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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와집(凝窩集) 이원조(李源祚)생년1792년(정조 16)몰년1871년(고종 8)자주현(周賢)호응와(凝窩), 취송(鷲松), 나고(懶高), 호우(毫宇), 만귀산인(晩歸山人)본관성산(星山)초명영조(永祚)시호정헌(定憲)특기사항조승수(趙承洙),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유정문(柳鼎文), 유치명(柳致明) 등과 교유
凝窩先生文集卷之二 / 詩○[南遊錄] / 道洞書院板揭 在知禮
太守同乘興。逶尋道院來。歌芝甪里伴。棲棘士元才。廟薌陞一炷。賓酒酢三杯。邂逅成眞率。玆遊亦樂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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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2권 / 서(書) / 이응현에게 답하다〔答李應賢〕
충효재(忠孝齋) 문회(文會)는 참으로 우리 유림의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탁한 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이 세상에 이런 태화(太和)의 기상(氣像)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문회에서 지은 시와 서문은 전아(典雅)하고 각실(慤實)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낭독하게 하면 갑자기 한 차례의 풍류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창목정기(彰睦亭記)〉는 문제시되는 곳이 많은 것 같은데, 이것은 진실로 저의 견해가 미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퇴도(退陶)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한번 글을 지어놓고 고치지 않는 것은 대성인이 아니면 반드시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원하건대 고명(高明)께서는 문장을 잘 지으려는데 힘을 쏟지 말고 사실대로 기록하여 기문(記文)의 문체(文體)를 극진히 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별지(別紙)
문 저의 선조 영당(影堂)은 동지에 차례를 지내니, 이것은 선조에게 제사 지내는 의리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참람되고 외람된 혐의가 있으나 선현들의 설이 또한 그러합니다. 어쩔 수 없이 속절(俗節)을 따른다면 한 해에 한 번 올리는 천신(薦新)을 중양절에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답 그대의 말씀이 맞습니다.
문 이미 축문(祝文)을 사용한다면 마땅히 제사의 예식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헌(單獻)으로 하는 것은 문제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례(茶禮)라는 이유로 그렇게 합니까? 들어보니, 모리(某里)의 미천(薇薦)과 보은(報恩) 장산(長山)의 익재영당(益齋影堂)에는 모두 삼헌을 드린다고 합니다.……
답 축문이 있다면 마땅히 삼헌을 드려야 합니다.
문 영정만을 내걸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초에 예(禮)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영정은 제사에 쓸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제사에 영정을 쓸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도원(道院)이 훼철된 이후로 영정을 옮겨 걸고 의탁(椅卓)은 비워두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대로 영정이 있으니 지방을 써서 의탁에 안치하였다가 제사를 마치고 나면 영정을 다시 걸고 지방은 불에 태우니, 또한 주자(朱子)의 두 개의 신주를 서로 의지하게 한다는 글귀에 매우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답 영정 앞에다가 또 지방을 설치하는 것은 예(禮)의 뜻으로 헤아려 보면 매우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혹 나라에서 금하는 법에 저촉되지 않겠습니까? 헤아려 대처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주-D001] 충효재(忠孝齋) : 금릉군 구성면 상좌원리에 있는 재실이다. 연안(延安) 이씨(李氏) 이장원(李長源, 1560~1649)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었다. 이장원의 자는 호원(浩遠)이며, 호는 초당(草堂)이다.[주-D002] 한번 …… 사람이라고 : 《퇴계집》 권12 〈답유인중(答柳仁仲)〉에 “고인이 말하기를 ‘한번 글을 지어놓고 고치지 않는 것은 대성인이 아니면 반드시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맛이 있다.〔古人云 一作不改 不是大聖 不免大愚 此言儘有味也〕”라고 하였다.[주-D003] 속절(俗節) : 한식ㆍ단오ㆍ중양절ㆍ동지와 같은 명절을 말한다.[주-D004] 모리(某里)의 미천(薇薦) : 모리(某里)는 정온(鄭蘊, 1569~1641)이 은거한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지명이다. 그는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에 이조 참판으로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에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모리(某里)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정온의 사당에 올리는 제사를 미천(薇薦)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고사리를 캐먹고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은 절개에 비긴 것이기 때문이다.[주-D005] 보은(報恩) 장산(長山)의 익재영당(益齋影堂) : 익재(益齋)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호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ㆍ역옹(櫟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익재영당은 지금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에 있는데, 아마도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익재영당이 여기에 있게 된 이유는 이제현의 후손인 이사균(李思鈞)이 1504년(연산군10)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여기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건립하였기 때문이다.[주-D006] 이천(伊川) :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정이(程頤, 1033~1107)의 호, 자는 정숙(正叔)이다.[주-D007]
도원(道院) :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 도동에 있던 도동서원(道洞書院)을 말한다. 이숭원(李崇元)의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서원 훼철시에 영정을 충효재로 옮겼다. 그 뒤에 경덕사(景德祠)를 지어 이봉(移奉)하였다.
[주-D008] 나라에서 …… 않겠습니까 :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도동서원에 제향을 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위패는 없지만, 영정과 지방을 놓고 제향을 드린다면 국법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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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문집 제14권 / 제문(祭文) / 종형 사원을 위해 연원군에게 올리는 제문〔爲從兄士元祭延原君文〕
영령께서는, 학문은 육경(六經)을 넉넉히 공부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재주는 경륜을 가슴에 품고 육경(六卿)의 우두머리에 올랐습니다. 공신각(功臣閣)에 화상이 모셔져 있고 영원히 그 공을 잊지 않겠다는 맹세가 남아 있습니다. 경연에서 성상을 가까이 모시면서 항상 곧은 마음으로 보좌하였습니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절조는 더욱 가다듬어졌고 이순(耳順)의 연세를 지나서도 덕은 더욱 커졌습니다. 사람을 예로 대우하여 오래될수록 공을 더욱 공경하였고 집안을 법도 있게 다스려 집안이 더욱 맑아졌습니다. 빛나는 그 모습은 사람 가운데 용 같은 사람이고 출중한 그 자태는 한 시대의 영걸이었습니다. 참으로 주석(柱石)과 같은 인재로 그 존재의 유무에 따라 나라의 경중이 달라진다고 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의지할 사람이 없고 나라는 의뢰할 분이 없게 되었습니다.
성취가 이와 같은 사람이 친척 관계가 되고 같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도 항상 나를 형으로 호칭하였고 벼슬이 나보다 앞섰음에도 나를 선생으로 섬겼습니다. 항상 지란과 같은 기운이 풍겼고 금석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거의 시종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에 늙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고 서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끝나고 말았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몹시 슬프고 놀라워하니, 다만 나라를 위해서 영원히 애석해할 뿐만 아니라 실로 저의 개인적인 정리 때문에 더욱더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마침 채신(採薪)의 근심 때문에 영전에 나아가 가는 길을 전송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의 아이를 보내어 보잘것없는 부의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영령이여, 만약 지각이 있다면 저의 미천한 정성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주-D001] 종형(從兄) …… 제문 : 종형 성숙(成俶)이 연원군(延原君)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을 추도하기 위해 올리는 제문을 성현이 대신 지은 것이다. 연원군을 잃은 것은 국가로서도 애통하지만 사정으로도 애통한 일이라 하였다. 성숙은 자가 사원(士元)으로 증조부는 성석연(成石珚), 조부는 성엄(成揜)이고, 부친은 참판 성순조(成順祖)이다. 호조 좌랑을 거쳐 1465년(세조11) 과거에 급제하였고, 대사간, 전라도 병마절도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10) 동생 성준(成俊)이 갑자사화로 교살되자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이숭원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인(仲仁)이다. 1453년(단종1)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재감 주부가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468년 장례원 판결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동부승지, 이어 좌승지가 되었다.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1471년(성종2) 좌리 공신(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연원군에 봉하여졌다. 이조 판서를 지냈고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648년(인조26) 지례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되었다.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이 전한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주-D002] 채신(採薪)의 근심 : 몸에 병이 난 것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어제는 왕명이 있었지만 채신의 근심이 있어 조회에 나가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병이 조금 나아 조정에 달려 나갔습니다.〔昔者有王命, 有采薪之憂, 不能造朝. 今病小愈, 趨造於朝.〕”라고 하였다. 병이 나면 땔나무를 하지 못하여 근심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병을 겸손하게 지칭하는 표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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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 제6권 / 시(詩) /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홍시가를 보내다〔送洪時可赴慶尙方伯〕
맑은 가을에 장안의 선몌를 떨치고 나가서 / 日邊仙袂攬淸秋
동남쪽 칠십 고을에 간담이 설렁케 하겠네 / 膽破東南七十州
남전은 대략 모방하여 새 규약 세워야 하고 / 略倣藍田新約立
녹동은 오로지 따라서 옛 학규 지켜야 하리 / 專依鹿洞舊規脩
옥산엔 유업이 있는데 어진 자손은 굶주리고 / 玉山有業賢孫餓
도원엔 서책이 없어 학도들이 걱정한다네 / 道院無書學子憂
진중하여 성상의 교화를 널리 선양해야 하니 / 珍重十分宣聖化
두 조항의 일은 도내 유림과 꾀해야 할 걸세 / 兩條要在道中謀
[주-D001] 홍시가(洪時可) : 홍성민(洪聖民, 1536~1594)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 호는 졸옹(拙翁)이다.[주-D002] 선몌(仙袂) : 선인(仙人)의 옷소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조정의 고관(高官)인 홍성민을 선인에 빗대서 한 말이다.[주-D003] 동남쪽 칠십 고을 : 경상도의 여러 군현을 통틀어 이른 말이다.[주-D004] 남전(藍田)은 …… 하고 : 남전은 송대(宋代)의 학자로 남전 사람인 여대균(呂大鈞)을 가리키는데, 그가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만들었다. 그 대강은 “덕업은 서로 권면해 주고, 과실은 서로 바로잡아 주며, 예속으로써 서로 사귀며, 환난을 당하면 서로 도와준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세에 길이 향약의 모범이 되어 왔다. 《宋史 呂大防列傳》 여기서는 소재가 홍성민에게 남전 여씨의 향약에서 대략만 모방하여 새로운 향약을 만들기를 권유하는 뜻이다.[주-D005] 녹동(鹿洞)은 …… 하리 : 녹동은 당(唐)나라 때 강주 자사(江州刺史) 이발(李渤)이 처음 창건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가리키는데, 이 서원은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동남쪽에 있었다. 당초 이발, 이섭(李涉) 형제가 일찍이 이곳에 은거하여 글을 읽으면서 흰 사슴 한 마리를 기르며 스스로 즐기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백록선생(白鹿先生)이라 칭하였다. 뒤에 이발이 강주 자사로 부임하고는 여기에 대사(臺榭)를 세우고 ‘백록동’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송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백록동서원이라 칭하게 되었다. 남송(南宋) 시대에 와서는 주희(朱熹)가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부임하여 백록동서원의 유지(遺址)를 찾아서 옛 모습을 재정비하고 학규(學規)를 만들어 강학에 힘썼다. 《宋史 道學列傳 朱熹》 여기서는 소재가 홍성민에게 그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주희의 백록동학규를 그대로 따라서 시행하기를 바라는 뜻이다.[주-D006] 옥산(玉山)엔 …… 굶주리고 : 옥산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유업(儒業)이 자리한 경주(慶州)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을 가리킨 것으로, 여기서는 홍성민에게 이언적의 어진 자손들을 굶주리지 않도록 도와주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주-D007]
도원(道院)엔 …… 걱정한다네 : 도원은 이숭원(李崇元)을 향사(享祀)하던 지례(知禮)의 도동서원(道洞書院)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홍성민에게 도동서원의 학도(學徒)들을 위하여 서책을 지원해 주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주-D008] 두 조항의 일 : 이언적의 후손들을 굶주리지 않게 도와주는 일과 도동서원에 서책을 지원해 주는 일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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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집(容軒集) 이원(李原)생년1368년(고려 공민왕 17)몰년1429년(조선 세종 11)자차산(次山)호용헌(容軒)본관고성(固城) 철성(鐵城)시호양헌(襄憲)특기사항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의 문인
容軒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 明湖書院講堂上樑文 後孫蓍秀
李蓍秀 | 1790 | 1849 | 固城 | 景圓 | 慕亭 |
歿而祭於社。百世之風猷尙存。古者黨有庠。三代之敎法可考。瞻高山而仰遺躅。捨舊院而立新規。恭惟容軒先生。河嶽毓靈。星斗降彩。稟正大壁立之氣。秀出萬人。應文明奎聚之期。際遇千載。課忠責孝。趾美乎文貞,文敬之家。論道經邦。佐理於太祖,太宗之世。宅百揆而寧萬姓。人賀勻衡之平。歷四廟而秉一心。國倚柱石之重。功存翊漢。王府藏丹券盟書。名播觀周。天子呼黃髥宰相。蓋其勳勞事業。皆本於學問之純深。亦有言論文章。可證於師友之推詡。圃隱爺許以儒術。淵源有自來。春亭老讓其文衡。詞律特餘事。銘彝鼎而考績。展也國朝名卿。載簡策而流芳。允矣經學君子。矧乎遺澤之遍及於吾嶺。是以追慕之尤別於後人。逮三世而復得忘軒公。冠一代而大振鐵城氏。鍾純剛於天地。凜乎貫日之忠。繼正聲於風騷。燁然華國之藻。從師講道。寒蠹睡濯之齊名。通藉蜚英。昆弟叔侄之踵武。蓮燭歸院。賜暇讀書之堂。玉節朝京。解撰淸河之頌。不幸師門之禍。一網打於正人。奈何孤臣之囚。六載困於荒徼。流涕黨錮之籍。復見白馬淸流。正色危亂之朝。卒陷靑鼠大難。天日改照。深燭覆盆之冤。璇筆親題。特降旌門之典。惜其經濟未試。西厓之錄備詳。猶有文獻足徵。永嘉之誌昭載。猗歟德業風節。偏萃於一家。宜乎俎豆羹墻。崇報於千祀。
肆明溪設此道院。
維名祖配以賢孫。蓋倣鹿洞舊規。並腏劉西澗父子。雖非畏壘遺址。何害庚桑楚祝尸。可見秉彝之衷。無間遠邇。尙欠尊賢之道。未盡謹嚴。云胡鬼魅。窺靜謐之中。猝然事變。出意慮之外。神棲驚動。不可仍奉於危邦。士林憂惶。亟欲改圖於他所。所以自廬江先昌。咸曰惟福州允臧。按節南方。最愛崇禮尙儉之俗。擇居東郭。遂爲貽謨種德之基。白鶴歸於遼陽。尙認李翰林之門巷。朱烏影於滄海。長繁張僕射之名聲。湖樓舊題。至今照臨川之筆。杏亭高會。曠世感通泉之墟。兩岸之臺榭周遭。卽孫曾休退之地。一郡之庠塾列峙。是仁賢輩出之鄕。召亭的在何州。斯可驗遺芬之未沫。濂溪移取舊號。夫孰曰新創之有嫌。牧伯郊迎。奉板輿而奔走。雲仍愴感。掃江閣而權安。乃是詢謀之所同。庶幾妥侑之無憾。爰卜二水上名勝。正合兩亭間排鋪。首艮尾坤。襟帶叶明河之象。背離面坎。方位取神道之幽。湖山十里仙家。始覺詩語之符驗。文藻百年古宅。更看衣被之昭回。鬼祕神慳。自是名區之有其主。臺平界闊。又其庠舍之不能容。運木石而經營。稍待數年蓄力。捐簪佩而勸相。皆願一心殫誠。在去歲先立翼翼之宮。而今日繼起渠渠之屋。衆工執藝。一聽匠氏之指揮。多士獻圖。專付奚期之主管。事鉅力屈。幾歎規模之未成。日吉辰良。旋喜縟儀之將擧。乘雲車而陟降。如挹杖屨之光塵。聽昕鼓而周旋。復聞弦歌之正響。是豈爲文具之虛設。且將見名敎之重明。迺助樑上呼庸作曲終之奏。兒郞偉拋梁東。海天初闢日輪紅。須臾照破浮雲蔽。影入台垣玉燭同。兒郞偉拋梁南。嶠嶺千年聖化覃。攬轡澄淸遺愛在。家家絃誦與農蠶。兒郞偉拋梁西。廣陵松柏白雲齊。山河帶礪無今古。碑面煌煌信筆題。兒郞偉拋梁北。淑氣花山天峻極。鍾得貞忠扶國綱。表閭長使後來式。兒郞偉拋梁上。列宿森羅辰極向。更看奎華一點明。海東鄒魯重回旺。兒郞偉拋梁下。滾滾長河日夜瀉。一理流行萬古同。聖人曾歎如斯者。伏願上樑之後。地靈呵護。儒敎興隆。籩豆靜嘉。恭修四時之香火。衿佩彬菀。樂育一方之英材。誦其詩讀其書。仰軌轍而思趾。居乎仁由乎義。攀戶牖而同歸。二三子益懋講明。千百歲永觀成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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凝窩先生文集卷之二十二 / 行狀 / 成均進士上洛金公行狀
金養楨 | 1785 | 1847 | 安東 | 濟彥 | 定菴, 南州下士, 沙眞軒 |
壬申負笈于愚山。亟蒙奬詡。丙子陪往道南講中庸。留侍對山樓月餘。又受大學。以詩言志。有道院千年瞻壁屹。山樓一月坐春深之句。及歸先生跋武夷圖屛以寵之。
鄭宗魯 | 1738 | 1816 | 晉州 | 士仰 | 立齋, 無適翁, 愚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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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대산루(對山樓) | 조선 중기의 학자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독서 강학하던 곳으로,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46(우산리 193-1)에 있다. | 입재집(立齋集) |
2 | 대산루(對山樓)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독서 강학하던 우산서원(愚山書院) 부속 건물로,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에 있다. | 입재집(立齋集) |
3 | 대산루(對山樓)에서 …… 우암 | 대산루(對山樓)는 정경세(鄭經世)를 제향했던 우산서원(愚山書院)의 문루이다. 우암은 대산루 앞을 흐르는 이안천[현 행정지명]에 있는데, 지금은 나무가 둘러 있어 대산루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 입재집(立齋集) |
4 | 산루(山樓) | 대산루(對山樓)를 가리킨다. 대산루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1600년(선조33)경에 고향 상주로 돌아와 지은 건물로, 독서 및 강학하던 장소였다. | 입재집(立齋集) |
5 | 산루(山樓) | 대산루(對山樓)를 가리킨다. 대산루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1600년(선조33)경에 고향 상주로 돌아와 지은 건물로, 독서 및 강학하던 장소였다. | 입재집(立齋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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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1권 / 소(疏)
우산서원(愚山書院)을 복설(復設)할 것을 청하는 의작(擬作) 소(疏) 기사년(1869, 고종6) 〔擬請愚山書院復設疏 己巳〕
삼가 생각건대, 신(臣)이 거주하는 경상도의 신하였던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는 곧 선조(宣祖) 때 유신(儒臣)입니다. 공이 이룩한 도학(道學)의 연원(淵源)과 사직을 일으켜 세운 정충(貞忠) 그리고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에 대한 업적이 역사책의 기록과 제현(諸賢)들의 찬술(贊述) 등에 두루 보이니, 신 등이 전하를 위해 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경세는 어릴 때 일찍이 선정(先正) 신(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제자인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습니다. 일심으로 도(道)에 향함이 마치 모든 물길이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것 같았으며, 화살이 과녁을 향해 적중하는 것 같았습니다. 낙양(洛陽)과 건양(建陽)에 학문의 근원을 탐구했고,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 그 여운을 접하였습니다. 앞서 나열한 이것이 바로 공의 도학 연원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군부(君父 임금)께서 몽진하는 것을 보시고는 분발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의병을 창도하여 왜적을 참수하고 포획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관직과 상을 내려 주었습니다. 경연관으로 재직함에 이르러서는 임금에게 진대(陳對)하였으며, 상소문으로 경계하는 글을 올려 임금을 이끌어 도(道)에 당면하게 하는데 진심을 다하였습니다. 구언(求言)에 응함과 시무(時務)를 진술함, 그리고 재이(災異)를 논함과 상례(喪禮)를 논술한 여러 가지 설(說)들은 모두 삼대(三代) 명신(名臣)들의 훈고(訓誥)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조정과 재야에서 공의 풍채(風彩)를 생각하고 우러름이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 교외의 숲에 있는 것과 같으며, 의젓한 봉황이 천길 절벽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이 공이 사직을 부지(扶持)한 정충(貞忠)입니다.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극진히 하고〔致知〕 몸에 돌이켜 실천하였습니다. 《사문록(思問錄)》을 저술하고 《주문작해(朱文酌海)》 등의 책을 편찬하였습니다. 만년에는 예학(禮學)을 더욱 정치하게 연구하여 인정과 예문〔情文〕을 헤아리고 따졌으며 고금을 고증하며 바로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조(國朝)의 전장(典章)과 사가(私家)의 상변(常變)에 있어서 모두 근거를 두어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공이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한 업적입니다.
오호라! 정경세의 도학 연원과 사직을 부지하는 정충, 그리고 계왕성개래학하는 업적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공을 높이고 보위하는 방법에 있어서 임금의 빛나면서도 은혜로운 사액을 내리는 일을 마땅히 나라 안의 다른 사액 서원보다 늦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제현인 문충공(文忠公) 신(臣) 유성룡(柳成龍)의 병산서원(屛山書院)과 문목공(文穆公) 신(臣) 정구(鄭逑)의 회연서원(檜淵書院), 문강공(文康公) 신(臣) 장현광(張顯光)의 동락서원(東洛書院) 같은 곳은 모두 이미 편액에 임금의 은총이 극진히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정경세의 영혼을 편안히 모시는 주된 이 서원은 신등(臣等)의 정성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지금까지도 명칭이 국승(國乘 나라 역사책)에 오르지 않았고, 사안이 나라의 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찌 무진년(1868, 고종5) 가을 나라 안의 서원이 훼철될 때, 그 가운데 섞여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등은 교서를 받들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하기를 “우리 전하의 현자와 덕 있는 사람을 숭상하는 뜻이 어찌 문장공 정경세를 돌아보지 않으신가?”라고 하였습니다. 신등이 사액을 청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르니, 신등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서로 조의를 표하면서 스스로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오호라! 서원은 곧 삼대(三代) 당서(黨序)의 유제(遺制)로, 도학(道學)을 밝히기 위해 설치된 것입니다. 도학은 국가(國家)의 원기(元氣)이며, 성현(聖賢)은 도학의 종주(宗主)입니다. 도학이 밝아지면 인심이 선해지고, 인심이 선해지면 풍속이 아름답게 됩니다. 풍속이 아름답게 되면 자식으로 아버지에게 효도할 줄 알고,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성할 줄 알며, 유자(儒者)로 의리와 이익, 왕도와 패도를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이에 백성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법맥을 잘 유지하게 되니, 이것은 어찌 도학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유(先儒)들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노(魯)나라에 들러 공자(孔子)의 사당에 제사를 드린 것이 400년 동안 왕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터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송(宋)나라에서 사대(四大) 서원(書院)을 설치하였고, 남송 이후에 국난이 많았지만 오히려 서원의 건립을 숭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태평성대에는 천하에 두루 설치되어 사원(祠院)이 많은 선비들이 귀의할 곳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헛되이 설치된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실로 국기(國基) 사업의 장단(長短)과 정치 교화의 성쇠, 그리고 인심의 향배에 관련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도(吾道 유교)가 동방으로 옴에 우리나라의 학교 설치는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또 선유(先儒) 신(臣)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으로 인하여 임금께서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하셨으며, 또 경서를 하사하시고 학문을 권장하셨습니다. 이에 크고 작은 고을들이 풍문을 듣고 흥기하여 앞다투어 서원을 건립하여 가르침과 학업을 깊이 숭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절의(節義)가 성대해지고 도학이 밝아져서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아 소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보답하여 사기(士氣)를 배양한 교화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로 세도(世道)가 날로 쇠퇴하고 선비들의 추향이 날로 비루해져서, 각각 자기 조상을 존숭하고 각자 자기 선생을 끼고 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하나의 경전을 밝히고 한 집안을 가지런히 다스린 공로가 있으면, 모두 사당을 만들어 서원이라 통칭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서원이 지나치게 번성함을 염려하여 갑자기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리셔서, 삼천 리 온 국토를 하루아침에 깨끗이 청소하듯이 쓸어버렸습니다.
아! 저 무부(無父) 무군(無君)을 추구하는 천암(千巖) 만학(萬壑)의 임궁(琳宮)과 범우(梵宇)는 오히려 여전히 전성 시대를 구가하는데, 우리 유림들이 수양하고 공부하는 장소〔藏修〕는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경서를 들고 도를 구하는 선비들을 허둥거리며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무궁한 근심거리입니다. 신등은 ‘일세(一世)의 공의(公議)가 모아진 분이고 나라에서 종사(宗師)로 받드는 분은 전하께서 비록 지금 그분의 서원을 훼철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복설(復設)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천리(天理)의 공변된 것에 합치되고 진실로 인정의 바름에 흡족한 것이니, 참으로 석개(石介)의 이른바 성덕(盛德)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태조(太祖))가 화가 나서 추성(鄒聖 맹자(孟子))의 위패(位牌)를 없애 버렸는데, 전당(錢唐)의 극간(極諫)으로 인하여 철거 명령을 취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 효종(孝宗)께서도 신축년 이후 새로 지은 서원을 철거하라고 하명하셨으나, 김창흠(金昌欽)이 상소한 것으로 인하여 다시 복설하였습니다.
신등은 당시 서원을 훼철하라는 엄한 어명이 내려졌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한마디 상소문을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신하가 임금을 섬김이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불행하게도 어버이의 마음이 혹 기뻐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되면 자식은 결단코 마땅히 자기를 꾸짖고 죄를 주면서, 우선 어버이의 뜻을 이어받아 따르면서 기쁘게 해 드린 뒤에 자기의 생각을 다 털어 놓아도 늦지 않을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공손히 오늘까지 기다렸다가 이에 감히 마음을 피력하고 심혈을 쏟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저의 신분은 미미하고 정성은 얕아서 위로 전하의 마음〔淵衷〕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국가를 위하고 사문(斯文)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명나라 고황제의 넉넉한 법전을 앙모하시고, 우리나라 열성조의 대덕(大德)을 체찰(體察)하시어, 정경세의 우산서원을 복설하는 것을 특명하시는 일에 조금도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비단 전하께서 가까운 이의 의견을 살피고 추요(芻蕘)의 말도 취하는 덕은 앞의 훌륭한 성인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는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 사문(斯文)의 행운에도 원대함을 경영하고 영원함을 기원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상소문을 씀에 재단하지 않고 함부로 썼으니, 죄가 만 번 죽는데 합당합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유의하셔서 밝게 살펴주십시오.
[주-D001] 우산서원(愚山書院) :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던 서원이다. 1796년(정조20)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경세(鄭經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정종로(鄭宗魯)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고, 그 뒤 복원되지 못한 채, 현재는 부속 건물인
대산루(對山樓)만 남아 있다.
[주-D002] 정경세(鄭經世) :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19)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수찬, 사간,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대제학에 이르렀다.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로 불렸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등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우복집(愚伏集)》이 있다.[주-D003]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 : 과거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자들에게 열어서 보여 주는 일을 말한다.[주-D004] 선정(先正) : 돌아간 유현(儒賢)을 일컫는 말로, 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현을 지칭한다.[주-D005] 이황(李滉) : 1501~1570.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다. 1534년(중종29)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으로 대제학과 외직으로 단양 군수, 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주자학(朱子學)을 깊이 연구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조종(祖宗)이 되었고, 특히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저술과 강학에 힘썼으며 많은 문도들을 배출하였다. 문묘(文廟)와 선조(宣祖)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예안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주-D006] 유성룡(柳成龍) : 1542~1607.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유운룡(柳雲龍)의 동생이며 이황(李滉) 문인이다. 1566년(명종21)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고, 왕을 호종하였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서애집》과 《징비록(懲毖錄)》이 있다.[주-D007] 모든 …… 것 : 중국의 지형은 서쪽은 산이 있어 높고 동쪽은 평지이다. 그러므로 모든 강물은 서쪽에서 발원하여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萬折必東〕 즉 만사귀정(萬事歸正)의 뜻이다.[주-D008] 낙양(洛陽)과 건양(建陽) : 정자(程子)는 낙양(洛陽) 출신이고, 주자(朱子)는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뜻하니, 곧 우복이 정주학에 근원하여 연구했다는 말이다.[주-D009]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두 강 이름인데, 공자가 이 사이에 문도를 모아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공맹(孔孟)의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10] 구언(求言) : 임금이 신하에게 정사(政事)의 득실에 대해 바른 말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주-D011] 상서로운 …… 것 :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기린과 봉황이 교외의 숲에 있고, 황하와 낙수에서 하도와 낙서가 나왔네〔麟鳳在郊藪 河洛出圖書〕”라고 하였다.[주-D012] 사문록(思問錄) : 정경세(鄭經世)가 《역학계몽(易學啓蒙)》과 그 주석설(註釋說) 가운데서 의심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설을 덧붙여 답을 제시한 글로, 《우복집(愚伏集)》 별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역학계몽》과 《예기》를 읽다가 의심이 생길 때마다 깊이 생각하고 그러한 사색 끝에 얻어진 새로운 깨달음을 기록한 것이다.[주-D013] 주문작해(朱文酌海) : 정경세(鄭經世)가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긴요한 부분의 글만을 뽑아 엮은 책으로, 16권 8책의 목판본이다. 1648년(인조26) 이만(李曼)이 발간하였고, 그 뒤 1653년(효종3) 송시열(宋時烈)이 발문을 썼다. 내용은 봉사(封事)ㆍ주차(奏箚)ㆍ의장(議狀)ㆍ서(書)ㆍ잡저ㆍ서(序)ㆍ발 등으로, 그중 잡저 부문에 학술적인 내용이 많다.[주-D014] 상변(常變) : 상(常)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변(變)은 변하는 것이니,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례(常禮)와 변하는 변례(變禮)를 말한다.[주-D015]
병산서원(屛山書院)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1613년(광해군5)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유씨(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겼다. 1620년(광해군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이황(李滉)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유성룡의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7)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고, 그의 셋째 아들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配享)하였으며, 1863년(철종14)에 ‘병산’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주-D016] 회연서원(檜淵書院) :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서원이다. 1622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0년(숙종16) ‘회연(檜淵)’이라 사액받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주-D017] 동락서원(東洛書院) : 경북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서원이다. 1655년(효종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 ‘동락’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1932년 다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주-D018] 무진년 …… 했겠습니까 : 무진년(1868, 고종5) 가을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린 것을 말한다.[주-D019] 당서(黨序) : 옛날의 학교 제도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의 교육기관으로 숙(塾)은 25 가구가 모인 규모의 고을 학교이고, 상(庠)은 500 가구 규모의 고을〔黨〕 학교이며, 서(序)는 2500가구 규모의 고을〔州〕 학교이고 그리고 나라에 국학(國學)이 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고 하였다.[주-D020] 주세붕(周世鵬) : 1495~1554.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ㆍ남고(南皐)ㆍ무릉도인(武陵道人)ㆍ손옹(巽翁)이다. 1522년(중종17) 문과에 급제하였고, 1541년(중종36) 풍기 군수가 되어 향교를 이전하고, 또 1543년(중종38)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저서로 《죽계지(竹溪誌)》,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과 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주-D021]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38)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건립한 서원이다. 중국의 주희(朱熹)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설립한 것으로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하였다. 배향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주-D022] 소수서원(紹修書院)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원래는 이곳에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는데, 1543년(중종38)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였다. 그 뒤 1548년(명종3)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명종5)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1633년(인조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그대로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주-D023] 무부(無父) 무군(無君) : 무부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겸애설을 주장한 묵적(墨翟)을 말하고, 무군은 나라의 임금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기주의를 주장한 양주(楊朱)를 말한다. 《맹자 등문공 하》에 “양주는 자신을 위하니 이것은 무군이고, 묵적은 겸애이니 이것은 무부이니, 무부와 무군은 모두 금수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是禽獸也〕”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불교와 도교를 말한다.[주-D024] 임궁(琳宮)과 범우(梵宇) : 임궁은 도가(道家)의 사원이고, 범우는 불교의 사찰이다.[주-D025] 수양하고 공부하는 장소 : 장수(藏修)는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원전에서는 ‘장수(莊修)’로 되어 있으니, 아마도 오자인 듯하다.[주-D026] 석개(石介) : 송(宋)나라 노인(魯人)으로, 자는 수도(守道)이며 호는 조래 선생(徂徠先生)이다. 학문에 독실한 뜻을 가졌고 일을 당해선 과감했으나,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몸소 조래산 아래서 밭 갈고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주역》을 가르쳤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조래 선생이라고 불렀다.[주-D027] 전당(錢唐) : 명(明)나라 초기 사람으로 자는 유명(惟明)이며 절강(浙江) 상산인(象山人)이다. 박학하고 행실에 돈독하여 홍무(洪武) 1년(1368) 명경과(明經科)에 천거되었다. 그 뒤에 대책문(對策文)을 지음에 임금의 뜻에 부합하여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특진되었다. 태조(太祖)가 《맹자(孟子)》에 “임금이 신하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면, 신하는 임금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맹자를 문묘배향에서 제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조치에 대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불경(不敬)의 죄로 다스리겠다고 조칙을 내렸다. 이때 전당이 상소문을 올려 충간하기를 “신은 맹가(孟軻)를 위해 죽을 것이니, 그렇게 죽으면 저의 영광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맹자의 배향을 회복하게 하였다. 《獻徵錄 卷44》[주-D028] 전하의 마음 : 연충(淵衷)은 연못처럼 깊은 마음이라는 말로 임금의 마음을 일컫는다.[주-D029] 추요(芻蕘)의 …… 덕 : 땔나무를 하는 천박하고 비루한 사람으로, 이러한 사람에게도 일을 묻는다고 하였다. 《시경》 〈판(板)〉에 “옛날 어진 사람의 말에, 추요에게도 묻는다 하네.〔先民有言 詢于芻蕘〕”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