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똘레랑스’는 영어로 toleration, 한자로 寬容, 불어로 tolérance 이다.
앙가주망(engagement)과 함께 늘 붙어 있는 말이다.
똘레랑스는, 세 번의 극심한 갈등 끝에 탄생했다.
첫 번째는 종교개혁이다. 과거, 프랑스는 유럽에서 스페인과 함께 카톨릭 국가였다. 종교 개혁과 함께 신교의 탄생은 프랑스를 극한의 갈등으로 몰아 넣었다.
왕권이 바뀌고 전쟁이 일어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수습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 갈등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한계와 이해와 용서의 단어가 탄생했다. 똘레랑스다.
두 번째는 프랑스 대혁명이다.
왕의 도우미였던 부르주아들이 평등을 외치며 개혁을 부르짖는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단두대에서 아름다운 왕비 앙뚜와네뜨도 참수 당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극심한 갈등을 해결한 것이, 똘레랑스였다.
세 번째는 68 혁명이다.
68 혁명은 전 세계 잘 나가던 제국주의 강대국 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학생운동과 적군파로, 미국은 베트남 반전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박정희라는 위대하신 독재자 때문에 68 혁명의 거대한 파도가 치지 않았다.
일부 민주화 인사들만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심지어 프랑스 유학파 출신 최악의 살인마 캄보디아의 폴포트도 영향을 받았고, 내가 존경하는 베트남의 호치민 조차도, 68 혁명의 위대함에 자극을 받았다.
똘레랑스가 한국에 겨우 알려진 것이, 홍세화의 책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였다.
얼마 전, 여당의 대표를 하다가, 권력 싸움 끝에 밀려난 이준석이 방송에 나와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저런 무식한 인간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를 했다니.
어린 친구가 권력에서 밀려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나, 만약 프랑스 였다면 당연하게 시민들은 받아주었을 것이다.
똘레랑스라는 공공의 사회적 관용 정신이다.
장애인들의 편의는 우리 사회의 공공의 영역이다.
사법부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데모를 법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판사들이 대부분이다.
똘레랑스는 법의 잣대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용과 양심의 눈으로도 바라 보아야 한다.
법은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규칙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처벌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법은 공화국을 만들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이 전부인줄 알고, 분서갱유로 권력을 완성하고, 그것 때문에 20 년 만에 멸망했다.
권력은 법을 애용한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당하기도 한다.
툭하면 고소 고발이다. 여당도 야당도 마찬가지다.
‘법대로 하라’ 말은 말은 결코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
약자를 위해, 또는 정의를 위해 법을 만들지만, 사실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강자다.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강자가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왜냐하면 강자가 법을 만들었으니까.
억울한 약자의 갈 곳은 어디인가. 무한의 팔뚝질만으로는 너무 힘겹다.
법도 약자를 도울 수 없다.
법을 최대한 활용하는 강자들 틈에서, 그들에게 작은 목소리라도 전하기 위해 약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앙가주망’이다.
앙가주망(engagement)은 ‘구속’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사르트르에 의해 ‘참여’의 의미가 더해진다.
약자들은 함께 모여서 연대하고 참여 할 수 밖에 없다.
‘똘레랑스’와 ‘앙가주망’은 약자들을 위한. 진정한 共和國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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