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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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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설교 | |
성경낭독 : 출 17:1-7; 요 4:5-42 본문 : 행 17:10-15 제목 : “베뢰아” |
베뢰아
얼마 전, JMS, 정명석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와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저는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그 만행들이 상세하게 보도되면서 사람들이 요동하고 있는 것이겠죠. 약간 염려스런 것은 어쨌든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기독교의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덩달아 욕을 먹기 십상이겠다 정도입니다. 그뿐 아니라 얼마 전 어떤 아파트 주민이 삼일절에 일장기를 걸어서 거의 모든 포탈에 도배가 되다시피 했는데, 엊그제 나온 뉴스에 의하면 그 사람이 목사였다고 합니다. 역시 또 교회가 엄청난 욕을 먹게 될 상황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이리 저리 참 어려운 시기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JMS를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이단’과 ‘정통 기독교’가 그 믿는 교리라던가 그런 것 말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때 취하는 스탠스, 그 태도에 있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사실 저는 이 점에서 염려스러운데, 한국교회 전반이 바로 이 점에 있어서는 ‘정통 기독교’의 태도보다는 ‘이단들이’ 취하는 태도와 유사하게 대응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적인 차이가 뭔가 하면, 정통 기독교회는 항상 어떤 종류의 공격에 대하여서도 그 문제를 갖고 토론하고 논의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단은 ‘자신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 구절들 외에’ 다른 본문들은 묻어버립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 자신들의 논리가 문제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혹은 자기 신도들에게 “저것은 사탄의 공작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문제를 회피합니다.
이단과 정통 기독교가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 가장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변될 수 있기 때문이고, 비진리는 결국 그 중심으로 파고 들어갈 때 거짓임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2천 년 역사(구약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동안)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여전히 건재하고, “고대인들의 낮은 이해력 때문에 있었던 어처구니 없는 종교”가 되어버리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여전히 항변되고 있으며, 파고 팔수록 더 놀라운 진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성영은 교수님의 강좌 소개를 보았는데, 거기 보니까 성영은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과학과 신앙이 가장 충돌되지 않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초현대적 사회에서도, 아니 심지어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성경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단은 자신들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진리를 가진 기독교는 공격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토론하고, 논쟁하고, 변증하고, 대답하면서 지내온 역사입니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가 ‘다른 의견들’, 심지어 ‘이단들에 대해서까지’ 가진 가장 결정적인 차이인데, 제가 가끔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신천지 같은 이단들에 대해 반대하는 행태를 보면 정통 기독교의 방식 대신 ‘종파주의적 방식’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에게 신천지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거의 알려주지 않고 그저 “신천지 OUT” 스티커만 붙이고, 신천지가 교회에 입장하는 것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진리다”라는 생각 대신에 그저 “내 편이 아니니까 넌 나빠”라는 사고방식을 부추깁니다. 기독교회는 언제나 진리를 파수하기 위하여 토론하고 논쟁해 왔고,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비록 의견이 달랐던 적은 있어도 비진리로 결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베뢰아”라는 말은 ‘말씀을 숙고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대변되는 용어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나게 된 바울 일행은 약 80km 정도 떨어진 베뢰아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여기 등장하는 말씀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더 너그러워, 간절한 말씀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입니다.
여기저기 많은 책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알려고 하는 이들”을 빗댈 때 사용하는 표현이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교회 역사의 진전 속에서 “베뢰아 사람들”은 마치 ‘올바로 듣는 사람들’의 표징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베뢰아 사람들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 너그러워서
베뢰아 사람들이 이런 ‘표징같은 사람들’이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이들이 ‘말씀을 들은 태도’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오늘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이 베뢰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씀을 어떤 태도를 가지고 들었는지, 그에 대한 점입니다.
단어의 의미
우리가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들은 태도에 대해 처음 만나게 되는 말은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더 더 너그러웠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너그러웠다”라는 말에 먼저 집중해 봅시다.
아마도 우리 성도들은 모두 이전 개역 한글판에 익숙하시니까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되었던 이전 버전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 단어가 “더 신사적이었다” 이렇게 번역되었고, 개정판에서는 “더 너그러웠다” 이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이나 “고귀한 혈통의”라는 의미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번역으로 보자면 이전 번역인 “신사적이었다”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한 태도’로만 보입니다. 반면 새 번역인 “너그러웠다”는 더더욱 의미부여가 안 되는 번역입니다. 둘 다 이 단어가 가진 원래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나마 가장 의미가 가까운 것은 “고상한” 혹은 “고귀한”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귀족적인”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KJV와 NIV, NASB 등 모두 noble을 씁니다. 이 말이 ‘귀족’에게서 나온 말이니까, “귀족적이다”, “기품이 있다”, “고귀하다”라는 식으로 번역이 되는데, 우리말 번역보다는 영어 번역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보더라도(3번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6절 말씀을 보면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에서 “문벌 좋은 자”에 사용된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딱 한 번 욥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고귀한 자”라는 뜻으로 말입니다(욥 1:3). 그래서 이 성경의 용례들을 보더라도, 귀족 가문이다, 고귀한 태생이다, 귀족적이다 라는 의미가 잘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을 “고상한”이나 “고귀한”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도록 합시다.
무슨 뜻일까?
자,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이 이러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요?
여러분은 베뢰아 사람들이 “더 귀족적이었다”, “더 기품이 있었다”, “더 고귀했다”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은 일”과 매치가 되는지 잘 이해가 되십니까? 그들이 더 고상하거나 귀족적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수준이나 교양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일반적인 관점을 따르자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을 ‘교양 수준이 높은 것’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귀족적인 것’, ‘고상하고 고결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과 그대로 매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씀을 잘 듣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가르칩니다.
디모데후서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오는 유명한 구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는 말씀에서, 성경에 대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태도는 ‘전 성도들에게’ 향한 것입니다. 어떤 고상한 사람들, 어떤 귀족적이고 기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성경 읽기의 태도가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해 경청해야 합니다. 아마도 디모데가 목회하던 교회에는 귀족들만 있던 것이 아니라 장사치도 있었을 것이고, 공장 근로 노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요일까지 열심히 시장에서 생선을 팔다가 주일에 교회에 나온 평범한 아주머니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더 잘 듣게 된 것을 두고 “고상하다” 혹은 “귀족적이다”라고 말한 것을 문자 그대로 ‘진짜 귀족들의 태도를 가진 것’, 혹은 ‘고상하고 고귀한 인품이나 행동 태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듣는 태도를 두고 “고상하다”고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떤 입장에서’ 이들이 “고상하다”한 것일까요?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태도를 두고서 “마치 귀족들처럼” 그렇게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다음 부분을 보면, 성경이 ‘어떤 사람들을’ 고상하다 했는지, 그들이 말씀을 ‘어떻게 들었기 때문에’ 귀족적이라고 했는지,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은 방식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은 방식은, 오늘 말씀에 보면 두 가지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는 것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는 것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고, 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고상한 것”입니다.
1. 열심
첫 번째 태도는 ‘열심’입니다.
우리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구절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모든”(헬. 파스)이라는 말과 “열심, 소원”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절한 마음”이라는 말을 아주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모든 열심으로”, “모든 소원을 담아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베뢰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졌던 태도의 첫 번째 요소를 ‘열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주일에......보빈이가 관악교회로 이명을 갔으니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정미란 성도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정미란 성도님 이야기가 보빈이가 관악교회에 가서 매우 빡세다고 하더라, 엄청 힘들다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관악교회에서는 우리 교회 카페에서 “날마다 말씀 묵상”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하는데, 그걸 전체 성도들이 다 필수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빠짐없이 다 그날의 말씀을 읽고 그 묵상한 것을 리플을 달거나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빈이도 이걸 매일 빠지지 않고 해야 하니까 엄청 힘들다고 했더라는 겁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 나는 성도들의 경건 생활 챙기는 것을 너무 느슨하게 하고 있나?”라고 잠깐 생각했더랬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어려서부터 해 오면서, 특히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회를 제대로 잘 다니지 않았으니까 대학을 가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 보겠다고 한 후에, 제가 한국교회에 대하여 많이 느낀 감정 중 하나는, ‘피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능동적인 이들은 교역자들밖에 없고, 다들 ‘시키는 일만’ 완수하는 데 올인해 있는 교회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특정 직분을 맡으면, 예를 들어 교사를 하거나, 부장을 하거나,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를 하면, 아주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가정교회가 많으니까, 그런 가정교회 시스템에서 목자를 하면 아주 열렬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보통의 성도들은 ‘매우 피동적’입니다. 시키면 한다는 점에서 성도들이 착한 면도 있지만, ‘스스로 알아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잘 못합니다. 그래서 경건생활 같은 것도, 적어도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성실하게 매일 경건생활 하는 성도들은 전체 교회에서 10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들이 ‘스스로’, 혹은 ‘마음에 동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주체적입니다. 성도의 언약적 삶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코 꿰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마음이 동하여 해야 한다......그런 생각인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데, 안 하는 사람은 안 하는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제아무리 교육을 쏟아붓더라도, 거기 안 오면 그만이고, 참여 안 하면 그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날마다 말씀 묵상”을 하고 금요 스터디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서, 신앙의 수준이 막 자라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교회의 이런 프로그램에 아무 데도 참여하지 않으니까, 10년이 지나도 신앙이 제자립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는 큰 숙제입니다. 그래서 관악교회 이야기를 들으니까, 목사로서 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조금 더 해야만 하는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까?
글쎄요, 이에 대한 답은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 보도록 합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적어도 베뢰아 성도들은 말씀에 있어 ‘열렬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외지로부터 온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니까, 이것을 “모든 마음을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단어가 ‘열심’, ‘열정’, ‘소원’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임을 감안하면,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적어도 ‘간절한 소망을 실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정말 주일에 여러분을 향하여 쏟아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온 열망을 다 실어서’ 듣고 있습니까? 제아무리 좋은 설교가 있어도 내가 안 들으면 그만입니다. 우리 교회 온 지 얼마 안 된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웹하드에 들어가니까 거의 보물창고 같더라!” 우리 교회 웹하드에는 지난 14년간 우리가 해왔던 온갖 종류의 금요 스터디 강의 내용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스터디가 적어도 한 주에 한 시간 반씩은 하니까, 1년에 40주만 한다 해도 1년에 60시간, 10년이면 600시간 분량입니다. 설교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한 주에 두 시간, 1년이면 100시간, 10년이면 1,000시간 분량입니다. 적어도 들을 수 있는 말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천 시간은 쌓여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도 듣지 않으면, 그게 아무리 많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말씀에 대한 태도는 ‘그가 말씀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열심’입니다.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말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것”(딤후 3:2-4)인데, 이때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는 대신에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4:3)했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4절) 했습니다.
이 말씀이 알려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사욕’ 혹은 ‘내 귀를 간지럽게 해 주는 것’은 반대편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세일수록 사람들이 ‘자기의 욕구를 해소시켜 주는 이야기’들에는 더 밝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적 욕망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와 같은 방향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반대 방향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쾌락의 극치의 시대’, ‘사욕의 극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재미없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귀히 여기십니까? 어떤 사람들을 “고상하다”, “귀족적이다” 하십니까?
자원하여! 스스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강한 열망을 품는 사람입니다!
설교 시간에 개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나현진 형제는 교회 온 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현진 형제는 ‘말씀을 배우는 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서를 읽는 것이 얼마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가를 제가 계속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습니다.
심방을 갔을 때 가장 실망스런 반응은 “요즘 말씀을 잘 집중해서 듣지 못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왜 집에 돌아가서 다시 말씀을 파헤치지 않습니까? 주중의 많은 시간들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일들’을 위하여 투자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수많은 일들’, 예를 들면 멍청히 유튜브를 보고 있다거나, 아무 생각도 없이 웹 페이지를 읽고 있다거나, 이렇게 해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서, 왜 그 시간을, 말씀을 사모하고 열렬히 탐구하는 데는 쓰지 않습니까? 단지 귀찮은 일이어서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귀히 보십시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2. 상고하다
다음 “상고했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앞에 말이 더 덧붙여져 있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했다”입니다. 즉 이 말은 그들이 바울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과 대 보았다’는 뜻입니다. 여기 “상고했다”는 말은(헬. 아나크리노) “자세히 공부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 보자면, 이 단어는 ‘사법적 판단’에 사용된 말입니다. 재판에서 검사나 변호사가 피의자나 증인을 상세하게 심문하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의미는, 베뢰아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정말 그렇단 말이야?”하면서,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성경을 펴고, 책을 펴면서 “열심히 공부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
이 베뢰아 성도들의 두 번째 태도, 곧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했다”는 것은 많은 경우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고, 이는 그릇된 방식으로 사실 동기부여가 되기도 합니다.
이 ‘그릇된 방식’이란, 말씀을 단순히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라는 말을 “이것이 참말이냐 거짓말이냐”라는 식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저는 20대 때 이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베뢰아 성도들”의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가르쳐 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들 설교를 다 믿지 마! 엉터리일지 몰라! 성경이 진짜 말하는 바가 아닌 거짓 진리를 유포하고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이게 진짜 그 뜻이 맞나?”라는 의심의 태도를 가지고 말씀에 접근해야 올바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어!
아마 저와 비슷하게, 말씀을 이런 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 혹은 그렇게 과거에 생각했던 분들이, 여기에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죠. 실제로 이런 예가 많기 때문에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거의 모든 목사님들이 참 진리만 가르친다면, 누가 이런 말을 해도 그냥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사장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평신도인 내가 봐도, 저건 너무 앞뒤가 안 맞는데?”하는 설교가 너무 많고, 전해지는 말씀의 수준이 너무 낮거나, 일반 세상의 윤리 의식에 비춰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느샌가 우리들 안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런 태도는 참 슬픈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억합시다.
우리는 성경을 ‘비판하기 위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지, ‘잘못을 판별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 현실이, 이렇게 나쁜 예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비판하고’, ‘비난하기 쉬운’ 그런 현실 속에 살고 있지만, 일단 원리를 분명히 합시다. 성경은 ‘비판하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들으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뢰아 성도들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는 “네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검증해 보겠어”라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바른 의미 : 칼빈 선생님의 해설을 통해
그러면 이 말이 어떤 의미인가? 칼빈 선생님의 설명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합당치 않은 주장이 생길 수 있다.
첫째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들이 가르침을 듣고 옳고 그름을 점검한 것은 오만한 것이다. 이는 누가가 잠시 전에 말한 거리낌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것 같다.
둘째로, 점검한다는 것은 의심을 가졌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의 점검은 믿음이 없는 표식이다. 믿음에는 확신과 확실성이 항상 결합되기 때문이다.
칼빈 선생님은 베뢰아 성도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어떻게 들은 말씀을 두고 “옳은가 그른가”를 논하는데, 앞서 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이죠. 옳은지 그른지를 논하는 태도로는 간절히 말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믿음’이라는 성격에 대한 것인데, “옳으냐 그르냐 점검을 하겠다”는 것은 소위 말하자면 ‘의심’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1)
첫 번째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마치 이들이 자기들 스스로 판단자들이 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토론하고 있는 것처럼 누가의 말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불로 금을 시험하듯이, 성경의 규범을 좇아 바울의 교훈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베뢰아 성도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은 ‘맞냐 틀렸냐 한 번 따져보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베뢰아 성도들은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모하고 있는 말씀과 여기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이 ‘정말로 일치하는지’ 불타는 마음으로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단어의 뜻을 말씀드렸죠? 사법 기관에서 조사하듯이 말입니다.
이 두 차이를 분명히 아시겠습니까? 제가 앞서 말씀드린 “옳으냐 그르냐 점검을 하겠다”는 태도는 ‘내가 말씀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잘못에 빠집니다. 어떤 설교를 들을 때, 어떤 책을 읽을 때, 어떤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 우리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어디 잘 하나 한번 볼까?”라는 태도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이런 태도가 아니어도 사전을 펴서 하나하나 대가면서, “어디 보자, 어디가 틀렸는지 찾아볼까?” 하는 식으로 말씀을 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 성도들의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탐구했습니다. 그들이 들은 복음이 “정말로 자신들이 가진 성경과 일치하는지” 애타는 마음으로 답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다릅니다. 이것은 ‘내가 말씀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는 답을 구하는 자의 소원이 담긴 태도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답을 구하는 자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답을 주시는 것을 굳세게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탐구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단순한 비판자’일 수 없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단순한 비판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열렬히 추구하고 탐구하는 탐구자’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이들을 향하여 “고상하다”, “고귀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2)
그래서 둘째로는
믿음은 의심의 반대가 되며, 이것 저것을 따지는 사람은 의심을 가진 사람이다......그러나 믿음에 대한 확실성은 확증을 배제하지 않는다. 여기서 ‘확증’이라는 말은 전에 의심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진리가, 이제 우리 마음에 더욱 잘 새겨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칼빈 선생님의 설명처럼, 우리는 “이것이 그런가 하여”라는 태도를 ‘단순한 의심’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베뢰아 성도들이 ‘의심’했었다면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의심’은 ‘믿음’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이 성경에서 칭찬받고 있다면, 그들의 이런 태도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쉬운 의심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지금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칼빈 선생님의 설명처럼, 신앙에는 ‘확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는 ‘의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확증’을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전에 저는 기드온이 양털 한 뭉치에 이슬이 내리게 하는 시험을 하나님께 구한 것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믿음이 없어서’ 구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가끔 흔들립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확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찬’을 주시는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말씀을 알더라도 우리는 흔들리는 존재이므로, 우리에게는 ‘확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것을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확신을 가지고 심령 속에서 성령의 증거를 가진 어떤 것은 때로 성경을 상고함으로써 믿음에 효과를 얻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곧 “성경의 상고”가 “믿음에 효과를 얻는 것”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뢰아 성도들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는 ‘의심’이 아니라 ‘확증’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도 기억합시다. 베뢰아 성도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의 태도로 말씀을 탐구한 둘째 이유는 ‘확증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연결시킵시다. 우리도 ‘확증을 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의심하니까 확증이 필요하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믿음이 더욱 강력해지기 위하여 성경을 탐구하는 일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더욱 단단한 믿음, 흔들리지 아니하는 확신을 갖는 일’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렇게 말씀을 정리했습니다.
이들은 “너그럽다”, 곧 고상하였고, 귀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출신성분’이나 ‘단순히 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첫째, 말씀에 대한 그들의 열심과
둘째, 그 열심을 갖고 열렬하게 말씀을 탐구/상고하여, 참된 진리에 도달하고, 그로 인하여 확신과 확증을 얻으려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16세기, 17세기, 종교 개혁과 그 이후의 시대의 성도들의 삶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얼마나 이들보다 하나님 앞에 열심에 있어 떨어지는가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즐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세상에서 이룰 욕망도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욕망은 접어두고, 잠재우고, 뒤편으로 미뤄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은 하루에 일곱 시간도 할 수 있지만, 성경을 읽는 것은 10분을 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기이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삶이 너무 복잡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왜 필요하며, 무엇 때문에 놓지 않고 잡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영원을 가져다줍니까? 단지 잠깐의 쾌락이나 욕망일 뿐 아닙니까? 왜 이 깊은 진리 속에서 헤엄치는 일을 향하여 인생을 좀 더 투자하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사랑하고, 그 안에 사는 일에 삶을 좀 더 투자합시다. 그래서 베뢰아 성도들처럼 칭찬받는 우리가 됩시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밥 먹을 때 30초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 전혀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진심이라고 하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건강한 도전’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