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 이지선
정확히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울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이모와 삼촌들도 그 말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엄마의 다섯 형제 자매가 나고 자란 곳은 진도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만 빼고 모두 서울에서 사신다. 차로 5시간이 넘게 걸리던 먼 곳···, 어떻게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일까?
엄마는 여행을 자주 못하셨다. 아버지의 병간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쯤 외삼촌께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잘 살고 있느냐며 서울로 놀러 오라고 하신 것이다. 남편을 먼저 보낸 동생이 염려되어 하신 말씀인 듯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엄마는 서울에 가기로 하셨다. 연세가 많아 혼자서 서울에 가시는 것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엄마는 갑자기 결심을 굳히셨다. 얘기인즉슨 이제 모두 나이가 많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 맞는 말이다.
또 서울 친구 두 명도 이번 기회에 꼭 봐야겠다고 하셨다. 옛날에 물 길러 다닐 때 같이 동무하던 친구들이어서 내 몸 같다고 하신다. 요양원에 계시는 외숙모도 보고 싶다고 하신다. 서울 사는 진도 사람들 다 만날 기세다.
진도 사는 둘째 동생이 엄마를 목포까지 모셔오기로 했다. 목포역에서 기차를 태워 드리는 것은 내 몫이다. 온라인 기차표 확인하는 방법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온라인상에서 끊은 표는 핸드폰에 저장된다. 전달은 기차를 탈 사람에게 딱 한 번만 된다. 사진이 찍히지도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니 절대 짐이 많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떡 하니 떡을 해오셨다. 이걸 들고 어떻게 기차를 타느냐고 투덜댔다. 잔소리 말고 먹어보라며 한 봉지를 건네주셨다. 먹어보니 희멀겋고 투박하게 생긴 것 과는 달리 참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하나 더 먹었다. 오빠들이 진도 떡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며 떡이 좋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오빠들이 좋아하실 거라며 만족해 하신다. 어쨌든 엄마보다 더 무거울 것 같은 떡과 엄마를 실은 기차는 서울로 갔다.
서울에 계실 때도 간간이 몇 번 전화를 드렸다. 그때마다 “나는 잘 있다.” 라며 전화 통화도 길게 하지 않았다. 10일이나 서울에서 지내고 목포로 오셨다. 진도 사는 남동생이 마중을 나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식사 내내 서울기행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애버랜드 야간 퍼레이드는 난생 처음 보는 진기한 광경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하셨다. 몇 해 전 우리 자매들끼리만 갔다 온 것이 죄송스러웠다. 서울은 똑같은 음식이어도 더 맛나다고 했다. 오빠들 건강이 염려 되어 부랴부랴 갔는데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하신다. 좋은 것 보고, 맛난 음식 먹으며 잘 살고있는 오빠들을 직접 눈으로 봐서 안심이란다. 엄마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인다며 엄마나 잘 잘아야겠다고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 후에 부쩍 정리를 많이, 자주 하셨다. 갈 때마다 집이 휑해지는 느낌이었다. 집안 물건 정리가 마무리되자 엄마가 하고 싶었던 정리 목록이 또 생겼었나 보다. 엄마의 서울 여행이 마음을 휑하게 만들지 않아 다행이다.
첫댓글 친척집 방문에는 떡이 최고입니다.
어렸을 때 이모가 서울사는 자식들 집 갈때면 기정떡을 해 가시더라고요.
몇 개 얻어먹은 기억이 납니다.
엄마의 서울 나들이가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참 현명한 어머니를 뵙는 듯 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정리를 못하는 마음 때문에 더 버거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내가 좋아하는 진도가 고향이신가요?
더 친근하고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