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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4 | 황희(黃喜)전
24년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世宗 치세를 도운 賢相
⊙ “寬厚하고 沈重하여 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正大하여 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썼다”(실록) ⊙ “성품이 지나치게 寬大하여 齊家에 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실록) ⊙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과단성 있고 곧은 성품 ⊙ 지신사 박석명의 추천으로 태종에게 중용… 훈구대신·외척에 맞서며 신뢰 얻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황희
실록을 통해 황희(黃喜·1363~ 1452년)를 직접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당혹감이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식의 능수능란, 우유부단의 황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결과론적인 초상화의 한 단면이고 위인전식 인물 서술의 폐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혹감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지나칠 정도의 과단성 혹은 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황희는 본관이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이다.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경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황희는 27세 때인 1389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1390년(공양왕 2년)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보직(補職)됐다.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 3년에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감찰(司憲監察)과 우습유(右拾遺)로 전직(轉職)됐는데, 태조 7년(1398년) 7월 5일 어떤 일로 경원교수관(慶源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됐다. 어떤 일이란 이성계 조상 도조(度祖)의 비 순경왕후(順敬王后) 박씨의 능이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여러 사람과 그 일을 비판했다가 폄직된 것이다. 그러고 얼마 후 1차 왕자의 난이 터진다.
박석명의 추천으로 중용되기 시작
1차 왕자의 난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태종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썩 좋지 않았다. 황희 졸기(卒記)다.
〈태종(太宗)이 사직(社稷)을 안정시키니 다시 습유(拾遺)의 벼슬로 불러 조정에 돌아왔는데, 어떤 일을 말하였다가 파면됐고 얼마 후에 우보궐(右補闕)에 임명되었으나 또 말로써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파면됐다.〉
습유나 보궐은 모두 간언을 맡은 언관(言官)이다. 황희는 태조 때나 태종 때 곧은 말을 꺼리지 않다가 자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런 성품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그와 가까운 태종 심복 박석명(朴錫命·1370~1406년)이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로 있다가 병이 들자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황희를 천거하고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박석명은 태종과 어릴 때 친구로 공양왕의 동생 왕우(王瑀)의 사위였던 관계로 태조 때는 줄곧 은거했다. 사람 보는 안목이 깊었다고 한다. 그 후 태종 초 지신사로 온갖 기밀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그 박석명이 황희를 천거한 것이다.
애초에 박석명이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자 태종이 말했다.
“경과 같은 사람을 천거해야만 마침내 그대 자리를 바꿔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종 5년(1405년) 12월 6일 지신사에 오른 황희는 얼마 안 가서 박석명 못지않은 총애를 태종으로부터 받게 된다. 황희로서는 처음으로 지우(知遇), 즉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난 것이다. 실록은 당시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후하게 대우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기밀사무(機密事務)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이틀 동안이라도 임금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했다.〉
훈구대신·외척들과 갈등
그런데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을 추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언급도 나온다.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혹은 그 간사함을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다.〉
하륜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또한 마찬가지였다. 훈구대신과 황희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이 《태종실록》 8년 2월 4일 자에 나온다.
〈예전 제도에 좌·우정승(左右政丞)이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겸해 맡아서 전선(銓選·인사업무)을 관장(管掌)하였는데, 지신사 황희가 지이조(知吏曹·이조 담당 승지)로서 중간에서 용사(用事)한 지가 오래되어, 비록 두 정승이 천거한 자라도 쓰지 않는 것이 많고, 자기와 친신(親信)한 사람을 임금께 여러 번 칭찬하여 벼슬에 임명하게 하니, 재상들이 매우 꺼려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으므로, 매양 전선할 때면 사양하고 회피하여 물러갔다. 이에 좌·우상(左右相)이 모두 겸령(兼領)하는 것을 사면(辭免)하니, 황희의 공정(公正)치 못한 처사를 갖추어 익명서(匿名書)를 만들어서 두세 번 게시(揭示)한 일이 있었다. 황희가 조금 뉘우치고 깨달아, 이때에 이르러 계문(啓聞)해서 예전 제도를 회복하게 하였으나, 역시 재상의 의논을 쓰지 않고 붕당(朋黨)을 가까이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황희는 오직 임금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공신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는 태종 입장에서 이런 황희를 총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 처남들을 제거할 때 비밀리에 일을 처리한 인물들로 실록은 이숙번(李叔蕃), 이응(李膺),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과 더불어 황희도 포함시키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도 깊이 간여했던 것이다. 당시 태종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신중히 하여 빈틈이 없게 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러 민씨(閔氏)가 마침내 몰락했다. 여기서 황희는 분명하게 민무구·무질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 신하 네 사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목인해 무고 사건’
목인해(睦仁海·?~1408년)는 우왕 기첩(妓妾)의 자손이다. 처음에는 김해 관노로 있다가 활을 잘 쏘아 이제(李濟)의 가신이 되고, 뒤에는 잠저(潛邸)의 이방원(李芳遠)을 섬겼다. 태종은 목인해의 무재(武才)를 아껴 호군(護軍)으로 삼았다. 1398년(태조 7년)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연루되어 청해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되고 1400년(정종 2년) 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402년(태종 2년) 처가의 재물을 훔쳐 형조에 고발되고, 1405년 남편을 잃은 지 3년도 안 된 여동생을 다시 혼인시키려다 사헌부로부터 탄핵받았다. 1408년 반역을 꾀하려다 탄로 나자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해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을 무고하여 조정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후처가 일찍이 조대림의 가비(家婢)였던 점을 이용하여 수시로 조대림의 집을 내왕하였는데, 이때 조대림이 말을 조리 있게 못 해서 스스로를 변명하지 못하고 화(禍)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지신사 황희의 노력으로 조대림의 무죄가 밝혀지고 그는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이를 흔히 ‘목인해 무고 사건’이라고 하는데 1408년 당시 실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변고가 일어나니 황희가 마침 집에 있었으므로 태종이 급히 황희를 불러 말했다.
“평양군(平壤君·조대림)이 모반(謀反)하니 계엄(戒嚴)하여 변고에 대비(待備)하라.”
황희가 아뢰어 말했다.
“누가 모주(謀主)입니까?”
태종이 말했다.
“조용(趙庸·?~1424년)이다.”
황희가 대답해 말했다.
“조용의 사람됨이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弑害)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종의 知人之鑑
후에 평양군이 옥(獄)에 갇히자 황희가 목인해를 아울러 옥에 가 대질(對質)하도록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따랐는데, 과연 목인해의 계획이었다. 태종이 대신(大臣)들을 모아놓고 친히 분변하니 곧음[直]이 조용에게 있었다. 태종이 황희에게 일러 말했다.
“예전에 목인해의 변고에 경(卿)이 말하기를 ‘조용은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과연 그랬다.”
조용이 비로소 그 말뜻을 알고 물러가서는 감격하여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황희가 했다는 이 말은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물었다. “중유와 염구는 대신(大臣)이라고 이를 만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남과는 다른 빼어난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기껏 유(자로)와 구(염유)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구나! 이른바 대신이란 것은 도리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더 이상 도로써 섬기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유와 구는 숫자나 채우는 신하[具臣]라고 이를 만하다.”
이에 계자연은 “그렇다면 두 사람은 따르는 사람[從之者]입니까?”라고 묻는다.
공자가 말했다.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실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논어》를 활용한 지인지감(知人之鑑) 능력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듬해인 태종 9년 황희는 의정부참지사(參知事)로 자리를 옮긴다. 지신사를 매우 중시했던 태종은 지신사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신하의 경우 의정부지사로 특진시켰다. 이에 앞서 지신사를 황희에게 물려준 박석명도 의정부지사로 옮겼는데 실록은 “개국 이래로 없었던 일”이라고 평하고 있다. 파격 승진이라는 말이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는 정승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의정부지사로 승진했다. 태종 11년 전후에는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건 누가 보아도 태종이 황희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후 예조판서로 옮겼고 한성부판사로 있을 때인 태종 18년(1418년)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다.
곧음[直]이라는 잣대로 황희를 재는 태종
어떤 사람이 곧은지 곧지 않은지[直不直]를 살피기는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태종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사람이 정말로 곧은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또 점검해 찾아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다.
그가 태종의 불신을 받고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배경에는 곧음 문제가 있었다. 병신년(丙申年·1416년)에 세자가 덕망을 잃자 태종은 황희와 이원(李原)을 불러 세자의 무례한 실상을 걱정했다. 황희는 세자가 경솔히 바꿀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자는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된 것이니 큰 허물은 아닙니다.”
태종은 이 말이 황희의 본심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곧지 못하다[不直]고 판단한 것이다. 태종의 생각은 이랬다. 황희는 일찍이 여러 민씨(閔氏)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종이 볼 때 황희는 즉위가 머지않은 세자에게 붙어 민씨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쪽으로 힘써서 향후 자기와 자손들 안위를 보장받으려 한다고 거의 확신했다. 태종은 황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공조판서에 임명했다가 다음 해에는 평안도도순문사(都巡問使)로 내보냈다. 바로 내치지는 않고 단계단계 멀리했다. 이는 훗날 태종의 발언을 통해서 확인된다. 태종 18년(1418년) 5월 10일 박은·이원과의 자리에서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승선(承宣·승지) 출신인 자를 우대하기를 공신 대접하는 것과 같이 하기 때문에 희(황희)로 하여금 지위가 2품에 이르게 해 두텁게 대접하는 은의(恩誼)를 온 나라가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심히 간사하고 굽었으므로[奸曲] 평안도관찰사로 내쳤다가 지금 다시 한성부판사로 삼아 그를 멀리했다[疎之].”
2년 후인 무술년(戊戌年·1418년)에 한성부판사(判漢城府事)로 다시 불러들였지만 세자 폐위 때 황희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파주 교하로 폄출시켰다. 더 이상 조정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나마 모자가 함께 거처할 수 있게는 허가했다. 5월 28일에는 남원으로 내려가게 했다. 이때 형조와 대간(臺諫)에서 소(疏)를 올려 황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상께서 친히 물었을 때 황희는 곧음으로 대답하지 않았으니[不以直對] 그에게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태종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이 모두 황희를 간사하다고 하나, 나는 간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심복(心腹)에 두었는데, 이제 김한로의 죄가 이미 발각되고, 황희도 또한 죄를 면하지 못하니, 지금이나 뒷날에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황희는 이미 늙었으니, 오로지 세자에게 쓰이기를 바라지는 않겠으나 다만 자손(子孫)의 계책을 위해서 세자에게 아부하고 묻는 데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어찌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럼에도 태종은 “그대의 간사함을 미워한다”며 경기도 교하로 유배를 보냈다가 충녕대군으로 세자가 교체되자 전라도 남원으로 멀리 내쫓았다.
태종은 그의 본심이 과연 곧은지를 가리기 위해 황희의 생질 오치선을 폄소(貶所·유배지)에 보냈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상이 물었다.
“황희가 무슨 말을 하더냐?”
오치선이 아뢰어 말했다.
“황희의 말이 ‘살가죽과 뼈는 부모가 이를 낳으셨지마는, 의식과 복종(僕從)은 모두 상의 은덕이니 신이 어찌 감히 은덕을 배반하겠는가? 실상 다른 마음은 없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이 말했다.
“이미 시행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漢나라 史丹과 같은 사람”
말은 이렇게 했지만 태종은 보고를 듣고서 황희가 곧다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4년 후인 임인년(壬寅年·1422년) 2월 태종은 그를 다시 불렀다. 태종은 사왕(嗣王)을 위한 정지 작업을 마치고 이제 충심으로 신왕을 도울 신하를 찾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희만 한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불러올린 것이다.
황희가 태종을 알현(謁見)하고 사은(謝恩)할 때 세종이 곁에 있었다. 태종이 말했다.
“내가 풍양[豊壤·상왕이 되어 머물던 이궁(離宮)이 있던 곳]에 있을 적에 매번 경의 일을 주상(主上·세종)에게 말했는데 오늘이 바로 경이 서울에 오는 날이로다.”
명하여 두텁게 대접하도록 하고,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돌려주게 하고 세종에게 임용을 당부했다.
훗날 세종은 황희를 불러 일을 토의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경이 폄소에 있을 적에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漢)나라 사단(史丹)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사단과 같은 사람이란 ‘곧은 신하[直臣]’라는 말이다. 사단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시중(侍中·재상)을 지낸 명신(名臣)으로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을 후사로 삼으려 하자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않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세종과 악연을 풀다
세종 |
사실 세종의 입장에서 황희는 불쾌한 존재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세자 즉위를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10월에 세종은 황희를 의정부참찬에 임명했다. 한직(閑職)이었다.
이런 황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듬해 7월 강원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었는데 당시 관찰사 이명덕이 구황(救荒)과 진휼(賑恤)의 계책을 잘못 써서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됐다. 이에 세종은 당시 61세던 황희를 관찰사로 임명해 기근을 구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황희는 놀라울 정도로 단기간에 강원도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때부터 황희는 일을 통해 세종의 신임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당시 그가 맡았던 관직이 이를 말해준다.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직했다. 1424년(세종 6년) 의정부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세종 8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병조판사를 겸직했다. 이제 건강만 허락한다면 그가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원(李原)이라는 인물을 떠올려야 한다. 만일 그가 계속 좌의정으로서 업무를 잘 해냈다면 어쩌면 ‘명재상 황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원은 아버지 태종의 신하이자 세종 또한 크게 신뢰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세종 1년 사실상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왕 태종은 좌의정에 박은, 우의정에 이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런 체제는 계속 이어졌다. 세종 4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박은이 세상을 떠났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세종은 이원을 좌의정으로 올렸다. 우의정은 정탁, 유관 등이 번갈아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비워두었다. 세종은 좌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이조판서 허조(許稠)의 3두 마차 체제로 정국을 이끌면서 젊은 신왕으로서의 입지를 하나하나 굳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원은 세종 8년(1426년) 3월 15일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복권의 기회도 없이 생을 마쳤다.
이로부터 1년도 안 된 세종 9년 1월 25일 잠시 우의정을 거쳤던 황희는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황희에 대한 세종의 평가
세종 13년 9월 황희가 교하수령에게 땅을 청하고 그 수령 아들에게 관직을 주었다 하여 정승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간언이 연일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9월 8일 세종은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을 불러 이 문제를 이야기한다. 먼저 안숭선이 말했다.
“이번 일은 진실로 황희의 과실입니다. 그러나 정사를 도모하고 의견을 세움에 있어 깊이 사려하고 멀리 생각하는 데는 황희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세종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경의 말이 옳다. 태종께서 황희를 지신사로 삼고자 하여 하륜에게 의논하시니, 하륜이 말하기를 ‘황희는 간사한 소인(小人)이오니 신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제수하셨는데, 이로부터 하륜과 황희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매번 단점(短點)을 말하였다. 조말생은 하륜 편인데, 하륜이 집정(執政)하여 조말생에게 집의(執義)를 제수하자 그때 황희가 대사헌으로 있어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았다. 하륜이 두 번이나 황희의 집까지 가서 청하였으나, 황희가 듣지 않았다. 하륜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태종께서 황희를 지신사로 삼기를 의논하시기에 내가 헐뜯어 말했더니, 황희가 이 말을 듣고 짐짓 내 말을 이처럼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황희의 과실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 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
세종은 하륜이나 박은 등은 모두 직권을 남용하거나 사사롭게 일을 처리한 데 반해 황희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공정하고 바르게 처신한다고 보았다. 공신이자 대선배인 하륜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황희의 강직함을 태종도 좋게 보았고 세종도 좋게 보았던 것이다. 황희에 대한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황희는 20년 넘게 재상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인사행정에 공정
황희는 무엇보다 인사행정(人事行政)에 공정했다. 황희가 평안도도순문사가 되었을 적에 행대(行臺·행대감찰) 이장손(李長孫)이 대등한 예(禮)로써 황희를 모욕하고, 황희와 더불어 서로 글장을 올려 논핵(論覈)하므로 태종이 양편을 화해시켰는데, 이때 황희가 정권을 잡으니 이장손은 통진수령(通津守令)으로서 교대를 당하게 되었다. 황희가 말했다.
“이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명성(名聲)이 있었다.”
마침내 천거하여 사간원헌납(獻納)으로 삼았고, 또 천거하여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사인이란 의정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자기 바로 밑에 두었다는 말이다. 졸기가 전하는 정승 황희의 모습이다. 젊은 시절 강직하기만 했던 황희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황희는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豊厚)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이 중년(中年) 이후에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니, 황희는 생각하기를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 하여,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렸으니, 다 따르지 않고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으므로 옛날 대신(大臣)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옥사(獄事)를 의정(議定)할 적에는 관용(寬容)을 주견(主見)으로 삼아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일러 말했다.
“차라리 형벌을 경(輕)하게 하여 실수할지언정 억울한 형벌을 내릴 수는 없다.”
비록 늙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항시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 시력(視力)을 기르고, 비록 잔글자라도 또한 읽기를 꺼리지 아니하였다.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뛰어난 재상[賢相]’이라 하였다. 늙었는데도 기력(氣力)이 강건(剛健)하여 홍안백발(紅顔白髮)을 바라다보면 신선(神仙)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송(宋)나라 문노공(文潞公)에 비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寬大)하여 제가(齊家)에 단점(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齊家에서는 문제 드러내
문언박 |
문노공은 북송 때 재상 문언박(文彦博·1006~1097년)을 가리킨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장상(將相)으로만 50년을 재임하면서 정계 원로로 활동했다.
황희는 제가(齊家)에서 종종 문제점을 드러냈다. 가족 문제를 처리하는 데서는 단호하지 못했다.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風聞)에서 나왔다고 변명하여 구원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주려고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변성(變姓)하라고 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문종 2년(1452년) 2월 8일 그가 졸하자 나라에서는 익성(翼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이 익(翼)이고 재상(宰相)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成)이다. 아들은 황치신(黃致身), 황보신(黃保身), 황수신(黃守身)이다.
황치신은 훗날 성종 때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는데 아버지처럼 장수해 88세에 졸했다. 그의 이름 치신(致身)과 관련해서는 태종과의 일화가 황치신 졸기에 남아 있다.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황희에게 물으시기를 “경(卿)의 아들 중에 벼슬할 만한 자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자(長子)가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벼슬을 구할 겨를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어립니다”라고 하니 태종께서 이르시기를 “동중서(董仲舒)도 하유독서(下帷讀書·휘장을 내리고 글을 읽는다는 말)하였으니, 경의 아들은 이름을 동(董)이라 할 만하다” 하며,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을 제수하고, 뒤에 다시 지금의 이름을 내려주었다.
치신(致身)은 《논어》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로 사군능치기신(事君能致其身)에서 따온 것이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황치신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그중 다섯 아들이 급제하니 조정에서 황치신을 우의정에 추증했다.〉
吏才 뛰어난 法家 면모 강해
둘째 황보신은 현달하지 못했고 황수신(黃守身·1407~1467년)은 1423년(세종 5년) 사마시에 응시하였다가, 학문이 부진하다고 시관(試官)에게 모욕을 당한 뒤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음서(蔭敍)로 감찰·지평·장령 등을 지냈다. 세조 13년(1467년) 5월 21일 황수신 졸기가 전하는 그의 모습이다.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여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랐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승진되고, 다시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가 마침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그 사람됨이 골모(骨貌)가 웅위(雄偉)하고, 성자(性資)가 관홍(寬洪)하여, 재상(宰相)의 기도(器度)가 있었으며, 경사(經史)를 조금 섭렵(涉獵)하여 이치(吏治)에 능하였고, 정승이 되어서 대체(大體)는 힘썼으나, 처세하는 데 능히 방원(方圓)하게 하고,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하여, 누조(累朝)를 역사(歷仕)하면서 크게 건명(建明·건의)함이 없었고, 회뢰(賄賂)가 폭주(輻輳)하여 한 이랑 밭을 탐하고, 한 사람의 노복을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臺諫)의 탄핵(彈劾)을 받는 데 이르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이 황(黃)이니, 마음 또한 황(黃)하다”고 하였다.〉
유소의 《인물지》 유형론에 따르면 황희는 이재(吏才)가 뛰어난 법가(法家) 면모가 강했으나 국면을 바꿀 줄 아는 술가(術家) 면모는 약했고 청절가(淸節家)에는 이르지 못했다.⊙
[출처] 조선 재상 열전 4 | 황희(黃喜)전 24년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世宗 치세를 도운 賢相 -황희실록을 통해 황희(黃喜·1363~ 1452년)를 직접
[출처] 조선 재상 열전 4 | 황희(黃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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