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경주 남산의 용장골, 관음사에 가다
얼마 전에 용장사터를 만나러 용장골을 올랐다가 비를 만나 혼이 난 적이 있다. 그날 빗줄기가 가늘어져서 설잠교 너머 산 언저리를 어슬렁거렸지만 비에 젖은 몸에 추위가 엄습해서 서둘러 하산했다. 즐거운 기억은 아니다. 그런데 다시 용장골을 찾기로 했다.
경주 남산은 젊은 날부터, 더 일찍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도 없이 올랐다. 주로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으로 등산길은 잘 모른다. 용장골은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으로 가는 길목이 용장골이기 땜문이다.
용장골에 있는 절 중에는 터도 확정하지 못하는 용장사가 제일 유명하다.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는 사실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봄꽃들은 거의 져버렸고, 또 지기 시작하여 오히려 초여름이 얼굴을 내민다. 이번 주말에는 어느 절에 갈까? 집사람과 용장골을 한 번 더 찾기로 했다. 비에 쫓겨 허겁지겁 다녀왔으므로, 여유를 가지고 한 번 더 찾아가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시간이 나면 배동의 삼릉 옆에 사시는 박대성 화백도 찾아보자고 했다.
머릿 속에 경주로 가는 길은 훤하다. 버스를 타고 경주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내려, 앞 머리에 5자를 달고 있는 5**인 번호의 버스를 타면 용장골 입구에 내려준다는 사실도 안다.
용장골을 조금만 들어가면 용장사터로 가는 길과 고위산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고위산으로 가는 길가에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까지는 차가 다니도록 길을 잘 다듬어서 포장까지 해두었다. 아내와 나는 관음사를 선택하고, 천천히 올랐다. 절까지는 1.5킬로미터 쯤의 거리라고 하나, 길이 훤히 뚫여 있으니 힘들지 않으리라.
용장사 쪽으로 가는 길보다는 계곡도 좁고, 경관도 좋지 않다. 그래도 조금 더 오르니 산 아래 마을도, 널찍하게 펼쳐져있는 내남들도 보이지 않는다. 산 능선으로 둘러싸여서 잎들이 움트는 나무들만 보인다. 아내는 안개에 묻혀 있는 산속의 나무들을 좋아한다. 안개는 없지만 하늘로 뻗은 나무 줄기가 겹겹으로 겹쳐진 모습을 즐겼다.
옛날에 남산의 유적지를 찾아다닐 때 안내하시는 분이 경주 남산의 뻬어난 점을 이렇게 말했다. 남산은 남쪽으로 누워있는 얕으막한 산이지만 골짜기가 40여 개나 된다. 짧은 골짜기이더라도 골짜기를 조그만 들어가면 깊은 산의 운취가 느껴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로 덮여 있는 산만 보이니------, 그 말이 실감난다. 그리고 배병우라는 사진작가가 찍었던 삼릉의 구불구불한 소나무들, 적막감, 등등이 바로 그 사진 속에 내가 있는 듯이 느껴진다.
관음사로 오르는 길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을 많이 만났다. 발걸음이 가볍다, 전문 등산가의 기분은 느껴지지 않고, 그냥 산책을 다녀오는 듯하다. 길의 경사가 더 심해진다. 힘들여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올랐다. 저 앞에 절집의 지붕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사(寺)라고 하였으나 자그마한 절집 한 채가 하늘로 치솟은 바위 아래에 있다. 암자라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내가 용장사터를 찾으려 이곳이 고향인 분에게 물어보았더니 용장사, 그런 절은 없고요. 관음사라는 절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적지를 찾아 남산을 수도 없이 다녔지만, 답사 코스에 관음사가 포함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부부는 용장골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다고 하니 찾아가는 것이지, 절집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눈 앞에 나타난 분위기는 달랐다. 안내판을 보니 절의 역사는 알 길이 없고, 여기저기에 탑의 부재가 흩어져 있고, 오래된 석축도 남아 있다. 탑은 일부만 남았지만 신라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절도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옛절의 터라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향하여 힘차게 서 있는 바위 때문이다. 남산은 불교유적지로 뒤덮여 있어 야와 박물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의 민속 종교가 있었다. 우리의 토속종교는 산과 냇가에서 제사를 올렸다. 나무와 바위를 신앙했다. 경주 남산에도 토속신앙지가 많다. 아마 불교가 자리잡기 이전부터 경주 고을에 사는 사람들의 성지였으리라, 지금도 남아 있는 흔적은 주로 바위이고, 동네 앞의 당나무 등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더라도 토속신앙지를 불교 신앙지로 만든 곳은 부지기수이다. 경주 남산은 지금도 토속신앙지가 있고, 토속신앙이 살아있다. 거대한 바위 밑에 절집을 세웠다 관음사도 토속신앙지에 비집고 들어서서 자기네의 성지로 삼았으리라,
바로 아래에 천우사라는 간판을 단 절집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마침 천도제를 올리고 있다. 법당에서 춤을 추고, 빙글빙글 돌고, 불교 의례와는 다르다. 내 눈에 이건 당집이 틀림없다. 그래도 걸어 둔 현수막에는 조계종이 적혀 있고, 초파일 행사 일정이 적혀있다. 속세에 부대끼면 살아온 내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멀고 살려니------“ 세상을 삐딱하게 보지 말자고 다짐다짐 했는데, 나는 언제 마음 속의 부처님을 찾을꼬.
아내는 법당으로 들어가고, 나는 절의 내력을 적어둔 안내판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조금 쉬었다가 내려오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 골짜기를 벗어나서 자동차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배동 삼릉이다. 배동 마을에 사는 박대성 화백 집에나 들려보자면서 걸었다. 예전에 찾아갔을 때보다는 동네가 달라져 보인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서 찾아갔더니 대문이 굳게 닫혀서, 방문을 포기하고 바로 옆의 경애왕릉 숲길로 나왔다. 삼릉을 안내한 비석도 있다. 여기는 바로 ’경주 배동 삼릉‘이다.
삼릉은 박씨 왕의 무덤이다. 세 능 중의 두 왕릉은 신라말의 박씨 왕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다. 조금 떨어져서 마을 쪽에 55대 경애왕의 왕릉이 홀로 있다. 신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53대, 54대, 55대 왕을 박씨들이 차지했고, 그 왕들이 이곳에 모여있다.
51대 진성여왕이 자진하여 퇴위하면서 박씨의 왕들로 바뀌어 간 것에는, 틀림없이 궁중비사가 있음직도 한데. 소설 ’삼총사‘같은 재미 있는 소설이라도 쓰여질 듯 한데, 신라사 교수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교수님 말씀이 의심은 가지만 사실을 증명할 자료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때 내 생각이 역사학자보다는 나처럼 글쓰는 사람이 더 좋다 였다. 우리는 자료를 찾으려 골머리를 앓지 않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입맛에 맞도록 요리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피곤했다. 본래는 조금 더 걸어가서 배동 3존 석불도 만나 뵈옵고 대구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너무 피곤해서 다음에 오자고 했다. 예전에는 배리 삼존불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지금은 배동 삼불사 란다. 살불사도 절이름이니 다음 주에는 삼불사를 찾아야 겠다.
집사람과 삼릉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경주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 왔다. 집에 와서 만보기를 보니 오늘 1만 7천 보를 걸었다고 찍혀 있다.
첫댓글 대단한 체력입니다. 그리고 그 열정에 항상 박수를 보냅니다. 관음사가 들어서기전에 토속신앙터였다니 저도 군침이 돕니다.
예전에는 역사 유적이 있거나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면서 집사람에게 아는 척하면서 설명도 했는데 다녀온 절 집이 많아지면서, 나 자신이 좀 겸손해졌습니다. 절은 껃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금은 이름 없는 작은 절 집도, 역사가 짧은 절이라도 주재하시는 스님을 따라 찾아가기도 합니다.
(도통해서 스님을 찾는 줄 오해할까 봐서, 그건 아니고, 그냥 다녀오는 것에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