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의정과 대면하고 앉아서 얘기를 나누던 왕이 피곤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영의정이 아니기에 한소리 거들었다.
" 요즘 전하의 용안에 수심이 가득하시옵니다. "
" 흐음. "
" 혹여 세자 저하와 대군마마의 혼사때문에 그러시옵니까. "
" 짐은 자다가도 그 생각만하면 잠을 이룰수가 없습니다. "
" 마음을 평안히 하시오소서. 혼사 문제로 전하의 옥체가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
왕은 수심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영의정을 내려다 보았다. 언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옆에서 큰 힘이 되어주는 영의정은 왕에게 버릴 수 없는 충신중에 한 사람이었다.
" 짐은 영상과 사돈을 맺고 싶습니다. "
" 마,망극하옵니다. "
" 세자든 대군이든 사돈을 맺고자 합니다. "
" 전하. "
" 짐의 생각이 끝나면 말해줄 것입니다. "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영의정의 생각에 한 걸음은 다가온 샘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군이냐 세자이냐에 달려있었다. 영의정이 생각한바로는 이미 왕의 마음이 세자와 수희를 엮어주려함이 보였다.
##
정자에 앉아서 주변을 살피던 수한이 어느새 들판을 쳐다보며 넋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허공을 쳐다보니 부슬거리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를 바라보다가 혹시나 수희가 이 비를 맞고 오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었다. 그 걱정에 자리에서 일어난 수한이 까치발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행인만이 간혹가다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 이것을 놓고 가야겠군. "
수한은 도포 자락에 넣어 두었던 하얀색를 꺼내었다. 궐에서 나오기 전에 수희와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적어서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꽂아둘 곳을 한참을 찾아다니다가 걸어와서 딱 보이는 곳에, 그러다고 한 눈에 보이진 않는 그런 곳 사이에 넣었다.
" 오늘은 그대를 못 볼 모양입니다. "
혼잣말을 되풀이하던 수한이 뒷짐을 지고 한참을 정자 앞에서 서성이며 비를 바라보았다.
##
처소에 앉아서 붓을 들고, 글 귀를 적어 내려가던 수희가 다과를 가지러간 달래가 안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돌렸다. 달래는 다과상을 내려 놓으며 머리에 묻어있던 물을 털어냈다.
" 밖에 비가 오느냐? "
" 예. "
" 언제부터 왔느냐. "
그러더니 수희는 달래를 재치고, 방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보았다. 어느새 부슬거리던 빗방울이 재법 굵어져있었다.
" 왜 그러세요? "
" 오늘 같은 날은 나오시지 않았을게야. "
" 누가요? "
" 나왔다면 큰 일이 아니냐. 이 비를……. "
"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에요. "
달래는 자신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던 수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모르는 수희는 비를 보며 불안해하고, 수한을 걱정하며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다 손바닥을 내밀어 그 비를 손바닥 안에 내리게 만들었다.
" 이러다 고뿔에 걸리십니다. "
" 이 비를 맞으셨다면 그러실게지. "
" 오늘 누굴 만나기로 하셨어요? "
" 아니. "
" 그런데 대체 누굴 걱정하세요? "
" 맞을 지도 모르겠구나……. "
수희의 머릿속에는 온통 수한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라리 오늘 나가서 약속 장소에 그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왔더라면 마음이 이토록 불편치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도 오는데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수한이 괜한 헛수고를 했을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못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도대체 제가 왜 이렇게 당신께 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까닭을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또 머릿속에 당신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
혁은 짙게 내리워진 어두워진 방 안에 앉아 서책을 읽다가 문득 오늘 낮에 궁녀들의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 떠올랐다. 영의정의 여식인 수희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왕자의 혼사 때문일까, 요즘들에 궐 안에 신료들의 여식들에 대한 소문들이 무수히 떠도록 있었다.
[ 영의정의 여식을 본 자 들이 하나같이 절세가인이라 칭한다지? ]
[ 응, 그 미모가 가히 양귀비를 능가한다드라. ]
손에서 서책의 자락을 내려 놓으며, 어릴 적 자신이 보았던 수희를 떠올려보았다. 아무래도 그 모습 그대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곱게 자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결에 혁과 영의정이 사위와 장인의 사이가 될 것이라는 말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말았다.
" 밖에 누구 없느냐. "
" 예. 저하. "
내시가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형님께선 입궐을 하셨느냐? "
" 예, 그러하온데……. "
"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
내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군을 뫼시는 상궁에게 전해 들은 것을 고해올렸다.
" 무어라? 형님께서 비를 맞고 돌아오셨다? "
" 예. "
" 고뿔에 걸리시면 어쩌시려고. 의원은 들었느냐? "
" 상궁과 나인들이 그러기를 청했지만 한사코 거절을 하시며 잠자리에 드셨다하옵니다. "
" 내일 아침 형님께 갈 것이니 의원들을 준비해놓고 있거라. "
" 예. 저하. "
" 그만 나가보거라. "
" 예. "
내시가 나가자 혁은 형님인 수한이 밝은 얼굴로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여 돌아온 것은 아닌가 염려되었다. 언제나 두 형제는 서로의 일을 자신의 일 처럼 여기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수희는 출타를 할 준비를 마치고, 처소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 내려와 신을 신고 있을 때 달래가 하품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 아침 일찍부터 어딜 가세요? "
" 갈 곳이 있다. "
" 문안 인사도 여쭙지 않으시고요? "
"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
수희가 집을 나서자 뒤늦게 달래도 그 뒤를 따라 대문을 열고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아직은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새벽의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구름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수희는 웃으며 새벽의 풍경을 눈여겨 보았다.
" 대체 어딜 가세요? "
" 다 왔다. "
달래는 정자가 있는 곳을 보고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 감탄을 했다. 이곳에 이런 곳이 있는줄은 달래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수희는 정자로 걸어가 그곳을 크게 눈동자를 굴리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가 수한이 앉아있었던 자리에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 이런 곳은 어찌 아셨어요? "
" ……. "
수희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수한과 서 있었던 곳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장난끼 가득한 눈으로 웃어보이던 그를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 또 마냥 웃고 계시네요. "
"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 "
달래가 그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 쪽 기둥의 틈이 벌어진 곳으로 손가락을 뻗더니 그 속에서 하얀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 어? "
" ? "
접어진 종이를 펼치자 작은 글씨의 한자들이 나왔다.
" 아가씨. 쇤네는 모르겠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
달래가 그 종이를 수희에게로 건네주자 앉아있던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눈으로 한 자씩 읽어갈 때마다 입술이 웃음을 또 다시 참지 못하고 미소짓고 있었다.
" 뭐라고 적혀있습니까요? "
" 이 곳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조심히 다루라 적힌 것이다. "
" 아. "
그러더니 달래는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가버렸다. 달래가 가자 수희는 내려 두었던 종이를 다시 들어서 한 손으로 조심히 글자를 쓰다 듬었다. 반듯하고, 또박한 한자들이 수한을 닮은듯 보여서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내가 없을 때 그대가 왔서 혹여 쓸쓸해할까싶어 몇 자 적어두고 갑니다. 오늘은 먹구름이 가득한대 왜이리 화창히 보이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곳에서 난 그대와 있었던 일을 회상하다 갑니다.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지내십쇼.
몇 번을 읽고, 또 읽다가 반듯하게 처음 모양 그대로 만들어서 소매 속에 조심히 넣었다. 정자의 주변을 살펴보고 돌아온 달래가,
"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아가씨. "
" 응. 그러자. "
정자를 벗어나 마을 어귀로 들어설 때쯤, 수희는 문득 예전에 달래에게 들었던 소리가 생각이났다.
" 그 전날 월이라는 여인은 어찌 되었느냐? "
" 대감마님이 워낙 고집이 세신 분이셔서 그대로 혼례를 치루셨답니다. "
" 상사병에 걸린 여식을 시집 보냈단 말이냐? "
" 예. 어찌나 불쌍하신지……. "
" 너무도 가엾질 않느냐…어찌 살아갈꼬……. "
" 그 아이 말로는 조선 천지에서 그리 슬픈 얼굴을 한 신부는 보지 못했답니다. "
" 저런……. "
" 아마 저희 대감마님이셨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
그 말에 수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정면을 돌렸다. 달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만약 영의정인 아버지였다면 그 사내와 맺어주었을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리 억지로 혼례를 강행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늘 수희의 행복을 우선시 여기는 아버지였기에-,
##
혁은 상궁들에게 약을 한 첩 지어서 수한의 처소 앞에서 몇 시간째 서 있었다. 조용하던 처소에서 상궁이 나오자 혁이 반가운 얼굴이 되어 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물었다. 대답을 들은 혁은 뒤에 서있던 상궁에게 약을 받아들고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 대군마마, 세자 저하 드셨사옵니다. "
" 뫼시거라. "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혁의 모습이 드러나자 수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혁을 맞이했다.
" 나인에게 들으니 일찍부터 왔다고 들었다. "
" 예. "
"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
" 형님께서 주무시질 않으셨습니까. "
혁이 웃으며 그리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 참, 어제 비를 맞고 입궐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
" 궐 안의 소문은 바람을 따라가는지 참으로 빠르구나. "
" 형님도 참, 걱정이 되어 몸을 따듯하게 하는 탕약을 지어왔습니다. 드십쇼. "
" 고맙다. "
수한이 웃으며 사발을 받아서 한 입에 모두 마셨다.
"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
" 밖을 나갔다가 비를 맞고 돌아온 것이다. 걱정 말거라. "
" 예. "
" 나 때문에 강론에 늦겠구나. 서둘러 준비하마. "
"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형님. "
" 일국의 세자 저하를 기다리게 해서야 쓰겠습니까? "
두 사람의 농이 다시 시작되며 수한의 처소에 웃음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
입궐을 하여 왕과 신료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마치고 나온 영의정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궁전 상궁을 발견하고 헛기침을 하며 다가가 맞이했다. 상궁은 중전이 만나기를 청한다며 영의정을 교태전으로 데려갔다. 교태전에 당도하여 상궁이 영의정이 왔음을 알리자 안에서 들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발이 내려져 있고, 그 건너편으로 흐릿하게 중전의 모습이 보였다. 영의정은 절을 올리며 중전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 엄 상궁. "
" 예, 중전마마. "
" 발을 올리시게. "
" 예. "
옆에 있던 두 상궁이 영의정과 중전 사이에 내려져 있던 발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흐릿하던 중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중전으로 간택될 당시 미색이 조선 최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 영의정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리 불렀습니다. "
" 말씀하시오소서 중전마마. "
" 주상 전하께 세자와 대군의 혼사 문제를 거론치 말아주세요. "
" 예? "
놀란 눈이 된 영의정이 고개를 들어 중전을 쳐다보았다.
" 전하께오서도 그 일로 많이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다른 말씀이 있기 전까진 어떤 신료들도
그 문제에 대해서 거론치 말아주세요. "
" 하오나 중전마마. 이제 더는 뒤로 미룰 수가 없는 일이옵니다. "
" 미루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전하의 어명을 기다려달라는겁니다. "
" ……. "
" 모든 신료들이 영의정의 말을 전하의 말보다 더 잘 따를것이라 생각되어 영의정을 부른 것입니다. "
" 망극한 말씀이시옵니다. "
"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니 이 사람의 말을 따라 주세요. "
" ……. "
" 아시겠습니까. 영상? "
"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중전마마. "
" 고맙습니다. "
" 망극하옵니다. "
중전은 영의정을 한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자는 어쩌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신료들은 영상의 말을 곧 어명이라 생각하며 모두들 따르고 있었다.
저 자를 수한과 맺는다면 혹 세자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수도 있음이야.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
궐에 어둠이 찾아들자 대전에 앉아서 하루 종일 상소문을 읽기에 바빴던 왕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전네 내시에게 중궁전으로갈 것이라는 전갈을 내려 놓았었다. 밖으로 나가자 왕의 연이 당도해 있었다. 그 곳에 올라 앉아 중궁전에 당도할 때까지 눈을 감고 쉬고 있던 왕이 내시의 말 소리에 눈을 떴다.
" 중전마마. "
" 어찌 나와계시오. "
중전이 교태전 앞에 나와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연에서 내린 왕은 중전과 함께 나란히 교태전에 있는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 중전도 혼사 문제로 수심이 깊으신 모양이오. "
" 전하만 하겠사옵니까. "
"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구소. "
" 영상은 권력이 너무도 막강하여 세자와 대군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염려되옵니다. "
" 흐음, 중요한 것은 대군과 맺어진다면 세자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이란 것이오. "
" 예? "
왕도 중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나, 영상 말고도 높은 관직을 갖고있는 신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수한과 영상을 이어준다고 해도 세자에게 큰 피해는 가져다 주지 않을것이었다. 이미 왕의 마음이 세자와 영상으로 기울었음이었다.
" 허나, 대군은 종친이 되어 사가 밖으로 나간다면 위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 그렇기에 더더욱 정치를 모르는 자와 맺어줘야 합니다. "
" ……. "
충격을 받은 중전은 이미 왕은 수한에게 어떠한 힘도 배경도 만들어주지 않으려 마음 먹었음을 눈치챘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 하오나 대군은 전하와 신첩에게 장자이옵니다. 어찌 힘없는 자와……. "
" 알고 있소. "
" 신첩은 대군이 종친이 되어 잘못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옵니다. "
" 중전의 마음을 짐이 어찌 모르겠소. 허나, 이것은 대군이 자청한 일이오. "
더는 어떠한 말도 할 가치가 없었다. 이미 결심이 선 왕에게 말해봤자 같은 말만 반복하는 꼴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중전의 눈동자가 어둠속에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너를 지켜줄 자는 영상뿐인데 어쩌면 좋느냐. 이 어미가 네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
다음날.
강론을 듣고 돌아온 수한은 처소에 앉아서 도포와 갓을 꺼내어 놓고, 궐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군의 지휘에 맞는 옷을 벗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갓을 쓰려는데 밖이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 나가려 할 때,
" 중전마마 납시셨사옵니다. "
그 소리에 수한이 갓을 치울 틈도 없이 처소 문이 열리며 중전이 안으로 들어섰다. 수한이 미처 치우지 못한 갓과 수한의 옷차림을 보고 중전이 화가났는지 수한을 흘깃 한 번 쳐다보며 자리로 와 앉았다.
" 또 나가느냐? "
" 예. "
" 예? 예라고 했느냐! "
" 어마마마. 소자가 한 두번 나가는 것도 아니온데 어찌 이리 역정을 내십니까. "
" 대군께서 이러고 다니시는 동안 세자는 전하께 모든 것을 얻고 있느니라! "
" 또 그 얘기시옵니까. "
수한은 매번 같은 소리에 귀에 딱쟁이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중전은 수한의 반응은 물리고, 매번 찾아와 같은 소리만을 반복했다.
" 이제는 혼인을 해야할 나이인데 어쩌자고 계속 이러고 다니는 것이냐. "
" ……. "
" 이 궐이 대체 무엇이 그리 답답하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나가는 것이냐! 세자를 보거라. "
" ……. "
결국, 세자와 비교하는 수위까지 건너고 말았다.
" 세자와 대군이 다를 것이 무엇이라고 어찌 이리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냐! "
" 다르기에 소자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옵니까. "
" 네 진정! "
" 소자를 이해해달라고 간청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
" 대군! "
이번에는 수한이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 중전의 말을 듣고만 있던 수한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듯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토해냈다.
" 소자가 원하는 삶은 이런 꽉 막힌 궐 안에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신료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무거운 소임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아니옵니다. "
" 무어라? "
" 제가 가져야 당연한 것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 아버지가 임금이라고 어머니가 중전이라하여 그의 아들이
똑같이 임금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혁인 누구보다 세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잘 해내고 있으니
소자에게 더는 이러지 말아주십쇼. "
" 대군! "
" 어마마마께서도 이젠 소자가 빼앗긴다고 생각치 마옵소서. 이것은 마땅히 세자가 누려야 할 것들입니다. "
" 네,네 지금!! "
" 허면 이만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
" 가만 있거라! "
" …죄송합니다. "
수한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갓을 들고 자신의 처소를 나왔다. 문이 닫히자 뒤에서 중전이 역정을 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 소리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신을 신으며 갓을 쓰고, 턱 아래로 내려온 끈을 단단히 묶었다.
" 형님! "
" ……. "
" 이리 가시면 안 되십니다. "
" 네가 어마마마께 들어가 보거라. "
" 형님! "
" 더는 듣고 싶지 않구나. "
수한은 자신을 붙잡는 혁의 손길을 뿌리치며 거칠게 걸으며 궐을 벗어났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답답함과 서운함은 도무지 수한을 진정시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처소에 앉아서 경대를 보며 댕기의 끈을 다홍색의 댕기로 바꾸고,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요리조리 살피다가 달래를 불러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저고리의 옷고름을 단단히 묶고 나서 달래를 쳐다보며,
" 괜찮니? "
" 예. 고우십니다. "
" 그럼 되었다. "
활짝 웃어보이던 달래에게로 걸어가 달래가 들고 있던 자신의 장옷을 빼앗아 들었다.
" 나갔다 오마. "
" 쇤네를 두고 가시게요? "
" 금방 올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
" 아,아가씨. 그러다 마님께서 아시면 쇤네가……. "
" 그럼 들키지 않게 옆집 순이네라도 다녀 오거라. "
" 대체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
수희는 뒤에서 칭얼거리던 달래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장옷을 펼쳐 머리 위로 올려 빼꼼히 고개만 내밀었다. 언제나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거리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수희는 바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습니까. ]
수한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태연하게도 수희에게 말을 붙이던 그의 모습,
[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오? ]
아무렇지도 않게 처음 본 여인의 이름을 물어보던 그의 얼굴, 배려깊었던 미소까지 모두 하나하나 어제 있었던 일 처럼 또렷하게 기억이났다. 그를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정자에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 어?……. "
흐릿하게 누군가가 정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레임과 반가움에 발걸음이 빨라져서 어느새 정자 앞에 당도해 있었다. 앉아있던 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희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옷을 어깨로 내렸다.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천천히 걸으며 서로에게 걸어갔다.
" 홀로 다니는 것은 마음에 걸립니다. "
" 그 전날 그들에게 그리 으름장을 놓으셨는데 설마하니 또 그러겠습니까. "
수희를 향해 웃어주는 미소가 다른 날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수희가 그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조심히 물었다.
"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
" 그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겁니다. "
"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
수희가 조심히 그에게 물어오자,
" 그대라면 대답해 줄 마음이 있긴 있습니다만. "
" 많이 좋지 못한 일입니까? "
" 어머님과의 사소한 다툼이었을 뿐 그대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
" 아, 예. "
그제야 수희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정자에 머무르지 않고 근처를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했다. 농부들이 모내기를 심으며 그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처음보던 수희는 걸어가던 수한을 두고 멈춰서서 농부들의 모습을 보았다. 진흙이 묻고, 땡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 모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
" 책에서 본 적은 있었습니다. "
" 오래 지나지 않아 벼가 되어 황금 들녘을 만들 것입니다. "
" 황금 들녘이요? "
" 예. 이 논들이 모두 황금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보여줄 것입니다. "
수희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지만 본 적이 없기에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 그 때도 그대와 이 곳을 거닐것이니 보여드리겠습니다. "
" 꼭 보고 싶습니다. "
" 그럴 것이니 걱정마십쇼. "
그 말에 수희는 소리없이 고개를 돌려 수한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셨는지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으나 입은 눈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 그런데 이리 나와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
"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
" 정말입니까? "
" 예. 자주는 아니지만 이젠 언제든 제 의지대로 나올 수 있습니다. "
" 듣던 중 반가운 소립니다. "
수희가 그의 말에 예쁘게 웃어주었다. 그를 보고 걷는 통에 바닥에 있던 돌을 보지 못한 수희가 그만 그 돌부리기 걸리고 말았다.
" !! "
" 어?! "
놀란 수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따듯한 체온에 눈을 떠보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일까-,
" 괜찮습니까? "
" ……. "
수희는 수한의 품에 꼭 안겨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수한을 놀란 눈이 되어 쳐다보는 수희는 말 없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그렇게 서로를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도 적나라하게 서로에게 전해졌지만, 서로에게 전해지는 따듯한 체온이 그 소리보다 설레게 만들었다.
##
언제나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곳은 큰 길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두 사람은 이 앞에 설 때면 아쉬움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수희가 어깨에 내려 놓았던 장옷의 끈 자락을 두 손으로 잡은 채,
" 참,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
" 말씀하십쇼. "
" 저……. "
" ? "
수한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이며 수희의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성함을…알고 싶습니다. "
" 아……. "
부끄러웠는지 수희는 눈을 크게 뜨며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렸다. 그 사이 수한은 잠시동안 고민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이 나라의 지존의 아들이 아니던가, 이름을 말했다가 행여나 수희가 알아차릴까 그것이 염려되었다.
" 김 수한입니다. "
며칠 내내 혼자 밤잠을 설치며 궁금해했던 그의 이름이었다. 그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속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 김 수한 ' 이라고…….
"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
" 예. "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매번 제가 모르던 것들을 보여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 그대와 있기 위함이니 감사하다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
" ……. "
" 더 늦기 전에 들어가십쇼. "
" 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수한을 한 번 쳐다본 수희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홀로 뒤에 서서 자신의 등을 보고 있을 수한이 떠올라 돌아보았다.
" ……. "
" 들어가십쇼. "
수희는 해맑게 그를 향해 웃어준 뒤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웃음을 본 수한은 넋을 놓고 그 미소를 떠올렸다.
" 수한 대군이라 생각할리가 없지……. "
말을 마친 수한도 돌아서서 궐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궐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유난히도 가볍고, 즐거워보였다.
##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수희가 장옷을 달래에게 건네주며 자리에 앉았다. 달래는 수희에게 주기 위해 물을 떠서 연상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그 물을 들어서 한 모금을 들이킨 수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으며 조용히 읆조렸다.
" 김 수한……. "
" 수한이라고요? "
" 귀도 밝구나. "
" 대군마마의 존함을 그리 부르셔도 되십니까? "
" 으응? "
대군이라는 말에 수희가 갸우뚱하다가 지난날 어머니에게 들은적 있던 수한대군의 이름을 떠올렸다.
" 수한 대군? "
" 예. 그 분이 아니십니까? "
달래의 물음에 수희는 대답을 멈추고 생각했다.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설마하니 왕의 아들일까, 에이, 설마…….
* * *
안녕하세요^^
여름이 언제가나 싶었는데 벌써 가을 분위기가 왔네요.
갈것같지 않던 무더웠던 날이었는데, 추워지니까 그날이
그리워지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편도 수한과 수희의 데이트씬이 좀 있긴하죠 ?
이제 천천히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비극을 향해
치닫아가는데, 그 사실을 모르죠^^;
이제곧 두 사람이 서로에대해 알것 같은 기분이 숭숭 드네요.
지난번편에 댓글을 달아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힘을 얻어서 열심히 연재하고 있답니다.^-^*
이번편도 꼭 읽어주시구 감상평 남겨주실거죠?~
업뎃쪽지 = 비극
첫댓글 비극. 수한이랑수희랑진짜둘이어울리는데ㅠㅠㅠㅠㅠ수한이랑수희랑제발이루어지면좋겠어요ㅠㅠㅠㅠㅠㅠ수희는눈치를채는거같은데수희가눈치채는거보다중요한건수한이가눈치채게되었을때가아닐까싶어요.........ㅠㅠ........이번편도잘읽었습니다!추천이요ㅠㅠ!
안녕하세요~ 두 사람 정말 잘어울리죠, 두 사람이 이루어짐 좋을텐데...일단 조금씩 눈치라기보단 생각이 물리는것 같죠ㅋㅋ매번 추천 감사합니다.ㅠ_ㅠ 다음편에 배용
비극 / 이제 점점 비극으로 가는걸까요? 수희는 수한과 결혼 하지 못하고 혁과 결혼을 하겠죠??
안녕하세요~ 음. 일단 그것은 비밀입니다만 사실 그쪽으로 많이 치우치죠?ㅠㅠ
비극/ 으억...아직까지는 알아채지 않기를 그냥 넘어가기를 바래봅니다ㅠㅠㅠㅠ담편기대요~
안녕하세요~ 아직은 안되죠 ㅠㅠ흑. 언제가 되든 꼭 놀러와서 봐주세요.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긴 하죠?ㅋㅋ
비극/재미있게 잘 읽고갑니다~ 근데 짐이라는 말은 황제만 쓸 수 있어요~ 과인이라는 표현이 적당하지않을까 싶네요;; 다음편도 기다리고있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짐이요? 아, 오타가 난모양이네요. 확인해보겠습니다. 다음편에배용^^!!
비극
업쪽이......... ㅠㅠㅠ
수한대군이라는것을 알아차려야... ㅠㅠㅠ
안녕하세요~ 업쪽 안왔어요?!ㅠㅠ아 다음편은 꼭 드릴게요. 음 일단 서로가 서로의 신분을 알아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