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휴전회담 대표의 얼굴에 똥파리가…그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북한군과 중공군, 같은 공산주의자면서 왜 그렇게 달랐을까
(6) 중공군은 강했다
‘매복’에 강했던 중국 군대
중국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은 쉽게 패하지 않았다. 그래서 1937년 일본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던 무렵에는 “일본군은 결코 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일본 군대 스스로가 그런 말을 했고, 번번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중국의 군대도 그런 속설에 전전긍긍하며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일소하는 데 꽤 큰 역할을 한 게 1937년 벌어진 ‘평형관(平型關) 전투’다. 이곳은 예로부터 군 요새가 들어섰던 험지(險地)다. 높고 험한 준령(峻嶺) 속에 구불구불한 길이 발달했고, 공격하는 공자(攻者)에 비해 방어하는 하는 방자(防者)에게 아주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곳 일대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으로 나서서 전투를 벌였다. 대오를 이끈 것은 평형관의 험로에 진출한 공산당 팔로군 소속 115사단의 린뱌오(林彪)였다.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병력은 모두 10만 명에 달했으나, 이곳에서 승리를 거둔 115사단 병력은 1만 2000명이었다고 한다.
-
- 중국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평형관.
이 전투 결과로 일본군 수송부대 병력 1000여 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다수의 무기와 차량도 빼앗겼다고 한다. 이 전투의 큰 특징은 매복(埋伏)이었다. 일본군 수송 병력이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폭우(暴雨) 등 열악한 기상조건에도 불구하고 팔로군이 먼저 평형관 동남 쪽에 매복하는 데 성공했다.일본군 수송 대열 후미가 포위권에 들어올 때까지 중공군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반나절에 걸쳐 공격을 벌여 일본군에 막심한 피해를 안겼다. 중공 팔로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나, 어쨌든 이 평형관 전투로 인해 ‘불패(不敗)의 군대’로 인식됐던 일본군의 명예는 크게 추락했다.
-
- 평형관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중국측의 유화작품
1950년 10월 청천강을 넘으며 ‘혹시 중공군이 참전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은 바로 이 평형관 전투다. 중국 군대는 그런 ‘매복’의 이미지와 함께 내 뇌리에 남아있었다. 제 것은 철저하게 감추면서 남을 시야에 고스란히 노출시킨 뒤 공격을 가하는 그런 군대 말이다.중공군을 실제 이끌었던 덩화평형관 전투를 이끌었다는 린뱌오는 나와 인연이 없다. 중국 지도부가 중공군의 한반도 전쟁 참전을 결정하던 무렵 스스로 전쟁 지휘를 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사람 기록해 둘 인물이 있다. 펑더화이(彭德懷)를 보좌하면서 실질적으로 중공군의 한반도 참전을 직접 지휘했던 덩화(鄧華)라는 인물이다.
-
- 6.25전쟁 때 중공군 제1 부사령관으로 참전해 대규모 공세 등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한 덩화.
그는 펑더화이 밑의 2인자였다. 중공군 제1 부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1910년 출생으로 나보다는 나이가 열 살 위였다. 그 또한 중공군 소속 고위직 장성들이 대개 그렇듯이 아주 일찍이 군사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는 17~18세에 이미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세력에 가입해 군사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에 따른 항일전쟁, 그 뒤에 벌어진 국민당과의 수많은 내전에서 다양하게 전쟁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1937년 벌어진 평형관 전투에도 115사 정치 주임 신분으로 참여했다.전쟁 중에 적장(敵將)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덩화는 나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한반도의 그 참혹한 전쟁이 크게 밀고 밀리는 긴박한 다툼을 다소 벗어난 때였다. 나는 1951년 7월 벌어진 최초의 6.25전쟁 휴전회담 한국 대표로 개성에 갔다. 앞에서 먼저 소개한 내용이다.그 때 공산 측 대표는 아군 측 대표와 동수(同數)인 5명이 나왔는데, 중공군을 대표해 회담에 나선 이가 바로 덩화였다. 그는 나중의 중공군 측 자료에도 자세히 나와 있듯 아주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쓰며 전쟁을 이끌었던 중공군의 실제 지휘관이었다.
-
- 첫 휴전회담 때의 공산측 대표. 왼쪽부터 셰팡, 덩화, 남일, 이상조, 장평산.
휴전회담 직전까지의 전쟁 국면은 이 자리에서 여러 번 소개했다. 중공군은 한반도 참전 직후 아주 빼어난 매복 작전을 선보였다. 그들의 매복에 걸려 미군을 비롯한 아군의 희생이 참담할 정도로 컸다. 막후에서 그런 모든 중공군 공세를 실제 계획하고 집행했던 사람이 덩화였다. 그런 중공군의 공세가 리지웨이의 강력한 반격으로 꺾인 뒤 첫 휴전회담 자리가 마련됐다.나는 개성에서 열린 공산 측과의 첫 휴전회담에서 묘한 기분에 젖었다. 내 나름대로의 관찰에서 오는 뚜렷한 인상 때문이었다. 북한군을 대표한 사람은 남일과 이상조, 그리고 장평산이었다. 중공군 쪽에서는 덩화와 함께 참모장인 셰팡(解方)이 나왔다. 다섯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그들은 국적이 다를 뿐 생각과 관념은 다를 게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 중공군 회담대표 셰팡. 일본 육사 출신의 참모장.
그러나 테이블에 앉았던 북한 대표와 중국 대표는 아주 달랐다. 공산 측 수석대표는 남일이었다. 당시 그가 회담 테이블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우선 골초였다. 늘 담배를 피워 물고 험악한 인상을 지었으며, 욕설에 가까운 발언으로 상대를 윽박지르기에 골몰했다.규정 때문에 회담 테이블에서의 발언은 양측 수석대표만 가능했다. 아군 측에서도 터너 조이 제독이 수석대표로서 발언했다. 나머지는 모두 그냥 앉아서 상대방을 마주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북한 대표와 중국 대표는 분위기와 태도 등에서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차이남일은 아마 정치적인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회담 수석대표로서 정치적인 발언과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던 부담 말이다.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상조와 장평산도 남일과 같은 분위기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이상조는 내 정면에 앉아 늘 나를 째려보며 이상한 동작 등으로 신경전을 걸어왔다.나를 자극하려고 계속 애쓰는 그에게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어느 날 아주 자극적인 행동을 보였다. 나를 한참 째려보더니 갑자기 종이에다 무엇인가를 끼적인 뒤 그 종이를 나를 향해 들었다.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속으로는 우선 화가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기껏 상대를 자극하려는 의도를 저런 유치한 방식으로밖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싶었다. 나는 잘 참는 성격이다. 그런 인내력 덕분인지 몰라도, 보잘 것 없는 국량(局量)으로 테이블에 버젓이 대표 자격으로 나와 있는 그가 가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나는 이미 펴낸 회고록에서도 이상조를 자세히 묘사한 적이 있다. 잠시 소개를 하자면, 그렇게 도발적이었던 이상조의 얼굴에 어느날 하루 큰 똥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파리는 이상조의 얼굴을 이리 저리 기어 다녔다. 그러나 남을 압박하려고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이상조는 파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
- 6.25 60주년인 2010년, 군사전문잡지 플래툰의 군사자료 수집가인 이준규씨가 공개한 6.25 전쟁 휴전회담 관련 사진. 1951년 11월 30일 판문점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단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하워드 터너 미 공군 소장, 한국 육군 이형근 소장, 회담 수석대표인 터너 조이 미 해군 제독(중장), 알 리비 미 해군 제독(소장), 헨리 호데스 미 육군 소장, 알레이 버크 미 해군 제독(소장).
그 파리는 몸집이 꽤 컸었다. 그래서 이상조 얼굴에 기어 다닌 파리의 모습은 아군 측 대표 다섯 명의 눈에 다 들어왔던 모양이다. 회담이 끝난 뒤 자유마을로 돌아온 우리 대표단의 최고 화제는 ‘이상조와 파리’였다. 모두들 똑같이 생각했던 모양이다. ‘공산주의 북한은 지독하다. 가려움과 더러움을 그렇게 참아가며 독한 인상 짓기에 골몰하다니…’라는 느낌이었다. 터너 조이, 알레이 버크 제독 등 아군 회담 대표 등은 이후에도 열심히 당시 상황을 입에 올렸다.덩화와 셰팡은 그들과 달랐다. 그들 역시 말이 없었으나, 특유의 웃음을 입가에 짓고 있었다. 우리 회담 대표 중 일부는 그를 ‘차이니스 스마일(chinese smile)’이라며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미군을 비롯한 아군 진영을 공격해 몰살시키기 위한 싸움을 지휘했던 제1 부사령관답지 않게 덩화는 신중한 표정으로 제 속을 꽁꽁 감췄다.셰팡은 아군의 로렌스 크레이기 미 극동공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사전에 내게 배운 중국어 인사말 “니하오(你好)?”를 건네자 아주 반갑다는 듯이 웃으면서 “하오(好), 하오(好)”를 연발했다. 그리고 특유의 차이니스 스마일을 입가에 걸치면서 회담에 임하곤 했다.남일은 매일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상조는 변함없이 도발적인 얼굴로 나를 째려봤고, 그 옆의 장평산은 딱딱하고 험악한 인상으로 앞만 열심히 바라봤다. 그에 비해 덩화와 셰팡은 회담장 분위기를 ‘회담장처럼’ 이끌어가는 데 열심이었다. 이 두 그룹의 공산주의자들은 왜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일까.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휴전 첫 회담은 진전이 없었다. 두 달 여 동안 회담에 참석했던 내 머리 속에는 늘 그 궁금함이 줄곧 맴돌았다.<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