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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중에 '호랑이가 없는 골짜기엔 여우가 왕이다' 라는 것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는 '섬에 새가 없으니 박쥐가 활개를 친다' 라는 고사가 전해지는데, 이 말의 유래는 전국시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다 노부나가와 쵸소카베 모토치카)
오다 노부나가가 한창 사방의 적으로 둘러 쌓여 피터지게 싸우던 1570년대, 바다 건너 온 사신을 접견하게 된다. 그 사람은 쵸소카베가문의 가신인 나카지마 베쿠노스케. 한창 시코쿠를 통일해나가던 쵸소카베가문에서 오다가문과 동맹을 맺을 겸 당주 모토치카의 적자의 원복(성인식)에 대부(에보시오야, 원복 때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을 부탁하러 왔던 것.
쵸소카베에 대해서 잘 모르던 노부나가는 베쿠노스케에게 주가에 대한 이런 저런 설명을 듣고(베쿠노스케가 나름 달변이었다고 한다) 반 쯤 놀리는 투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새가 없는 섬의 박쥐로군….' 즉, '시코쿠에는 다이묘 다운 다이묘가 없으니 쵸소카베 같은게 설치고 다닌다'는 비아냥거림이었던것이다. 베쿠노스케는 달변이기는 해도 가방 끊이 짧았던 모양인지 정확하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대충 자기 주군을 칭찬하는 말로 짐작해버리고는 '감사하옵니다. 노부나가님도 호라이큐노 칸텐으로 보이옵니다.' 라고 대답했다. 있지도 않은 말이니 노부나가가 알아 들을 리는 없고, -_- 묵묵히 있다가 '그런가.'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쿠노스케와는 달리 모토치카는 이해력이 빠른 사람이었던것 같다 ^^; 이 말이 자기를 야유하는 말인지 알아채고는 '박쥐는 새에겐 없는 어금니가 있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오다가문과 쵸소카베는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노부나가가 죽던 1586년에는 아들 노부타카와 니와 나가히데가 이끄는 시코쿠 정벌군이 꾸려지기도 했지만,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암살되는 바람에 백지화되고 만다.
이후 쵸소카베가문은 시코쿠를 완전히 통일했고, 히데요시VS카츠이에 대결구도에서는 카츠이에 편에, 코마키 - 나가쿠데에서는 이에야스 편을 들었다. 코마키 - 나가쿠데전역 중 히데요시가 일부 병력을 빼내 시코쿠를 치지만, 모토치카는 이를 히케타에서 격파하는 등 상승가도를 달리지만, 이에야스와 화친한 히데요시가 10만이 넘는 대군을 몰아 시코쿠를 공격하자 대패하고 항복했는데, 도사 1국만을 제외한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고 만다.
쵸소카베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명령에 출진한 시마즈 정벌에서 가문의 유망주였던 장남 노부치카를 잃은걸 시작으로 오다와라 공성전, 임진왜란 등 무리한 전쟁에 동원되었고, 후계자 선정문제에서 여러 혈족과 가신을 잃었다. 모토치카는 히데요시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죽으니 향년 61세.
모토치카 사후의 일은 더욱 기가 막히게 진행된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알력이 심해지고, 이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자 쵸소카베가문의 당주 모리치카는 이에야스라인인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쥬코쿠의 모리가문 때문에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서군으로 가담하게 된다 ㅡㅡ; 하지만 용장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어쩔수 없이 가담한것 치고는 꽤 잘 싸워, 서군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에는 개역(무사가 평민으로 강등당하는것)당해 교토에서 생활하다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쟁을 벌일 때 도요토미가문의 부름을 받고 옛 영지탈환이라는 야심을 품고 도요토미군대의 주력으로 활약하지만 결국 패전해서 죽는다.
그 사이에 쵸소카베의 옛 영지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세키가하라합전 이후 쵸소카베의 영지는 야마노우치 카츠토요가 하사받게 되었다. 하지만 일령구족(이치료쿠소쿠,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고안해낸 군대동원조직. 농민이 일을 하러 나갈 때 창과 갑옷을 들고 나가게 하여, 일을 하는 도중이라도 나팔이 울리면 재빨리 무장을 하고 모일 수 있게 했던 방법)을 중심으로 한 쵸소카베의 옛 가신들은 새로운 영주에게 반발했고 (옛 주군인 모리치카의 복권 요구 및 무장봉기) 이것에 대해 카츠토요는 강경대응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버렸다. 이후 도사 번에서는 야마노우치의 가신과 옛 쵸소카베의 가신(향사)을 차별대우하는 정책을 썻다.
200년 후, 에도막부가 삐끄덕거리자, 개혁을 요구하며 유신지사들이 봉기했는데 이들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사람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위시한 도사 번의 향사들이었다. 결국 이들의 피로 인해 막부는 무너졌고,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오랫동안 절치부심하여 성공시킨 200년 만의 복수극이었던 셈이다.
첫댓글 난 유전자얘기나올줄알았는데
일본의 갈라파고스화??
덕분에 웃었네요 ㅋㅋㅋㅋ.
ㅋㅋㅋ
쵸소카베 가문과 아케치 미츠히데 사이의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의 쵸소카베 정벌군이 편성되자 노부나가를 공격해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죠.
쵸소카베와 아케치 사이에 연줄이 있었나요? ㄷㄷㄷㄷ.
자세히 아시면 설명 좀 부탁해도 되나요?
모토치카가 시고쿠 통일전쟁 당시에 중앙정계에 노부나가와는 본래 동맹관계였는데 쵸소카베 가문과의 외교전담이 미츠히데였다고 합니다. 노부나가가 위에서 말한 박쥐얘기에서 나오듯이 쵸소카베에 대해 딱히 좋은 시선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일본의 통일이 진행됨에 따라 쵸소카베에게도 신종을 권유합니다.
1580년에 노부나가의 신종요구에서 쵸소카베는 본래의 토사와 아와 일대의 소령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쵸소카베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요구였기에 거절했죠.
이 일이 있기전에 미츠히데는 자신의 가신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을 모토치카의 부인으로 보내서 평화롭게 쵸소카베의 신종을 이끌려고 했으나
노부나가의 갑작스러운 외교전환으로 도시미쓰의 주군인 미쓰히데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되어버렸고, 결정적으로 노부나가가 시고쿠 정벌군을 편성하면서 모토치카와 인척관계인 미쓰히데 입장도 굉장히 난처해졌음.(모토치카의 측실이 도시미쓰의 딸로 미츠히데의 조카)여기에 시고쿠와 가까운 키나이일대의 영지 몰수에 원한을 품은 미츠히데를 쵸소카베 측에서 부추켜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물론 혼노지의 변에는 너무나 많은 음모론이 존재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왜 일본에서 게임,만화에 오다 노부나가를 마왕?으로 하죠?
실제로 노부나가가 자기를 스스로 '제육천에 강림한 마왕이다'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ㅡ.ㅡ;;;
히에이산 토벌 등 방자한 불교세력을 탄압하면서 '마왕'의 이미지는 더욱 짙어집니다...^^;
같은 불교탄압임에도 조선과는....
당시 대사찰의 난행이 꽤나 유명했기 때문에, 노부나가를 '훼불, 배불'의 선상에서 보기는 또 그렇습니다...^^;
절끼리 전투 벌이고, 승려가 민간인 약탈하고 강간하는 세상이니...
승려가 민간인을 약탈 했다니..-_-;;
이름만 절,중이지, [卍]家紋쓰는 다이묘죠 뭐;;;
소코님 말이 정답 ㅋㅋㅋㅋㅋㅋ
근데 까놓고 말해서 토사의 향사들이 절치부심해서 성공했다고 하기는 참 애매합니다. 물론 가장 열렬한 활동을 펼치고, 많은 희생자를 낸 경우가 토사향사들이지만- 삿쵸에 비하면 정계에서의 입지는 그닥 크지 않았죠...^^;
더구나 토사 근왕당의 경우는 '일번근왕(一藩勤王)', 즉 기존의 야마우치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토사번이라는 체제를 바탕으로, 향사들의 입지를 늘리고 번주를 설득하여 근왕에 가담시키자는 식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그 중심이었던 다케치 즈이잔 등은 결국 전번주 야마우치 요오도에게 팽당하여 몰락했고, 이후 향사들의 '탈번'이 가속화되죠...-_-;
음, 해동천자님 덕에 근대 일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ㅡ.ㅡ; 전 그냥 단순히 사쓰마번, 쵸슈 번, 도사 번이 막부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싸운건지 알았습니다. ㅡ.ㅡ ㅋㅋㅋ;(세 번의 이해관계가 달랐다는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_-;)
지난학기에 강의들은걸 떠올려보면, 삿쵸에 비해 토사쪽이 자금력이 딸렸다고 하더군요. 결국 돈빨 되는 삿쵸가 유신 후 주력이 되었다는...
삿쵸가 '번정개혁'으로 돈줄이 꽤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요인이 있습니다. 토사의 야마우치 일족은 존왕과 좌막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공무합체'로 기울어지기도 했고, 나중에는 거의 방관(눈치?)하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위에 언급한 다케치 즈이잔의 토사 근왕당의 집권은 존왕으로 줄타기 할 때 얘기고, 토사 근왕당의 몰락은 좌막, 혹은 공무합체로 기울어지면서 벌어지죠...-_-;
토사 노공(老公) 야마우치 요오도는 항상 "세키가하라 이후 우리를 토사에 봉한 막부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한다"는 얘길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ㅎㅎ;; 그러니까 삿쵸처럼 번론이 통일되어 존왕도막을 목표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토사번을 움직이는 집권층들은 줄타기 하고, 향사들은 존왕에 목숨을 거는 분열양상이라는 겁니다. 결국 집권층이 좌막으로 돌아서자 향사들이 대거 탈번했고, 유신에 공을 세운 사카모토 료마의 해원대나 나카오카 신타로의 육원대 같은 집단들은 토사번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유신파 낭인연합'이었습니다. 토사번 집권층에서 유신 공로자는 고토 쇼지로 등 몇몇에 불과하고, 신정부 내각구성에서 토사번벌은 소외당하죠...^^; 당시 천하의 [4현후(四賢侯, 재능과 힘이 있는 4명의 제후)] 중의 한명으로 꼽하던 토사 노공 야마우치 요오도는 신정부에 명함도 못내밀고...ㅋ
삿쵸에 비하면 좀 그렇지만 토사번도 돈줄은 꽤 있는 편이었습니다. 시코쿠에서 두번째로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시코쿠 1위는 아와 하치스카번 25만석, 2위가 토사 야마우치번 24만석...), 장뇌, 목재 등을 전매하면서 꽤나 돈을 모읍니다(아와 토쿠시마번은 염료인 쪽을 전매함). 다만 그돈을 삿쵸가 주도하는 존왕도막에 쓸맘이 전혀 없었다는 거...
토사 노공 야마우치 요오도는 '토바-후시미 전투' 이후 막부토벌을 결정하는 어전회의에서, "대정을 봉환한 요시노부에게 이 이상 물을 죄가 있는가?"라고 일갈한 좌막분자...ㅋ
료마랑 삿쵸얘기가 나와서 급떠올랐는데(본글과는 상관없습니다;), 얼마전에 젊은 대학생이 안중근의사였나?를 몰라서 화제가 됬었던 기억이 있는데, 일본도 비슷한 예가 있었죠ㅋ
료마하면 지금의 일본이 있게한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늘 방송조사1위)임에도 불구하고 료마 출신이 어디냐는 질문에 ‘삿쵸 중 어딘가 아닌가요?’ 라는 답이 많아서 요즘 애들 문제다! 고 하는 방송을 본기억이 나네욬ㅋ 하긴, 료마하면 삿쵸동맹등 삿쵸얘기가 빠지질않으니 그럴지도ㅋ
사카모토가 인기가 좀 있죠. 사바 료타로씨의 <료마가 가다>는 수차 드라마화했고, 올해에도 일본 nhk에서 '료마전'을 방영하는 중이구요...^^; 료마전에 아오이 유우가 나온다는... 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