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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답으로 읽는 제주 4.3.♥
1. 나라를 빼앗긴 시대 민족해방운동을 벌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제주 4․3을 이해하려면 한국 현대사를 알아야 합니다. 우선 일제치하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알아야 합니다. 1919년 3․1 운동은 민족해방운동 역사의 분수령이 됩니다. 3․1 운동이 실패하고 운동 노선은 크게 좌파와 우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좌파는 조국 해방과 함께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세력입니다. 우파의 운동노선이 점차 일제와 타협하는 쪽으로 나가는데 반발한 좌파 세력은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민중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타협 없는 투쟁 노선을 가지게 됩니다. 좌파의 확산은 전 세계적 현상이었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황제의 폭정을 무너뜨리고 인민평등을 추구)이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더욱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그 후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독립운동 세력을 거세게 탄압하는데 이 때 민족운동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우파에는 변절(친일)의 길을 가는 이가 많아졌고, 좌파 역시 타격이 커서 대부분 지하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탄압이 심했던 1930년대는 갑자기 시대별 서술이 주제별 서술로 바뀝니다. 1930년대 우파 운동인 김구의 애국단(이봉창, 윤봉길 등) 활동이 1920년대의 강우규, 김상옥, 나석주 등의 활동과 함께 '애국지사들의 항일의거'란에 실리고, 역시 1930년대인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이 1920년대 청산리 전투와 함께 '독립군의 항일전쟁'란에 실리게 됩니다. 이런 서술 체계가 아니라면 1930년대 항일운동은 상당 부분 공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1940년대가 되어 일제가 전쟁에 지고 망하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자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꾸리는 우파 쪽의 활동이 다시 시작 됩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동북항일연군, 조선독립동맹 등 좌파의 활동은 두드러집니다. 냉전시대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교과서의 한계로 좌파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좌우를 막론하고 새 조국 건설의 정강정책에 '토지 및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좌파들이 주장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흐름이었고 해방된 새 조국 건설에 있어 누구나 동의할 수 있었던 정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단 친일세력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이 당시 좌파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 국가가 많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합니다. 제3세계라 분류될 수 있는 국가들은 더욱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 공황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모순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그 폐단을 여실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 있는 지식인들과 식민지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성향의 정책을 선호하게 됩니다. 전쟁이 없고 고루 잘 살게 된다는데 좋아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사회주의 나라의 계획경제가 실패했지만 오늘의 시선으로 1940년대를 재단한다면 커다란 역사인식의 오류를 가져오게 됩니다.
2. 좌익과 우익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은데요?
좌익과 우익은 흔히 진보와 보수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원래는 프랑스 혁명기인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의장석에서 보아 왼쪽에 급진파(자코뱅)와 오른쪽에 온건파(지롱드)가 의석을 차지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은 자칫 대립되는 개념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무한 경쟁, 기업의 무제한 영리추구, 개성의 존중 등은 자유를 앞세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욱 강조되고, 복지와 부의 균등분배 및 약자 보호 등은 평등을 앞세운 사회주의 체제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좌와 우는 사회주의 경향과 자본주의 경향으로 대변됩니다. 사회주의는 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을 핵심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상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소련이나 북한의 형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시정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세계인을 대상으로 지난 천년의 '최고의 사상가'가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답은 마르크스였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전문가를 상대로 한 같은 조사에서도 답은 마르크스였습니다. 사회주의 가치 즉 좌파가 옹호하는 가치가 얼마나 큰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현재 15개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무려 13개국에서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녹색당 등 구좌파와 신좌파가 단독 혹은 연립정권을 세운 집권당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도 마르크스 사상의 유효함과 좌파의 넓은 범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한 사회에는 맹목적인 '극우'가 판을 칩니다. 6․25를 거치면서 형성된 남한의 ‘반공 절대 신앙화’가 우리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친일파의 인맥을 이은 ‘극우’가 마치 ‘보수’(우파)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보수(우파)라면 개성의 존중, 사상의 자유, 독재정권에의 저항을 먼저 자신들의 간판으로 내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파의 특징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늬만 보수인 그들은 여전히 ‘색깔론’을 만들어 퍼뜨리며 사상 검열 따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심어진 냉전적인 정서를 활용하여 자신의 부당한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후 권력을 잡은 친일세력들은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이데올로기 교육 펼친 결과 한국현대사교육을 완전히 왜곡해 놓았습니다. ‘좌파’니, ‘인민’이니 하는 단어를 쓰면 자동적으로 ‘빨갱이’, ‘악마의 세력’으로 인식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 지난 날의 사실을 차가운 이성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해방 당시 좌와 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아야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좌파가 주도했다는 것에 거부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경우 특히 좌파의 강세를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경제 구조에 있어서 대지주가 없었으며 ‘궨당(친척) 시스템’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좌파에서 주장한 ‘평등’이나 ‘공동체적 이념’이 더욱 일반 만중들에게 가깝게 다가갔을 수 있습니다.
3. 해방 후 건설하려 했던 새 조국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제 패망이 다가오던 1940년대에 주요 독립운동 세력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 민족통일전선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요 세력으로 국내에는 조만식(우), 여운형(중도좌), 박헌영(좌) 계열이 있었고 중국에는 김구(우), 김원봉(중도좌), 김일성(좌), 김두봉(좌) 계열 그리고 미국에는 이승만(우), 안창호(우) 계열이 있었습니다. 국내 세력은 식민지 조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강점이 있었고, 중국에 기반을 둔 세력은 한반도 인접지역에 군대를 가지고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세력은 사실 그 효과가 확실치 않은 외교독립론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국제 관계가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강대국에게 독립을 호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들 여러 세력들 사이에는 대부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빼앗긴 나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단결하자는 기운이 일고 있었습니다. 유럽식 개념의 부르주아 독재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모두 부정하고, 통일전선 노선에 의한 민족독립국가를 세우려 했습니다. 통일전선 노선이 지향한 민족국가는 친일 세력을 제외한 모든 계급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정권 또는 좌․우익의 연립 정부 등이 모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이런 노력들이 외세 간섭으로 좌절되고 결국 남북 분단 정부가 들어서더니 급기야 우리민족은 제주 4․3과 6․25 같은 비극을 겪게 됩니다.
4.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백범 김구는 왜 탄식을 했을까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방금 출옥한 독립 인사들이 만세를 부르는 감격스런 사진은 흔히 ‘해방’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이 기쁜 날에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는 크게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왜 김구는 해방을 괴로운 심정으로 맞이했을까요? “우리 병력이 국내에 진공하기 전이다. 따라서 그 만큼 해방 후 우리 목소리보다는 외세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 분단정부가 들어서면 곧 바로 우리끼리 벌이는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 인용문과 같은 김구의 한숨은 우리 민족의 비극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8․15 해방은 우리 손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과서에는 우리민족이 전개해 온 독립투쟁의 결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애국심과는 별도로 역사 서술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 8․15는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외세의 강점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미국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어져 가는 요즘, 태평양전쟁의 본질을 바로 본다면 이후의 사건 전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그 많은 피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흘린 게 아닙니다. 태평양전쟁은 무한대로 상품시장을 확대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터져 나온 결과일 뿐입니다. 태평양 지역에 이미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연합국과 새로이 시장과 원료 공급지 확보를 위해 나선 일본과의 추악한 식민지 쟁탈전일 뿐입니다. 미군과 독일군, 혹은 미군과 일본군과의 대립 구도로 만들어진 미국 전쟁영화를 보면서 정의로운 미군의 모습에 감동받던 우리들의 문화 종속이 이 전쟁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막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미군을 해방군으로 가르쳐온 역사 왜곡과 미국을 세계의 경찰로 받아들이게 한 이미지 조작을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아무 문제 의식 없이 너무도 순진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결국 8․15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외세 지배 혹은 간섭의 시작을 뜻하며 게다가 남북 분단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5.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고 배웠는데요...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선언 등은 과거 시험 문제에 가끔 등장했던 용어들입니다.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요성이란 다름 아닌 ‘한국 독립’과 관계된 연합국의 회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과거 정권의 교육철학이 얼마나 사대주의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회담에서 한국독립 문제가 거론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도 바쁜데, 한국이라는 미개한 나라에 그 같은 은혜를 베풀 만큼 그들이 자비로운 사람들입니까? 식민지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지 못해 눈이 빨개 있는 그들이 진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바랬단 말입니까? 특히 백인들은 황인종에 대해 아직까지도 인종차별(편견)이 심한데 당시 그들의 눈에 조선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웠단 말입니까?
사실 이들 회의는 ‘전후 세계질서 재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열린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세계를 나누어 먹을까’ 하는 것을 의논하는 ‘승전국들의 전리품 분배회의’였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독립과 관계해서 언급되었다고 하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흔히 우리민족의 독립을 최초로 약속했다는 카이로 회담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었습니다. ······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단지 이것뿐입니다. 애초에는 적절한 시간에(in due course)가 아니라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라고 초안이 되었던 것을 미국의 루즈벨트가 바꿀 것을 주장했습니다. 독립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적당히 상황을 보아서 챙기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는 스탈린에게 한국에 20~30년 정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한국에 신탁통치를 먼저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습니다.
6. 자주 언급되는 ‘인민위원회’는 공산당 조직이 아닌가요?
‘인민’이란 용어가 왠지 친숙하지 않아서 그런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 언어도 분단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재단을 받게 된 것이죠. 편견 없이 ‘인민위원회’에 대해 공부하려면 먼저 1944년 조직된 ‘건국동맹’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일제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1944년에 이미 중도좌파 지도자였던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새 조국 건설을 준비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새벽 조선총독부의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초대하여 행정권 이양 의사를 밝히고 일본인의 안전 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여운형은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등 5개 조건을 제시하였으며 서로가 이를 수락하게 됩니다. 그 날 저녁 건국동맹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발전하였으며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 권한을 이양 받습니다.
이후 8월 말까지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 지부가 등장하였고, 이 건국준비위원회가 지방 수준에서부터 인민위원회로 전환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인민위원회는 민중적 자치기관입니다. 마치 동학농민전쟁에서 등장했던 ‘집강소’나 현재 이상적 개념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민위원회는 마을 단위에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 지역 인사들이 추대된 조직이었으며, 좌우을 막론하고 다양한 계급계층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친일파는 여기서 배제되는 게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사실상의 행정권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19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9월 22일에 인민위원회로 전환하게 됩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 임원 구성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대중에게 신뢰받던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미군정 하에서도 상당 기간 주민의 자치기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이 생소하고 공산주의 조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실 ‘인민’이란 말은 「삼국사기」에서부터 나오는 단어로 ‘사람들’ 즉 ‘민중’이라는 말 같습니다. 제헌헌법을 기초할 때 유진오는 ‘인민’이란 말이 빨갱이들이 쓰는 말이므로 ‘국민’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국민’이란 말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군국주의 나라 백성을 만드는 곳이란 뜻이어서 그래서 전국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그 압력에 반발하던 유진오가 눈물을 흘리며 “이 좋은 우리 말을 없애다니...”라며 한탄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해방 직후 극우 친일세력들은 유서 깊은 우리 말을 만들어지진 지 얼마 안된 일본 군국주의 말로 바꾸면서 ‘인민’이라는 말 자체를 빨갱이 말로 색칠해 버린 것입니다. 비슷한 처지의 우리 말로 친구를 뜻하는 ‘동무’가 있습니다.
7. 조선인민공화국(인공)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둘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북한의 국기를 ‘인공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는 혼란을 가져올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한국현대사에서 ‘인공’은 북한과는 따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국기는 ‘북한기’, ‘북한국기’, ‘북조선기’, 아니면 공식명칭 그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라고 부르는 게 옳습니다.
그럼 ‘북한’과는 또 다른 ‘인공’ 즉 ‘조선인민공화국’이란 무엇인가요? ‘조선인민공화국’ 해방된 지 20여 일 만인 1945년 9월 6일, 전국의 인민위원회를 대표하는 1000여 명이 서울의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하고 선포한 해방조선 최초의 통일된 나라의 이름입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는 시기적으로 볼 때 급조된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연합국의 진주를 앞두고 이들을 상대할 국내 민중의 집결체로서 정부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일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9월 7일 남한 상공에 뿌려진 맥아더의 포고문은 38선 이남에 ‘미군정’ 실시를 선포하며, 이외의 어떠한 권력체도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맥아더 포고문 1호에는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occupy)함” 등의 표현 외에도 “군정을 실시함”,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 “공용어는 영어로 함” 등의 구절이 있습니다. 즉 이는 해방 후 우리 민족의 건국의지를 완전히 짓밟은 것이며, 미군이 한반도를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점령하러 온 것임을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결국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만든 해방 조국의 첫 국가는 점령군 미국의 탄압으로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8. ‘신탁통치 문제’는 심하게 왜곡되었다고 하는데 그 진실은 무엇인가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실 왜곡은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말해지는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1945년 12월에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회의입니다. 흔히 이 회의에서 소련은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주장했으며 이는 소련의 한반도 지배 음모를 드러낸 것이라고 교육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것은 미국이며, 소련은 이에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단서만을 달았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회의 결정 사항 중 핵심은 신탁통치 이전에 먼저 한반도에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의 자치 능력 부족을 감안해 미․영․중․소 4개국이 후견인 역할(신탁통치)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조선인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의논하여 먼저 임시정부를 만들고, 이 임시정부가 미․영․중․소 4개국의 감독 혹은 후견 아래 전체 한반도를 5년 동안 통치한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가장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여당이 되어 정식 정부를 수립하고 완전 독립국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언론을 통해 왜곡된 소식을 전해들은 좌익도 처음에는 반탁을 외쳤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찬탁’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이라는 조건하에서 외세의 지배와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3상회의 결정사항인 ‘임시 민주정부 구성’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미국의 신탁통치 음모를 폭로하고 ‘찬탁’이 아니라 ‘모스크바 협정의 총체적 실현’을 주장했던 겁니다. ‘소련의 사주에 의해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꿔 찬탁을 주장’했다는 지식은 냉전체제의 선전문구입니다. 물론 교과서도 여전히 이 입장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35년 동안 식민지배가 이제 막 끝난 상황에서 다시금 외세의 간섭을 허용하는 것이 국민 정서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외세의 간섭을 생각한다면 ‘무조건적인 즉각 독립’ 즉 ‘반탁’이라는 주장이 과연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지, 상황을 고려치 못하고 당위만을 주장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9. 47년 2월 제주도 ‘민전’ 결성식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한 점을 보면 아무래도 ‘민전’은 공산주의 조직 같은데요?
당시의 정치 정세를 모르고 단면만 보면 그럴싸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극우세력들이 흔히 써먹는 악선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민전’이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약칭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민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된 조직입니다. 제주도인 경우 1947년 2월 23일에 결성되고 의장단에 안세훈, 이일선, 현경호가 추대됩니다(일제시대 독립운동가였던 안세훈은 남로당원으로 이후 월북했고, 이일선은 스님이었으며, 현경호는 당시 제주중학교 교장으로 지금도 제주중학교 교정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잣대로 해방정국을 바라볼 때, 인식상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거론된 의장단 면모를 보면 좌우를 막론하고 신망있는 지역인사가 주도했다는 인민위원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제주도만의 상황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스탈린과 김일성이 추대된 그 ‘민전’ 결성식에는 박경훈 제주도지사가 참석해서 축사를 했고, 강인수 감찰청장, 심지어 미군정 제주도 법무관 패트릿치 대위까지도 참석해 연설을 했습니다. 그 땐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해방정국은 좌우가 지금처럼 단절되지 않았으며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6․25를 거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고 반공교육이 강화되면서 우리에게 이런 장면은 낯설게 된 것입니다.
10. 4․3의 발단이라는 3․1시위는 기미년 만세운동과는 물론 다른 것이겠죠?
예, 물론 다른 사건입니다.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은 1919년 사건이며 또한 이 운동이 제주도까지 파급된 것은 3월 21일이다. 이 사건은 서울에 유학해 있던 조천 출신 김장환의 귀환으로 시작된 일제하 민족독립운동입니다.
흔히 4․3의 발단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47년 3․1시위’ 혹은 ‘3․1절 발포사건’ 등으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당시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이 대회는 탐라국 개벽 이래 제주도 최대 인파(약 3만)가 몰렸다고 합니다. 이 대회에서 내건 슬로건은 ‘3상회의 결정 즉시 실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3․1정신으로 통일 독립 쟁취하자’였습니다. 왜 이런 슬로건이 등장했는가 하면 1947년에 접어들어 미국은 38선 이남만이라도 친미정권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의도에 따른 분단정부 수립이 가져올 비극을 걱정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위와 같은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미군정의 의도에 반하는 슬로건이 등장하자, 평화시위였음에도 미군정은 과잉대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발포로 이어졌으며 6명의 사망과 8명의 중상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발은 거세었습니다. 가뜩이나 잘못된 미군정의 곡물수집 정책으로 민생이 피폐해지고, 친일파의 부활로 민심은 어지러운 마당에 과잉대응, 발포에 대한 사과는커녕 더욱 강경책으로 치닫자 마침내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폭발하게 됩니다. 3월 10일 도청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공서와 상가가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의합니다. 일부 경찰관들이 가담하기도 했고, 박경훈 도지사 역시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릅니다. 제주도 전체가 참여한 3․10 총파업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을 왜 4․3의 도화선이라고 부를까요? 만약 미군정이 과오를 인정하고 정당한 조치를 취했다면 문제는 확대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 정책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 같은 강경 노선은 미군정이 남한만의 친미 단독정부 수립 방침을 확고히 한 뒤였기 때문에 이에 방해가 되는 민족 자주적, 통일 지향적 성향을 제거할 필요에서 나온 것입니다.
빨갱이 색출을 명분으로 체포와 구금이 잇달았고, 고문 사망이 이어졌습니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서청)가 제주도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일본으로의 도피, 한라산 입산 등 모순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차츰 누적되어 가면서 마침내 4․3봉기로 다가가게 됩니다.
11. 서북청년회(서청)는 어떤 조직인가요?
지금도 4․3을 겪으신 노인들에게 서청은 몸서리치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서청이 그만큼 무지막지한 잔혹성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집단광기로 몰아 녛은 것인가요?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됩니다. 명칭에서 보듯이 서북지역 월남 청년들의 조직입니다. 평안도를 관서(關西), 황해도를 해서(海西)라 한 것에서 西자를 취하고, 함경도를 관북(關北)이라 한 것에서 北자를 취하여 ‘서북’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입니다.
이들 38선 이북 지역은 해방 뒤 소련과 김일성 권력에 의하여 친일파가 처단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북 지역의 지주층이나 친일세력 혹은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재산을 잃거나 심하게는 처형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공산주의 권력에 의해 가족을 잃고 재산 피해를 겪은 이들은 반공정책의 최전선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은 이런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만은 아니었습니다. 월남이후 극심한 실업난 속에서 겪은 생계유지의 어려움은 또한 이들을 ‘사람사냥’에 나서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됩니다. 이러한 처지를 잘 살피고 있었던 이승만은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맞게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당시 서청단장이었던 문봉제의 증언에서도 “서청의 배후는 이승만”이라는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가 한때 서청 종로 지부 총무부장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2. 한마디로 말해 4․3은 왜 일어났나요?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단순히 한두 가지로 말할 수는 없으며 4․3 역시 몇 마디로 이렇다 하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 시대 상황을 전체를 알아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발발했다든가’, ‘5․10단선을 반대하기 위해 전도민이 떨쳐 일어났다’는 식의 이야기는 역사를 편협하게 이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정치적인 측면입니다. 일제 패망으로 ‘해방’된 삶을 기대했던 도민들은 곧 실망과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주민 자치 기구인 인민위원회가 부정되고 미군정이 들어선 뒤 친일파, 모리배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친일경찰 뿐 아니라 서북청년회까지 악행에 나서서 오히려 일제 때보다 더욱 힘들게 됩니다. 3․1발포 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도민 2,500여 명이 구금되었고 특히 1948년 3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중의 불만은 거세어 갑니다. 그런 상황 속에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이 친미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과 이승만 세력의 집권욕 때문이라는 주장은 점점 설득력을 얻습니다.
경제적 측면 또한 중요합니다.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실업 문제, 계속되는 흉년과 미군정의 반강제적 곡물수집 정책, 일본에서의 송금 중단, 대일교역의 금지와 이로 인한 생필품 부족, 그리고 이를 둘러싼 모리배들의 농간은 도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해방 직후 귀환인구의 급증은 사회변화의 큰 요인이 됩니다. 일본에서 귀환(돈벌이 및 징병․징용)은 무려 6만 인구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해외에서 얻은 노동운동의 경험과 선진사상의 유입 그리고 실업 문제는 사회 변동의 잠재 요인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콜레라)도 민심을 불안케 한 요소가 됩니다.
이같이 복합적인 배경이 깔린 가운데 제주도 좌익 세력은 5․10 남한 단독선거을 거부하고 외세를 배격하는 것, 그리하여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이 모든 불행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여기에 제주도민의 자기 방어 성격의 생존권 투쟁이 결합되어 4․3은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李仁)이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언급한 것은 4․3의 원인을 밝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13. 1948년 4월 3일 제주도민들은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저지’와 ‘자주적 통일국가 건설’ 그리고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당시 도민들의 정치의식이 통일을 논할 만큼 높았던 것인가요?
모든 주민이 세련된 정치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해방 이후 6만에 이르는 귀환 인구의 넓은 세계관이 도민의 정치의식을 높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문맹자도 많았으며 구체적인 정치상황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도민의 생활은 오히려 일제 때만도 못해갔고, 이에 대한 불만은 매우 커져갔습니다. 그런 과정에 항일운동가 출신이 모여 있는 인민위원회는 이런 도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나섰고, 반면 미군정에 의해 되살아난 친일파와 서청세력은 도민에게 악행을 일삼게 됩니다. 민심은 자연스레 인민위원회로 기울어 갔고 미군정의 정책은 불신을 받습니다. 이런 가운데 대립선이 뚜렷해지자 대다수의 도민들은 인민위원회 측을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탄압이 극심해지자 도민들은 생존을 위해 토벌대 측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게 됩니다.
14. 하지만 교과서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요?
한국의 근대 교육은 정치 권력에 묶여 있었습니다. 모든 교육 정책은 교육부 방침에 따라 흐트러짐 없이 운영되었습니다. 게다가 국사 과목의 경우 박정희 군사 정권 때부터 국정 교과서제를 채택하여, 정권의 집권 논리를 전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것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특히 한국근현대사 부분은 왜곡이 심합니다. 근현대사 교육이 부실하고 금기시되었던 것도 이 점과 관계 깊습니다.
특히 이 점은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고등학교 교과서 현대사 필자와 인터뷰한 내용의 기사를 보면 그 부실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 집필진들은 한결같이 4․3의 진상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도 않은 채 기존의 관변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고 합니다.
15. 그렇다면 누가, 왜 4․3을 ‘공산 폭동’으로 왜곡하고 있는 건가요?
우선 남쪽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권력을 잡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친일 죄과를 덮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정부 수립에 더욱 몰두했으며 그들은 이것을 애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민족 자주’와 ‘단일국가 건설’을 주장한 사람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정치 목적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모두 없애야 했기 때문입니다.
4․3 무장대를 토벌했던 군경의 고위직에는 친일경찰과 일본군 출신이 많았다는 것도 이와 관계가 깊습니다.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외부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을 주장했으나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된 증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무리한 주장을 하는 까닭은 학살의 죄를 덮고 그럴듯한 토벌의 명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속셈 때문입니다.
둘째는 미군정입니다. 이점은 당시 제주주둔 9연대장 김익렬 장군의 회고록을 통해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미군정이 말하는 공산 반란론은 조작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미국 본토로부터 제주도 사태 발생에 대한 문책을 받은 미군정은 국제여론을 무마하고 사태를 조속히 진압하기 위해 전략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제의를 당시 제주주둔 경비대 책임자인 자신에게 직접 했었다.”는 증언을 남깁니다.
‘공산폭동’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때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이라는 사람의 진술을 유력한 증빙 자료로 제시합니다. 박갑동의 저술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과거 경력 때문에 한 때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남로당 중앙의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미군정 때 정보부에서 고쳐 쓴 글”이라는 해명을 합니다. 우리 사회의 극우 세력은 이처럼 남의 글을 고쳐 쓰면서까지 참모습을 덮고 숨기려 했습니다.
16. 군경의 토벌대상이 되었던 무장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육군 본부에서 펴낸 「공비토벌사」등 초기 군경 자료를 보면 당시 무장대의 동원 규모는 대체로 ‘주력500명 미만, 동조 가담자 1,000명 안팎’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후 토벌과 학살이 확대되어 3만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범죄행위로 남을 것입니다.
17. 4․3 발발 당시 한라산 정상에 오각별기(북한기)가 휘날렸다는 주장도 있던데요?
이 이야기는 4․3을 공산폭동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애써 4․3을 북한과 연계시키고자 하지만 이는 객관적 정황 증거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오각별기는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북한 정권이 수립된 시기는 남한보다 한달 가량 늦은 1948년 9월 9일이며 4․3은 그보다 한참 앞서 있기 때문에 사건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4․3이 발발하던 그 4월에는 김구, 김규식이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을 벌인 바 있습니다. 4․3발발 후 보름이 지난 때입니다. 그 때 평양 남북협상회의장에 걸린 깃발 역시 북한기가 아니라 태극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아직 북한기가 제작되기 이전입니다.
18. 4․3이 조기에 평화적으로 수습될 기회가 있었다면서요?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500명 안팎의 무장대가 11개 지서와 서청 등 극우단체의 집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4․3의 초기 모습은 이후 전개된 엄청난 양민 학살극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육지부에도 이 정도의 충돌과 유혈사태는 종종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진압작전 참여 명령에도 제주 모슬포 주둔 경비대 9연대는 이 사건을 제주도민과 경찰 및 극우단체와의 충돌로 간주해 ‘선선무 후토벌’의 원칙을 세우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연대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회동,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변 보장 등 세 가지 조건에 합의하는 평화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4․28 평화회담이며, 어쩌면 4․3의 비극을 최소화할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인 4월 29일 미군정장관 딘 소장은 극비로 제주도를 방문했고 그 뒤 미군정의 정책은 화평보다는 토벌위주로 바뀌게 됩니다. 아직까지도 그의 방문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사전 예고 없이 아주 급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점은 아무래도 4․28평화회담을 뒤집고 강경 진압책을 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 오라리 방화사건의 진상은 무엇입니까?
4월 28일 평화회담 성사, 다음날인 4월 29일 딘 군정장관의 극비 방문, 이틀 뒤인 5월1일 제주시 오라리 연미부락에 정체 불명의 청년들이 들이닥쳐 방화, 그리고 이 장면을 공중에서 필름에 담은 미군, 5월 3일 평화협정에 따라 귀순하는 양민들에 대한 총기 난사.
일련의 사건은 평화회담을 무산시키고자 한 미군정의 의도가 담긴 것임이 입증되었습니다. 5월 1일 연미부락 방화를 무장대 측이라고 조작하려 했으나,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 등 극우단체의 소행임이 밝혀졌고, 5월 3일 200명 이상의 귀순자에게 총기를 난사한 것도 무장대를 가장한 경찰의 소행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상호 무력공격을 자제하기로 합의한 평화협상은 깨지고 맙니다. 평화적 해결을 두려워 한 세력의 방해공작이 성공한 셈이죠. 만약 평화적으로 사태가 수습된다면 그간 악행을 저질러 온 친일경찰이나 서북청년단은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미군정 역시 자신의 점령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죠.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빠르고 완전한 진압, 이것만을 생각했던 겁니다.
한편 미군은 공중에서 이 광경을 담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day On Cheju-do)」라는 무성 기록영화를 제작합니다. 메이데이에 맞추어 제주도에서 좌익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조작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후 5월 5일에는 군정장관 딘 소장이 제주에서 최고수뇌회의를 개최하고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합니다. 이 자리에서 김익렬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서로 멱살을 잡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리고 김익렬의 후임으로는 강경파인 일본군 장교출신 박진경을 임명합니다. 일련의 과정은 제주도에 평화는 멀어져갑니다.
20. 대한민국은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인가요?
단호하게 말해서 아닙니다. 당황하셨나요? 우리는 분명히 유일합법 정부라고 배웠고 교과서에도 명백히 쓰여 있는데 아니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고요?
북한이 유엔에 가입했으니까 이젠 남북 모두 합법정부이며 대한민국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방정국 즉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를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반쪽짜리 정부가 세워지면 이는 남북 분단을 의미하며, 분단은 곧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그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연설문은 지금도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왜정 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바와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중략) 이 육신을 조국이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스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리고서 그는 1948년 4월 19일에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며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기에 친미분단세력은 그를 그대로 놓아두질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다음 해인 1949년에 친미분단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맙니다.
제주 4․3도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목적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하지만 5․10선거는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시되었고 여기서 뽑힌 의원들이 제헌 국회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했고 8월 15일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해방 후 꼭 3년 만에 38선 이남에 반쪽짜리 정부가 들어선 것입니다. 북한도 이에 질세라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여기서 대한민국은 유엔이 승인하고 그에 따라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원래 정부의 합법성이란 유엔총회의 결의를 필요조건으로 하지 않으니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유일’입니다. 유엔의 결의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아래 선거가 실시된 지역, 즉 ‘38도선 이남’에 수립된 유일 합법 정부라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엔 입장에서는 38도선 이북은 ‘공백’으로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남한에서의 유일 합법 정부’이지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 정부’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동굴속의 독백」(나남)을 참고 바랍니다.
21. 48년 8월 해주대회에 4․3의 주역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4․3은 북한과 관계 깊은 것 같은데요?
48년 8월 해주대회는 북한 정권 창설을 위한 집회입니다. 남쪽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차츰 진행되어 가자 북한과 남한의 좌파정당은 이에 대응해 독자적인 권력체를 창설하기로 하고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남한 360명, 북한 212명)을 선출하기로 합니다. 이에 따라 북한 대의원은 8월25일 북한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선출하기로 하고, 공개적인 선거가 불가능한 남한에서는 각 시군의 인민대표가 해주에 모여 대의원을 뽑기로 합니다. 이것이 해주대회이며 남한에서는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각 지역 대표 1,080명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제주에서는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등 6명이 참석했습니다. 당시 남한의 타 지역에서는 시군별로 대표자 5명에서 7명씩을 전국적으로 뽑아 1,002명이 참석했습니다. 해주대회에 할당된 남한 대표가 1,080명인데 그 중 78명만이 불참한 것입니다. 이 숫자를 인구비례로 따져볼 때 제주에서 파견된 대표 6명은 오히려 타지역에 비해 적은 숫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제주도만을 북한과 연계시키는 것은 논리의 오류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남북의 경계선이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남북을 오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점도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죠.
22. 4․3과 관련한 사망자 숫자는 어느 정도 되나요?
역사상의 통계는 결코 무의미하고 건조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 이동과 쫓김의 규모와 방법에 대한 기록입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백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고 지껄였다지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과 고통과 그리고 남은 유가족의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통계 이면의 삶과 죽음의 기록을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4․3과 관련된 사망자 숫자는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록마다 편차를 보이고 있으며 집단학살의 경우가 많아 그 죽음을 증거해 줄 사람조차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사령부 1949년 4월 1일자 G-2(정보)보고서에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5천명이 살해당했고, 가옥의 3분의 1이 파괴”되었다고 씌어 있습니다. 김종명의 「조선신민주주의혁명사」(일본 도쿄, 五日書房, 1953)과 김점곤의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박영사,1983)에는 6만 명으로, 김봉현․김민주 공편의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일본 오사카, 文友社)에는 7만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60년 민주당정부가 들어섰을 때 제주출신 고담룡 의원은 6만 5천~6만 8천 명을, 김성숙 의원은 5만 명을 주장하였습니다. 박용후의 「제주도지」에는 4만 명으로, 콩드의 「분단과 미국2」(사계절 편집부 역, 1988)에는 3만3천 명으로, 메릴의 「제주도 반란」에는 3만 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만근의 「광복 제주 30년사」(문조사, 1975), 제주도교육위원회의 「제주교육사」(1979), 강용삼․이경수의 「대하실록 제주 백년」(태광문화사, 1984) 1982년판 「제주도지」, 제주시의 「제주시 30년사」(1985), 김봉옥의 「제주통사」, 제주도경찰국의 「제주경찰사」(1990)에는 27,719명, 1993년판 「제주도지」에는 3만 명 안팎으로 씌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최소한 3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주도의회 4․3특위에서 신고접수 등을 통해 파악한 명단은 14,504명이고 이 중 토벌대 측에 의해 희생된 인원은 82.93%, 무장대 측에 의해 희생된 인원은 11.26% , 그 나머지는 분류 불능 및 기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희생이 한꺼번에 일어난 때는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이었습니다. 소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시기입니다. 토벌군은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또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습니다. 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인정,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이어 11월 17일에는 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점들은 이 시기 대량학살을 간접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군경의 자료에서조차 무장대 규모를 500 명 안팎이라고 했음에도 이처럼 많은 사상자가 난 것은 그 대부분이 양민학살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23. 4․3 당시 선포된 계엄령은 불법이라면서요?
4․3 전개 과정에서 계엄령만큼 제주도민들의 가슴 깊이 응어리진 용어도 드물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4․3증언 속에는 반드시 “계엄령 시절이니까...” 또는 “계엄령 때문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들은 심지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제도’ 정도로 계엄령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언 말미엔 ‘시국 탓’이라 체념하며 애써 분을 삭이곤 합니다.
그러나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초토화 작전이 진행될 때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습니다. 즉 계엄법은 계엄령이 선포된 지 1년 뒤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제정 공포되었던 것입니다. 제헌헌법 제64조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법률(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계엄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4․3 계엄법이 불법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극우 세력은 괴상한 논리를 펼쳤습니다. 정부를 수립하고도 아직 모든 법을 완전히 정비하지 못했음으로 미비한 법은 일제시대와 미군정 시대의 법을 존속시켜 활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일정 부분 타당합니다. 그러나 일제 때의 계엄령이 1948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인민에게 차별 및 압박을 가하는 모든 법률의 효력을 폐지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천황의 계엄령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독립된 국가의 수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또 아무리 일제의 계엄법을 근거로 삼든 혹은 이후에 제정된 계엄법을 근거로 삼든 “자식이 사라졌으니까 부모를 대신 죽이라.”거나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죽이라.”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부분이 희생자가 재판 한 번 받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것이기에 그 슬픔은 더 큰 것입니다.
24.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그런 학살을 저지른 심리는 어떤 걸까요?
4․3과 관련한 증언을 듣다보면 도무지 ‘광기’라는 단어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게임을 벌이고, 부모를 학살하면서 자식들에게 박수를 치게 하고, 장모와 사위를 발가벗겨 성행위를 강요하며 낄낄거리는 등 도대체 믿어지지 않은 증언들을 생생하게 듣게 됩니다.
이런 비인간적 정신 상태는 어디서 온 것일까? 서중석 교수는 ‘악질 친일파를 포함하여 지배층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도덕적 취약성과 그로 인한 극도의 편협성, 비인간성이 그러한 집단학살을 저지르게 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일제시대 때 저지른 반민족행위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시자에게 맹목으로 복종하고 자신의 동족에게 무슨 일이든지 저지를 수 있는 정신상태에 있었고, 그렇게 되도록 일제나 미군정에 의해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본군국주의를 분석한 한 연구가는 일본군은 양민을 학살할 때 특별히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태우고 범하고 죽이는 것이 규칙의 굴레에 묶인 군대의 임무에서 개인의 단독행동이 허용된 자유시간이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긴 일본군 하사관도 있습니다. 하시오 육군 중장은 “전투에서 이기고 난 후 또는 추격전 때는 약탈, 강도, 강간은 오히려 사기를 왕성하게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4․3당시 토벌대 지휘관들 대부분이 일제 때 일본군에서 초토화 작전에 단련된 사람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익렬 이후에 부임한 박진경 9연대장은 일본군 소위 출신, 후임인 최경록과 송요찬은 일본군 준위 출신, 홍순봉은 일제 경찰 출신, 최난수 역시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함병선 2연대장은 만주군 출신,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홍 대령 역시 일본군 출신이었습니다.
다른 분석으로는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 ‘섬놈’에 대해 가지는 멸시와 편견을 들 수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 심한 사투리를 쓰고, 자기네끼리의 독특한 의사소통구조를 갖고 있는 제주사람들을 ‘동족’이나 ‘내 집단’ 혹은 ‘우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이민족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과 함께 우월의식이 복합 작용하여 ‘자기보호’와 ‘타인멸절’의 행동논리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조적인 틀 속에서 그 심리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4․3 초기에 만약 미군정이 온건한 정책으로 사태를 수습했을 경우, 그 동안 악행을 저질러온 경찰과 극우단체의 책임과 처벌은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즉 4․3의 본질적 원인에 대한 규명과 이에 바탕한 합리적 대책을 수립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사건이 드러나지 않게 제압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군정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냉전의 상징인 한반도에서 남한 정부 수립에 대한 내부적 반대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증대될 것을 미군정은 두려워했던 겁니다. 이에 따라 강경 진압책을 취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의식도 클 것입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독일이 아닌 일본에 떨어뜨린 것도 백인 우월주의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4․3에서도 이러한 미군의 인종차별의식은 녹아있을 겁니다.
25. 4․3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고 하던데요?
근본적으로 4․3은 미군정 때 발생했기 때문에 미국은 4․3에 대해 무관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학자는 비록 4․3이 미군정 하에서 발생했어도 대규모 학살(48년 10월 이후)이 자행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48년 8월15일) 후의 일이므로 학살책임은 없다고 발뺌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주한 미대사 보스워스(Stenphen W. Bosworth)는 “미국정부가 제주도로부터 철수하고 있던 과도기적 시점, 그리고 철수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면서 “미국은 제주 4․3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공식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1999년 12월 21일)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미국의 책임은 명백합니다.
첫째, 4․3의 발단이 된 3․1 발포 사건, 고문치사 사건, 4․3봉기 등이 모두 미군정 하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딘 장군의 제주방문(48년 4월 29일)과 오라리 방화 사건(48년 5월 1일)을 계기로 평화롭게 해결되려는 분위기가 깨지고 강경토벌로 선회한 것, 합리적 해결을 주장한 김익렬 9연대장을 해임하고 강경파 박진경으로 대체한 점 등은 모두 미군정의 책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중산간을 초토화시키고 대학살을 가져온 ‘해안선 5Km 이상을 적지로 간주하라’는 작전은 미군장교가 애초에 권유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서청이 경찰과 경비대에 지원하게 된 것은 미군장교의 추천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미군은 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정적으로 미국의 책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양민학살은 이때 집중된 것인데 미군의 허용, 묵인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제주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에 대해 미군은 실제적․법률적 책임이 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26. 이제 4․3에 대해 올바른 이름을 붙여주세요.
1987년 민주화 물결이 일기 전만 하여도 4․3은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4․3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공산폭동’이라고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논리는 그 근거를 상실했지만 40년 동안이나 우리를 짓눌렀던 4․3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런 왜곡은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양민학살을 덮기 위해 꾸며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왜곡만이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극단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더욱 굳어졌고 그로 인해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란 딱지 붙이기는 자신들의 비인도적 악행을 모두 감출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4․3은 제주사회의 특수성과 함께 해방 정국을 맞은 한반도의 모순이 집약되어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대한 명명도 총체적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먼저 이 사건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4․3은 해방 정국하의 통일조국 건설운동입니다. 그리고 완성 되지 않은 해방을 참된 해방으로 완성시키려 한 민족해방운동입니다. 봉기 목적에 잘 드러나 있듯이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가 가장 중요한 투쟁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지도부를 제외한 대다수 일반 도민들이 실제 높은 정치의식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주도민들은 친일세력을 감싸고 지켜주며 이들을 활용하는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독립운동가 출신이 주축을 이룬 인민위원회 측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됩니다. 때문에 세련된 정치의식은 없었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어느 편에서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4․3은 강요된 저항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조건에서 이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구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봉기한 것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약자는 평화를 사랑하고 지배자는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이 역사의 진리입니다. 북한(남로당)의 사주였다는 주장은 이미 그 근거를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단순히 피동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천박한 역사인식을 드러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4․3은 제주민중의 수난사입니다. 4․3을 역사적 사건이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실로 3만 명이란 숫자는 통계 수치로는 간단할 지 모르나, 한 사람 한 사람 그 가족의 아픔과 함께 가슴으로 다가간다면 이러한 대량학살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자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모한 무장투쟁 노선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물론 올바른 지적입니다. 그러나 지도부의 소영웅주의적 행태와 민중들의 자발적 투쟁을 동일하게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패배한 역사였기에, 그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구조를 무시하고 4․3 봉기를 비난만 한다면, 과연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전봉준과 농민군은 어떻게 평가되겠습니까? 수난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맥 없는 넋두리나 양비론이 아니라 대량 학살을 저지른 반인륜적 세력을 뚜렷하게 찾아 밝히는 일입니다.
도민의 희생 만에 주목한 수난사적 시각으로 보자면 ‘사태’나 ‘사건’으로 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의 예를 들었듯이 역사의 진행과 시대의 요구를 함께 고려한다면 제주 민중들의 적극성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주어져야 합니다. 즉 자신들을 짓누른 한반도의 모순, 그것이 구체적 삶의 고통으로 다가왔던 상황에서 그 모순을 깨치고자 스스로 저항했던 행위를 고려할 때, ‘민중 항쟁’이란 개념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역사를 보는 시각 즉 사관(史觀)은 시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때에는 이 ‘민중항쟁’론이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상성’에 대한 주목과 ‘거대담론’ 기피 현상, 포스트모던의 시대 분위기는 탈정치적 사조를 만들었고, 이런 경향은 4․3을 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원인, 배경보다 피해 그 자체, 고통 그 자체에만 주목하는 흐름이 일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수난사적 입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 학습은 거시와 미시의 종합 즉 사회 구조와 개인의 구체적 삶을 함께 조목조목 아울러 살피는 눈으로 다가갈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27. 4․3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4․3은 그 동안 제주 도민들의 가슴에 가장 큰 상처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대학살극이 일어난 것도 60년이 넘었습니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이제는 서로를 용서하고 화합할 때가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냉전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학살에 직접 나섰던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피해자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명령 때문에 사람을 죽여야 했고, 억지로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고,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아야 하는 이 모든 고통은 그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 가해자는 미국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학살을 명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갈등을 풀기 위해서, 그리고 이 같은 비극이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있었던 사실은 사실 그대로 모두 밝혀져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로 색칠을 한다든가, 억지 정당성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덜 아문 상처를 후벼파는 아픔이 있더라도 후세를 위해서는 진실은 진실 그대로를 남겨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밝히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또, 억울하게 죽어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넋을 달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런 진실규명과 화해를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아 실천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4․3과 관계된 여러 유적지는 제대로 보존하여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잊은 겨레에게는 앞날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