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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피한(避寒)
역사상 대청은 부패로 망하고, 외적(外敵)으로 망하고, 혁명(革命)으로 망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대청이 더욱 무서운 것으로 망했다고 본다. 전체 사회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단련(斷聯, 연결단절)"되었던 것이다.
황제는 민간의 고통을 몰랐고, 관리는 국가의 존망을 몰랐고, 백성은 무엇이 가국(家國)인지를 몰랐다. 몇 가지 괴이한 사건, 몇 개의 단면은 이 제국의 마지막 가면을 벗겨주고 있다.
1
여순(旅順)이 함락되는 날, 집선다루(集仙茶樓)에서는 경극(京劇)을 공연하고 있었다.
1894년 11월 21일, 여순구(旅順口)가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이어진 3박4일동안, 이 성은 인간연옥으로 바뀐다. 총소리, 비명, 곡소리가 진동했다.
다만, 이 혼란과정에 일본병사들은 극히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북과 징을 지면서, 경극을 공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리를 따라갔고, 신가(新街) 집선주루의 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막 전투를 끝낸 병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무대 위에는 200여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생단정말축(生旦净末丑, 경극의 5가지 역할)이 모두 있었고, 징과 북을 치는 사람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노래와 악기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무대 아래는 텅 비어 있었고, 관중은 한명도 없었다.
더욱 궤이한 것은 배우들의 상태였다. 그들의 동작은 기계적이었고, 눈빛은 텅 비었으며,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무대 위에 올려져 조종되는 인형같았다. 그저 익숙한 동작을 반복할 뿐이었다.
일본군은 아직 살아있는 현지사람을 불러서 물어본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답은 황당했다.
이들 경극단은 여순의 관리가 경성에서 불러온 것이고, 원래는 어르신들의 흥을 돋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쳐들어오니 관리들은 토끼보다 먼저 도망쳤고, 이들 극단배우들은 극장안에 버려지게 되었다.
대담했던 몇 사람이 상황을 알아보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혼란스러운 전투와중에 계단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것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경극공연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물어볼지 모르겠다. 이들 경극배우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그러나 한번 물어보겠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성은 함락되고, 관리는 도망치고, 병사들은 흩어졌다. 아무런 호신무기도 없는 예술인들이 사면초가의 외딴 건물안에 갇혀 있다. 나가면 죽고, 남아 있어도 아마 죽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생명의 아마도 마지막이 될 순간을 보낸 것이다.
이것은 마비가 아니라, 절망이다.
진정으로 마비된 것은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공연하라고 경극단을 부른 관리들이다. 조정의 녹봉을 받으면서 성이 함락되기 전에 성을 버리고 도망친 '관리'들이다.
배우들은 그저 버려진 것이고, 그들을 버린 사람이 바로 이런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막의 진정한 편극이다.
2
독일인의 곤혹: 우리는 "중국인의 등에 업혀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청일전쟁(갑오전쟁)에서 패배한 후, 열강들이 중국을 나누어갖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산동에 눈독을 들였다.
1897년, 독일군이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한 후, 100여명의 병사를 보내 일조현(日照縣)을 살펴보도록 했다.
병사들을 이끈 장교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1861-1922)이었는데, 그는 악전고투를 예상했다.
일조현의 성벽은 아주 높았고, 성벽도 아주 튼튼하게 쌓여 있었다. 성벽 위에는 청군(淸軍)의 깃발이 보였다. 이치대로라면, 이 정도 규모의 성을 백여명이 강공을 벌인다면,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할 터였다.
결과는?
독일군의 배가 해안에 도착했는데, 해안의 물이 너무 얕아서 큰 배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병사들은 갑판 위에 서서 고민하고 있었다. 물 속으로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가죽신은 물에 젖으면 아주 괴롭기 때문이다.
이때, 부대를 따라온 선교사가 중국어로 해안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든 물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업고 해안까지 데려다주면 1명당 1은원을 주겠다!
에리히 폰 펜켈하인은 그 말이 너무 천진난만하다고 여겼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성벽위에 서서 보고 있는데, 백성들이 어떻게 적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이 틀렸다.
말이 떨어지자 마자, 해안가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것도 아니었다. 앞다투어 물속으로 뛰어들어 독일병사들을 업기 시작했다.
1은원이면 일가족이 며칠은 배불리 먹을 돈이었기 때문이다.
독일병사들은 이렇게 중국백성의 등에 업혀서 한명한명 일조현성내로 들어갔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저 구경만 했다.
성문은?
열려 있었다.
에리히 폰 펜켈하인은 나중에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읽어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담배 한갑 피울 시간만에 일조성을 점령했다. 모두 이곳이 적의 국가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걸어들어갔다. 즐겁고 아무런 걱정없다."
담배 한갑을 피울 시간(약10-15분).
많은 사람들은 백성들이 우매하고, 무지하고, 기개가 없다고 욕할 것이다. 그러나 각도를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왜 대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조정은 그들의 세금을 거둬가고, 그들의 인력을 징발하고, 매년 수해가 발생해도 도와주지 않았다. 관리들은 그저 긁어가기만 할 뿐, 그들의 생사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주는 은원은 진짜였다. 양식으로 바꿀 수도 있고, 소금을 살 수도 있었다.
조정이 한 약속은? 한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정권과 그 백성들간에 단지 일반적인 수탈만 있게 되면, "국가"라는 개념은 그저 세금을 거둬가는 부호로 바뀌고 만다.
백성들의 냉막함은 그저 조정의 냉막함을 거울이었다.
네가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데, 그들이 왜 너를 나라로 여긴단 말인가?
3
청일전쟁(갑오전쟁)? 들어본 적이 없다.
만일 일조현의 일은 그저 "하층백성들은 잘 모른다"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다면, 이어진 사건은 전혀 원만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에 따라 일본은 중국내 여러 도시에 영사관을 개설할 권리를 얻었다.
1895년, 일본은 호리구치(堀口)라는 외교관을 호북(湖北) 사시(沙市)로 보내 영사관을 개설하고자 했다.
호리구치는 사시에 도착한 후, 현지의 청나라관리를 만나, 온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해 했다.
호리구치는 통역문제인가 싶어, 다시 한번 통역을 통해 말을 전했다: 나는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왔고, 일본영사관부지를 선정하려고 한다.
관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사 말했다: <시모노세키조약>이 뭐지?
호리구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바로 청일전쟁(갑오전쟁)이후에 체결한 조약이 아닌가.
관리들은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갑오전쟁? 들어본 적도 없다.
호리구치는 완전히 멍해졌다.
이건 금방 끝난 전쟁이고, 북양수군이 전멸하고, 배상금으로 2억냥백은을 물게 되었으며, 대만과 요동을 할양한 건이다. 온 나라가 뒤흔들릴 큰 사건인데, 이들 지방관리들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했지만, 대답은 모두 같았다.
그들은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호리구치는 알게 되었다. 청나라에는 관리들에게 정무소식을 전하는 저보(邸報)라는 것이 있는데, 이들 사시의 관리들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국가대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매일 그저 백성들에게서 어떻게 돈을 뜯어낼지, 자리를 어떻게 지킬지만 궁리했던 것이다. 북양수군이 침몰했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대만을 할양했다고? 거긴 나와 십만팔천리 떨어진 곳의 일이다.
이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관료계통이 집단적으로 기능을 멈춘 것이다.
조정의 정령이 하층으로 전달되지 않고, 지방의 실정에 중앙으로 보고되지 않는다. 중추(中樞)와 말초(末梢)간의 신경이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대청에는 역참이 있고, 전보가 있고, 저보가 있다. 정보전달의 하드웨어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관리들이 스스로 국가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면, 아무리 선진적인 통신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게 무슨 제국인가. 그저 사발 위의 모래알이고, 각자 자기 집앞의 눈만 치우는 격이다.
4
광서제의 대혼(大婚) 날, 태화문(太和門)은 종이로 만들었다.
1889년 정월 이십칠일, 광서황제의 대혼일이다. 법도에 따르면, 황후는 반드시 대청문(大淸門), 천안문(天安門), 단문(端門), 오문(午門), 태화문(太和門)의 5개 문을 차례로 지나 자금성(紫金城)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건 법도이고 깰 수가 없었다.
그런데,문제가 생긴다.
대혼이 있기 42일전인 납월(臘月) 십오일 심야에, 자금성의 정도문(貞度門)이 돌연 불탄다.
불길이 거세어져서 정도문, 태화문, 소덕문(昭德門)의 세 개 궁문이 모조리 불태워져 재가 되어버렸다.
옹동화(翁同龢)는 그날 밤에 현장에 있었다. 그는 일기 속에 "화광충천(火光沖天), 경심동백(驚心動魄)"이라고 적었다.
태화문이 없는데, 황후는 어떻게 궁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혼인일자를 바꾸어야 할까? 그건 불가능하다. 날짜는 흠천감(欽天監)에서 계산한 것이고, 천하에 고시한 길일이다. 바꾸게 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태화문을 새로 지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큰 공사를 42일만에 끝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서태후가 결정을 내린다. 대혼은 원래 날짜에 진행한다. 태화문을 임시로 하나 만든다.
그리하여 전 북경성의 붕장(棚匠), 찰채(扎彩) 장인들을 자금성으로 불러 밤낮으로 일을 시킨다. 42일후에 참신한 태화문이 세워졌다.
<청궁술문(淸宮述聞)>에 이렇게 기록한다: 이 채붕(彩棚)은 "높이와 너비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건물 기와의 치문(鴟吻), 와구(瓦溝)의 무늬조차 똑같았다. "오랫동안 내정에서 일해온 사람들도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만주족 학자인 진균(震鈞)은 <천지우문(天咫偶聞)>에서 이렇게 썼다: "높이가 십장이 넘고, 차가운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기술이 이 정도면 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기술은 확실히 대단했다. 다만 문제는 바로 이것이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종이로 만든 물건은 누가 쓰는가?
바로 죽은 사람이다.
황후가 종이로 만든 문으로 들어가다니,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길하지 않다. 나중에 일어난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융유황후(隆裕皇后)는 광서제에게 시집간 후,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우울하게 살았다. 광서제 본인은 더욱 비참했다. 무술정변이 실패한 후, 연금되어 죽을 때까지도 권력을 진정으로 장악해보지 못하게 된다.
이십삼년후, 바로 이 융유태후가 청제퇴위조서를 반포한다.
대청은 종이로 만든 문에서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결국은 이 문으로 들어간 여인이 직접 끝장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필자는 망국지조, 천강이상(天降異象)을 믿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는 믿는다. 한 왕조가 거짓된 물건으로 체면을 살려야할 때는 그의 진정한 기운이 이미 흩어진 것이다.
종이로 만든 태화문은 바로 대청의 가장 진실된 자화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금벽휘황(金碧輝煌)하지만, 그 안은 텅비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