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금정구 금성동 산1-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산내 암자이며 현재 전통사찰 제19호로 지정 또한 나반존자 기도영험 도량으로도 이름난 사찰이다.
원효대사 678년에 창건, 미륵암이라 하였는데, 미륵암이란 절 뒤 암봉이 마치 화관을 쓴 미륵불처럼 생겨서 사람들에게 신령한 기운을 준다고 하여이름 지어졌다 한다. 미륵사(彌勒寺)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미륵사(彌勒寺)는 미륵봉으로 불리는 암봉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미륵사의 석간수는 맑고 신성하여 각종 국제행사 때나 부산의 공식 행사 시 정안수로 많이 사용하는데, 1986년에 개최된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한에서 가져온 물과 합하는 합수제를 지낸 물이 바로 이 미륵사의 물이었다.
경내 한가운데 위치한 염화전 뒤편 미륵봉의 거대한 바위는 마치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로 불리고 있으며, 여러 개의 바위들이 모자이크를 한 듯 어울려 있는데, 해가 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금이 보이지 않게 될 때 전체로 보면 그 형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륵사의 창건 연대를 범어사와 비슷한 시기인 678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실제 미륵사는 범어사보다 앞서 창건된 사찰이다. 675년 부석사를 지은 의상대사가 3년 후인 678년 범어사를 창건할 때 원효암에 주석하며 불사를 지휘하였고, 원효대사는 이곳 미륵사에 주석하며 미륵삼부경전 중 하나인 ‘미륵상생경종요’를 썼다고 전한다. 또한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호리병 5개를 구하여 왜구의 배 5만 척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
미륵사 입구의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미륵사(彌勒寺) 편액이 걸려 있다.
염화전(拈華殿)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씩의 규모로 지었다. 석가삼존불은 중앙에 석가여래를 모시고 그 좌우보처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 측면에 신중탱과 지장탱이 걸려 있는데 중앙에는 후불탱을 1974년 함께 조성, 봉안됐으며 모두 석정스님 작품이다.
염화실(拈華室) 대부분의 사찰에서 조실스님이 계시는 방, 염화(拈華)란 말도 부처님의 법(法)을 전해 받았다는 가섭존자의 염화미소(拈花敬笑)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이곳 미륵사의 중심 법당은 대웅전 편액 대신 拈華殿(염화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관지(款識)에는 甲寅中秋(갑인중추)라 적혀 있어 1974년 음력 8월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백전(五白殿) 노적(露積)가리 바위의 뒤에 보이는 이 건물은 으로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이고 염화전과 같은 시기에 지었다. 석고로 된 500나한이 모셔져 있고 그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 하고 좌우협시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어간문 양옆으로는 석고로 된 금강역사가 배치되어 있다.
범종각(梵鐘閣)1978년에 조성
미륵전(彌勒殿) 맞배지붕에 정면과 측면 각 1칸씩의 규모.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 세상에 출현하실 미륵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미륵부처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후 56억7천만년 뒤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 8만4천세가 될 때(탐욕과 질투가 없으며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시기)에 사바세계에 내려오셔서, 화림원(花林園)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시고, 3회의 설법(용화삼회)를 열어 아직도 제도하지 못한 272억명을 교화한 후 만 6년만에 열반에 든다고 한다.
이건물은 원래 독성각이었으나 미륵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옛금당에 있던 미륵불을 모셔 미륵전이라 하였다. 미륵사(彌勒寺)란 사명(寺名)을 뒷받침해주는 이 전각 내부에는 크기는 작지만 임진왜란 직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400년 전 미륵보살상이 보관을 쓴 모습으로 모셔져 있고 그 뒷에 1986년 조성된 미륵탱이 걸려 있다. 특이한 것은 같은 금정산 내에 있는 범어사 산내암자 내원암의 지장전 지장보살과 상호나 전체의 윤곽, 크기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아 미륵사의 연혁 파악에도 중요한 근거를 남기고 있다.
독성각(獨聖閣) 주변은 커다란 암벽에 둘러싸여 있고, 위태로운 암벽 위에 자리,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미륵사 독성각의 나반존자는 화강암에 양각하여 새긴 모습으로 그앞쪽에 나반존자해동근본도량(那般尊者海東根本道場)이라고 씌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자리에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 미륵불이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독성각을 신축하면서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 잎이 피고 지는 것, 봄에 꽃이 피는 것, 가을에 열매가 맺는 것 등 변함없이 운행되는 우주의 법칙을 보고 깨달았다. 또한 전생을 꿰뚫어 보는 숙명명(宿明明)과 미래를 보는 천안명(天眼明), 현세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명(漏盡明)의 능력으로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해 중생의 공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독성각 옆에 있는 미륵바위에는 원효대사께서 왜적의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장군기를 꽂았다는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칠성각의 건물양식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전각 이름은 칠성각으로 부르고 있지만 내부에는 향(向) 우측에 칠성탱과 함께 좌측에는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山神)은 산의 신령(神靈)으로 존경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호랑이를 불교화하면서 산신(山神)으로 승격시켜 수용해 그린 것을 산신탱이라 한다. 산신탱의 도상적인 특징은 호랑이의 변화신인 산신을 중심으로 반드시 호랑이와 함께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산신의 옆구리에는 호랑이가 따르고 있는데, 그 표정이 무섭기보다는 재미나게 표현되어 중생들에게 더욱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칠성각은 조선중기 이후에 민간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전각이다. 칠성신앙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별이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유래한 신으로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던 토속신이다. 중국에서 형성된 다음 우리나라에 들어와 수명 장수신으로 불교에 수용되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 중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북극성(인도에서는 이 북극성을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 한다)이다. 바로 우리가 말하는 치성광(熾盛光)이란 북극성을 가르키며, 칠여래의 화현인 칠원성군(칠성)이란 북두칠성을 가르킨다. 특히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하늘의 상제로서 자미대제(옥황상제)라 하여 모신다. 이러한 자미대제가 불교에 들어와 치성광여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미대제통성군’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자미대제 즉 북극성이 모든 별의 지배자라는 것을 뜻한다.
칠성각에는 삼존불을 봉안하고, 칠성탱화에는 보통 해와 달과 별을 통솔하는 치성광여래는 금륜(금으로 된 윤보輪寶)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과 월광보살을 양협시로 하고, 상단 좌우에 칠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과 3태6성, 28수까지 도설하는 구도이다. 그리고 칠성탱의 향(向)오른쪽에는 남극노인성이 있는데, 이 노인은 아이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신라 신문왕 때, 왜구들은 툭하면 신라에 쳐들어와서는 약탈을 했다. 원효는 고민에 빠졌다. 왜구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백성이 죽고 다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바다 멀리서는 새까만 왜구의 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효는 사미승에게 호리병을 구해오라는 심부름을 보낸 뒤, 산 위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사미승이 심부름을 갔을 때, 두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왜구 병사라는 걸 알아차렸다. 한 명은 저 위 장군기가 있으니 분명히 많은 신라 군사가 매복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하고, 다른 한 명은 군사들이 있기엔 너무 조용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미승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우리가 길을 잃었는데 길 좀 물읍시다. 저기 저 깃발 너머엔 군사들이 있는지요?"
"글쎄요… 저는 이 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릅니다."
그들이 산 아래로 향하려 할 때였다.
"거기 두 분은 잠시 들렀다 가시오!" 원효가 산 아래로 소리쳤다. 그들은 곧 원효 앞에 나아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기장에서 왔습니다." "왜군을 보셨죠?" "아니오, 보지 못했습니다." "너희 자신을 못 봤다고, 이 왜놈들!"
원효는 호리병 두 개의 목에 붓으로 선을 둘렀다. 그러자 그들의 목에 피멍이 둥글게 생기더니 고통을 안겨 주었다. 원효는 나머지 세 개에도 붓으로 선을 그은 후 주면서 말하였다. "가서 너희 대장에게 알려라.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모든 걸 소상히 들은 대장은 분노하여 칼로 그 호리병을 베어 버렸다. 그러자 자신의 목이 꺾이더니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고, 왜구들은 곧장 뱃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당시 왜적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대사가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구멍이 아직도 독성각 옆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미륵암 쌀바위 설화 또한, 독성각으로 오르는 좁다란 돌계단 길의 중간 부분에 석간수가 솟아나는 사각형의 샘이 있는데 여기에는 쌀바위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매일 아침 작은 바위구멍에서 한 톨 한 톨 쌀이 떨어져 스님이 이 쌀로 끼니를 이어 갔다고 한다. 그런데 한 사미승이 자신의 욕심에 한꺼번에 많은 쌀이 나오라고 구멍을 작대기로 쑤신 뒤로 쌀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화엄벌 전설
미륵사를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인 금정산성 북문 옆 너른 벌판이 제2화엄벌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이곳은 양산의 불광산 척판암에 주석하던 원효스님이 멀리 중국 태화사에 소반을 날려 1천명의 대중을 구했다는 ‘척판구중’ 설화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곳이다.
원효스님을 찾아 멀리 중국에서 건너온 1천명의 대중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양산 내원사 골짜기. 이곳에서 토굴을 짓고 살았던 이들에게 양식이 문제가 되자 원효스님이 마을로 내려가 “당나라 1천 대중이 법문을 들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 하시고 양식을 해결한 후 금정산 원효암으로 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후 1천 대중이 스님을 찾아 법문을 청하였으나 원효암이 너무 좁아 바로 이 북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야단법석을 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