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바꿀 것은 다 바꾸자
글쓴이 : 사자후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사람을 다 바꿔. 바꿔 바꿔 거짓은 다 바꿔.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
테크노가수 이정현이 부른 노래 '바꿔'가 새 천년 새해 벽두부터 한국사회를 크게 흔들어대고 있다. 어른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몸짓인 테크노댄스에 맞춰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마치 주문과도 같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노랫말은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든 이미 짙은 사회성을 띤 것이 됐다. 이정현은 노래를 통해 온갖 허위와 잘난 것들을 통째로 부정하고 '모든 걸 다 바꾸자'고 선동한다. 덩달아 신문과 잡지들은 이정현을 인터뷰하고 왜 '바꿔'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기사를 싣느라고 법석이다. 가위 '바꿔 신드롬'이라 할만한 현상이다.
이 같은 '바꿔 열풍'을 지켜보면서 한가지 반성되는 것은 과연 불교는 바꿀 것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그 동안 불교는 개혁 또는 변화와 같은 움직임에는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다. 종단 내적으로는 제도개혁이다 개혁종단이다 해서 자기변신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이 대세를 장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니컬하게 말하면 불교에서 변화나 개혁은 마지못해 하는 흉내내기 또는 대외선전용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불교만큼 바꾸는 것에 인색한 종교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용운을 비롯한 근대불교의 선각자들이 그토록 불교유신과 개혁을 주장했지만 한가지도 제대로 유신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율문제, 포교문제, 제도문제 등 산적한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직도 같은 주제 같은 타령 그대로다. 남들은 랩이다 테크노다 하는데 우리 불교는 새 천년에도 흘러간 옛 노래나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바야흐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숨가쁜 전환이 진행되고 있대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란 곧 낙후와 퇴보를 의미한다. 세상은 벤처다 뭐다 해서 저렇게 토끼뜀으로 가는데 불교만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다면 정법의 영토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미 불교는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아니다. 각종 통계수치가 그렇고, 현실적 상황도 그렇다. 도심의 사찰 수와 교회 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영향력이나 종교적 역할에서도 불교는 기독교에 뒤진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불교도 바뀌어야 한다. 오래 전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이 일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불교가 바꾸어야 할 것은 우선 터무니없는 관념적 우월주의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대한 종교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 있게 증거를 대지 못한다.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불교가 한 일이 무엇인가'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불교가 한 역할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불교 자체가 정화되지 못하고 사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어떻게 남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원래 바꾸는 종교였다. 부처님 자신이 어리석음을 돌려 깨달음을 열었고(轉米開悟)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만드는(革凡成聖) 일에 매진한 종교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렇다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바꾸어야 한다. 낡은 의식과 관념을 확 바꾸어야 한다. 중생사회를 바꾸어 정토를 이루고자 한다면 불교 자체부터 바뀌어야 한다. 갈등을 화해로 바꾸고, 소모적 종단 운영방식도 생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교육과 포교, 제도도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바꾸어야만 한국불교가 살아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정법만이 포교다
포교란 무엇인가. 왜 포교를 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진리(法)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교화해 반야(般若)의 눈을 뜨게 하고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불교라는 교단이 존재하는 이유도 부처님이 가르친 정법의 수호와 전지, 그리고 확대를 위해서다. 승려가 있고 절이 있고 포교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포교란 바꿔 말하면 정법의 선양이고 확산이며 실현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불교신도를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포교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설법을 한다면서 외도의 가르침을 불법인 양 태연히 가장해서 말한다든가 불공을 한다면서 이교도처럼 개인적 구복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라 할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가장한 사교(邪敎)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불교 포교현실은 어떠한가. 법당에서는 정법이 가르쳐지고 있는가. 불자들은 그 가르침을 사무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그렇지 못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온갖 사언마설(邪言魔說)이 불교를 가장해서 흑사병처럼 창궐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간판만 바꿔 걸면 서양의 어떤 종교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그런 내용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법사의 입에서 무차별로 '설법'되고 있다. 그 명백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절에서 입춘부적을 파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신도들이 그런 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계율로 금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들의 생각이었다. 만약 어느 절에서 입춘부적을 나누어주었다면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른바 포교를 잘한다는 절에서조차 '방편'이란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한다. 심지어는 스님들이 신도들의 궁합과 작명, 택일에서부터 사업운세, 관상, 사주까지 보아주는 예도 흔하다.
만사형통의 기도는 이제 불자들의 신행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돼버렸다. 대학입시철이 되면 절마다 합격을 비는 백일기도가 벌어진다. 현수막까지 내 걸린 이 기도는 도시주변의 웬만한 절 치고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제는 절 집안의 중요한 풍속으로 자리한 치병(治病) 득남(得男) 승진(昇進)기도도 연중무휴로 진행된다. 이런 절에서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정각자, 인류를 바른 길로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 아니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한손에 거머쥔 전지전능한 절대신으로 둔갑한다. 그러다 보니 절마다 가장 중요한 법사(法事)는 불공이요 기도다.
불공이나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정법에 귀의하고 공양하는 의미의 불공, 번뇌를 조복받기 위한 진언수행으로서의 기도라면 마땅히 권장돼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기도=영험'의 등식이 서양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구원'의 등식과 같은 구조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법(邪法)이다. 이런 사법을 빠져 있으면서 기도만 하면 만복을 소낙비처럼 받는다고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포교(布敎)가 아니라 파교(破敎)다.
정법을 펴는데 매진해도 부족한 형편에 이런 일을 해놓고도 사람만 많이 모이며 포교를 잘한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처녀의 임신같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어처구니없는 변명이란 이런 것이다. "근기 낮은 중생을 인도하려면 방편이 필요하다. 종교에 신비한 측면이 없다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변명 뒤에 숨어있는 보다 솔직한 이유는 좀 다르다. 하나는 그런 기도나 불공이 사찰의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불교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이런 점을 염려해 입멸(入滅)에 즈음해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法歸依 法燈明)'라고 유훈을 남긴바 있다. 그런데도 정법의 사도(如來使)이어야 할 사람이 사법(邪法)의 찬미자가 되고 외도의 가르침을 방편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자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진리뿐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그것을 다음 네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진리에 의지할 것이며 사람에 의지하지 말 것(依法不依人) 가르침의 뜻에 따를 것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나 문자에 의지하지 말 것(依義不依語) 참지혜에 의지할 것이며 세속적인 지식에 의지하지 말 것(依智不依識) 완전한 가르침에 의지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에 의지하지 말 것(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이것은 불교의 생명이 바로 정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정법을 바르게 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교해서 옳은 말씀, 진리의 가르침은 배우고 실천하기를 외면한다. 하지만 포교란 오히려 그런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미혹한 중생이 없다면 부처님이 굳이 45년 동안 장광설을 했을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몇 명에게 '정법'을 전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포교는 아무리 양적인 확대가 이루어졌더라도 질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우리 불교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법당의 단청에 빛이 바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의 당간(幢竿)이 높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할 때만이 한국불교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서양불교에서 배우자
아야 케마는 남방불교를 공부한 최초의 서양비구니다. 스님은 5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출가한 뒤 스리랑카, 호주 등에서 수행을 했다. 만년에는 독일로 돌아가 뮌헨 근교에 '부처님의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명상과 설법하다가 1997년 입적했다. 최근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자서전 <이 생명 다 바쳐서>는 왜 그녀가 세속적 행복을 포기하고 출가하게 됐는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79년 나는 드디어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나 결코 세속적인 것에서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 여행을 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흥미진진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마음의 평화와 고요는 얻을 수 없었다. 마음의 평화와 고요는 오직 '내 마음'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최고의 이상을 향해 내 모든 것을 헌신할 준비를 했다."
케마 스님의 이 같은 고백은 서양인에게 불교가 어떻게 이해되고 실천되어지고 있는가를 엿보게 한다. 서양에서 불교도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그 빛을 이웃에게 회향하기 위해서다. 저들에게 있어 부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인류의 스승이다. 서양사람들이 이해하는 불교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종교다.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며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불교를 주목한다. 유일신의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서양종교에 의문을 가지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불교의 메시지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서양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교양 있고 지성적인 사람들이다.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서양의 출가자들도 물질적 관심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평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아직은 저들에게서 종교를 빵으로 바꾸었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불교의 본향으로 자부하는 동양의 불교도들은 개인의 물질적 이익과 구복을 위해 불교를 믿는다. 동양의 불자들에게 부처님은 현세이익을 보장해주는 신적인 존재다 .불교본래의 합리적이고 지적인 전통은 방편이라는 미명 아래 왜곡되고 만다. 출가자들도 진정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물질적 탐착에 빠지는 예가 많다. 종교를 팔아 빵을 사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재가불자들에게 부처님은 절대자이며 기도를 하면 가피를 주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양의 불교도들은 서양종교를 모방하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도나 의례의 문제는 물론이고 교리나 종교생활마저 저들을 닮아야 비로소 '종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이것이 현재 동양과 서양의 불교상황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에 관한 한 서양에 대해 우월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이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서양사람들의 불교이해가 더 정확하다. 실천수행 또한 우리보다 더 진지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제는 동양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서양사람이 쓴 책을 읽어야 할 정도다. 불교이론도 역수입한 것이라야 먹혀들어 간다. 심지어는 일반법회도 외국스님이 주관하는 곳이 더 성황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 오래 동안 불교가 융성했던 동양에서는 본래의 순수한 정신적 전통이 많이 퇴색되고 말았다. 반면 이제 발아를 시작한 서양불교는 도리어 싱싱하고 순수한 참 불교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부끄럽더라도 서양불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서양불교의 방법이 옳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래야 고목에서 새순이 돋아날 수 있지 않겠는가.
종단 혁신할 새로운 대안집단 등장 절실 - 한겨레 펌
글쓴이 : 자연같이
‘대한불교조계종 파벌탐구’ 씨리즈를 마치고 나서
종단 혁신할 새로운 대안집단 등장 절실 승려교육체제 혁신, 공부·봉사하는 스님 우대 풍토 조성돼야
지난 23일 중앙종회에선 간선의원선출위원회가 열렸다. 낙산사 지홍스님이 사퇴해 궐석이 된 선원 몫 종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원회가 시작되자마자 한동안 입씨름이 계속됐다. 투표로 뽑자느니 합의로 뽑자느니, 합의 도출을 위해 선출 날짜를 연기하자느니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느니 다소 격앙된 논의가 계속됐다. 투표 연기와 합의 선출을 요청하던 금강회와 보림회쪽 위원은 여당이 일승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투표 직전 자리를 뜨거나 백지투표를 던졌다. 반쪽 투표였다. 결과는 재적 9명 가운데 5명이 찬성으로 종열스님이 당선(?)됐다. 종단내 중진스님들과 두루 관계가 좋은 명진스님은 떨어졌다.
지난 7월초 열려 새 이사를 뽑은 동국학원 재단이사회의 재판이었다. 당시 재단이사회 회의는 일승회쪽 이사가 불참하고, 영담 영배스님 등 보림회쪽 이사만이 참석한 가운데 새 이사를 선출했다. 새 이사는 보림회나 금강회쪽에서 추천한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공방이다. 그러나 누구도 즐거울 리 없는, 부끄러운 공방이고 승패였다. 세상에 대해서는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승가 안에서는 병적인 수준의 집착을 보이고 있는 셈이고, 대외적으로는 원융살림을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파벌살림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내부문제 감시집단 부재
이런 종단내 파벌적 양상과 관련해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은 이런 반불교적인 행태를 가열차게 비판하고 감시할 집단이 없다는 것이다. 서의현 체제 때 종단에는 불교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에서 불교의 자주화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대안세력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종단에는 파벌화되어가는 비불교적인 양상을 지적하고 비판할 양심적인 개인이나 단체가 없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결사체 또한 없다. 개혁불사 당시 개혁에 헌신했던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종단 상부기구에 입성해 종권을 놓고 각축하고 있다. ‘우리가 종권을 잡는 것이 곧 개혁’이라고 한사코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겐 종권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새로운 종단상 정립을 위한 청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른바 개혁세력이 모두 종단정치 안에서 각축하다보니, 온당한 비판이나 합리적인 대안이라 하더라도 특정 정파를 대변하는 것으로 낙인 찍힌다. 실천승가회와는 물론 다른 종파와도 거리를 두고 포교에 푹 빠져있는 금강 스님이나, 생명평화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는 도법스님도 특정 파벌 소속으로 내몰린다. 때문에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도 선뜻 종단 현실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새로운 대안집단 갈망
때문에 종단 안팎에선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대안집단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다. 대승불교승가회든 정토구현승가회든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던질 젊은 승려들로 구성된 결사체가 그것이다. 불가에는 고려때의 수선결사 정혜결사로부터 시작해 20세기의 봉암사결사 등 정법 구현을 위한 결사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선우도량도 그 맥을 잇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 결사체는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법대로 수행하며, 법대로 원융살림을 살고, 법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수행과 경전에 근거해 새로운 종단상을 몸소 실천하는 모임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꼽히는 대안은 승려교육체제의 혁신이다. 제대로 된 스님을 만들 수 있도록 승려 교육의 내용과 체제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스님들이 종권이나 주지 주변에 얼씬거리는 이유는 바람직한 승려상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사실 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자학을 가르친다. 어린이들이 배우는 <명심보감>은 선악과 상하를 구분하는 법, 어른을 모시고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법 등을 가르친다. <소학>은 청소년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 담겨 있으며, <논어>는 군자의 바탕인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 특히 仁(인)과 義(의)]을 가르치고 <맹자>는 義(의)에 집중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인성 교육프로그램이 없다. 깨달음 지상주의로 흐르다보니 깨달음 이전에 성직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해야 하는지, 지켜야 할 예의범절의 내용과 교리적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승려로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과정이 없다. 그저 여법하게 살라고만 할 뿐 무엇이 여법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것이다.
“스님들이 염불이나 선이나 교학이나 봉사 등 무언가 하나씩 전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다 보니 스님들에게 전공이란 게 없고, 그러다보니 대부분 스님들은 종단 주변에 얼씬거리거나 주지 자리나 차지하려고 기를 쓰게 되는 겁니다. 가만히 보세요. 권승들에겐 전공이 없습니다.”(윤창화 <민족사> 사장)
세번째로는 공부하고 봉사하는 스님들이 우대받도록 관행과 제도의 혁신에 대한 요청이 많다. 각 사찰의 법회에서 하는 법문은 공부하는 스님에게 맡기는 것은 기본이다. 주지는 법상에 올라서는 안 되고, 법문을 할 스님을 초빙하고 모시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보살행이나 포교 등 대사회적 활동을 열심히하는 스님을 지원하고 편리를 봐주는 게 주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스님들은 행정직을 기피했다고 한다. 주지 맡으라고 하면 두세번 사양하는 게 관례였다. 석주스님이나 지관스님은 교계 원로들이 총무원장으로 추대했음에도 이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주지 한 자리 얻기 위해 칼부림이 일기 시작했고, 지금도 주지 자리다툼은 파벌 혹은 문중 갈등의 뿌리가 되고 있다. 주지 한번 맡으면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보호막 구실을 해준 파벌부터 찾아다니고, 종회의원 한 자리를 놓고 계파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신세계의 토양
불교는 우리나라 유형문화재의 70%를 보유하고 관리한다. 토착신앙과 결합해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해온 뿌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불교는 한국에서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적 문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남방불교나 티벳불교, 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한국의 불교는 불교문화에 익숙한 외국인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이 믿는 종교를 떠나 한국 불교에 거는 기대는 크다.
청빈을 자랑삼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눈푸른 납자들이 구름같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출재가 혹은 불자 비불자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이 결코 더럽혀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내안의 불성을 찾아가듯이, 우리 정신세계의 토양을 이루는 불교문화의 빛나는 모습을 함께 드러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충고와 질책에 감사드리며
연재물 ‘조계종 파벌탐구’를 진행하는 동안 애정어린 충고와 질책이 잇따랐다. 대부분 조계종 종단이 한국적 정신세계의 지킴이로서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더러 과도한 표현이나, 잘못된 사실관계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오보도 있었다. 사퇴한 종회의원은 낙산사 지홍스님이었으며(기사 속에서는 조계사 전 주지 지홍스님), 정대스님과 지선스님이 대결한 총무원장 선거는 1999년이었고(기사 속에서는 1998년), 금강회의 전신인 청림회는 이 선거 때부터 결성돼 활동하기 시작했다(기사 속에선 결성시기가 애매했음). 해량해주시기를 빈다.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동안거 하안거 (자연같이)
계절이 바뀔때마다 언론을 통해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식, 승려들이 동안거에 들어갔다. 하안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을 때마다 쓴웃음만 나온다.
승려들이나 일반 불자들이나 도대체 무슨 생각, 가치관으로 살길레 불교계에서는 뭘 했다거나 참 잘했다고 여길만한 소식은 가뭄에 콩나듯 드물고 비난, 비판 받을 짓만 골라서 한단 말인가??
기독교계나 여타 종교야 마음 밖에 있고 관심도 없으니 무슨 소식을 접하든 동요가 없건만 불교계 소식 들을때마다 긴 한숨만 나올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 번뇌에 시달리고 세파에 찌들린 삶을 살아가는 한낱 속인이 전생에 불교와 무슨 악연이 있고 현생에는 무슨 맺힌 것들이 많아 이렇게 하나하나 마다 불교와 대립하나?? 괴롭다. 차라리 한잔 술에 복잡한 머리와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낫을 것이다.
차라리 불교를 모르거나, 불교가 없는 세상에서, 불교도 내 마음 밖에 있다면 이다지 불교로 인한 번뇌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복잡한 머리 심란한 마음으로 인하여 거두절미하고 쓰겠다.
공부란 평소때 하는 것이지 특정한 계절에 특정한 장소에서 많은 무리를 오랫동안 모아 놓고 하는 것이 아님은 속세의 초등학생에게도 적용되는 기본에 속하거늘
하안거 3개월 동안거 3개월 모두 6개월
1년 12달중 하,동안거 6개월 빼고 나머지 6개월 동안 승려들은 도대체 뭐하며 지내길레 또 하안거니, 동안거니 해가며 산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또한 승려들이 (하,동)안거 3개월 했다고 안거 전후를 비교해 별반 달라진 것이 거의 없고 아무리 오랫 세월동안 (관습적, 전통적, 습관적으로) 안거를 해도 승려들의 수행, 공부의 수준 향상 또는 변화에 별반 달라짐이 없는 것을 보면 (하,동)안거라는 것은 별 효용성이 없고 따라서 할 필요성이 없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래도 굳이 안거를 해야 한다면 안거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국한되어야지 천편일률적으로 모두가 참가하는 안거는 그저 습관적인 관습이요, 타성에 젖은 전통일 뿐이다.
동안거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승려들이 말하는 것처럼 겨울철 동안 수행, 공부의 집중 기간이 아닌 또 다른 은둔 정도로 여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템플스테이`라고 것이 있다. 일반인이나 외국인이 절에 가서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1달 전후 `절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체험자는 누구나 불교에 대한 이해와 불교를 좋게 평가 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대 승려들이여! 시간이 있거든 매년 맨날 해 보았자 별 진전도, 소득도 없는 부질없는 짓 잠시나마 멈추고 속인들이, 중생들이 그대들이 사는 절에 가서 템플 스테이 하듯 "속세생활 스테이" 또는 "승려판 - 체험 삶의 현장"이라도 할 생각이 없는가?? 기간 또한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1달 전후가 적당할 것이다. 짧은 그 체험들이 그대들이 동안거 3개월 동안 겨울잠 자는 기간보다 더욱 의미있고 깨침이 있는 시간이 될것이다.
승려들이여! 승려들이여!! 그대 승려들이 동안거라고 갈 곳은 산이 아니라 그동안 너무나 외면하였던 고해(苦海)에 신음하는 중생들이 사는 속세임을 어찌 모르는가?
대안은 간단합니다.
출가 했다는 수행자들이 사판적 행위에 몰두하고 고위직 사판승(권승, 부자 승 등)일수록
고승대덕 행세하고 대접이 통하는게 정상적 불교입니까??
반대로 이판승들은 사판승들의 눈치밥이나 먹거나 말 한마디에 입퇴방 등 같은
운명 등이 결정되는 이런 현상이 불교 맞습니까??
말로만“사찰경영 재가중심으로 변해야 생존”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하든지, 법적, 제도적 개혁을 하여 사판승 제도를 폐기하든지 아니면 축소하든지,
재가불자들이 힘으로 승으로써 자격이 없는 자들을 몰아내든지 (한국 승가는 자정 능력도 없고, 승가 스스로 자정할 수 없는 구조),
고타마 붓다의 참불교를 받아 들이든지, 뭘하든지간에 구제불능 수행자들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같은건 접어 버리고 재가불자들이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불교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가능성이 엿보일텐데 기존 삿된 한국불교과 썩어빠진 수행자들의 권위에 찌든 어리석은 대다수 불자들은 절대 안합니다. 아니 못합니다. 그러나 깬 소수의 불자들은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소수에 의해 움직여 왔습니다. 그런 소수의 불자들마저 움직이지 않으면 진짜로 한국불교에 대한 희망을 접어야 합니다.
불교는 혁신이 필요하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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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법에대한 소신 좋은글 올려 주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