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두세대만 지나면 날조가 가능하다. 추천수 : 15
싸리비, 2002/08/20 오전 11:37:25
<앞부분은 생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설은 4,50년만 지나면 날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요즘 `야인시대` 를 드라마로 하죠?
김두한이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나옵니다.
이거.. 이거를 사실로 믿으십니까?
쌩거짓말이죠. 1940년대 당시 일제 치하이던 시절, 그 흉흉하던 시절에 수표교 다리밑의 거지이던 한 건달이 자기가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당근 당시사람들은 상대도 안해줬죠. 왈가왈부할 가치조차 없으니까.
하지만 6.25동란을 거치면서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그런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못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두 세대가 지난 오늘, 버젓이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전국으로 방영이 됩니다.
이제는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아마 그럴테지 하고 생각할 뿐.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이미 오래된(적어도 2세대) 전설이니까요.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보다는 독립군 장군의 아들이 거지로 살다가 주먹계의 대부가 되는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즐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거죠. 영웅이야기에는 그 영웅의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으니까요. 그 영웅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자신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느냐가 더 중요하죠.
이렇듯.. 신화란 것은 금방 조작이 가능한 겁니다. 김일성도 당대에 신화를 만들어냈죠. 아마 70이상 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진실로 믿을 겁니다. 나뭇잎 타고 대동강 건넌 얘기를. 아빠,엄마 할 때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테니까요.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그 이야기를 부정하는 어떤 말도,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는 환경에 살고 있으니까요.
<뒷부분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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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이 김두한을 언급한 책 `도올세설`과 또 그 책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김광열(마르스의 네티즌)의 글에 `일제하 옥중수기`라고 책 제목이 적혀 있는데 김용옥이가 착각한 듯하다.혹시 처음 책을 찍어냈을 때는 책 제목을 `일제하 옥중수기`라고 했는가?
내가 가진 책은 명백히 책 제목이 名人獄中記이고 내용 자체가 일제하 옥중수기라고 할 수 없는 게 대부분임.
김용옥이가 도올세설 280∼283에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인가?`라는 글로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기이고 허위이며 날조극이라는 것을 잘 밝혀 놓았다.그런데 이 김용옥이란 자 김두한의 거짓 사기 날조극을 아주 잘 알았으면서도 요사스런 궤변을 주절거리면서 장군의 아들이란 결국은 깡패를 미화 찬양하는 고약한 영화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여기 명인옥중기(名人獄中記) 책에서 김두한이 자기의 출생을 이야기한 부분을 한 자의 가감도 없이 정확히 그대로 전재합니다.
名人獄中記(1966年 3月 10日 發行. 希望出版社.350원)
세로 쓰기 2단 체제 385p
수록순서는 高貞勳 金斗漢 徐珉濠 宋志英 李東華 韓熙錫 許泰榮 鮮于宗源 孫道心 李哲承
김두한 편은 53p∼88p
김두한이 자기 출생과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 53,54,55p를 전재하였음.
한자,맞춤법은 책에 있는 그대로임. 다만 단락을 읽기 수월하도록 나누었음.
몇번을 검토해서 옮긴 것이니 원문과 단 한자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자신합니다.
아래의 (1),(2),(3)과 ** 표시를 붙인 주는 Tupac Amaru의 주임.
(1) 김옥균 1851∼1894,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망명.1894년 홍종우에 의해서 암살되다.
(2) 김좌진 1889∼1930,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서 암살되다.
(3) 김두한 1918∼1972
이 세 사람의 생몰 연대와 청산리 전투 연대를 정확히 기억해 두시고 아래 글을 읽으세요.
(53p)
第 1 章
俠客時代 決算
1.名門胎生의 乞人少年
나는 古筠 金玉均을 조부로 白冶 金佐鎭을 부친으로 모시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 安東金氏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부친께서는 일찌기 古筠 할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셨기 때문에 나는 법률상으로 古筠의 직계가 된다.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갔다는 것은 세상에서 김두한만이 주장한 요상스런 이야기임.
어떤 기록도 어떤 증언도 없다. 김두한 혼자만의 헛소리임.김옥균은 1884년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1894년 암살되었고,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는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이뇨.**
어느 날 선친께서는 지금의 서울 근교 野山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가지셨다.이 회합에는 白麟, 尹誠씨 등 30여명의 독립투시들이 집결하여 이색적인 산상회담을 열고 있었는데 日警은 이 정보를 미리 알고 2중 3중으로 회담 장소를 포위하고 포위망을 착착 압축해 왔다고 한다.
당황한 산상의 동지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아버님은 "내가 日警을 유인할 터이니 동지들은 어서 속히 몸을 피하여 먼저 대륙으로 망명하시오" 라고 말하면서 日警들 앞에 홀연히 자태를 나타내시셨다고 한다.
부친께선 두 손을 들고 日警 앞에 항복하는 양 꾸미고 수갑을 채우려는 日警 3명을 한꺼번에 때려눕혔다.그리고 그들이 소지했던 권총을 나꿔채어 수연발을 공중 발사하여 적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후 산상의 동지들에게 대피로를 마련해 주고서, 자신도 피하기 위하여 달아날 수 있었다.
발악하는 추격대들을 뒤로 하며 허둥지둥 문안에 들어선 아버님은 갈 곳이 없었으나 지금의 사직동에 자리잡고 있던 당시의 양반촌에 들어 가셨다는 것이다.1초를 다투는 위기에서 아버님은 어떤 양반집의 담을 뛰어 넘고 안에 들어 가셨다.
그 운명의 집이 나의 産室이었다.내 外祖母께서는 궁정의 尙宮이셨고 딸이 한 분 계셨는데,그 분이 내 生母가 되신다.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밖은 철통 같은 경비망이 퍼졌다.
나의 선친께서 뛰어든 방은 규중처녀 朴尙宮의 딸 朴桂淑의 공부방이었다.놀란 어머님께서는 강도가 침입한 줄 알고 안채에 연결된 요령줄을 흔드시려는 찰나 선친께서
** 그래 그 무슨 상궁이라고 치자. 아무리 망해가는 조선 왕조의 상궁이라고 해도
(조선 시대에 궁에 일단 들어가면 상궁이든 뭐든 궁녀는 죽어서야 궁 밖을 나오는 걸로 알고 있다)
상궁이 딸 가졌다는(김두한이 1918년 생이라 하니 1890년대 말에 그 딸아이가 한두살이라는 말이렸다.) 이런 해괴한 소리는 내 김두한이한테서 처음 듣는다. 또 양녀라고 할 텐가? 김두한의 글 일일이 따지자면 횡설수설과 황당무계 궤변의 연속이지만 이 정도로 해두겠다.**
(54p)
"내가 김좌진이요"하고 말했다.그러자 모친께서는 흔들려던 요령줄을 멈추고 방안에 선친을 들어 오게 하신 후 책을 넣어 두는 책장을 열고 선친의 몸을 감추어 주었고 방안에 남겨진 신발 자국을 말끔히 닦았다.선친의 뒤를 쫓아 방문 앞에 다다른 日警이 검문을 하겠다고 하자 모친께서는 서슴치 않고 책장의 열쇠를 꺼내어 여는 시늉을 태연자약하게 연출하셨다.이것을 본 日警은 모친의 선수에 눌리어 때마침 들려온 추격대 호각 소리에 따라 물러 갔기 때문에 위기 일발의 난을 면한 부친과 모친은 안도의 숨을 함께 내쉬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나의 外祖母와 모친께서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궁리 끝에 데리고 있던 하인들을 재산상의 이유를 달아 즉일로 하향시키고 모녀가 손수 부친의 시중을 드신 모양이다.이때 생겨난 운명아가 바로 나 金斗漢이다.
그러니까 부친께서 이렇게 6개월 동안 피신 생활을 한 뒤 홀연 渡滿하실 때에 모친께서 이미 胎兒가 있음을 고하자 부친은 아들을 낳으면 `斗漢`이라 이름하고 딸을 낳으면 `斗玉`이라 부르라고 하시면서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나의 모친께서 말해 주셨다.
이러한 극적인 환경에서 세상에 태어난 나는 참으로 어려운 소년시절을 극복해야만 했다.명문 安東金氏 가문에서는 나 같은 庶子를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으며 일본 총독부 또한 나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상 고아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곱 살 때까지,그러니까 교동 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까지는 그래도 외조모님과 어머님의 알뜰한 사랑 속에서 클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세계 전사상 희귀한 靑山里 大捷이 있자 日警은 즉각 外祖母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천애 고아가 됐던 것이다.그리고 열살 되던 해에 不忘의 獨立軍 大將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 듣고 울었다.
**김두한은 1918년 생이고,김두한의 7살 때는 1925년이고, 청산리 전투는 1920년이고, 김좌진의 사망은 1930년이다. 김두한 이 자가 얼마나 횡설수설 하는지 연대를 따져 보시라.**
그 뒤에 혁명가가 되겠다고 단신 서울로 백 60리를 걸어 내려왔다. 그때까지 나는 開城 외숙모 댁에서 냉대를 받으며 밥을 얻어 먹고 지냈던 것이다.허지만 막상 서울에 와 봐야 나를 반길 집이나 아는 사람 하나 있을 리 없었다.
이때부터 나의 생활은 해가 저물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데잠을 자고 또 날이 새면 구걸행각을 나서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해 저문 전차정류장에 지쳐서 쪼그리고 앉아
(55p)
네온사인의 불빛을 하염없이 보고 있던 나는 王草에게 붙들리었다. 王草에게 이끌리어 장차구 다리(지금의 淸溪川)밑에 이르니 여러 사람의 남녀 노소 걸인들이 있었다.나는 그곳 식구가 되었다.밤에는 쪼그리고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구걸을 나 다녔다.그리고 구걸해 온 돈이 적으면 王草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그러나 神은 내게 이 일을 오래 시키지는 않았다.
하루는 내가 지금 종로구청 자리 맞은 편에 있던 설농탕집 문전에 밥을 구걸하고 서 있자니 설농탕집 주인 영감이 나를 유심히 보고 있더니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앞에 다가서니 영감은 이렇게 말했다.
"너 斗漢이가 아니냐?" "네 제가 金斗漢인데요."
하고 대답은 하면서도 나는 저윽이 놀래었다.
"네가 교동 보통학교에 다니지 않았니?" "네 2학년까지 다녔어요."
그러자 元영감은 내 손을 덥썩 잡고 주륵 눈물을 흘렸다."애국자의 아들이 거지가 돼!"
元영감은 내게 하는 소리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 이내 내 몸을 번쩍 안고 가까운 이발소로 가셨다.그리고 목욕탕으로, 양복점으로 돌고나니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내가 설농탕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고나자 元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斗漢아 너 오늘부터 나하고 살자. 너희 아버님은 우리 나라의 독립군 사령관이신 金佐鎭 장군이시다. 金장군은 내가 존경하는 동지이시다."
元영감은 나를 매일 밤 품에 껴안고 주무시었다.그리고 새벽 4시가 되면 자는 나를 꼭 깨워 설농탕 한 그릇을 먹이고 또 재웠다.그야말로 진짜 설농탕이다.조악했던 건강 상태는 곧 회복되었다.그리고 나는 운동을 했다.얼마 가지 않아 나는 왼손 하나만 짚고 파고다 공원 담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군요.. 이 애기는 장군의 아들이 만들어 지고 나서 많이 이야기가 되었던 건데....
김두한이 주장하는 애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날 김좌진 장군이 서울 근교 야산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갖았다. 그러다 일경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고, 사직동 어느 양반 동네에서 촌각을 다투다가 담을 훌쩍넘어 피신했는데, 그집은 궁정 상궁의 집이었고, 그 상궁에겐 딸이 있었다. 바로 백야 김좌진 장군이 들어간 방이 그 딸방이었다. 그래서 일은 (?)을 벌어졌고 홀연히 떠나가면서 말하기를
" 아들을 낳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두옥이라 하시요."
그래서 안동 김씨 명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고...>
도대체 그 상궁이 누구인지. 그상궁의 딸이 누구인지는 김두한 본인을 위시해서 아무도 알수가 없는 일이고, 김옥균이 조부라는 주장도 그에게 친손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후에 김두한이 부친인 김좌진 장군이 양자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것도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는 낭설입니다.
<내가 일곱살때 세계전사상 희귀한 청산리대첩이 있자 일경은 외조부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열살되던 해에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듣고 울었다. 그래서 혁명아가 되겠다고 단신 서울로 백육십리를 걸어 내려왔다.-`일제하 옥중수기`/ 김두한편 54쪽>
청산리 대첩이 1920년 9월의 일이고 , 김좌진 장군이 고려청년회의 단원들에게 암살당하것은 1930년 1월의 일입니다. 김두한의 회고록에는 이 두사건이 일곱살과 열살때의 일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도대체 그의 모든 역사기술이 전부 순구라로 채워져 있고 그의 회고록은 대부분 이런식의 말도 안되는 일들로만 쓰여져 있습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자면 해방직후 김일성이 자기에게 순금단추가 번쩍이는 육군소장 제복을 보내며 `남반부 인민사령관`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고. 거리에는 `김두한이 육군소장이 되었고 남반부 인민사령관이에 취임하게 되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는등 하여튼 그의 구라는 끝이 없습니다.
이외에도 그가 기술한 몇장면을 소개합니다. 무식한 우익 깡패의 만행아래 죽어간 수많은 목숨을 생각하시기를...이렇게 터무니없는 도살행위를 자기 삶이 성취한 최대의 선인양 출판을 통해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것이 정당화될수 있었던 시대가 정말 무섭군요.
<내 체코제 쏘아 총의 12발을 신호로 사격은 개시되었다. 곤히 자고 있던 놈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날뛰다가 죽어갔다. 그들이 쓰러진 다음 죽창으로 가슴을 박아 일일이 죽음을 확인했다. 그리고나서 모두 건물속에 쓸어놓고 휘발유를 뿌린다음 소각했다. 천 3백여명이 일시에 화장을 당했다. ~ 후에 사가는 말할 것이다. 내가 왜 천3백여명의 내 민족을 일시에 학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그리고 천 3백여명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 것인가를. 역사가 사실대로 밝혀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철도 파업 진압작전에 내 생명을 걸었다. ~ 실로 극적인 돌격작전에 의해서 우리는 2천여명을 포로로 하여 창고에다 쳐놓았다. ~ 나는 부하들을 시켜 간부 8명을 생매장하라고 지시했다.(실제로 생매장 했음)~철도 노조 파업을 완전히 수습하고 나자 수도청장이 날 찾아와 내 손을 꽉쥐고 이렇게 말했다. "김두한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
-이상은 `일제하 옥중수기` 김두한편에 실린 김두한의 기술이며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임 68~73쪽
김광열 05/25[02:01]
김좌진의 신화는 일제하의 김두한의 성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김좌진의 신화가 신화로서 사회적의미를 지니게 된것은 오로지 김두한의 해방후 잘못 전도된 반공투쟁의 행각과 더불어 시작된 것입니다.
-p- 05/25[09:42]
김두한 이 인간 알고있던 것 보다 더 악질이네..; 주제에 구케에 똥이나 뿌리고...똥차가 똥뿌린 격이군..
-o- 05/25[09:55]
근데 1300명을 일시에 화장시켰다는게 언제적 일입니까?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이면 모를리가 없을텐데..-_-;; 김두한 이 인간이 뻥친건가..-_-;;
김광열 05/25[10:23]
1948년 12월 7일 지금의 육군사관학교 교정인 태능연병장에서 김두한이 이끈 `대한민청`이 남로당원들을 도살한 실제 사건입니다.
전석환 05/25[16:19]
흠. 참고로 역사를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는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란 대목으로 김두한이 등장합니다.. 거짓말이란 증거가 확실치 않잖아여...지금까지 그렇게 널리알려진게 단순히 영화의 영향이라고 하기엔 너무 말이 안맞네요
김광열 05/25[17:13]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 익숙해지면 엄연한 역사적 사실도 우습게 되는게 사실입니다. 안타깝군요....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란을 피하고 싶군요.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된다는 것도 증명을 해야한다니 서글픕니다. 하긴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것도 증명을 하라고 요구하는 나라도 있으니....
끝으로 영화 장군의 1편의 대본을 썼던 도올 김용옥씨의 김두한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 하려합니다. ( 스크린에는 `구성`이라는 항목으로 나와있지만 1,2차 각색후 도올에 의해 353매의 시나리오가 부분적 개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쓰여졌으므로 이 영화는 도올의 시나리오 데뷔작으로 봐야 합니다. 이후 `개벽`이라는 영화가 도올과 임권택 감독이 같이 했고, 최근에 최민식을 주연으로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찍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 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모든 정보를 대강 다 흟어보고 난후에 내린 하드 팩트(hard fact)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개성에서 자라난 부모를 모르는 고아다. 열살때 서울로 내려와서 거지노릇을 하다고 왕초라는 거지 대장에게 붙들리어 장차구다리(청계천)밑 거지 소굴에서 컸다. 그런데 김두한은 선천적으로 재능을 부여받은 탁월한 쌈꾼이었다. 그 쌈질이란 무슨 일본인의 무술을 배운것도 아니고 조선 전통의 무술을 배운것도 아닌 순 경험적 체득의 기술인데, 김두한이 주먹질보다도 다리질에 탁월했다는 것은 그의 쌈질이 조선 전통의 태껸과 무의식적인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움직였다하면 사람의 키만큼 붕떠서 발길로 상대방의 아구를 질러버린다. 다시말해서 그가 장차구다리밑의 거지에서 종로일대를 제패하는 깡패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라른 픽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이며, 김두한 자신에게 도 의식된 족보의 사실일수가 없으며, 오로지 쌈꾼의 실력, 그야말로 적나라한 실력하나로 주먹계의 패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 이외의 어떠한 논리도 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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