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 시해와 죽음의 진실, 사진, 살해되지 않았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일제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던 사건이다. 명성왕후는 과연 시해사건 때 정말로 살해당했을까?
우리는 국사교과서에서 민비(명성왕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것으로 배워왔으며.
그렇게 알고 있다.
모든 역사교과서가 대부분 민비가 1895년 일본 자객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장례식까지 치른 것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여태까지 국민들 대부분이 명성왕후는 시해당한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왔던 것이며 우리 민족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관련해 매우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있어.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KBS에서 을미사변 120주년 특집으로 방송된 ‘명성왕후 를 다시보다’에서 전혀 뜻밖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져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민비 시해사건‘ 당시 죽었다고 알려진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즉 명성왕후는 을미사변 때에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지 않았으며. 몰래 궁을 빠져나가 피신했다고 하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있었던 민비(명성왕후)가 살해당했다고 하는 내용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을미사변 이후에도 오랫동안 은밀한 은신처에서 안전하게 삶을 살아갔다고 하는 주장들이 힘을 실어가고 있는 중이란다.
그리고 명성왕후 생존설은 여러 가지 문헌자료에서도 확인되고 있어서. 단순히 가설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기정사실로 확정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죽었다고 알려진 명성왕후가 아직 살아있다’는 보고서를 러시아주재 독일대사 라돌린이 독일본국에다 보고했다고 한다.
이보고서를 올린 시점은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시점인 1895년 10월 8일보다 훨씬 지난 1896년 6월 2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뉴욕타임스지에서도 ‘고종은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가 춤추는 기생의 복장으로 변장해서, 서울을 빠져나갔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을미사변’ 당시에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재외공관원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피신했으며. 그 후 한동안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1895년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러시아대사관, 독일대사관, 프랑스대사관. 미국대사관 등 대부분의 열강 외교관들은 모두 ‘을미사변’ 이후에도 민비(명성왕후)가 살해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에 민비(명성왕후)가 을미사변 때 시해당했다면. 그 시신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시신 또한 발견되지 않았으며, 학자들에 따르면 승정원일기에도 명성왕후가 죽었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즉,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가 일본낭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적지않은 수의 역사학자들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믿지않고 있으며, 그 후에도 명성왕후가 은밀하게 살고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서 명성왕후 살해를 시도했던 이유는 당시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가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도모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속국화하고 난 후 중국대륙을 점령할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서서히 조선에 대한 마수를 뻗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양국간에는 서로 협력관계가 지속되어왔다.
그런데 1884년 친일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청나라가 개입하게 되고 청나라의 개입으로 당시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친일세력들은 모두 숙청당했으며. 그 후부터 고종은 일본을 불신하게 되었고, 일본 대신 청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갑신정변 이후에 조선에서 주도권을 잃게된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에서 다시 주도권을 확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894년도에 농민들이 주체가 된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동학혁명을 주도한 농민군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조선은 일본군들을 한반도에 끌어들이기 된다.
1894년도에 발생한 동학혁명은 일본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작용하게 된다.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고. 조선에서 동학농민군들을 제압하는 데에 성공한 일본은 청군과 전쟁을 벌여서 또다시 크게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주도권은 다시 일본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군 진압에 성공하고. 청나라군대까지 물리친 일본은 그후부터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고. 조선에 친일정부인 김홍집내각을 구성해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렇게 조선 조정이 일본세력과 친일세력이 장악하고 모든 정치를 주도해나가자, 위기감을 크게 느꼈던 고종과 민비는 일본을 견제할 만한 능력을 지닌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친러시아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일본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친러시아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민비. 즉 명성왕후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세력이 조선의 정치를 주도해나가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소외된 고종과 민비는 일본세력을 몰아낼 만한 스스로의 힘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다.
당시 명성왕후는 조선에서 일본세력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조선의 자주독립은 불가능해지며 언젠가는 일본에게 먹힐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날로 커져가는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명성왕후는 당시 대국이었던 러시아와 손을 잡기 시작한다. 원래 조선은 청나라가 일본세력을 몰아내주길 바랬었는데. 그렇게 믿었던 청나라군대가 힘도 써보지도 못하고 일본군대에 완전히 패배하고 철수해버리자, 또다른 대안을 모색해왔다.
명성왕후가 찾아낸 대안은 일본보다 더 큰 대국인 미국과 러시아였던 것이다. 명성왕후는 먼저 미국에 손을 내밀었는데. 당시 미국은 조선에 별로 큰 이해관계를 못느끼던 상황으로서 조선의 제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결국 명성왕후는 일본을 몰아낼 새로운 대안으로 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당시 동북아정세에 큰 관심을 갖고있었던 러시아는 민비의 요구에 화답해서 조선과 러시아간에 긴밀한 친교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명성왕후가 이토록 러시아와의 관계에 몰두했던 이유는 그녀는 일본의 침략의 저의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조선의 국왕 고종의 주변에 있는 많은 대신들은 조선이 개화를 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명성왕후 만큼은 일본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으며, 제3국인 러시아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일본은 그당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조선을 개혁시키고 개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본의 속내는 바로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대륙을 정복하려는 것이었다.
명성왕후는 바로 일본의 이같은 침략의 야욕을 미리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대국인 러시아와의 도움을 갈망했던 것이다.
당시 명성왕후는 국제정세에 능통했으며. 당시 그녀의 판단이 옳았음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한일합방이 일어났을 때에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다.
명성왕후는 ‘러시아는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나라이다. 러시아가 조선의 왕권을 보장해준다면, 우리는 러시아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녀의 어록에서도 의도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렇게 명성왕후가 친러시아정책으로 선회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된 일본으로서는 명성왕후는 조선진출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다.
명성왕후 초상화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미리 간파했던 명성왕후는 당시 조선 자체의 국력으로서는 일본에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이제이’ 정책으로 즉 오랑캐의 침략은 다른 오랑캐의 힘을 이용해서 제거한다는 정책을 가지고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며. 대국인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러한 명성왕후의 의도를 간파했던 일본의 이노우에공사는 일본 본국에 보고를 올리게 되었고, 결국 명성왕후 제거라고 하는 불법적인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내용이 일본 이토 히로부미 전기문에 실려있는데. 이노우에공사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조선의 사정을 상세히 보고했으며. 이노우에공사는 내각회의에 참석해서 이토 히로부미총리를 비롯한 전내각 각료들에게 조선에 대한 정책을 제안했으며. 일본 내각은 이노우에공사의 조선정책을 의결하고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 군 강경파인 미우라를 새로이 임명해서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당시 조선의 일본공사였던 이노우에공사가 제안한 조선정책이라는 것은 바로 명성왕후 제거정책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러시아와 손잡았던 명성왕후를 제거하려는 정책을 일본 내각회의에서 의결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 대목이다. 군부내 강경파였던 미우라를 외교관경력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에 파견했던 이유는, 그가 명성왕후를 제거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성왕후 시해사건은 이노우에공사가 제안했고 일본내각이 의결해서 철저하게 일본정부가 주도해서 일으켰던 사건이었고. 무사출신인 미우라를 조선에 파견해서 그가 무사들을 동원해서 실행에 옮기게 된다.
또한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외교문서에 미우라공사가 당시 일본외상이었던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보낸 보고서가 담겨있는데. 이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으로서는 민비왕비를 제거 실각시켜서 대원군을 집권하게 하면, 일본에게 유리하다’라고 하는 기록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당시 새롭게 조선의 공사로 파견된 미우라가 조선에 파견되자 마자, 명성왕후 시해계획을 세우고 시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일본문서에 있는 또다른 미우라의 보고문에는 ‘궁궐의 여인들을 살해한 사람은 일본인’이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이보고서가 발송된 날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바로 그 같은 시기이다.
이렇게 마우라공사가 올린 보고문에 명백히 일본인들이 궁궐로 침입해들어가서 조선의 궁녀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일본공사는 조선의 궁녀들을 살해한 자들은 대원군과 훈련원병사들어었다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일본이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일으키고 난 후에, 일본은 조선에서 친일세력인 김홍집내각을 중심으로 해서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고. 일본과 러시아는 극도로 대립관계에 서게된다.
이당시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을 견제해왔던 러시아는 ‘을미사변’ 이 발생하자, 일본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하였으며. 일본인이 시해사건을 일으켰음을 밝히내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는 현지답사까지 하면서 ‘을미사변’을 일으킨 사람들이 일본정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본낭인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조선 궁녀시해를 일으켰던 일본낭인들은 일본으로 소환되어 히로시마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이것은 다른 나라들의 여론이 악화되자 어쩔 수 없이 열었던 형식적인 재판에 불과했으며. 재판을 받았던 일본낭인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나게 된 것이다.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났던 일본낭인들은 명성왕후를 시해했다고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1895년 을미사변 당시에 명성왕후가 살해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여러가지 문서들이 발견되고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조선궁녀 시해사건이 발생한 직후, 미우라공사가 일본내각에 보냈던 보고서에는 ‘명성왕후가 아마 시해되었을 것이다’라고 다소 모호한 내용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당시 하라 다카시 일본외무상의 개인문집에서 ‘조선왕비는 현재 행방불명상태이지만, 일설에 의하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그당시 궁궐에 쳐들어간 일본낭인들은 명성왕후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단지 일본낭인들은 궁녀들만 살해했던 것이고. 명성왕후는 피신하였기 때문에 행방불명인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당시 일본의 공식기록에 의하면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습격해 들어가서 많은 궁녀들을 살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성왕후는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며, 명성왕후는 미리 피신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또다른 기록문서가 존재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러시아 로마노프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일본낭인에게 살해당히지 않고 미리 피신해서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1896년 1월 14일 서울주재 러시아공사였던 시페이예르가 러시아외무대신에게 올렸던 보고서에도 왕후가 현재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왕후는 현재 나라안에 은밀한 곳에 숨어있으며. 러시아공사관에 들어오기를 요청하고 있다고 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1896년 2월 6일 러시아주재 독일대사였던 라돌린대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죽었다고 소문난 조선왕비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은 러시아 외무대신 로마노프가 독일대사인 라돌린에게 전해준 얘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을미사변’을 직접 주도했던 미우라공사가 작성한 보고문을 보면, ‘조선왕실에는 명성왕후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얘기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는 왕비가 멀리 피신해서 숨어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것은 조선의 왕비 명성왕후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단지 행방불명되었으며. 일본낭인들이 침투했을 당시에, 멀리 피신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비밀문서에 기록된 내용인데. 이 비밀문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당일날에 나왔던 기록인데 ‘대원군과 일본군, 그리고 왕실쪽에서도 명성왕후가 생존해있으며, 아무런 위험에 처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리고 몇 년 뒤 미국의 뉴욕타임즈지 기사에서도 명성왕후가 사건당일 미리 깨어있었으며. 가마를 타고 몰래 빠져나갔다고 보도하고 있으며.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와서 소란을 피우자 고종이 명성왕후에게 춤추는 여인의 복장을 입혀서 가마를 태워서 궁궐을 빠져나갔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을미사변 당시에 서울에 주재하고 있었던 조선주재 미국대사관이나 다른나라 공사관들이 보고서를 올린 내용들을 토대로 작성했던 기사들로서 당시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명성왕후 시해사건’ 당시 고종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시해사건 이후에 고종은 일본이 주도하는 명성왕후 장례식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이것은 러시아 비밀문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종은 일본세력이 민비의 가짜 유골을 가지고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반대했다고 하며, 고종은 러시아대사관에 일본이 명성왕후의 가짜 장례식을 치르려고 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베베르공사도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명성왕후 장례식을 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베베르공사도 명성왕후가 생존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데,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장례식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처럼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발생했던 1895년 10월 8일 당일날과 그 이후에 벌어진 여러 상황들을 분석해보았을 때. 명성왕후는 시해사건 당일날,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까우며.
명성왕후는 일본낭인들이 침입해오는 것을 간파하고, 미리 은밀한 곳으로 피신해서 살아남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당시 서울에 주재해있던 많은 외국대사관에서는 한결같이 명성왕후가 생존해있으며. 피신해서 숨어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고종도 생존해있는 명성왕후의 장례식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것이다.
민비시해사건을 주도했던 일본공사 미우라 자신도 자신의 일기에서 명성왕후가 죽은 것이 아니라,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기록해두고 있다.
명성왕후가 시해사건 당시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하나 있다고 한다. 일본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해서 시해사건을 일으킨 시점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이다. 그런데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왔던 시점인 새벽 4시 30분경에 수비대 연대장 이학균이 고종에게 달려와 왕비가 어디계시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며. 고종은 왕비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보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러시아 베베르공사의 보고문에 기록되어 내용으로 ‘명성왕후시해사건’ 당시 명성왕후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명성왕후와 가장 근거리에 있었던 조선국왕 고종이 직접 말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고종 사진
이처럼 ‘을미사변’ 당시에 명성왕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낭인들이 명성왕후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왕후는 1882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임오군란 때에도 죽을 뻔했지만, 지혜롭게 피신해서 살아남았던 경력이 있다.
그 이후부터 명성왕후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못하게 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사진도 일체 찍지못하게 했던 것이다.
명성왕후를 살해하기 위해서 궁궐로 난입했던 일본낭인들은 명성왕후를 찾지못한 채, 애꿎은 궁녀들만 살해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어딘가에 생존해있는 명성왕후의 장례식을 치르지못하도록 반대했던 것이다.
고종은 1897년 아관파천한 러시아공사관에서 다시 왕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 명성왕후에 대한 국장을 실시했다. 고종은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2년후에 비로서 명성왕후에 대한 장례식을 실시했는데. 그렇다면 명성왕후는 나중에 다시 죽었단 말인가? 아니라고 본다. 고종이 나중에 명성왕후 장례식을 실시한 이유는 아마도 은신처에 숨어있는 명성왕후를 안전하게 살려주기 위해서 거짓 장례식을 치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종이 러시아대사관에서 다시 환궁한 이후에 다시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진 상태였는데, 이렇게 자신의 생명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고종은 명성왕후를 거짓으로 죽었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오히려 명성왕후를 은밀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보여진다.
즉, 1997년 고종이 실시한 명성왕후에 대한 장례식은 일본에 대한 눈속임이었으며. 오히려 명성왕후의 생명을 연장해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판단된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던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인해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명성왕후는 외국의 여러외교관들의 공식문서에 의해서, 죽지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명성왕후는 남편인 고종의 권력을 탐했던 왕비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명성왕후는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당시 조선을 다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만들고, 문명화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위대한 정치가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다만, 이러한 명성왕후의 개혁정치가 너무 늦은 시기에 실시되었다고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미 조선의 국력이 크게 쇠퇴해진 상황에서 명성왕후는 개혁과 부국강병의 계획을 세웠지만, 바람앞에 촛불처럼 한없이 쇠락해진 조선은 일본의 근대화된 저력앞에 힘도 못쓰고 무너져만 갔던 것이다.
조선이 좀 더 이른 시기에 부국강병과 개화를 추구했다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늦은 시기에 문명과 개화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일본에 먹히게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사실 조선이 일본에 강제합병된 이유는 고종과 명성왕후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될 만큼 쇠약해진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헌종, 철종, 순조때, 자신들의 권력강화만을 추구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서 부국강병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허송세월만 했었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무너뜨린 고종의 왕위등극 이후에는 대원군이 10년동안 집권했었는데, 이시기가 조선의 부국강병과 개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그러나 집권한 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선진국으로부터 선진문물과 기계문명을 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다. 이당시 대원군의 쇄국정치만 없었더라면, 우리조선도 발빠르게 선진국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해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한다.
즉 조선의 멸망이유는 고종과 명성왕후 때문이 아니라, 세도정치를 일삼았던 안동김씨와 쇄국정치를 추구했던 대원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미 망하기 일보직전에 정권을 인수한 고종과 명성왕후는 더 이상 강력한 일본세력앞에 어찌해볼 수 없었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미 간암3기에 걸려 죽기 일보 직전에 놓인 환자를 데려다놓고, 너의 능력을 발휘해서 살려보라고 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고 해도 결코 살려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명성왕후는 안동김씨와 대원군이 망쳐놓은 조선을 살려내려고 모질게도 발버둥쳤지만, ‘만시지탄’으로 이미 해는 저물었고.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바람앞에 촛불처럼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조선을 끝까지 살려보려고 애쓰다가 사라진 명성왕후의 간절한 염원과 노력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일본의 마수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문명화를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다가 사라져간 명성왕후는 정말 시대를 잘못 태어난 위대한 정치가이자 국모였다.
그래도 새로 밝혀진 사실에 의해서, 명성왕후가 일본낭인들에게 더렵혀지지 않고 살아남아 은밀한 곳에서 살아갔다고 하니, 정말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펌글)
|
첫댓글 아주 오래전 어릴적에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란 영화를 봤는데..
민비역으로 최은희가 나온것 같은데 너무나 오래되어 등장인물이나 내용이 전혀 기억이 없네여~~~
나이 드시면 다 그래요~ㅋㅋㅋㅋㅋ
흥미롭네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반복은 되은건 맞는 듯. 요즘이 어쩜 구한말과 비슷하단 생각을 해봅니다. 에효효!!
공감!
@에이스VN 따라서 국가 최고책임자의 자질과 능력이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성황후인지 민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로 정치를 넒게 보고 실행할 인물은 아닌듯. 다만 권력욕에 눈이 먼 여자인 듯 보임닙다.. 뭐 순전한 개인 생각
어차피 역사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이죠.
결론이 짜증나네요. 고종 집권 기간이 얼마인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학군 소탕 작전을 누가 지시하고 일본군대를 끌어온 자가 누군지 명백합니다. 자신의 집권욕인 왕권을 위해서 국가와 백성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은 고종과 그 일파가 전부는아니겠지만 확실한 망국의 주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조선의 미국 외교 책임자가 전직 식당 종원원이었습니다. 단지 영어를 좀 한다는 이유로. 공무는 잊고 나랏돈으로 흥청망청 쓰고 온 놈을 다시 대신으로 임명하는 등 국가 통수권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자가 왕이 된 것이 조선이 망국으로 치닫게 된 이유입니다. 올바른 역사는 사실과 그 사실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막부가 "대정봉환"이라는 반군(유신군)에 권력 이양이 되어서 미국에 먹히지 않고 자주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종이 자신의 능력과 조선 백성을 위한다면 혁명정부 또는 동학 정부 등에 권력일 이양하고 외세에 대비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식민지가 안된 몇 안되는 나라입니다. 참고할 만한 대목입니다.
좋은 의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