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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과 '사회적기업 바리의꿈' 원문보기 글쓴이: 프로펠러
< 독립운동과 연해주 >
러시아 연해주지역은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와 더불어 국내와 접한 국경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 특히 한인들은 러시아 연해주를 동강(東江), 북간도(또는 동간도)를 서강(西江)이라 불렀고 두 지역을 아울러 동서강(東西江)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연해주의 러시아 당국자들은 광활한 미개척지를 억척스럽게 개척한 함경도 농민들의 이주를 환영하였고, 한인들의 항일동립운동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또한 한인들은 연해주지역이 과거 고구려, 발해의 영도였다고 하는 강력한 역사적 연고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연해주지역은 19세기 중반 이래 국내로부터 함경도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피와 땀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가꾸게 되는 희망의 땅이 되었다.
연해주지역은 20세기에 들어와, 특히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의 국권이 기울게 되자 수많은 의병과 독립운동지사들이 후일을 기약하며 망명하게 되면서 교육문화운동과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국망 직전인 1908년 여름에는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들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고, 국망 이후에는 수많은 항일단체들이 조직되어 한인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이후 한인들이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까지 연해주지역은 유력한 해외 항일독립운동 근거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강제적인 병탄직전인 1910년 6월에는 유인석, 이범윤, 홍범도, 이상설 등이 조직한 13도의군과 성명회를 비롯하여 국망 이후인 1910년대에는 이동휘, 이상설, 이종호, 정재관이 조직한 권업회와 항일비밀군사정부였던 대한광복군정부, 그리고 정재관, 이강 등이 자바이칼주의 치타에서 조직한 대한인국민회시베리아총회 등이 한인사회의 단합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러시아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6월에 결성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원호인(입적한인) 중심의 고려족중앙총회가 1918년 1월에 여호인(비입적인) 중심의 한족중앙총회와 통합하여 그해 6월 니콜스크-우스리스크에서 러시아지역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한인단체인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아울러 하바로브스크에서는 이동휘, 김립, 김알렉산드라에 의하여 볼세비키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추구한 전위조직으로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다. 1919년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3 ․ 1만세시위운동과 마찬가지로 연해주지역을 비롯한 러시아에서도 한인들의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전로한족중앙총회가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어 한민족의 중앙기관을 자처하였다. 아울러 러시아 연해주 각지에서는 독립군부대들이 조직되었다.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개임으로 시작된 시베리아내적 시기에는 러시아공산당세력과의 협력을 추구한 고려공산당이 이르쿠츠크와 상해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아울러 러시아 빨치산과 연합한 무장세력으로서 혈성단, 독립단, 다반군대, 이만군대, 사할린부대, 자유대대, 솔밭관한인공산당부대 등의 한인무장부대들이 조직되어 연해주 각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인무장부대들의 희생적인 투쟁으로 연해주지역을 비롯한 러시아원동지역은 백위파와 일본군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니항(니콜라예프스크-아무레)에서의 전투, 이만전투, 볼로차예프카전투, 올가전투 등에서 보여준 한인빨치산(의용)부대들의 영웅적인 희생은 러시아혁명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러시아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이루는 데 초석이 되었다.
< 블라디보스토크지역과 한국독립운동 >
연해주의 행정중심도시인 러시아 군항 블라디보스토크는 하바로브스크와 함게 원동러시아의 중심도시로서 러시아당국의 주요행정기관들이 집결해 있는 정치, 경제, 행정, 사회문화의 중심지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특히 국내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관계로 저명한 한인지도자들이 집결하여 활발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말 이래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동신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 한글신문의 발간, 계동학교, 대한학교, 한민족학교 등 한인학교의 설립, 거류민회, 한민회 등 자치기관의 조직, 공립협회, 국민회, 권업회 등 민족운동단체의 조직을 통하여 한인사회의 민족의식화를 촉진함으로써 블라디보스토크를 명실상부한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는 한말 이래 일제강점시기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근거지로서 해외독립운동의 유력한 중심지의 하나였다. 한편 일본총영사관이 위치하고 있어 항일애국지사들과 민족운동단체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자행하는 등 불리한 여건에 있었으나, 항일민족운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변화, 특히 시베리아내전시기에 일본군의 무력개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세력이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원동러시아지역은 물론 만주 북간도와 훈춘지역의 민족운동세력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항일운동역량을 키워나갔다.
1. 구 개척리터
현주소 : 블라디보스토크 포크라니치니야 거리
현재 구개척리는 러시아 거리로 완전히 바뀌어 있어 한인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구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건설을 전후로 한 1874년 한인들이 최초로 집단 거주하던 지역이다. 현재의 포크라니치나야 거리 1번지로부터 ‘둔덕마투애’라고 부르던 아무르만에 연한 남쪽 언덕과 ‘웅덕마투애’라고 부르던 그 아래 저지대에 이르는 일대가 러시아어로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한인거주지)라 불렀던 개척리 마을이 있던 곳이다.
1911년 5월 콜레라 예방을 이유로 이곳의 한인마을을 폐쇄하고 한인들을 신한촌(노바야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으로 이주케 한 후 기병대의 주둔지로 삼았다. 이후 한인 집단거주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웅덕마투애, 둔덕마투애에 있었던 한인촌을 ‘구개척리’라고 했고, 신한촌은 ‘신개척리’라 부르게 되었다. 구개척리는 을사늑약 이후 국치를 전후해 신재호, 장지연, 이강, 홍범도, 유인석 등 국내외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운집한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계동학교 등 한인학교의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동신보 등 한인 언론기관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직전 유인석, 이상설, 김학만, 이범윤, 김좌두 등이 경술국치를 저지하기 위하여 성명회(聲明會 )를 조직한 곳이기도 하다.
2. 신한촌터
현주소 : 하바로스브카야 거리 일대
1911년 5월 구개척리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러시아당국의 명령으로 이주해 와 새로이 신한촌이 건설되었다. 신한촌에는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이었던 권업회와 그 기관지인 권업신문사, 신한촌민회, 한민학교, 여성단체인 자해부인회와 대한여자단, 그리고 이 두단체가 통합한 대한부인회 등이 위치하여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에는 신한촌민회, 권업신문을 계승한 한글신문 한인신보사, 그리고 3 ․ 1운동후에는 고조된 항일분위기를 타고 노인동맹단, 소년애국단, 기독청년회, 부인회의 후신인 부인독립회, 소녀애국단, 일세당, 한인사회당, 대한국민의회 등 각종 단체의 사무소가 위치하여 항일독립운동, 혁명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한촌의 이러한 역할은 1920년 연해주 주둔 일본군이 자행한 4월 참변으로 항일단체들이 해산되거나 도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22년 말 일본군이 철수하고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되면서 신한촌은 다시 연해주 한인사회의 중심지가 되어 스탈린구락부, 고려도서관, 고려극장 등 문화기관과 9년제 학교 등 교육기관이 위치해 있었다.
3.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현주소 :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거리 끝 부분
연해주 신한촌기념탑은 1999년 8월 15일 신한촌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연혁과 역사적 의의를 새긴 탑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가 건립하였다. 신한촌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기록한 연해주 신한촌기념탑문과 기념탑 건립의 경위를 기록한 건립기에 기념탑 건립에 중심적 역할을 한 해외한민족연구소 관계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 이 기념탑은 보존을 위해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간이관리사무소가 세워져 있다.
향후 한인여행객과 학생들의 관광명소로 되어 현장교육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념탑문의 내용 가운데 신한촌으로 이전하기 전의 구개척리 시기에 일어났던 독립운동 사실이 신한촌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잘못 기록된 내용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4. 푸쉬킨 극장
현주소 : 블라디보스토크 푸쉬킨거리 10번지
푸쉬킨극장은 극동 종합기술대학의 부속건물로 여전히 푸쉬킨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17년 4월초 푸쉬킨극장에서 러시아인 우시니크의 사회로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기독교도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독교전도회가 개최되었는데 조선인 기독교전도회가 개최되었는데, 조선인 약 100명, 일본인 30명, 중국인 10명 등이 참석하였다, 한인대표로서 김학준이 연설하였고 윤능효는 창가대를 이끌고 이동휘는 신도들을 선도하여 조직적인 행동을 하여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동휘, 김학준, 윤능효와 이 모임에 참석했던 최의수는 주요한 항일애국자였다. 이 진회에 참가한 얼마 후인 1917년 4월 16일 이동휘는 신한촌 하바로브스카야 거리 김낙선의 집에서 러시아현병대에 체포되었다.
5. 블라디보스토크의 기타 독립운동 사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밖에도 항일애국지사 이동휘 거주집터 추정지(하바로브스카야 거리 17번지, 21번지), 고려사범대학(오케얀스카야 프로스펙트 18번지), 일본총영사관 건물(아드미랄라 포키나 거리 18번지), 독립운동가 계봉우가 교사로 활동하던 8호 10년재 중학교(뽈로따야 65번지), 최초의 한인볼셰비키당원으로서 한인사회당 창당의 산파역을 맡았던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페트로브나가 공부했다고 추정되는 학교 건물(현재 제9호 중학교 건물, 푸쉬킨 거리 39번지), 한인사회 지도자이자 애국지사였던 최재형 거주 건물 등이 있다.
※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관광지
*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
엷은 녹색이 아름다운 러시아 건축양식의 석조로 된 역사이다. 1912년의 건축물로 러시아 제정시대의 영화로움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야 철도의 동쪽의 시점으로 여기부터 모스크바까지 9,297Km의 여행이 시작된다.
* 향토박물관
붉은 벽돌로 지어진 블라디보스토크의 향토박물관으로 자연, 고고학, 역사박물관을 겸하고 있으며 1890년 문을 열었다. 20만 점 이상의 전시물이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지방의 동물, 식물, 표본관과 이 지방의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다 특기할 것은 이 박물관에 발해관련 유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향토 박물관에 걸맞게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고 거주했던 소수민족에 대한 유물과 역사도 많이 전시하고 있다.
* 중앙광장
정식으로는 소비예트 정권을 위해 싸운 병사광장이라고 한다. 일반 시민을 사이에서는 중앙광장이라고 불리고 휴식처가 되고 있다. 옆의 흰 고층 건물은 시청이다. 중앙광장에서 금각만으로 향해 올라가면 블라디보스토크 125주년 오벨리스크(방첨탑)가 있다.
* 잠수함 C-56
상선부두 바로 앞의 높은 단에 제2차대전 당시의 잠수함이 그대로 놓여 있는 박물관이 있다. 내부의 천정은 낮지만 잠수함을 견학하면서 소련시대 태평양함대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00시에서 18:00까지이고 월요일, 화요일은 휴관이다.
<우수리스크지역과 한국독립운동>
우수리스크는 1861년 자그마한 러시아마을인 니콜스코에 마을로 시작되었고 1898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로 인정받은 이래 1935년에 다시 보로실로프시로, 그리고 1957년에 오늘날의 명칭인 우수리스크시가 되었다.
이 지역은 아무르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수이푼강(현재 라즈돌리노예강)과 그 지류들이 가로지른 평원에 많은 한인농촌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이푼지역에는 이른바 부유한 입적 한인들의 원호인촌이 많았는데, 추풍4사로 불리는 코르사코프카(河口, 허커우), 크로우노브카(黃, 황커우), 푸칠로브카(六城村), 시넬리코보(水安坪)가 대표적인 부호 원호인촌이었다. 수이푼강의 비옥한 넓은 농토를 배경으로 이 지역 한인들은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다. 이들 부유한 원호인 자제들이 정식 고등교육을 받은 후 각처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1917년 2월혁명 이후에 조직된 에스.엘(사회혁명당) 계열의 젬스트보를 비롯한 자치조직에는 유력한 한인들이 진출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문화적 배경에서 우수리스크지역은 1917년 혁명 이후의 한인사회를 주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에스,엘당을 지지하였고, 특히 10월혁명 이후에는 반볼셰비키적 한인들(후일 한인사회당을 조직하는 세력)과 대립하였다. 1917년 6월의 제1회 전로한족대표회에서 조직된 고려족중앙총회, 1918년 6월의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바로 이들 원호인들이 주도했던 전체 한인사회의 대표단체였던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이들은 3 ․ 1운동 전후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여 임시정부적인 기능을 지닌 대한국민의회를 통하여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경쟁하였다. 러시아혁명이 진전되면서 이 지역의 깊숙한 산골에 위치한 비입적 여호인촌에서는 한인빨치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앞에 언급한 추풍4사의 원호인들과 대립, 충돌하는 계급투쟁의 양상도 보이게 되었다.
1. 고려족중앙총회,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한국민의회본부, 청구신보,
한족공보 신문사
현주소 : 지체리나 31번지
현재는 집이 없고 같은 주택부지 내의 뒤편, 즉 다른 거리쪽에 같은 번지의 집이 있다. 주택건물이 되어 있다. 러시아혁명 이후인 1917년 6월 입적한인(귀화한인, 원호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고려족중앙총회, 그리고 1918년 1월 하바로브스크에서 비입적한인(여호인)들이 발기한 한족중앙총회가 통합하기로 하고 1918년 6월 정식으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 그리고 1919년 3 ․ 1운동 직후 전로한족중앙총회가 확대, 개편된 대한국님의회 본부가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또한 고려족중앙총회와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기관지로 발행되던 『청구신보』와 그 후계지였던 『한족공보』 역시 이곳에서 발행되었다.
2. 전로한족대회(노령한인협회 대회)개최지
현주소 : 블로다르스카야 거리 11~27번지
러시아 2월 혁명후인 1917년 6월 우수리스크에서 시베리아 바이칼호 이동의 러시아지역 한인대표들이 모여 중앙기관과 신문발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대회로서 입적(귀화)한인과 비입적(비귀화) 한인들의 통합된 중앙기관 조직에 실패하고 입적한인들만으로 고려족중앙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대회의 의결에 라 우수리스크에서는 고려족중앙총히의 기관지로 『청구신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신한촌민회의 기관지격으로 『한인신보』가 창간되었다. 현재 이 터는 22호학교의 구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1957년도에 설립된 이 학교는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11번지에서 27번지에 걸쳐있다.
3. 최재형 집
첫 번째 집 : 수하노바 32번지
두 번째 집 :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
러시아 한인사회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최재형은 함경도 경원에서 출생하여 9살 때 연해주로 이주, 연추면 최초의 한인면장을 지내게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넌 러시아사회에 안주하는 데 머물지 않고 1906년에 의병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에 뛰어든 이후, 대동공보사장(1909년) 권업희회장(1913년), 노령한인이주50주년기념사업회 회장(1914년)을 지내며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러시아혁명이후에도 최재형은 연추면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출병한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하여 군(郡)자치회 의원을 지낸 한인사회의 최고지도자였다.
최재형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일본군은 1920년 4월 참변을 기회로 하여 최재형 등 우수리스크지역의 한인지도자들을 불법 체포하였고, 이들 가운데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4명의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최재형의 첫 번째 집은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이주해 거주했던 집이고, 이후 다시 이사하여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거주했던 집이 두 번째 집이다. 최재형과 가족들이 거주하던 당시의 집 건물이 현재 그대로 남아 있다.
4. 고려(조선)교육전문학교
현주소 : 아게예바 거리 75번지
1937년 강제이주 전까지 1920년대, 1930년대에 한인교사들을 양성하던 전문학교 건물이다. 현재는 문화전문학교(문화관련 학생 양성)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고려교육전문학교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18년 러시아 힌인의 중앙기관으로 조직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주도로 중등학교인 조선인사범학교로서 설립되었으나 1920년 일본군에 의한 4월 참변으로 폐쇄되었다가 다시 개교되었는데, 1924년까지는 러시아 학생들도 다닌 일종의 혼성사범학교였다. 이후 시베리아내전이 종결된 후에 러시아교육전문학교의 조선과로 개조되었다가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서 정식 설립된 이후, 1936년까지 10년 동안 교원 244명을 배출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사범대학과 함께 한인교사를 양성하여 각급 한인학교에서 한인자제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5. 우수리스크의 기타 독립운동 사적지
우수리스크에는 이외에도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 유허비, 4월참변 당시 최재형과 같이 희생된 김이직의 사무실(시베르체바 10번지), 황경섭(카피톤)의 공장(크라스나야 즈나메나 거리 26번지), 전로한족중앙총회장과 대한국민의회 의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주 교통총장에 선임되었던 문창범의 집과 공장건물, 안중근의 거주지(찌미랴제바 거리 10번지), 안정근의 거주지(찌미랴제바 거리 21번지) 등이 있다.
우수리스크 서남쪽 외곽에 위치한 4월참변 추모비(코마로바 거리 1번지 옆)는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러시아빨치산들을 위해 건립한 기념물이다.
※ 우수리스크의 주요 관광지
* 울리짜 라조 일대
크고 작은 광장과 잔디 공원이 조성된 시청일대가 우수리스크의 심장부로 각종 편의 시설과 영화관, 드라마 극장 건물이 즐비하다. 시청사 앞에는 오른손에 총을 든 동상이 서 있고, 주요행사가 있을 때면 경비가 삼엄하니 여권을 지참하는 게 좋다. 영화관 라씨야는 울리짜 네끄리소비에 연해 있다.
2003년 일대 보수공사를 마친 울리싸 라조는 이제 번화한 상권으로 거듭났다. 묵은 건물들은 화사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지고, 거리 중간에 나지막한 화단이 꾸며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 한민족 문화학교
러시아 연해주는 과거 고려인들의 독립운동 및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한때 민족교육을 위한 학교가 2,000여 개에 달했지만 1937년 강제이주로 인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2005년 9월 1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에 한민족 문화학교가 처음으로 정식 인가를 받아 개교식을 가졌다. 고려인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일깨우고 러시아인에게는 한국을 알리는 통로가 될 문화학교를 둘러보는 것은 좋은 경험일 것이다.
* 끼따이츠끼 짼뜨르(중앙시장)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100Km 에 위치한 우수리스크시는 인구 16만명의 도시로 극동 러시아의 상업 중심지이다. 이곳에 생긴 ‘중국인 시장’(Chinese market)에는 거의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러시아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물건들을 싸게 팔고 있다.
이 시장에는 1,500개의 상점이 있으며 우수리스크시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이 시장은 우수리스크시의 보물 상자인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시장에 와서 찻주전자, 실내화, 잠옷, 부엌 리놀륨과 그 밖의 많은 물품들을 구매한다.
<연해주 남부>
연해주 남부 지역과 한국 독립 운동
현재 행정구역이 ‘프리모리스키이 크라이 하산스키 라이온’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던 관계로 한말 이래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독립운동의 유력한 근거지로 주목 되었다.
우선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내와 가까운 위치에 있고, 훈춘과 북간도와도 연결되어 있어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국내전입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1860년대 이래 이주해온 함경도 지역 농민들에 의하여 개척된 이래 이 지역에는 10여만 명에 달하는 동포사회가 형성되어 있어 독립운동의 물적, 인적 자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울러 1904,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러시아당국은 한인들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한인사회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가능한 한 배재하였기 때문에 독립운동 전개에 더할 수 없이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러시아당국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또는 백위파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는 일본당국의 외교적 압력을 받아들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연해주 남부지역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여러 가지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아시아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地新墟)
현주소 : 비노그라드노예 일대(프리모르스키이 크라이 하산스카이 라이온)
지신허 마을은 러시아지역 50만 고려인 역사의 발원지이다. 1863년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인 이곳에 13가구가 정착하여 형성한 첫 번째 마을이 바로 지신허이다. 지신허는 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항일세역 근거지 연추(煙秋)와 더불어 대규모 한인 집단거주지로 성장해 갔다.
1908년 여름 최재형, 이범윤을 지도자로 하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 국경지대를 공격한 엄인섭(후일 친일첩자로 전락)은 바로 지신허마을 출신으로 이 마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현재 지신허는 완전히 폐촌이 되었고, 러시아농민이 목축을 하고 있으며, 지신허 마을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한국계 인물이 경영하는 배추농장이 있다 또한 마을 입구 왼편에 2004년 가수 서태지가 기부한 돈으로 제작한 지신허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 한말의병운동의 중심지 연추(煙秋)
현주소 : 프리모르스키이 크라이 하산스키이 라이온 추카노브카 마을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등의 한말의병 동호회가 결성되고, 안중근 등의 단지동맹이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재형의 집이 있었다. 1910년대 연해주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재정 후원자인 이종호의 집 역시 하연추(下煙秋 또는 下煙理)에 있었다. 의병장 유인석 은 중연추(中煙秋 또는 中煙理)에 머물기도 했다.
1908년 봄 연추의 최재형 집에서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등 수백 명이 총회를 열고 동의회(同義會), 일명 창의회(唱義會)를 결성하였다. 동의회 총장에는 최재형, 부총장에는 이범윤, 회장에는 이위종, 부회장에는 엄인섭, 서기에는 백규삼 등이 선출되었다. 동의회는 1908년 7월초부터 9월에 걸쳐 두만강 연안 국경지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략하였다.
이후 안중근을 맹주로 김기룡, 강순기, 황병길, 백규삼, 조용순 등 12명의 애국지사들이 1909년 2월 7일 연추의 하리(下理)에서 왼손 무명지를 끊으며 혈서맹약을 행하였다.
현재 상연추, 중연추, 하연추의 위치는 확인 가능하다. 하연추에서 중연추, 중연추에서 상연추까지는 각각 6K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 상연추, 중연추는 폐허화되었고, 하연추마을만이 러시아마을인 추카노브카로 변모되어 있다. 현재 크리느키노에서 추카노브카 마을로 가는 길목에 안중근의 단지동맹기념비가 세워져 있기는 하나 단일 사건에 대한 기념비에 불과하여 한말의병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연추지역이 갖고 있는 포괄적인 역사적 의미를 담지 못하고 있다.
3. 한말 의병부대의 국내진공 루트 두만강 하류 하산지역
현주소 : 하산(프리모르스키이 그라이 하산스키이 라이온)
현재 이 지역은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두만강철교가 놓여 있는 국경지역으로서 통제구역이다. 이 지역은 한말 의병부대의 국내진공 루트였는데, 1908년 7월초부터 9월에 걸쳐 연추에서 결성된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 가운데 전채익 이하 안중근, 엄인섭 등이 인솔하는 200~300명의 연해주의병이 연추를 출발하여 하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대안에 위치한 홍의동을 거쳐 경흥, 신아산으로 진출하였다. 이들 연해주의병은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4. 연해주 남부지역의 기타 독립운동 사적지
3 ․ 1운동이 일어났던 녹둔도(鹿屯島, 러시아이름은 크라스노 셀로마을)와 의병장 유인석이 체류했던 시지미마을이 서계동이 있었다.
<연해주 남부지역의 주요 관광지>
* 아르쫌
아르쫌은 연해주 최대의 석탄 채광 도시이다. 1938년 대량의 갈탄 자원을 캐기 위해 창립된 인구 12만명의 소도시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위성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1929년 광산을 중심으로 아르쫌마을이 생깅 이후, 혁명을 거치며 사회 노동당의 주요 활동지로 알려졌는데 도시명도 볼셰비키의 게릴라로 활동한 표도르 세르기예프의 본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 슬라비안카
블라디보스토크 남서쪽 50Km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블라디보스톡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면 아무르만을 지나 슬라비안카로 갈 수 있다. 연해주 사람들에게는 작고 예쁜 휴양지로 알려져 있고 바다낚시와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높다.
<연해주 중북부의 주요 관광지>
* 아르세니예프
헬리콥터 공장으로 유명한 곳, 중동, 중앙아시아로 팔리는 경비행기 등은 연해주에서 무시할 수 없는 효자상품이다. 아르세니예프에는 연해주 유일의 산악 스키장을 갖춘 관광지이기도 하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우수리스크 타이가와 끝이 보이지 않는 활강 코스 덕에 미국, 카나다의 스키애호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곳이다.
* 스빠스크-달리니
연해주 걸설산업의 중시부 스빠스크-달리니는 1885년부터 이미 촌락이 형성돼 있었지만 품질 좋은 석회암과 점토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1926년 정식도시로 창설됐다.
17Km 떨어진 가이바론에는 호랑이같은 맹수들의 질병을 관리해주는 과학연구소가 있어 호랑이를 보러온 가족단위의 관광객을 볼 수 있다.
* 달레네고르스크
탐험가 마슬레니코프가 제쭈흐강 골짜기의 납, 아연, 은 채석장을 찾다 발견한 곳으로 1897년 처음 촌락이 형성되었다. 세계 최대의 특수 화학 공장 ‘보르’에서 생산한 물건들은 한국, 일본, 중국 등의로 팔리고 있다. 1989년 도시로 창설되면서 관광산업 발굴에도 힘써 희귀 광물, 크리스털, 광물, 광석, 열광석을 모아둔 광물박물관도 있다.
<기타지역>
* 파르티잔스크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정 격전기, 러시아 최고의 백과사전을 집필한 혁명가 K.K아르세니에프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다. 여름철 주말이면 빠르티잔스크 강 일대의 계곡에 가족단위의 휴양객이 있으며, 대도시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냥을 즐긴다. 온화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 덕에 곳곳에 표도 농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