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내 친구 외 1편
문정희
“아아 입을 벌리세요”
그의 손이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이빨에다 물을 뿌리고 기구를 들이 민다
나는 눈을 감고 뜬구름 속을 헤맨다
초등학교 친구, 그가 50년 동안 흰 가운을 입고
이렇게 이빨을 고치는 동안
나는 뜬구름 백지 위에 시를 썼다
썩은 이빨만한 허명(虛名)이 입안을 굴러다닌다
수치와 굴욕을 깨물다가 깨진 이빨도 있다
생명의 근원인 음식을 씹고 희망도 씹고
노년의 고독을 깨물 차례
헐거운 노인의 이빨을
그는 하얀 돌로 바꾸어 심어주려 한다
어느새 노련한 석공(石工)이 되었다
굳이 이쯤에서 내가 시인이 된 것을 변명하긴 싫다
어린 시절 그 처음의 포유류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또 길을 잃으리라
드디어 물로 입을 행구라고 한다
일어나서 뜬 구름 백지 위로 돌아가라 한다
나는 낡은 몸을 일으킨다
어서 허공에다 별을 심어야지
아무래도 치과는 좀 으스스하다
6번 칸
어떤 나뭇잎은 기억처럼 굴러다니다가
내가 길을 걸어 갈 때
뜻밖에 부는 바람으로 내 옷깃을 쳐든다
암각화를 보기 위해 무르만스크행 기차를 탄
북구 여자의 6번 칸*에서
보드카에 취해 자꾸 말 걸어오는 사내를 본다
이윽고 핀란드 말로 사랑해!가 뭐냐고 그가 물었을 때
여자는 대답한다
하이스타 비투(haista vittu)! 엿 먹어!
내가 탄 배는 그때 난민 보트였던 것 같다
항구에 닿아도 기실 아는 이 없었다
바다에는 고래, 불쑥 두려움처럼 솟아나는
젊고 위험한 미시시피 시인들의 배에서
나는 자욱한 우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한 시인이 내민 북구 시인의 시집
암각화처럼 어렵고 낯선 그 첫 문장을
18년이 지난 오늘에야 해독해 본다
혹시 엿 먹어!?는 아니겠지
고대 암각화 속에서 뭉클 솟아 오른
고래의 시
미나 라카스탄 시누아(Mina rakastan sinua)!
나는 당신을 사랑해!
푸우! 아직 푸른 밍크고래가 천년 늦게 당도했다
*6번 칸; 핀란드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 영화. 칸느(2021) 그랑프리
문정희
전남 보성출생. 1969년 등단.
시집 <나는 문이다> <카르마의 바다> <작가의 사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외 다수.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등 다수.
2010년 스웨덴 시카다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