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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어디로 갈 것인가? ⑤ | ||
성문을 열어야 한다. 다수가 성 안으로 들어와서 같은 행복을 노래해야 한다. |
안철수, 어디로 갈 것인가? ⑤
지금까지 나는 이 시리즈에서 4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조순은 자기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뒤 정치권에 영입된 케이스다. 박찬종은 박정희의 낙점으로 저격수로 사용되었으나 나중 자신의 힘으로 일정한 파괴력을 얻은 케이스다. 손학규는 김영삼의 지원으로 두각을 나타낸 케이스이며, 이인제는 바람이 만들어 낸 기린아였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시대상황을 오판, 이질적 그룹과 통합하므로 자신도 조직도 사라져 갔다. 시대상황이 그들을 불러냈고 시대상황이 그들을 몰아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어떤 파괴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본인들에겐 불편하겠지만 그들의 정치 지도자 그릇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4회의 연재를 통해 그것을 세밀하게 거론했다. 즉 시대는 언제나 영웅을 요구한다는 것, 하지만 영웅으로 알고 불러 낸 사람이 영웅이 아니었을 때 시대가 그를 죽인다는 것을 말했다. 오늘 그 적나라한 케이스의 한 사람을 더 조명한다. 유시민이다. 그리고 유시민을 마지막으로 ‘실패자 케이스’는 마감하면서 성공한 케이스를 조명하려고 한다.
유시민,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의 탄압에 당해 강제로 징집되어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복학생 지도자급이 되었다. 이 때 유시민을 유명하게 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터졌다. 유시민은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는데 당시 지금도 유명한 장문의‘항소이유서’를 재판부에 제출, 판사들이 회람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독일에 유학했다. 이 과정에서 집필한 <아침으로 가는 길><거꾸로 읽는 세계사>등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었다. 귀국 후 1988년 4.13 총선에서 당선된 이해찬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꼬마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면서 김대중이 대선후보가 되자 이해찬 곁을 떠났다.
다시 저술가로 돌아 간 유시민은 1992년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펴냈는데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했다. 이후 1996년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가 또 히트했다. 여세를 몰아 동아일보에 칼럼니스트로 등장, 날카로운 정치비평을 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유시민의 세상읽기>는 야권 인사들에게 정치를 보는 눈이 될 정도였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 움직임이 일자 그때부터 김대중 저격수를 자임했다. 그리고 1997년 대선가도에서 김대중을 가장 악랄하게 저격했던 저격수였다. 당시 나온 그의 저서 <97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유시민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며 “직접 출마하지 말고 제3의 후보인 조순 서울시장을 대리전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예측과 주장은 빗나갔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밀었던 조순은 이회창과 연합, 그가 가장 싫어한다던 군부정권 후예들의 정당인 한나라당 총재가 되었다.
그랬음에도 유시민의 김대중 저격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지지했던 조순이 총재로 있는 한나라당이 새정부의 총리인준을 6개월씩이나 발목을 잡았어도 비판하지 않았다. 안기부 고문 책임자인 정형근 의원을 검찰이 체포하려 했을 때, 이부영 김홍신 등이 정형근 방패박이가 되었어도 이들을 질타하지 않았다. 반면 김대중에 대한 비판은 매서웠다. 동아일보 칼럼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다” “집권당 국민회의는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불과 2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는 독설도 서슴치 않았다.
2000년부터 MBC 100분토론 사회자가 되었다. 2002년까지 사회자로 활동하며 맨파워를 키웠다. 이런 맨파워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이 두각을 나타내자 노무현 지지 핵심이 되었다.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형편없는 패배를 당했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급감했고 노무현 자신이 말했던 후보교체론이 현실이 되어 민주당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2002년 8월, 유시민은 절필하고 정당을 창당 노무현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10월, 영화배우 명계남 문성근 등의 후면 지원으로 개혁국민정당(약칭, 개혁당)을 창당했다. 당시 개혁당 창당 현장에서 보인 노무현의 눈물은 나중에 대선후보 텔레비전 광고로도 쓰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은 노무현 세력이 장악했으며, 유시민은 2003년 4월 치러진 고양 덕양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민주당 개혁을 주장하며 당을 장악한 친노그룹은 “공직후보자를 당원들이 상향식으로 뽑아 공천해야 민주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민주당 덕양갑 지역구 당원들은 상향식으로 안형호 후보를 뽑아 중앙당에 공천을 요구했다. 하지만 민주당을 장악한 친노 지도부는 당원들이 상향식으로 공천한 안형호 후보를 인정하지 않고 개혁당 유시민에게 지역구를 양보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뒤 유시민은 이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등원했다.
그의 국회등원은 엉뚱한 곳에서 이슈를 낳았다. 초선 의원이 국회에 하얀 면바지 차림을 한 케주얼 복장으로 나타나 선서를 하려고 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다음 날 양복을 갈아입고 선서를 했다. 국회의원 유시민은 노무현 돌격대 역할을 충실히 했다. 민주당 분당 후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개혁당을 이끌고 합세했다. 그리고 2004년 열린우리당 돌풍이 불던 총선 당시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되었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과 국민연금 제도개혁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던 김근태 복지부 장관이 사퇴했다. 노무현은 후임으로 유시민을 기용했다. 장관이 된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뚝심으로 추진했다. 당시 유명한 어록이 있다. “일단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였다. 그러나 이 연금체제 개편은 국민들과 정치권의 극심한 저항을 받았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2007년 5월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퇴했다. 이후 국민연금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
다시 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적을 만든 때문이었다. 정중동을 하면서 <대한민국 개조론>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어서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강력 지지그룹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승산이 없었다. 같은 친노계 후보단일화 여론에 밀려 이해찬 지지선언을 하고 경선후보에서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당 내분을 겪던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통합되면서 해체되었다. 유시민은 합당에 찬성하면서 합류했다. 정동영이 최종적으로 대선후보가 되었다. 친노계는 정동영 비토였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김영춘 등 일부가 탈당. 문국현 후보에게 갔다. 지지층도 상당부분 옮겨갔다. 정동영은 대선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2008년 벽두, 유시민은 이해찬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4월 총선에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겠으며 유연한 진보정당을 만들겠다”고 밝힌 뒤, 대구에서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에게 패배, 낙선했다.
2009년, 이명박의 노무현 핍박이 극한에 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던 날 기자들에게 “피의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잘 대처를 하고 와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잘 이겨내고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영 내에서 강한 반발을 불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피의자’가 아니며 이명박 검찰이 억지수사로 ‘피의자’를 만든 것인데 정치적 경호원을 자처했던 유시민이 그 말을 썼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 유시민은 돌변했다. 국장기간 내내 유시민은 노무현의 장자였다. 그 사이 유시민의 국민 지지율은 야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었다. 표정관리를 하면서 정중동을 했으나 국민참여당 창당에 찬성하면서 “민주당과 같은 당을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2009년 11월 10일, 국민참여당에 입당했다. 서울시장과 경기지사 후보출마를 저울질하다가 경기지사 출마로 돌았다. 야권 단일후보 협상에서 지루한 룰 전쟁 끝에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해 단일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경기도의 김대중 지지자들의 유시민 비토 정서가 상당했다. 그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때부터 1997년 대선과정,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간까지 김대중 대통령에게 했던 독설들 때문이었다.
유시민은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방문,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 비판을 사과한다”며 “김 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말씀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이 돼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해서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초입을 만들었고, 남북관계도 분단 50년 만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큰 업적을 이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김문수에게 져 2위로 낙선했다. 당시 김문수와 4%의 근소한 차이였는데, 이 때문에 다시 서영석 등 친노와 유시민 핵심들 사이에서 “호남출신 유권자의 비토 때문에 졌다”는 논리로 유시민 책임을 벗겨주려 했다.
2011년 유시민이 국민참여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해 4월 김해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또 민주당과 지루한 단일화 싸움 선두에 섰다. 결국 문재인의 중재로 여론조사 단일화 경선을 통해 국민참여당 이봉수가 야권 단일화 후보가 되었다. 이후 유시민은 김해에서 “투표 안하시면 집니다” 푯말 하나를 걸고 이봉수 지원에 올인했다. 하지만 이봉수는 낙선했다. 이봉수의 낙선은 유시민에게 대단한 데미지였다. 그동안 줄곧 야권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했으나 이 보궐선거 후 민주당 손학규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
돌파구를 모색하던 유시민은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결의한 후 2011년 12월에 이정희,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이후 통합진보당 공동 대표에 취임했다. 그러나 2012년 4월 총선 후보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은 격렬한 내부투쟁을 치렀다. 그리고 총선 후 유시민 파로 지칭되는 참여계는 전북 남원에서 강동원 후보 단 한명만 당선되었다. 격렬한 내부투쟁이 계속되던 통합진보당의 내분은 법정으로 옮겨갔으며 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심상정 노회찬 등과 함께 탈당 진보정의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유시민은 2013년 2월 19일 집필자로 돌아간다는 선언과 함께 정계를 은퇴했다.
여기가지다. 그러면 유시민은 왜 실패했을까? 유시민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면서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유시민은 옳은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평가를 유시민과 그의 지지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략의 평가가 그렇다. 그리고 유시민만이 아니라 유시민을 따르고 좋아하는 팬 그룹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소수의 강력한 팬 그룹이 다수의 강력한 안티그룹을 만든 것이다.
유시민이 정치를 하고자 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5.000만이 살고. 그 5,000만은 각자의 생각이 있다. 이중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정권을 잡는다. 의지가 충만하고 그 의지가 나라를 살리면서 미래의 번영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을지라도 그 의지를 다수가 인정해야 한다. 소수의 이너서클이 인정한다고 그게 정의는 아니다. 유시민의 실패원인은 여기에 있다. 다수를 향한 문을 닫은 것…소수가 다수를 견인해야 한다며 다수를 설득의 대상으로만 본 것, 이것이 유시민의 실패 이유다. 또 노무현의 실패 이유이기도 하다.
새정치. 좋다. 그러나 지금 안철수의 새정치에 대한 실체를 누구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안철수는 오늘도 새정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다수를 설득하려한다. 설득의 주체도 없으면서 ‘새정치’라는 단어 하나로 설득하려 한다. 이는 유시민이 갔던 길이다. 그리고 유시민은 끝내 좌초했다. 스스로 물러났다. 나는 지금도 유시민의 정치개혁과 새정치에 대한 열정은 인정한다. 그가 그동안 고군분투 했던 것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안철수의 새정치에 대한 열정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안철수는 유시민이 갔던 길을 가려한다. 다수를 설득의 대상으로만 보고 소수가 다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다시 말한다. 성문을 열어야 한다. 다수가 성 안으로 들어와서 같은 행복을 노래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체제다. 다양한 의사들을 하나의 의사로 집약시키기 위해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싸우며 때로는 양보하는 등, 공동체가 하나 되는 길을 향해 합의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득을 하기도 하고 설득을 당하기도 해야 한다. 설득만 하려 했지 설득을 당하지 않으면 상대는 성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민주제 국가, 민주 공화제를 채택한 국가의 지도자가 업으로 진 짐이다. 이를 해 내면 안철수는 훌륭한 국가 지도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