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국도 고갯마루에서
간밤부터 새벽까지 장마전선과 무관한 기압골 통과로 비가 살짝 내렸다. 제주도 아래 머문다는 장마전선은 이번 주말 남녘 해안으로 올라와 우리 지역 장맛비가 시작될 듯하다. 밤새 내리던 비는 날이 밝아오면 그칠 듯해 평소와 다름없이 자연 학교는 머뭇거리지 않고 길을 나섰다. 하지에 인적이 드문 산자락을 누비면서 발갛게 농익어 있을 막바지 산딸기를 따 먹고 올 요량이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 담았다. 봄날 산나물을 채집하러 갈 때면 배낭이 비좁을까 봐 김밥으로 때우기 일쑤였으나 그렇지 않으면 도시락도 무방했다. 도시락 찬은 곰취와 죽순 장아찌를 채웠다. 아침 이른 시간 현관을 나서 아파트단지 뜰로 내려서니 비가 부슬부슬 내려 우산을 펼쳐 들었다. 이웃 동 뜰의 수국은 가뭄으로 시들던 꽃잎이 간밤 비에 생기를 띠었다.
버스 정류소에서 마산역 앞으로 가는 101번 버스를 타고 충혼탑을 거쳐 홈플러스를 지나 창원대로를 달렸다. 마산역 광장으로 오르는 노점은 주말이 아닌데다 비까지 내려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번 대중교통이 개편되면서 마산역 광장에서 출발하던 몇 개 노선은 기점이 어시장 복국거리로 바뀐 번호가 있었다. 구산 원전과 구복으로 가는 노선과 진전 상평과 둔덕 노선이었다.
내가 가려는 곳은 진전 탑동인데 종점 정곡으로 가는 77번이라 마산역 기점은 변화가 없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자 휴게실에서 대기하던 기사가 나타나 시동을 걸어 버스에 올랐다. 시내를 관통해 댓거리를 지난 진동 환승장을 둘러 진전면 소재지 오서에서 국도를 건너 탑동 종점에 닿았을 때 내리니 기사는 차를 돌려 창포를 거쳐 정곡으로 향해갔다. 비가 와 우산을 받쳐 들었다.
탑동 안길을 지나자 밭곡식으로 심겨 자라는 콩과 참깨는 비를 맞아 싱그러움이 더했고 고춧잎도 생기를 띠었다. 마을 뒤 밭에는 한 노인이 비를 맞으면서 모종을 옮겨 심고 있었는데 수수였다. 옥수수보다 야윈 포기라 대번 수수임이 알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비가 오길 기다리다가 때를 맞추어 모종을 심었다. 밭이랑에는 잡초가 수북했는데 땅이 젖어서 호미로 뽑기가 수월했다.
마을 뒤 독립가옥이 한 채 나왔는데 이전에 두 차례 지날 때 성질이 사나운 개가 왕왕거리며 짖어댔다. 이번에는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지나니 성깔을 부리던 흰둥이가 늘어진 채 잠들어 나를 의식하지 못해 마음이 놓였다. 탑곡산으로 가는 희미한 등산로에서 고성터널이 지나는 방말재로 향했다. 4차선 국도의 터널 위에 예전 국도로는 차량이 다니질 않아 묵혀진 길이었다.
예보에는 아침이면 그친다는 비가 부슬부슬 계속 내려 우산을 받쳐 쓴 채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지난해 가을 대학 동기와 산행을 나서 단풍마를 한 무더기 캐왔던 산기슭이었다. 그날 산허리 어디쯤 Y자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만 가봐서 가보지 않은 왼쪽 구간을 마저 답사하고 싶었다. 등산로를 따라 계속 나아가면 적석산에 이르겠으나 처음부터 거기까지 갈 생각은 하질 않았다.
길섶에 산딸기가 있기는 했으나 며칠 전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남겨둔 딸기가 그새 익어 손을 뻗쳐 가시를 조심하면서 따 먹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의 산허리 숲은 옅은 운무에 가렸고 인적이 없는 호젓한 길이었다. 산 아래 저만치서는 터널을 빠져나온 자동차들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붕붕거렸다. 임도가 끝난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 비가 그쳐주어 도시락을 비웠다.
올랐던 숲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덩치 큰 멧돼지가 부스럭거리면서 헛기침하듯 소리를 지르고 사라져 잠시 긴장했다. 창원과 고성의 경계를 이루는 국도 옛길 고갯마루에서 동산마을로 가는 임도를 따라 걸었다. 인가가 없는 그윽한 골짜기의 용덕사 절집을 지나니 발산재를 넘어온 2호선 국도 동산 교차로가 나왔다. 진전천 냇물에 손을 담가본 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왔다. 23.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