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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9:51-56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내용분해 : A.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행 길에 사마리아를 경유하려 하심 (51-52절)
1.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상 사역을 마감할 때가
가까운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결심하심 (51절)
2. 사마리아를 경유하기 위해 제자 중에
사자를 한 동네에 미리 보내 예비하게 하심 (52절)
B.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냉대하자 제자들이 격분함(53-54절)
1.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선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음 (53절)
2. 이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격분하여
불 심판을 내릴 것을 예수님께 제안함(54절)
C.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과 충돌하지 않으시고 우회로를 선택하심 (55-56절)
1. 예수님께서 격분한 야고보와 요한을 오히려 꾸짖으심 (55절)
2 . 다른 동네로 우회하여 여행하심 (56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아침을 허락해 주시고, 오늘의 행복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때는, 답답함과 근심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땐 우리의 삶은 여유롭고 행복할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과 안식을 마음껏 누리는 주일을 맞이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일평생을 책임져주시며, 우리에게 그냥 내 안에 있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이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누가복음 9:51-56절 말씀으로 예루살렘 여행 시작과 사마리아인들의 예수님의 배척 및 우회로 선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 문단에서 시작하는 51-19:27 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인 A.D 29년 가을 무렵부터 이듬해인 A.D.30년 봄 무렵까지 약 6개월 동안에 유대(Judea) 및 베레아(Perea) 지역에서 사역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대 및 베레아 지역 사역을 제 19-20 장의 두 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에서는 제10장 단 한 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반해 누가복음은 무려 열 장에 이르는 지면을 할애 할 정도로 예수님의 유대 및 베레아 지역의 사역을 다른 공관복음서에 비해 매우 상세히 기록하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긴 여행 과정에서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가능한 자세히 추적해 보고자 하는 누가의 역사가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은 사건(Events) 보다는 강화(Discourses) 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총 23개의 비유 중 16개가 이 부분에서 발견되며, 반대로 총 20개의 이적 중, 단 4개만이 이 부분에 기록되었을 정도로 비유와 교훈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사건이나 교훈이 행해진 구체적인 장소가 불분명하다는 것도 이 부분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9:51-19:21의 내용을 지역에 따라 좀더 세분해 볼 수 있는데, 곧 9:21-13:21 까지를 후기 유대 사역, 13:22-17:10까지를 베레아 사역, 마지막 17:11-19:27 까지를 최후 순회 전도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룰 9:51-10:37 까지의 내용은 후기 유대사역 기사의 전반부로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 초기의 몇 개의 일화들(Episodes) 및 70인 전도와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9:51-56 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출발하시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의 시작은 곧바로 그의 십자가 수난의 절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역에서의 사역 기간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단,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51절), 예수님께서 유대 사역을 수행하시는 도중에도 자신의 최종 목적지 (Final Destination) 인 예루살렘에 늘 시선을 집중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 구속 사역을 완수하게 될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것은, 자신에게 닥쳐올 험난한 십자가의 길 (the Way to the Cross) 을 자발적이고도 의지적으로 수용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첫 문단에서 한 사마리아 동네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사건은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수난을 예표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곧 십자가로 향하는 길임을 정확히 아셨던 반면, 제자들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을 때 하늘로서 불 심판을 내리자고 제안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은 (54절) 제자들이 예수님의 거듭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9:57-62 의 문단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들의 경우를 통해,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들에 대해 다각적으로 교훈하시는데, 이는 문맥상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으면서도 그 길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교훈하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 일 주일이면 가능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길을, 여러 차례 장소를 이동하시면서 6개월 동안에 걸쳐 하신 이유에는, 어쩌면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마지막 사역을 수행하고자 하시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을 교훈하고 훈련하고자 하시는 측면도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1-16은 70인 전도 파송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껏 주로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수행해 오셨는데, 이제 자신의 공생애 사역 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유대의 많은 마을에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 70인의 제자를 따로 세워, 전도단을 구성하고, 그들을 파송하시며, 동시에 그들이 복음 전도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교훈하고 나아가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어 10:17-24에는 70인 전도대의 성공적인 귀환 보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 계시에 관한 오묘한 섭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복음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졌으나(hidden),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신 (revealed)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십니다 (21절).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과, 자신이 택하여 계시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22절). 이는 후에 바울이 말한 바대로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세상의 지혜의 방식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적으로 미련해 보이는 전도의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택하셨다는 오묘한 구속사의 비밀을 보여 줍니다(고전 1:21).
마지막 10 :25-3 은 예수님과 한 율법사와의 대화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대화의 내용인즉 영생의 방법과 이웃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물었는데 (25절), 이에 대해 주님은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고 다시 역질문하심으로써 (26절) 율법사 스스로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을 하게 하셨다. 그 대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었습니다(27절). 이는 율법의 대강령으로, 이 주님의 역질문에는 원칙적으로는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28절). 그러나 사실 사람이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감안할 때, 주님의 말씀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구약 율법이 예언하고 있는 구속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율법사는 율법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자 자신의 이웃에 대한 선행을 과시할 목적으로 주님께 다시금 ‘내 이웃이 누구인가 ’ 라고 질문을 하였는데(29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the Parable of the Samaritan)’를 통해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기 전에, 내가 다른 사람의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바로 그 자신이 그러한 선한 이웃이 되어 이 땅에 오사 죄인들을 구원하는 구주가 되셨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하였던 율법사가 정작 율법의 근본 정신에는 무지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윗문단에서 언급된 내용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어졌다는 사실과 문맥적으로 밀접히 연결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알려지지 않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단순한 성경 지식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에 대한 정보(Inf ormation) 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U nderstanding) 는 별개의 차원입니다.
메시야와 더불어 길을 동행하면서도 그 길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율법의 지식에 정통하면서도 정작 율법 정신의 실천과는 무관했던 율법 전문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해야 할까요? 메시야가 행했던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던 고라신과 뱃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끝내 그 기적들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실패한 사실에서(10:13-15) 우리는 어떤 경고를 받아야 할까요?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고 있노라고 자족하고 있기에는 성경의 무지한 인물들이 우리의 모습을 너무 많이 투영(投 )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투영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교만과 허영을 버리고 다시 한번 어린아이들과 같은 겸손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라고 한 시편 기자의 간구를 우리 자신의 기도로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복음은 징계하되 보복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54절을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주님 일행을 거부하는 것을 본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과연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보아 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 이름 붙여 주신 자들답게(막 3: 17) 격렬하고 과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본절에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아마도 엘리야가 자신을 잡기 위해 아하시야왕이 보낸 군사들을 불을 내려 멸한 것을 재현해 보고자 했음에 분명합니다(왕하 1:9-12). 또 엘리야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그들이 주님을 대적한 사마리아인들에게 보복하고자 한 것이 완악함의 결과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야고보와 요한이 시대를 구분할 줄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즉 그들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는 보복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은혜의 시대에는 보복이 결코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자기를 희생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요 3:17). 그러므로 보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보복 의사를 묻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고 다른 촌으로 돌아가는 온유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56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복음이 말씀하는 징계와 인간의 보복에 대해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복음과 교회의 질서를 위해 은혜로운 방법으로 징계할 것을 명하셨지, 결코 죄지은 자들을 심판하고 복수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거부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 증거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을 지언정, 결코 그들에게 불을 내려 멸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5절).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교회 내에서 징계를 행할 때나 교회 밖에서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대할 때, 이들을 결코 원수 대하듯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원수 갚을 일이 있다면 우리의 손으로 행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께 맡기며 원수 갚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해야 할것입니다(롬 12:19.20).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무력과 폭력이 아니라 원수까지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변화시키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