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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으로, 아난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로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불교용어이다. 여시(如是)는 경(經) 가운데 설(說)한 부처님의 말씀을, 아문(我聞)은 아난(阿難)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如 : 같을 여(女/3)
是 : 옳을 시(日/5)
我 : 나 아(戈/3)
聞 : 들을 문(耳/8)
(유의어)
문여시(聞如是)
아문여시(我聞如是)
부처에게서 들은 교법(敎法)을 그대로 믿고 따르며 적는다는 뜻으로, 경전(經典) 첫머리에 쓰는 말이다. 석존(釋尊)의 제자인 아난이 경전의 첫머리에 쓴 데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이(如是) 나는 들었다(我聞)", 또는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는 뜻의 이 말은 불자가 아니라도 불경을 암송할 때 처음 나오는 것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조금도 거짓이 없이 진실 되게 옮긴다는 의미를 갖는다. 아문여시(我聞如是), 문여시(聞如是)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존칭으로 고대인도 샤카(Sākya/ 釋迦) 민족의 성인을 뜻하는 모니(muni/ 牟尼)란 뜻이다. 본명은 성이 고타마(Gautama, 瞿曇/구담), 이름이 싯다르타(Siddhārtha, 悉達多/실달다)인 것도 상식이 되어 있다.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부처님 말씀은 어떻게 불경으로 남아 전해졌을까. 훌륭한 말씀이라도 전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신뢰받지 못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반(涅槃)하기 전까지 25년간 시중을 들었던 아난타(阿難陀)의 기억으로 전해졌다.
석가모니의 사촌이며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아난타는 곁에서 가장 많은 말을 들었으므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더라도 자기 개인의 의견이 아닌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는 뜻을 강조하여 경전 앞에 썼다. 초기 불교의 경전은 석가의 사후 제자 중의 영도자 역할을 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린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영도로 결집사업이 이뤄졌다고 한다.
대반야경(大般若經)의 전반적인 주석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아난이 모든 경전의 앞에 어떤 글자를 붙여야 하는지 여쭙자 부처님께서 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모든 경전의 앞에 제가 들은 바는 이와 같습니다란 말을 두면 된다(一切經首置 如是我聞等言).'
좀 더 풀이를 옮겨 보면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건널 수 있는데 '이와 같이(如是)'의 의미가 바로 믿음이라 했다. 그러면서 깨끗한 믿음이 있어야 불법에 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믿음을 말하는 표현은 열반 500년이 지나 편찬된 초기 경전에도 그대로 전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부처님이 어디서 누구에게 설법한 내용은 이와 같다고 전한 아난의 말은 사실대로 전하는 뉴스와 닮았다. 없는 사실을 전하고 실제보다 부풀려 말하고,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느끼게 하는 점이 크다. 목소리 크게, 여러 매체를 동원하여 동시다발로 전한다고 해도 사실이 아니면 일시적인 믿음은 곧 사라진다. 전하는 사람이나 그 내용이나 믿음이 앞서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으로, 아난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로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불교 용어이다. 팔리어로는 evam me suttam, 산스크리트어로는 evam mayā śrutam이며, 직역하면 '이와 같이 나에게 들렸다'는 의미이다. 내 의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붓다가 말한 대로 나에게 들려진 것을 그대로 여기에 전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문여시(我聞如是), 문여시(聞如是)라고도 한다.
초기불교의 경전은 붓다의 열반 후, 제1차 결집에서 마하까삿빠(대가섭)가 주도하여 정리되었다. 붓다가 깨달은 후 25년 되는 해부터 붓다의 비서(侍子)였던 아난다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시작하며 다섯 니까야를 암송하였고, 당시 모인 참가자(전체 500명)와 함께 외워(合誦) 전했다. 따라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아난다가 듣고 붓다가 말한 것을 증명하는 표현으로 경전의 첫 머리에 제시되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붓다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 경전의 주석 문헌에 이 구절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해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란 자신에 의해 일어난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앞의 청문(聽聞)을 설명하고, 이것은 내가 네 가지 담대함(四無畏)과 열 가지 힘(十力)를 갖추고, 우왕(牛王)의 지위에 있고, 사자후를 하며, 일체 존재의 최상자, 법의 자재자, 법왕, 법주, 법의 섬, 법의 귀의처, 정법의 최상전법자이고 정각자인 저 세존의 면전에서 직접 들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 또는 법 또는 형식에 대해서 의문이나 의심을 해서는 안된다고 모든 천신과 인간이 이 법에 대한 불신(不信)을 소멸시키고, 믿음의 성취를 일으키고 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고타마의 제자는 말하면서 가르침에 대한 불신을 없애고 믿음을 키운다. - 범망경(梵網經)
대승 경전인 '대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에서 여시아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시(如是)'에 대한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問 : 모든 불경은 어찌하여 처음에 '이와 같이'라는 말을 하는가?
答 : 불법의 대해는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건널 수 있다. '이와 같이'의 의미는 바로 믿음이다. 만약 사람의 마음에 깨끗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불법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불법에 들어갈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는 '이 일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믿지 않는 모습이다. 믿는 자는 말한다. '이 일은 이와 같다.' 비유하면 소가죽이 부드럽지 않을 때는 구부리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이와 같다. 비유하면 소가죽이 이미 부드럽다면, 쓰임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붓다의 면전에서 직접 들은 가르침을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붓다의 가르침을 들은 그대로 전한다는 점을 경전의 처음에 분명히 밝히는 표현으로 삽입된 말이다. 초기 경전에서 사용된 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표현은 붓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고 500년 정도가 지난 기원 전후부터 대승 운동가들에 의해 성립한 대승불교의 경전들에도 초기 경전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되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묘법연화경, 화엄경, 불설무량수경 등의 대표적인 초기 대승 경전은 모두 여시아문(如是我聞) 또는 아문여시(我聞如是)로 시작한다. 대승 경전도 붓다의 설법이라고 대승 경전 편찬자들은 주장했던 것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초기 경전 편집에서 아난다에 의해 사용되어 경전의 내용이 붓다에게 유래함을 분명히 말해준다. 하지만 붓다가 완전한 열반에 든 지 500년 후에 편찬된 대승 경전도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며 붓다의 가르침임을 드러내고 있다.
대승불교권에서는 대승 경전에 사용된 여시아문이라는 문구를 통해 대승 경전도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여시아문이 의미하는 바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인정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017 제1권 2. 초품(初品) 중 여시아문일시(如是我聞一時)
대지도론(大智度論) 017
大正新脩大藏經 25冊
第1冊 017
摩訶般若波羅蜜初品如是我聞一時釋論第二 (卷第一)
제 1 권
2. 초품(初品) 중 여시아문일시(如是我聞一時)를 풀이함 01
[經] 如是我聞一時.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論] 問曰. 諸佛經何以故初稱如是語.
[문] 모든 불경(佛經)에는 어찌하여 첫머리에 '이와 같이[如是]'라고 말하는가?
答曰: 佛法大海信爲能入, 智爲能度. 如是義者卽是信, 若人心中有信淸淨, 是人能入佛法. 若無信是人不能入佛法. 不信者言是事不如是, 是不信相, 信者言是事如是.
[답]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건널 수 있다. '이와 같이'라고 함은 곧 믿음이니, 만약에 마음속에 믿음이 청정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불법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불법에 들어갈 수가 없다. 믿지 않는 자는 '이 일은 이와 같지 않다' 하니, 이는 믿지 않는 모습이거니와 믿는 이는 '이 일은 이와 같다' 한다.
譬如牛皮未柔不可屈折, 無信人亦如是. 譬如牛皮已柔隨用可作, 有信人亦如是.
마치 쇠가죽이 부드러워지기 전에는 꺾어 구부릴 수 없는 것과 같나니, 믿음이 없는 사람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쇠가죽이 이미 부드러워진 뒤에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나니, 믿음이 있는 사람 역시 그와 같다.
復次經中說信如手, 如人有手入寶山中自在取寶. 有信亦如是, 入佛法無漏根力覺道禪定寶山中, 自在所取.
또한 경에서 믿음에 대해 '손과 같다' 하셨는데, 마치 손이 있는 사람은 보배산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보물을 취하는 것과 같다. 믿음이 있는 사람 역시 이와 같아서 불법의 무루의 근(根), 역(力), 각도(覺道), 선정(禪定)이라는 보배산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취하는 것이다.
無信如無手. 無手人入寶山中, 則不能有所取, 無信亦如是, 入佛法寶山, 都無所得.
믿음이 없는 이는 마치 손이 없는 것과 같다. 손이 없는 이는 보배산에 들어가도 아무것도 취할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믿음이 없는 이는 불법의 보배산에 들어가도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佛言: 若人有信, 是人能入我大法海中, 能得沙門果不空. 剃頭染袈裟, 若無信是人不能入我法海中. 如枯樹不生華實, 不得沙門果, 雖剃頭染衣讀種種經能難能答, 於佛法中空無所得. 以是故, 如是義在佛法初, 善信相故.
부처님께서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이 사람은 나의 큰 법의 바다에 들어와서 사문의 과위를 얻어 헛되지 않으리라. 머리 깎고 물든 가사(袈裟)를 입었지만 만약에 믿음이 없다면 이런 사람은 나의 법의 바다 속으로 들어올 수가 없느니라. 마치 죽은 나무가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사문의 과위를 얻지 못하리니, 비록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고 갖가지 경전을 읽고 갖가지 진리를 묻거나 대답할 수 있어도 불법 가운데에서는 전혀 얻는 바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라는 구절[義]이 불법의 첫머리에 있나니, 좋은 믿음의 상징인 까닭이다.
復次佛法深遠更有佛乃能知, 人有信者雖未作佛, 以信力故能入佛法.
또한 불법은 깊고도 멀어서 부처님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나니,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비록 당장에 부처를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믿음의 힘 때문에 불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 如是我聞 - 두 개의 독화살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굳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종교를 믿으나 안 믿으나 행복하게 사는데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부처님께서 가란다죽원에 계실 때 설하신 설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잡아함 제17권에 수록된 '화살경(箭經)'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리를 모르는 범부들은 괴롭다는 느낌(苦受), 즐겁다는 느낌(樂受),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不苦不樂受)을 받는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진리를 아는 거룩한 제자들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정말 범부와 불법을 믿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범부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고통이 발생하고, 고통이 깊어져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 슬픔에 잠겨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마음이 미친 듯이 혼란스러워진다. 그들은 감각기관으로 느껴지는 '몸의 고통(身受)'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마음의 고통(心受)'까지 느끼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전쟁터에 나간 병사가 두 개의 독화살을 차례대로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다. 범부가 두 개의 화살을 맞는 이유는 존재의 실상과 불법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욕에 대해 즐겁다는 느낌(樂受)이 일어나면 오욕의 즐거움에 탐닉하고, 그것 때문에 탐욕의 지배를 받는다.
반면 괴롭다는 느낌(苦受)이 일어나면 버럭 화를 내고, 그것 때문에 분노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진리를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몸에 고통이 생겨 설사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더라도 슬픔에 빠져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감각기관으로부터 오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는 오직 '몸의 고통(身受)'만을 느낄 뿐이며 '마음의 고통(心受)'은 받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제자들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이유는 즐겁다는 느낌이 발생해도 그것에 탐착하지 않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도 화내지 않아서 욕망과 분노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개의 화살로 표현되는 '감수작용(受)'이다. 첫 번째 화살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오는 '육신의 고통'이고, 두 번째 화살은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나서 생겨나는 '마음의 고통'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육체의 노쇠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절대로 피해 갈 수는 없다.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나 성인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당했을 때 범부는 육신의 고통에 신음하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와 좌절, 절망과 공포라는 정신적 고통도 함께 받게 된다.
문제는 첫 번째 화살은 아무도 피할 수 없지만 두 번째 화살은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에 따라 충분히 피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 거룩한 제자들도 첫 번째 화살은 피해가지 못한다. 그들도 춥고, 배고프고, 질병의 고통을느끼며,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모든 존재가 피해갈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고통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맞아도 그것 때문에 분노하거나 두려워하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만 있다면 비록 첫 번째 화살을 맞는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으로부터 빨리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기 암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맞는 순간 사람들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그리고 그 같은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을 더욱 깊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밝은 마음으로 대처하는 환자들은 첫 번째 화살에 의해 무너져 내리지 않고 오히려 병을 극복해 낸다.
로마시대의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Epictetus)는 노예 신분이었다. 그는 노예로 살면서 여러 가지 부당한 대우와 불행한 상황을 만났지만 항상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괴팍한 주인의 마음이나 세상을 바꾸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바꿈으로써 고난과 역경에 초연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업에 실패하거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같은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힘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할 수 없는 일에 맞서 저항하며 몸부림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마음 다스리는 것을 잘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고 첫 번째 화살의 독기를 해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삶의 고난과 힘든 일을 당했을지라도 그것에 자극받아 분노하거나 좌절하며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역경과 고통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맞았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도록 마음을 챙겨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 보고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있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므로 독기가 퍼지기 전에 뽑아버려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신심깊은 불자들과 그렇지 못한 범부들이 가진 차이점이다.
■ 如是我聞 - 두 가지 부끄러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우리들의 삶은 부끄러운 일들로 가득하다. 살다보면 남 보기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오죽하면 맹자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들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는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을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중에 하나로 꼽았겠는가?
그런데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에서 부끄러움이 사라져가고 있다. 매사에 당당하고 자기주장과 행동에 부끄러움을 모른다. 사람들의 삶이 도덕적이고 성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허물을 부끄럽게 여기지 못하는 불감증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다.
삼독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거울이자 잘못된 행동을 억제하는 버팀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잡아함 47권에 실린 이정법경(二淨法經)에는 부끄러움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두 가지 깨끗한 법[二淨法]’이 있어 세상이 보호된다고 설하셨다.
그 두 가지 법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慚)'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愧)'이라고 하셨다. 만약 세상에 이 두 가지 깨끗한 법이 없었다면 세상은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처자와 종친과 사장(師長)과 존비에 차례(序)가 있음을 알지 못해서, 뒤바뀌고 혼란하게 되어 축생(畜生)의 세계와 다름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태 작금의 세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듯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위 정치인에서 때로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들조차도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언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세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개인적 심성 탓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조장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부끄러운 행동을 해도 아이를 제지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이야말로 구김살 없는 아이다움이나 당당한 용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신입사원 연수에서도 자신감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복잡한 거리에서 물건을 팔게 하거나 큰 소리로 연설을 늘어놓게 한다. 돈과 출세가 전부인 사회에서 부끄러움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돌함이나 발칙함은 개성이나 당당함으로 호도되기도 한다.
여기서 도덕적 행위와 부끄러움은 별개처럼 분리되고 마침내 부끄러움은 용기 없는 사람들의 넋두리처럼 치부된다. 하지만 진정한 당당함이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러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 않는 언행과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세상에 만일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었다면 청정한 도를 어기고 뛰어 넘어서 생노병사를 향해 달려가리라"고 하셨다.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면 상하질서와 윤리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바른 도(道)를 벗어나 생노병사의 불길 속으로 달려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 가지 부끄러움 부끄러움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흔히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에 대한 부끄러움만을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괴로운 것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세상 사람을 모두 속여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 앞에 부끄러운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지지만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은 기억 속에 살아있다.
까마득한 과거사가 불현듯 떠올라 밤잠을 설쳐본 사람이라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안다. 뿐만 아니라 당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낮 뜨겁게 느껴지는 일도 허다하다. "군자는 혼자 있을 때에도 언행을 삼가야 해야 한다(君子愼其獨也)"는 가르침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 속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언행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지금 당장 스스로 보기에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남 앞에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복잡한 전철에서 하나님 믿을 것을 강요하며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자기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 마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짜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심성이 중요한 이유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륜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짐승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유교경'에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낙엽을 모으는 쇠갈퀴와 같아서 능히 사람의 그릇된 법을 잘 다스린다. 그러므로 비구는 항상 부끄러워 하여 잠시도 계행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선법을 지닐 수 있지만 부끄러워함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고 하셨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낙엽을 모으는 쇠갈퀴처럼 잘못된 행동을 쓸어내고 나를 깨끗하게 만든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다짐은 계행을 지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설하고 계신다. 부끄럽지 않는 당당함은 바른 언행과 당당한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 如(같을 여, 말 이을 이)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계집녀(女; 여자)部와 말을 뜻하는 口(구)로 이루어졌다. 여자가 남의 말에 잘 따르다의 뜻이 전(轉)하여, 같다의 뜻과 또 음(音) 빌어 若(약)과 같이 어조사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如자는 '같게 하다'나 '따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如자는 女(여자 여)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口자는 사람의 입을 그린 것으로 '말'을 뜻하고 있다. 如자는 여자가 남자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부권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순종을 미덕으로 삼았던 가치관이 낳은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순종하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와 같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고 있다. 그래서 如(여, 이)는 법의 실상(實相)이란 뜻으로 ①같다, 같게 하다 ②어떠하다 ③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닿다 ④좇다, 따르다 ⑤가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⑥당연히 ~하여야 한다 ⑦맞서다, 대항하다 ⑧비슷하다 ⑨어찌 ⑩가령(假令), 만일(萬一) ⑪마땅히 ⑫곧, 이것이 ⑬~과, ~와 함께 ⑭보다, ~보다 더 ⑮이에, 그래서 그리고 ⓐ말을 잇다(=而)(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대상이 변함이 없이 전과 같음을 여전(如前), 이와 같음을 여차(如此), 얼마 되지 아니함을 여간(如干), 사실과 꼭 같음을 여실(如實),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여하(如何), 왼쪽에 적힌 내용과 같음을 여좌(如左), 이러함을 여사(如斯), 일이 뜻대로 됨을 여의(如意),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람을 결여(缺如), ~만 같은 것이 없음을 막여(莫如), ~만 못함을 불여(不如), 혹시나 설혹을 혹여(或如), 어떠함을 하여(何如), 뒤섞여서 어지러움을 분여(紛如), 뜻하지 않은 사이에 갑자기를 홀여(忽如), 3년과 같이 길게 느껴진다는 뜻으로 무엇을 매우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을 여삼추(如三秋), 얇은 얼음을 밟는다는 뜻으로 몹시 위험함을 가리키는 말을 여리박빙(如履薄氷),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부부 간에 화락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고금슬(如鼓琴瑟),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일이 썩 쉬움을 일컫는 말을 여반장(如反掌), 바람이 귀를 통과하는 듯 여긴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태도를 일컫는 말을 여풍과이(如風過耳),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힘을 이르는 말을 여조삭비(如鳥數飛), 여러 사람의 말이 한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한결같음을 이르는 말을 여출일구(如出一口), 시키는 대로 실행되지 못할까 하여 마음을 죄며 두려워함을 이르는 말을 여공불급(如恐不及), 물고기가 물을 얻음과 같다는 뜻으로 빈궁한 사람이 활로를 찾게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어득수(如魚得水),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모하는 것 같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여원여모(如怨如慕), 개미가 금탑을 모으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근검하여 재산을 축적함을 이르는 말을 여의투질(如蟻偸垤), 천금을 얻은 것 같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이루어 마음이 흡족함을 이르는 말을 여득천금(如得千金), 강을 건너려 하는 데 마침 나루터에서 배를 얻었다는 뜻으로 필요한 것이나 상황이 바라는 대로 됨을 이르는 말을 여도득선(如渡得船),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환히 앎을 일컫는 말을 여견폐간(如見肺肝), 아주 작은 고을을 콩 만 하다고 비유하는 말을 여두소읍(如斗小邑),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과 같은 뜻으로 무슨 일을 하는 데 철저하지 못하여 흐리멍덩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여수투수(如水投水), 물고기가 물을 잃음과 같다는 뜻으로 곤궁한 사람이 의탁할 곳이 없어 난감해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어실수(如魚失水), 얼굴의 생김생김이나 성품 따위가 옥과 같이 티가 없이 맑고 얌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여옥기인(如玉其人), 나는 새가 눈앞을 스쳐간다는 뜻으로 빨리 지나가 버리는 세월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여조과목(如鳥過目), 발과 같고 손과 같다는 뜻으로 형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사이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족여수(如足如手),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여원여소(如怨如訴), 한 판에 찍어 낸 듯이 조금도 서로 다름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여인일판(如印一板),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는 뜻으로 괴로운 일을 벗어나서 시원하다는 말을 여발통치(如拔痛齒), 한쪽 팔을 잃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가장 믿고 힘이 되는 사람을 잃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실일비(如失一臂),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뜻으로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이 하늘로 비상하여 더 큰 일을 이룬다는 의미를 일컫는 말을 여호첨익(如虎添翼) 등에 쓰인다.
▶️ 是(이 시/옳을 시)는 ❶회의문자로 昰(시)는 동자(同字)이다. 해(日)처럼 정확하고 바르다(正)는 뜻이 합(合)하여 옳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是자는 '옳다',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是자는 日(해 일)자와 正(바를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와 日자가 결합한 是자는 '태양(日)은 올바른 주기로 움직인다(正)'는 뜻이다. 즉 是자는 태양은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진다는 의미에서 '올바르다'와 '옳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是자는 때로는 '이것'이나 '무릇'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是(시)는 (1)옳음. 옳은 것 (2)도리(道理)에 합당함 (3)이. 이것. 여기. 이곳 등의 뜻으로 ①이, 이것 ②여기 ③무릇 ④이에(접속사) ⑤옳다, 바르다 ⑥바르게 하다 ⑦옳다고 인정하다 ⑧바로잡다 ⑨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의(義),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불(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다. 용례로는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다고 인정함을 시인(是認),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날을 시일(是日), 마찬가지로나 또한을 역시(亦是), 만일에 또는 가다가 더러를 혹시(或是), 도무지나 전혀를 도시(都是),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시(本是), 나라의 근본이 되는 주의와 방침을 국시(國是), 옳다고 여기에 확정되어 있는 그 정당의 방침을 당시(黨是), 회사나 결사의 경영 상의 방침 또는 주장을 사시(社是), 학교의 기본 교육 방침을 교시(校是), 민족 정신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주의와 방침을 민시(民是), 다른 것이 없이 곧을 변시(便是), 자기 의견만 옳게 여김을 자시(自是),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들어 맞음을 칭시(稱是),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시비지심(是非之心),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공정하게 판단함을 이르는 말을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 또는 도리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시비곡직(是非曲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으로 부처를 밖으로 찾다가 하루아침에 대오大悟하면 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시심시불(是心是佛),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야비야(是也非也),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다름을 일컫는 말을 사시이비(似是而非),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는 뜻으로 과거의 잘못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금시작비(今是昨非), 어저께는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은 좋다고 생각됨을 일컫는 말을 작비금시(昨非今是), 형체는 헛것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인연으로 생기는 것인데 그 본질은 본래 허무한 존재임을 이르는 말을 색즉시공(色卽是空), 말인즉 옳다는 뜻으로 말 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언즉시야(言則是也), 제 뜻이 항상 옳은 줄로만 믿는 버릇이라는 뜻으로 편벽된 소견을 고집하는 버릇을 이르는 말을 자시지벽(自是之癖), 여자의 말을 무조건 옳게 쓴다라는 뜻으로 줏대 없이 여자의 말을 잘 듣다는 의미를 일컫는 말을 부언시용(婦言是用), 말로는 옳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구시심비(口是心非), 어떠한 일에 대하여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함을 일컫는 말을 왈시왈비(曰是曰非),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분명하지 아니함 또는 누가 옳고 그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 하는 말을 일컫는 말을 숙시숙비(孰是孰非), 의리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짐을 일컫는 말을 유리시시(惟利是視),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여 옳고 그른 것이 질정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혹시혹비(或是或非) 등에 쓰인다.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 또는 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의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아심여칭(我心如秤), 자기네 편의 무위가 드날림을 이르는 말을 아무유양(我武維揚),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 또는 자기만 잘 났다고 자부하는 독선적인 태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바깥 사물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일컫는 말을 물아일체(物我一體),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망아지경(忘我之境), 본디 내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뜻밖으로 얻었던 물건은 잃어 버려도 서운할 것이 없다는 말을 본비아물(本非我物), 자기가 어떤 것에 끌려 취하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자아도취(自我陶醉), 잘못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말을 곡재아의(曲在我矣),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어떤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를 잊고 다른 사물을 돌아보지 않거나 한 가지에 열중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림을 일컫는 말을 무아몽중(無我夢中), 자기 때문에 남에게 해가 미치게 됨을 탄식함을 일컫는 말을 유아지탄(由我之歎), 인신人身에는 항상 정하여져 있는 주제자 즉 아我가 없다는 말을 인아무상(人我無想),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이르는 말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일컫는 말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일컫는 말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일컫는 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
▶️ 聞(들을 문)은 ❶형성문자로 闻(문)은 간자(簡字), 䎹(문), 䎽(문)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 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門(문; 입구)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聞자는 '듣다'나 '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聞자는 門(문 문)자와 耳(귀 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聞자를 보면 사람의 귀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어둑해진 저녁에서야 결혼할 신랑이 신부의 집에 당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이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혼인하다'라는 뜻으로 썼었다. 후에 이러한 모습이 바뀌면서 사람은 女(여자 여)자와 昏(어두울 혼)자가 결합한 婚(혼인할 혼)자가 되었고 사람의 귀는 耳(귀 이)자에 門자를 더한 聞자로 분리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聞자는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에서 '듣다'나 '소식'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聞(문)은 소리가 귀로 들어가다 라는 말로 듣다, 들리다의 뜻으로 ①듣다 ②소리가 들리다 ③알다, 깨우치다 ④소문나다, 알려지다 ⑤냄새를 맡다 ⑥방문하다, 소식을 전하다 ⑦묻다, 질문하다 ⑧아뢰다(말씀드려 알리다), 알리다 ⑨틈을 타다, 기회를 노리다 ⑩견문(見聞), 식견(識見) ⑪소식(消息), 소문(所聞) ⑫명성(名聲), 명망(名望) ⑬식견(識見) 있는 사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들을 령/영(聆), 들을 청(聽)이다. 용례로는 듣고 보는 것으로 깨달아 얻은 지식을 문견(聞見), 도를 들음 또는 도를 듣고 깨달음을 문도(聞道), 들어서 얻음을 문득(聞得), 이름이 널리 알려져 숭앙되는 일을 문망(聞望), 부고를 들음을 문부(聞訃), 소문으로 전하여 들음을 문소문(聞所聞), 들어서 손해 봄을 문손(聞損),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문인(聞人), 들어서 앎을 문지(聞知), 들어서 배움을 문학(聞學), 뜬 소문을 들음을 문풍(聞風), 향내를 맡음을 문향(聞香),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을 문달(聞達), 들려 오는 떠도는 말을 소문(所聞),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전하여 들음을 전문(傳聞), 퍼져 돌아다니는 소문 또는 설교나 연설 따위를 들음을 청문(聽聞), 아름답지 못한 소문을 추문(醜聞), 이전에 들은 소문을 구문(舊聞), 여러 번 들음을 천문(千聞),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으로 실상 없이 떠도는 말을 풍문(風聞), 들어서 앎 또는 듣고 앎을 일컫는 말을 문이지지(聞而知之),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는 뜻으로 총명함을 이르는 말을 문일지십(聞一知十), 원래의 뜻은 동쪽 닭과 서쪽 개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닭 우는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하여 인가가 잇대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계견상문(鷄犬相聞), 지난 시대에는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뜻으로 매우 놀랍거나 새로운 일을 이르는 말을 전대미문(前代未聞), 눈 먼 말이 앞에 가는 말의 방울 소리를 듣고 그대로 쫓아간다는 뜻으로 자기의 주견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쫓아 감을 이르는 말을 고마문령(瞽馬聞鈴),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들음을 일컫는 말을 금시초문(今始初聞), 출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음 또는 명예를 구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구문달(不求聞達), 눈으로 직접 보니 들었던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헛된 명성을 비유하는데 사용되는 말을 견불체문(見不逮聞), 명예나 명성이 드날리지 아니하여 남에게 알려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요요무문(寥寥無聞), 혹시나 또 무슨 말을 듣게 될까 겁난다는 뜻으로 한가지 착한 일을 들으면 다음에 듣게 될 착한 것과 겹치기 전에 어서 다 배워 익히려는 열심인 태도를 이르는 말을 유공유문(唯恐有聞)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