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의 '전사2'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아니 수백만 명이 다시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김남주, `전사 2'의 첫 두 연).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1945~94)의 시들은 선명한 메시지와 강렬한 어조로 하여 두드러진다. 김남주가 외세에 대한 거부와 부자들을 향한 증오, 독재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을 노래한 유일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 거부와 증오와 싸움을 노래 바깥의 현실로 옮기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분된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으며,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시인이여')라고 그가 부르짖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고은, `화살')는 선동과 같은 궤에 놓이면서도 훨씬 더 강한 울림을 울린다. 그것은 무기(창:화살)와 대상(압제자:과녁)의 차이가 빚어내는 미학적 거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의 전사와 시인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철의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쓰러지기 불과 보름여 전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김남주는 중심인물인 이재문 등 20여명과 함께 그때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이후 모두 80여명이 검거돼 그 가운데 2명이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른 남민전 사건이란 무엇이었던가.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남민전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예속적 독재권력의 타도와 외세의 축출, 그리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목표로 한 비밀결사였다. 남민전이 가장 직접적인 모델로 삼았던 것은 베트남 통일의 원동력이었던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이었으며, 국내적으로 그것은 인혁당과 같은 자생적 사회주의 결사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검거 당시 아직 준비위 차원에 머물러 있던 남민전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 명의의 반독재 유인물 살포에 주력했으며, 김남주와 박석률 등 남민전 전위대의 전사들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담을 넘기도 했다. 남민전 동지이자 김남주의 부인인 박광숙씨에 따르면 남민전은 무엇보다도 반독재 민주화투쟁 단체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공포통치의 시대에 남민전은 교사와 노동자, 학생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운동체였다. 강령에 있어서는 반제국주의와 노동해방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반독재·반유신투쟁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김남주의 대부분의 시는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방에서 쓰여졌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이라고 규정한 그에게서 선동의 효과가 미학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와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글에서 그는 그 둘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토를 달았지만, 그것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의 규정과도 같아서 그에게 있어 우선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혁명이었다. 그러나 흥미있는 것은 시보다는 혁명에 기운 그의 선택이 오히려 미적 완성도가 높은 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노래' )
“미군이 있으면/ 삼팔선이 든든하지요/ 삼팔선이 든든하면/ 부자들 배가 든든하고요//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부자들 배도 터지고요.”
(`삼팔선' 전문)
김남주는 하이네,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등 외국 시인들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에서 보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김지하에 이르는 참여적 서정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제국주의/신식민주의, 독재/자유, 자본/민중의 명료한 이분법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절창을 낳았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쓰여졌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가 면회온 친지들에게 불러주거나, 읽던 책의 여백이나 우유곽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간수의 눈을 피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시를 새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김남주는 먼저 석방돼 나와 그의 옥바라지를 계속한 박광숙씨와 출옥 한달여 만에 결혼해서 아들 토일이를 두었다. 노동자들이 1주일에 사흘 금·토·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긴 토일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시인은 가고 뒤에 남은 처자와 함께 그의 고향 해남을 찾는다. 희고 붉은 코스모스, 노랗고 예쁜 벼들, 그리운 이의 손짓처럼 하느작대는 억새로 해서 가을 들판은 따뜻하고 정겨웁다. 해남읍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삼산면 봉학리 그의 생가에서는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마당에 넌 고추와 호박을 돌보고 있다가 어린 손주를 반긴다.
푸른 대숲으로 둘러싸인 집에는 군 청년회에서 만들었다는 시화 패널들이 처마에 걸려 있을 뿐 시인의 생가임을 알리는 이렇다 할 기념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주로 썼다는 사랑채에 그가 옥중에서 보았던 이런 저런 잡지와 단행본들이 먼지에 덮여 쌓여 있다. `수번 2164, 교부일 81. 3. 23, 요납일 81. 4. 22'의 열독허가증이 붙은 책들은 80년대 초의 어느 시점에 얼어붙은 채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시인은 죽어서 망월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가 쓴 시 `망월동에 와서'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5월 광주 희생자 묘역에서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찾았을 것인가. 그의 분신인 토일이와 부인 박광숙씨를 일어나 반기지 못하는 무덤 속의 그를 안쓰러워하며 `전사 2'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해남·광주/글 최재봉, 사진 윤운식 기자
카페 게시글
━━━━━━━ 문학산책
김남주의 '전사2'
해시시
추천 0
조회 54
21.02.14 16:36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