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에게 붙이기에 가장 알맞는 칭호(epithetum)을 꼽는다면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붙여준 "하느님의 사람"을 들고 싶다.
무엇이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사제가 성당에 거주하고 수단을 입고 오로지 교회와 하느님을 바라고 살며 독신생활을 하는 신분만으로는 너무도 미흡하였다.
신도들이 사제에게 그 많은 비현실적 기대를 거는 것은, 적어도 본당공동체 안에서는, 사제가 산위의 마을이요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자기네 종교생활이 미숙하고 삶과 신앙이 유리되어 있음을 실감하므로 아무래도 삶의 이상적인 구현을 사제에게 투사하면서 기대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내나 남편만 줄 수 있는 것 따로 있고, 친구나 선배만 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듯이 사제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들에게 사제는 얘기책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이다.
그러나 "사제의 말은 그의 말이면서도 다른 이가 발설하는 말을 가리키는 표지일 뿐이다. 사제는 자기가 전달하는 메시지 이면으로 보이지 않게 사라져야 한다"는 라너의 이 구절에는 신자들이 사제에게 거는 모든 도덕적이고 영성적인 기대들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텔리비젼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마더 데레사의 쪼글쪼글한 얼굴을 본다면, 그 수녀가 인류 가운데 그 누구한테도 미움받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필자가 학생들에게 종교철학을 가르치면서, 인류의 탁월한 지성들 상당수가 무신론을 주창하였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를 품었음을 읽고 깨닫게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들 가운데 나자렛사람 예수를 경멸하거나 미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가난한 자, 겸손한 자, 남에게 다 내어주는 자는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못한다. (덕성까지 포함해서) 권세든 재산이든 학식이든 가진 것이 많아야 질시의 대상이 되는법이다.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렇지만 사제 역시 자기 신도들에게서 받들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낮추기는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자기가 설교하는 메시지 뒷편으로 보이지않게 사라지라(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는 저 예수회원의 주문은 매우철저한 것이다.
(1) 인내와 온유
성직자 아닌 신도가 사제를 바라보는 모습,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상적인 사제상을 두고 워낙 많은 글과 책이 나왔으니까 필자의 좁은 주관으로 들어가서 얘기해도 흠이 되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바울로가 "하느님의 사람" 디모테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충고에 필자가 하려는 말이 모두 간추려져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이단과 탐욕을] 피하시오. 오히려 의로움과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를 구하도록 하시오. 믿음의 훌륭한 싸움을 싸우시오"(디모 6,11). 인내와 온유, 이것은 현대의 각박한 삶에서는 흔히 사제만이 줄 수 있는 보물로 줄어들었다. 우선 사제의 시선(視線)에서 신도들은 온유함을 찾는다. 간음하다 들켜 속옷바람으로 끌려온 여자가 예수에게서 보았던 시선, 여염집 여자들의 눈흘김이 무서워 한낮의 뙤약볕에 야곱의 우물로 물길러 온 사마리아여자가 낯선 유대인한테서 보았던 눈, 떼지어 다니던 열 사람의 문둥이들이 나자렛 사람한테서 본 바로 그 눈빛을 신도들은 사제에게서 기대한다. 인간은 참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타인을 이리도 만들고 저리도 만든다. 사내들의 색정적인 시선은 여자를 물건으로 만든다[物化]. 처녀의 눈을 들여다 보는 젊은이의 시선은 그녀를 인격화(人格化)한다. 신도 한 사람 한 사람 영혼 깊숙이에서 은총을 갈구하는 가난함을 들여다보는 사제의 시선은 그를 신화(神化)한다.
그런 뜻에서 라너의 말대로, 사제는 시인(詩人)이다. 태초에 만물을 존재에로 불러내시던 원천적 언어(Ur-wort)를 발설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스러움에 짓눌리고 가정에서 상처받고 각박한 사회생활에 찌푸러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시선을 지녔기 때문이다. 경사로운 일을 함께 즐거워 할 사람들은 세속에서도 쉽게 만나지만 고통을, 더군다나 마음의 번뇌를 함께 아파하는 사람은 드문 연고로 신도들은 사제에게 기댄다. 고백소는 아마도 사제가 시인으로 임하는 가장 그윽한 성소이리라. 시인만이 자연과 교감을 갖고, 가난한 인생들의 고뇌에 공감(sympathia)하기 쉽다. 그리고 이 공감이 사회적 죄(社會的罪)를 의식하면서 민중에게로 확대되는 해방신학이 사제들의 깊은 영성으로 등장하고 있다(misereor super turbam). 시인은 사물을 바로 보게 만든다. 연민에 찬 사제의 시선에서 신도들은 사물의 다른 쪽을 보고(conversio), 목을 길게 뽑고서 머얼리 또 두루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법(synopsis)을 배운다.
본당의 사목자로서 모든 신도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하니까 물론 부자들도 상종하게 된다. 어느 교구 주교님 명언대로 부자도 천당갈 권리가 있음은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우리를 제 발로 찾아오는 사람, 한 끼라도 초청해 주는 사람, 대학을 나와 얘기가 통하는 사람, 휴일을 함께 보낼 사람, 잠못이루는 밤에 술친구라도 되어 줄사람, 그래도 성당일에 시간과 돈과 관심을 쏟을 만큼 여유있는 사람이 가까이 느껴짐은 자연스러운 인정이므로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다만 그러한 상종에서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느냐는 것이다. 생이스트가 반죽을 부풀게 하고, 짠소금이 생선을 절인다. 사제한테 여간한 지혜와 영성이 없으면, 맘몬이 하느님의 사람을 타락시키지 하느님의 사람이 맘몬의 사람을 추방하지는 못함을 신도들은 목격해 왔다.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주님 말씀이고 오히려 "하느님과 돈 둘다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더라다"는 선배들의 격언에 젊은 사제들까지도 곧잘 넘어감도 지켜 보았다.
본당 살림에서는 사제는 관리직을 수행하기보다는 지도적 역할로 그침이 바람직하다. 서울 대교구 평균 8천명이넘는 본당 신도들에게 말씀을 펴고 성사를 베푸는데도 여념이 없을 지경일 텐데 본당에서의 사제 권위가 돈주머니에 있다면, 결재하는 도장에 있다면 퍽으나 안타깝다. 경험으로 미루어 사목협의회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관리를 맡겨도 충분하다. 모든 결정에서 독단적이지 않고 신도들에게도 판단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실제로 책임을 부여하는 사목자는 훌륭하다. 인간은 타인이 자기를 신뢰하는만큼, 인정해 주는만큼 스스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된다. 신뢰할 만한 인간이 된 다음에 신뢰하겠다는 것은 세속적인 방식이지 하느님의 방식은 아닌 성싶다.[13]
독신으로 살면서도 남녀관계는 여전히 비복음적인 남존여비사상에 젖어있는 사제들은 신도들을 슬프게 한다. 적어도 수덕과 영성 문제에 있어서는 사제도 본당 수녀들에게서 배울 만한 것이 있으리라. 한국인 가정이라는 게 남자는 돈 벌어오는 일 하나로 그치고 육아와 자녀교육, 행정적이고 법률적인 문제, 가사와 재산을 온통 여자가 책임지는 형태로 잘못 꾸며져 있다. 한국남 사제들이 꾸리는 본당도 흔히는 예비자 교리, 학생 교리, 병자 방문과 반상회(지금은 소공동체 모임), 신심회와 사도직 활동을 두세명 수녀들이 모두 도맡고, 사제들은 성사 집행과 사무결재 정도로 그치는 광경을 자주 본다. 그러면서도 수녀들에게는 하녀 부리듯 주종관계를 유지려고 버티는 일은 인권유린이다. [14]
한 마디 덧붙인다면, 어느 본당에로 가든 주임사제는 그곳 교회 건물과 제도는 가급적 그대로 두면 한다. 새로 오는 주임사제가 그 본당을 최초로 사목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들을 다루기 힘들수록 사제는 사람 대신 집에 마음을 쓰고,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는 신도들보다는 돌로 세워진 건물에다 사목적 정열을 쏟는 듯하다. 그러한 개축공사로 유실되는 돈은 또 얼마나 많은가! 본당의 돈은 신도들의 헌금(獻金)이요 따라서 '성스러운' 돈이다. 운영에 쓰이고 남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서울에서는, 사제들의 방을 고치고 늘리는데 쓰일 잉여분이 아니라 본당 구역내의 "가난한 사람들의몫"이라고 여김직하다.
(2) 의로움과 경건
여배우가 진선미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표상하고 신문기자가 진실을 표상한다면, 사제는 선함을 표상한다. 신도들이 하느님의 사람에게 바라는 바는 재능도 언변도 활동력과 통솔력도, 업적도 아닌 듯하다. 그것은 자기들도, 아니 대개는 더 많이 지닐 수 있는 까닭이다. 사제에게서 바라는 것은 성스러움이다. 선량함이다. 영의 세계다.
성스러움은 경건하면서도 매혹적이다(mysterium tremendum ac fascinosum). 사제가 어느 정도의 고독한 나름대로의 공백을 따로 갖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헌신(獻身)이라는 것은 종교적 삶의 어떤 본질일 뿐더러, 늘상 "그 이상의 것"(plus ultra)을 바라보는 종교인의 자연스러운 경지이다. 교구장들을 당혹케 만드는, 그 많은 사제들의 그 숱한 스캔달이나 이중생활들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이 사제의 독신을 법률로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하늘나라에 대한 수도자의 표상적 생활양식을 서구교회의 문화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교구사제들마저 짊어지게 된 일도 재론할만하다. 동방 가톨릭 사제들처럼 독신생활 여부는 부제서품 이전에 자율이 선택결정하는 제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지만, 사제의 독신이 속인들에게 삶의 다른 차원을 보여줌은 사실이다. 고독하면서도 맑은 사제의 눈에서 사람들은 피안 세계를 엿보고, 그의 신념있는 말에서 그들은 그 나라(하느님 나라) 얘기를 들으며, 그의표정에서 그 세계가 화안한 곳인지 암울한 곳인지 읽는다. 참으로 그의 삶에서 그들은 그 세계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감지한다.
독신생활을 하는 사제들에게 여자는 참으로 미묘한 사목 대상이다. 더군다나, 여타종교 지도자들도 비슷한 일을 당하겠지만, 여교우들은 사제에 대해서 일종의 공유(共有) 개념을 품고 있는 듯하여 사제의 처신은 더욱 힘들다. 사실 하와의 딸은 지상에서 아담이 최초로 발언한 감탄사("아, 드디어 나타났구나!")의 대상이며, 창조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하느님의 걸작이요, 하느님과 인간이 아울러 경탄한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만큼 가치있기 때문에 그만큼 매력있는 존재이다. 사제들은 많은 이들에게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분의 삶을 본받겠다는 선의에서 우러나, 똥이나 악마나 덫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상에서 남자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희생하였다.
하지만, 성의 매력은 하느님이 만들어놓으신 가장 강한 자력(磁力)이므로 여성과 단둘이 있으면, 탁월한 자제력과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차단장치가 없으면, 저절로 들러붙게 만든다. 교회가 순진한 동정(童貞)을 성직지망자에게 요청하는 것은 오랜 사목 경험에서 우러난 처사이리라. 부정을 저지르는 기혼자들에게서 보듯이, 사제직을 떠났거나 이중생활을 하는 동료들에게서 보듯이, 여성문제는 한번 기울면 좀처럼 바로서지 못하고 침몰하는 배와 흡사하다. 신도들이 고백실에서 자백하는 것처럼 한번 부정을 저지른 남편이 그 실존적인 상처로 인하여 결코 전처럼 순수하게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듯이, 사제도 여성을 경험하면 다시는 전처럼 순수하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봉직하지 못하는가 보다. [15]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지당하다. 사제의 본질이 직설적인 발설에 있는만큼 그것과 질이 같은 성경이야말로 그의 음식이리라. 남에게 인용하기 위해서만 성경을 펴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 믿고 싶다. 사제가 강론과 훈화를 준비하더라도 성서를 훑어볼("다 아는 소린데...")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보는 경문을 대하듯이) 정좌해서 정독하고, 그 다음에는 단 5분이라도 묵상하고 나서 글로 옮기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하셨던 것처럼 설교전에 강론을 들을 우리 신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리라 굳게 믿는다. 필자도 필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위해서 자주 기도한다. 다만 말씀을 전하는 이는 권위있게 발설하는 편이 좋았다. 자기 삶을 고백하는 일은 드물수록 좋으며, 인간적 비유는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만들지만 감상적인 표현은 오랜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듯하다.
감실 앞에 무릎꿇어 기도하고 있는 사제의 모습보다 신도들에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이 또 없다.
(3) 믿음과 사랑
지나간 한 해에 서울대교구에서만도 여덟 명의 사제들이 사제직을 떠났다고 들었다. 더구나 대부분이 갓 서품된 젊은 분들이었으므로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이 일로 본당의 젊은 청년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사람은 자기 양심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사제성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그분들의 심사숙고한 결단을 존경한다"는 거침없는 대답이 나와 필자의 생각이 이미 구세대로 접어들었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정말 어떤 분들은 "새로운 결단"이라면서 떠났다. 결단의 동기가 여자 관계 때문이 라면 인간적인 성실을 위해서라도 수긍이 간다. 종교인은 타인의 시선이나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전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아무리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을 인정한다손치더라도, 이중생활로 제단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죄는 폭로된다. 남의 눈에 발각되어 스캔달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제단에 서 있는 분에게서 성스러움이 내비치지 않음으로써, 그 얼굴에서 범상한 "애아버지"의 냄새가 남으로써, 도대체 행복하지 못하고 찌든 얼굴에서 죄가 드러난다.
그러나 사정이 어떻든, 이 문제로 사제직을 떠나는 이들에게는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 자처해온 어머니의 정을 보여야 마땅하다. 결연히 떠나는 사람은 이중생활을 견지하는 이들보다는 차라리 타인과 자신에게 성실한 편이다. 교회가 설교해온 것은 사랑과 연민의 하느님이시니까 정작 일이 벌어지면 그가 책임있게 사회생활에 자리잡기까지 최소한의 인간다운 배려는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도 당신이 십자가를 져 보신 분이시므로 십자가 밑에 짓눌려 손을 들고 떠나는 사람들을 두고 서운해 하실망정 욕하지는 않으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이 목격하기로는, 누가 사제직을 떠날 때마다 교구청이든 본당 사제단이든 그를 대하는 태도는 대개 비정(非情) 자체였다.
어떤이는 기성 사제들의 스캔달에 환멸을 느껴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악표를 보인이들은 "나귀가 돌리는 연자맷돌을 메야 할"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미숙한 인간일수록 사제직이라는 직무(ministerium 심부름)를 무슨 벼슬처럼 만끽하는 어리석음을 신도들은 간혹 목도한다.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장사꾼이나 이중생활의 위선자를 만나더라도 먼 훗날, 그러니까 우리가 평생 온갖 죄악과 실수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또 입은 다음에 우리에게 어렴풋이 새겨질 "하느님의 시선", 연민의 시선을 조금 일찍 배워도 좋지 않을까? 거룩하고 바르게 살면서 스캔달에 분노하는 사제들이 아니면, 창녀이자 어머니인 교회를 누가 정화하고 누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해 드린다는 말인가? 인간이란 완벽하게 충실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실제로 사람은 "불충실한 충실"로 마음을 위로하며 절름발이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쉽다. 또 "자기의 사람들"(주교, 본당주임, 동료 사제)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et sui eum non comprehenderunt)은 사람이 되신 말씀에게까지 일어난 사건이 아니던가? 젊은 사제들서는 스승이 가신 길이니까 마냥 따라갈 도리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보좌신부들도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는 며느리 여교우들에게는 인내와 사랑을훈계할 처지 아니던가?
하지만 어떤 사제는 "보다 복음적인 삶"을 내세우며 떠나기 때문에 한사코 말리고 싶은 심경이었다. 동기야 이해함직하지만 필자의 좁은 경험으로는 사제직은 타인을 위해서만 살기에는 가장 제도적인 장치요 또 제도적인 삶이 가장 오래 가는 것이 아닌가한다. 인간이 선의대로 이룰 수 있는 선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렇게 쉽지도 않다고 하면 옹졸한 의견일까? 오만의 악마는 대개 선의에 들떠있는 사람을 메겨치기 때문에 영의 식별이 필요할 것 같다. 좁은 문으로, "나는 문이다"고 하신 분을 통과하려면 몸을 추스리고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하고, 바늘귀로 지나가려면 그만큼 작아져야 할것 같다. 젊은 보좌신부라도 50대의 중년 남자가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처지를 두고 상담을 해 온다면, 저 혼인날의 애정깊은 약속을, 하느님 앞에서 세운 백년해로의 언약을 일깨워 주면서 말리리라. 50대의 유부남이 조강지처를 버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결단한다고 떠벌일 때에 사목자로서 그 속임수를 간파하고도 남으리라. 사제든 기혼자든 새로운 결단이 있다면, 그것은 잠시 내려 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걷는 일이리라. 십자가야 모든 인간들의 어깨에 매어져 있으니까....
3. 사제는 누구인가?
일반 교우들과 더불어 본당에서 이상적인 사제상을 이야기할 기회는 좀처럼 없다. 필자는 본당에 새 사제가 서품되는 경사를 맞아 원고지 3매 짜리 단문으로 몇차례 사제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어서, 본당 주보에 실었던 그대로 이 자리에 소개한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금년에도 우리 본당에서는 사제 한 분이 탄생한다. 돌아오는 7월 16일 수유 2동 3반 교우 이봉춘(요아킴) 형제의 아들, 이충열(디도) 부제가 사제로 서품받을 것이다. 하루전인 7월 15일에는 수유 3동 6반 교우 장원애(아녜스) 자매의 아들, 김종한(분도)군이 부제로 서품된다.
옛적 교회에서부터 사제는 그분을 내는 교회의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서 수유동 본당 사제는 수유동 본당 교우 가운데서 뽑아 서품하였다. 지금도 <서품공시>라는 것을 하여 부제가 사제직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신자들에게 물어서 정하고, 특히 부당한 점이 있으면 이의를 말할 여유와 권한을 주고 있다.
지금 교회제도는 수유동 본당 교우를 사제로 서품해도 수유동 본당의 사제로 남지 않고 서울 교구라는 커다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 (어차피 시집보내는 딸이 있으면 집에 들여오는 며느리도 있듯이) 우리 본당에서 일하시는 신부님들도 모두 다른 본당에서 낸 분들이니까 섭섭해 할 것은 없다.
다만 우리 본당이 합심하여 젊은 교우 한 분을 사제로 바쳤다는 뜻으로, 부제품이나 사제품에 필요한 비용은 교우들이 한데 염출하여 부담한다. 그래서 7월 4일에는 축의금 봉헌이 있을 것이다. 자기 아들딸 시집장가보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생각한다면, 우리 수유동 본당 공동체가 키워서 하느님의 교회에 바치는 이 젊은이들을 생각해서, 또 독신으로 살면서 오로지 교우들에게 봉사할 분들을 생각해서 집집이 체면이 깎이지 않을 부조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새 사제에게 필요한 것을 개인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면 원장수녀님께 의논드리면 된다.
부처님 지고가는 당나귀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교우들을 종종 본다. 결혼생활 실컷 누리다가 뭔가 좀 아니꼬울 때에,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식으로 그분들의 생활을 넘보는 것이다. 곁에서 "당신은 어차피 늦었으니 아드님 신학교에 보내고, 당신 따님 수녀원 보내시지 그래요?"라고 한 마디 하면 당장 꿈을 깬다.
사제직은 성령께서 주시는 카리스마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하게 봉사하는 카리스마이다. 그대신 우리는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는 카리스마를 받았다! 그분들의 독신생활은 이 봉사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처자식이 있을 적에 남을 위해서 살고 남에게 잘 해준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해서 알지 않은가?
사제직은 오로지 남을 위해서 사는 봉사직이지 특권이나 칭호는 아니다. 교우들이 제아무리 떠받들고 공경해도, 사제들은 자기가 부처님을 모시고 가는 당나귀 처지임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한테 절하는 것은 등에 지고가는 예수님 때문이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님을 실감하면서 산다.
우리의 대사제 예수님은 평신도이셨다. 더군다나 당대의 사제계급에게 미움받아서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삶 자체가 하느님께 올리는 예배요 제사였다. 특히 그분의 죽음은, 우리 믿음대로, 만민을 죄에서 구하는 인류사의 가장 성스러운 제사였다. 교회는 이것을 신자 모두의 "보편 사제직"이라고 일컫는다.
피곤한 어부
교형자매들이여, 사제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곧잘 우리의 험담에 오르고, 작은 결점에도 이러쿵저러쿵 우리가 불만스러워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눈에 사제들은 자칫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그들의 선택과 소명이 그래선지 성덕의 첨단에 서 있지 못하면 입체감이 가장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주시는 힘으로 그침없이 상승하고 있지 않는 한, 측량키 어려운 가속도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제들은 이방인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없이도 잘 살고, 신자들이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으며, 주일미사에서 귀에 솔깃한 위안의 말만 찾고, 제가진 것 없는 사람과 나누어먹으라고 호소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설령 예수라도 그냥두지 않겠고 눈을 부라리는 세상에서 사제는 초라한 이방인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의 사제들은 피곤한 어부입니다. 이것은 비록 서양 교회의 모습입니다만 (한국 교회도 언젠가 이리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밤새 빈 그물을 내렸다 올렸다 하는 어부들, 그래도 혹시 잔챙이 한 마리라도 걸리기 바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고 말씀드리는 어부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사제들 역시 갈바리아까지 스승의 뒤를 따라갑니다. 가나촌에서 최고급 포도주에 거나하던 베드로, 가파르나움에서 기적의 떡광주리를 들고 신바람나던 베드로, 다볼산에 그냥 있기가 좋다던 베드로, 그는 군중 맨끝에서 슬금슬금 행렬을 따라가 먼 발치에서나마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 호숫가에서 세번 다짐하시고 세번 물으시자("너 나를 사랑하느냐?") 그는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본당에서 새로 탄생하는 사제와 우리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사제들, 개인적으로 아는 다른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존경할 만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 하느님의 사람이여!"
사제는 성숙한 남성입니다. 청춘이 그의 정신에서 시듦이 없고 인간과 자연에 항상 놀라워하고 다정다감하지만 그렇다고 미숙한 미혼자가 아닙니다. 그도 나약과 실수와 때로는 죄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는 "우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여, 그의 용기를 꺾지 마시고 그를 시험하지 마시오. 사십대 기혼자의 성숙과 평정이 갖추어진 남성이 되도록 거들어 주시오.
사제는 성실한 인간입니다. 은총에 겸허하게 순응하면서 하느님과 자기와 타인에게 성실하고자 애씁니다. 우리 죄의 실재성과 그 상흔을 들여다보고 부드럽지만 용기있는 음성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고백실을 물러나가는 우리의 쓰라린 다짐들이 거의 언제나 헛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느님 사랑이 인간의 죄악과 배신에 꺾이지 않으신다는 소신을 품고 있읍니다. 그러니 고백실의 훈계와 미사의 강론과 회합 중의 충언을 귀담아 들으시오.
그는 교회의 사람입니다. 스무 세기의 긴 세월동안 언제나 주님의 괴이심을 받아젊어지고 순결해지고 더욱 지혜로워지는 어머니께 아들다운 신뢰와 사랑을 바칩니다. 교회의 얼굴이 아무리 쭈그렁이고 심술궂고 고집스러워도 사제는 종국에 가서는 순종과 평화를 교회에 바칩니다. 그를 교회의 품에서 멀어지게 만들지 마시오. 줄기에서 떨어져나간 포도가지가 되어 말라버립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한테 들려주며 복음을 읽고 복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언어, 십자가의 언어로 말합니다. 자신과 자기에게 지워진 교우들의 죄과를 무릎꿇어 속죄하기에 그의 무릎에는 옹이가 들고 찌르는 가시가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와함께 미사를 봉헌할 적마다 그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따스한 안방에서 처자와 저녁기도를 올릴 때에 사제관의 고독한 그를 위하여 기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