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상황을 접하게 되면 그때 그때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된다.
어떤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따를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 선택 기준이 남과 조금 다를 경우는 고집이 쎈 사람으로 보이고 비슷한 선택을 하면 순해 보일 수도 있다.
남과 다른 선택을 했다고 누가 옳고 그른 것도 없고, 그냥 사람마다 다른 선택을 할 뿐이라고 훌륭한 분들과 매스컴 여기 저기서 많이 얘기들 하지만, 남과 다르면 자칫 “따”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약간 “따”로 살아 온 거 같다.
나를 자주 만나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은 그동안 가끔씩 이런 얘기를 할 기회가 있어 나를 고집 센 동창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고집 센 것이 무슨 자랑거리는 절대 못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나는 어떤 생각과 기준으로 선택을 한 것이 아니고 그저 돈이 부족했던 상황이 나를 어쩔 수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내 몰았고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 하려고 나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의 선택은 나를 “따”로 살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중고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가지 정말 열심히 공부 해 보지 못 했다고 생각했고 그 후에 석박사 과정을 하면서는 체력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나름 똥줄 빠지게 공부를 해 봤지만 그것도 남들에게 비할 바는 못된다. 판소리 완창이란 것이 책 한권을 새소리 한마디부터 음정 가락까지 몽땅 외우는 것이라는데 나는 석사 과정 기말시험 실패 이후(C는 실패), 교수에게 사정사정해서 원서 한권을 한 달 안에 토씨하나 안 빼고 외우는 조건으로 재시험 허락 받고 재시험 당일 8절지 100여장에 아침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점심 안 먹고 써 봤는데 나는 1년 이후 모두 잊어 버렸으니 판소리 하시는 분들 발꼬락 끝에도 못 따라간다.
대학 졸업 이후 운 좋게 공기업에 입사를 하게 된 나는 같은 직종 20명의 동기들과 함께 즐겁게 회사 생할을 시작하면서 공기업에서는 상급자가 마음에 안드는 아래 직원을 승진은 안시킬 수 있지만 자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5년이 지나가면서 동기들은 진급 문제를 얘기하기 시작했고 소위 줄서기를 시작했다. 모든 인사 실권을 쥐고 있는 처장님께 출장 나갈때와 돌아올 때 인사를 하는데 처장님 집을 찾아가 사모님께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입사동기들이 만든 전통이 아니고 우리 선배인 과장, 부장들이 자기들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승진하고 싶다면 무조건 따라하라고 말해 주었다.
또한 처장 사모님은 동일 직종 부인들의 왕초님이셨다, 주말이면 본사 동일 직종 30여명 직원 부인들이 처장 사모님의 지시에 따라 관광버스로 전국 맛집을 찾아다니셨다. 각도의 지사에 근무직원 부인들은 가끔씩 따로 처장님 사모님 일행을 자기네 지방으로 초대해서 한턱 내고 있었고 이런 얘기들이 년말 승진 심사 때마다 상세하게 상황 중계되고 있었다. 처장님 집으로 인사 다니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 불편하고 들리는 선물비도 부담이 돼서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돈이 없는 상황이 나의 동기들과는 다른 길을 가게 만든 것이다.
내 어부인에게 그러한 상황을 보고했다. 당연히 어부인도 그런 모임에 따라 갈 생각도 없고 돈도 없다며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애들 학교 선생을 한 번이라도 찾아 가겠노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입사후 10년쯤 지난 망년회 자리에서 처장 사모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내게 하시는 말씀이 “이 계장님 내가 누군지 아시지요 나는 우리 처 소속 직원 부인 얼굴들을 모두 다 아는데 이계장 부인 얼굴만 아직 몰라요” 하시길래 한 번은 꼭 인사를 시키겠다고 대답했고 그 이후 몇 년 지난 망년회 때 나의 어부인 얼굴을 처장 사모님께 보여드렸다. 기가 차 하시던 처장 사모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줄서라는 선배들의 충고뿐 아니라 나중에는 동기들까지도 여러번 나에게 권했지만 결국 나는 줄을 설 수 없었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줄 서지 말고 편하게 내 멋대로 살자. 동기들 중에서 승진 가장 늦게 하면 되지 뭐.” 그랬다 나는 동기 중에서 거의 꼴지로 승진을 했지만 매 년말 승진 심사 때마다 한 번도 누구에게 빈말이라도 승진을 부탁을 하거나 혹시나 기대하며 가슴 졸여 본 적 없다. 만년 계장을 17년 달며 편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결국 나의 주무부서 처장님 휘하를 자진해서 떠나 연구원과 해외사업처로 전전하면서 타직종들과 근무하며 뒤 늦게 과장, 부장을 달고 처장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상관의 눈치 전혀 안보고 30여년 근무하면서 정말 편하게 직장생활 할 수 있었던 것에 지금도 감사한다.
학교 공부에 대한 내 경험을 생각해보고 또한 내 월급이 평범한 월급쟁이 정도라서 나는 나의 두 딸들도 나처럼 그냥 대충 공부해서 서울 소재 대학까지 가게 되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EBS 교육방송을 보면 정말 잘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출연하셔서 그 어떤 학원 강사님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고 딸들에게 적극 권장했다. (가만 보자, 당시 모헌 조 영태 교수님께서 EBS 방송에 한축을 담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감사해야 하는게 맞지?) 그리고 두 딸에게 너희는 서울 소재 대학을 가면 되고 그 정도는 사교육 없이 가능하다고 얘기 했다.
두 딸 모두 현대고를 다녔는데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사교육을 받기 편하도록 고 2, 3학년때도 거의 오후 4시가 되면 학교 수업이 끝내고 집으로 돌려 보냈는데 같은 반에서 우리 두 딸 빼고는 거의 모두 사교육을 받았고 결국 두 딸은 중고교 친구가 몇 명 안 된다. 학원과 과외를 함께 다녀야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 문제는 딸들에게 미안하다. 다행히 내 생각대로 두 딸은 서울 소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둘 다 사교육 없었던 것에 만족해 하고 있다. 두 딸 모두 고교 3년 동안 오후 4시 이후에는 집에서 EBS를 가끔 보면서 공부하라는 잔소리 안들으며 스트레스 적게 받으며 보냈다.
두 딸은 우리에게 말하길 부모로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자신들을 거의 공짜로 키운다며 피자와 광어회를 원할 때마다 사줄 것을 요구해서 종종 수산시장에 가서 사다가 주었다.
현대고에 우리 두 딸이 다니는 동안에 누구 누구 부자집 엄마들은 다른 부모들에게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학교 선생님들을 부지런히 쫒아 다니셨고 결국 그런 친구들은 아주 훌륭한 내신으로 소위 SKY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며 두 딸이 내게 불평을 했지만 나는 두 딸에게 너희는 그냥 수능으로 성적에 맞는 대학교에 가도 된다고 대답했다. 졸업식 장에서 그런 부모를 가진 아이들에게 상장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상장이 수여되는 것을 보며 두 딸이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두 딸은 우리 집이 친구들에 비해 상당히 가난하다고 생각했으며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나는 두 딸에게 핸폰도 대학 들어가서야 사 주었는데 두 딸은 우리가 정말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교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두 딸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가난 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두 딸이 중년의 나이들인지라 가끔 동창회를 다녀 오면 그 당시 SKY 대학을 들어간 친구들이 지금도 잘나가고 있지만 대학이 행복과는 크게 상관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큰 딸이 결혼을 하고 지금 딸과 아들을 한명씩 낳아서 첫 손녀는 내년에 초등학교를 가게 된다, 손주들과 관련해서 나는 내 딸에게 몇 가지를 나의 생각을 따르도록 부탁했다. 우선 요즈음 유행하는 산후 조리원을 가지 말라고 했다. 이 문제 역시 돈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손주는 친정 엄마가 돌봐주는 것이 산후 조리원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생각에 산모입장에서는 산후조리원이 여러 면에서 친정 엄마보다 더 잘 돌봐 준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태어난 아가에게는 할머니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딸이 병원에사 아이를 낳고 나는 몇 일간 병원에 문안을 다녔는데 갈 때마다 병원에서 갓 난 아기들을 돌봐주는 모습이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갓 난 아기를 포대기로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꼭꼭 싸매서 바구니 안에 뉘이고 정해진 시간이 되어야 엄마를 오게 해서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혼자서 여러 아가를 관리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어 보였다.
아가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도 팔다리를 마음껏 움직이고 발차기도 하던 아기인데 저렇게 포대기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싸매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어른들도 2주간 석고 기부스를 하면 불편하고 다시 움직이려면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내 손주에게 그런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가들이 아무 때나 배고프면 먹어야지 2~3 시간 마다 규칙을 정해 젖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딸에게 절대로 산후조리원에는 가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두 손자는 결국 산후 조리원 신세를 지지 않았다.
첫 손녀는 내년에 초딩 들어가는데 나는 유치원 이외에는 어떤 학원도 보내지 말라고 딸에게 부탁했다. 자식을 학원에 꼭 보내고 싶다면 태권도 한 가지 정도는 보내도 좋을 것이라고 했더니 결국 두 손주 모두 아무 학원도 보내지 않아 정말 나는 만족스럽다, 나는 유치원도 없이 자랐지만 유치원 정도면 어린이 교육으로는 충분하고 나머지는 엄마가 놀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도 돈과 관련된 나자신의 합리화 일지 모른다
만일 자식이 천재이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다면 조기 교육이 큰 효과를 거두겠지만 나는 내 손주들이 그런 천재성이나 특별한 재능도 없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약에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재능은 죽이고 평범하게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 친구들을 사귀며 성장하기를 바라고 어떤 분야에서든지 맨 앞에서 3등 안에는 들지 말기를 바란다.
살아오면서 내가 한 선택이 나의 생각으로 결정된 것인지 아니면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쪽으로 선택된 것이었던지 헷갈리지만 합리화는 나를 편하고 안락한 방향으로 살아 올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가족들에게 미안한 점들도 많다.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나의 두 딸이 아직까지는 많은 것을 내가 선택한 대로 따라와 줘서 나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 앞으로도 내 손주들도 사교육 없이 대충 정규 학교만 다니고 아무 운동이나 한가지 정도 배우면서 서울 소재 대학정도를 다녔으면 하는게 돈 부족한 할아버지의 바램이지만 그때까지 내가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오늘도 손주 두녀석은 대머리 할아버지를 너무도 좋아해 주고 갔다.
첫댓글 최근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가 있는데.... '허쉬'라고.... 그 드라마에 이런 귀절이 있어. '밥은 펜보다 강하다.' 매우 반어법적으로 쓴 글인데 최근 기철이 너의 글을 읽으며 갑자기 그 귀절이 생각난다. 나는 대부분 너에게 듣고 보고 해서 아는 내용이지만 흥미진진하니까 계속 자서전을 발표하면 좋겠다. '브라질 땅' 얘기 등등 무궁무진하잖아. 수고....
어부인께서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을 두셨네 ㅎㅎ
그래도 속내는 든든하게 여기시며 행복해 하시겠다~
남자가 고집도 없이 빌빌대며 아부하며 출세해야봐야....
그래서 우리 여태 살아 오며 그런 사람들 잘 된 꼴 본 적이있나?
돈이 없어 사교육 못시킨 대목은 애들한테 좀 미안하지만 말이야~ㅋ
요즘 자네 글 읽고나면 뭔지는 몰라도 시원한 맥주 한병 마신 것 같아 좋다~
솔직한 이야기라기보다 진솔한 이야기라고 말해야 하겠네...... 자기 원칙이 분명하고 그 원칙에 충실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아. ㅋ안동 권씨 권여사에게도 안부 좀 전해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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