 달리던 그 기분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는 느낌이었다. 운전석이 높다보니 버스 운전석과 비슷했고, 아래로 승용차들을 내려다보는 즐거움이 대단했다. 당시 지게차의 육중한 풍채는 왜 그렇게 든든해 보였는지 덤프트럭하고 한판 붙어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자격증 하나들고 취직했는데...
지게차가 달리면 모든 차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바빴다. 실은 너무 느려 추월해 간 것이었지만 내겐 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치 숲속에 사자가 나타나면 모든 동물들이 피해 달아나듯 내가 동물에 제왕인 사자가 된 느낌이었다. 초보시절 현장에 도착하면 잽싸게 내려 지게 발을 파이프로 열심히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선배님이 지게차 기사는 지게 발을 잘 벌렸다 오므렸다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곤 쏜살같이 선배님 옆 자리에 앉아 작업하는 걸 뚫어져라 눈에 담았다. 작업을 마치고 돈을 받아 올 때면 내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양 양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선 사무실로 귀환했다. 선배님들이 나누는 작업 뒷이야기는 콜럼버스의 미국 대륙 탐험 이야기보다 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현장에서 처음 지게차를 운전 하던 날 난 그저 뱅글뱅글 돌기만 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도로주행을 하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난 지금까지 그때만큼 긴장되고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해 졸업식이 열리던 2월 시골 학교 안에서 나의 서울 지게차 무용담(?)은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취업 나간 친구 중에 굴삭기 조종하는 친구 다음으로 내가 봉급이 많았으니까~ㅋㅋ 도로 주행 한번 해본 나는 그해 겨울 한 신문사 이사를 하는데 도비 일을 따라 갔다. 이틀 동안 몸으로 때우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임무가 떨어졌다. 춘천에서 서울 천호동까지 지게차를 끌고 오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한 일이라곤 선배님 말을 받들어 지게 발을 오므렸다 폈다하는 일, 그리고 도로에서 핸들 한번 잡아 본 게 다였다. 그런 나에게 춘천에서 서울까지 지게차를 몰고 오라는 것이다. 그 당시 난 춘천과 서울 사이 거리가 얼마나 멀는지, 신호등 무슨 색깔에 출발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주위에서는 사장이 운송비를 아끼려고 나에게 무리한 일을 시켰다며 “너무 한다”고 수군거렸다.
“춘천서 서울까지 운전하고 와”
난 우려와 걱정 속에 전·후진 조작과 좌·우 깜빡이, 액셀과 브레이크 조작을 초스피드로 습득하고 도로로 뛰어 들었다. 내가 모는 지게차는 내차선 네차선이 따로 없을 정도로 좌우를 휘젓고 달렸다. 뒤에서 빵빵 거리는 소리는 수없이 들렸을 텐데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난 오직 내 차선을 찾아 사투를 벌렸다. 문짝도 없었고 한 겨울이었는데도 난 사하라사막처럼 더웠고, 20킬로미터 남짓 달리는 속도는 제트기도 울고 갈 정도로 빨랐다. 도로 약도나 표지판도 모르고 한참을 달리던 나는 어느덧 내 차선을 찾아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무실에 입성 하니 선배님들이 하나 같이 칭찬을 해줬다. 불과 4시간여에 걸친 주행이었지만 난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추위도 잊고 시간도 모른 채 그렇게 첫 장거리 주행을 무사히 마쳤다. 그때는 만원이면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거래처에서 일 전화가 오면 전화 받는 순간부터 시간 체크를 시작했다. 현장에서 작업 할 때 1시간을 넘기면 무조건 1시간씩 추가 요금을 받았다. 지하철 공사장 빔이며 복공판을 옮기는 일을 할 땐 차대수대로 요금을 받았다. 베테랑 선배들은 잠깐 사이에 많은 매출을 올렸다.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엔 나처럼 초보기사도 많았다. 선배님들은 한분 두분 기사 생활을 접고 자기차를 사 나갔다.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처럼 지게차가 흔치 않던 시절, 어느 날 압구정동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한 남학생 녀석이 지게차 속도에 신기해하며 내 차를 따라 잡을 요량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 전 속력(20km)으로 달렸다. 우린 그렇게 압구정 거리를 함께 달렸다. 그 시절 주행하다 지게 발을 앞차 밑에 바짝 밀어 넣을 때면 여성 운전자 같으면 기겁해 차를 앞으로 살짝 빼거나 차에서 내려 뒤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운전대가 손에 익을 무렵 성남의 분당신도시 공사현장에 ‘월대’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내리고 나르고 정신이 없었다.
따라 달리던 압구정동 고교생은...
가끔 게으름을 피우면 업체 총무와 사장이 식권을 두둑이 챙겨 주었다. 당시 식권은 ‘함바’(밥집의 일본말)에서 담배를 빼곤 뭐든지 살 수가 있었다. 공사현장에서는 그야말로 현금과 같았다. 그땐 오전 오후 ‘참’이 있었는데 그 때면 밥집이 잔치집이 되곤 했다. 라면에 국수, 빵과 음료수를 사놓고 술판이 벌어져 왁자지껄 떠들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차에는 업체에서 사준 빵과 음료수가 가득했다. 일을 마치면 고맙다며 웃돈을 주신 분들도 많았다. 20년이 지난 오늘도 난 지게차를 몰고 도로를 달린다. 생계를 위해 달린다. 한 때 사자처럼 늠름하던 시절은 이제 아련한 추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압구정 거리를 함께 달려 줄 그런 녀석은 없다.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여성운전자도, 고맙다고 웃돈을 주는 정겨운 사용자도 없다. 지금에 우리 건설기계 사업자들이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그때 그 시절의 사자가 되어 도로 위를 힘차게 달려보고 싶다~~ www.kungiin.co.kr 대표전화 (02)2209-3800 건설기계신문('10.05.17) |
첫댓글 ㅎㅎ재밌는 글 속에 공감가는 내용과 함께 힘들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네요..이젠 그때 그시절이 안오겠지요ㅡㅡ
저도 90년에 처음 운전할때 이건 뭐 파워핸들도 아니고 클러치에 기아변속까지 정신이 없더군요~
옛날생각나게 잘쓰셨네요.저도89년부터 일했는데요. ㅎ
국가공인자격이 아닌 수료쯩을 남발하니, 문제죠~
지게꾼도 택시+화물차처럼 영업용번호판을 허가제로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
항상 고생하시는 회장님 화이팅입니다,
지게차인 봄날 그리워하며 화합 상생 공존으로 "들불처럼 일어나라.
2017 전국 지게차인 한마음 체육대회 이천시편 많은 참석바랍니다. 10월22일 10시 부발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