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시조 김선평 태사공(太師公)
1. 출생 시조 태사공은 신라 효공왕(孝恭王) 5년(901년) 흥덕궁(興德宮)에서 태어 나셨다. 공의 용모는 봉(鳳)의 눈과 용(龍)의 수염, 별의 정기(精氣)와 호랑이의 위엄을 갖추셨다. 효공왕은 진성여왕 때의 실정을 만회코자 노심초사하였으나 뜻을 이루시기에 너무 늦었었다. 결국 보좌에 오르신지 16년 만인 912년에 붕서(崩逝)하였으니 유일한 혈육인 우리 시조는 겨우 춘추 11세로 보위에 오르지 못하시고 경애왕(景哀王) 3년(926) 춘추 26세에 고창 성주(지금의 안동시)로 나가셨다. 지리상, 군사상 주요 진성에 성주가 되셨으니 그 임무 또한 막중한 것이었다. 2. 시대상황 그러나 이때는 왕실내외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시기였다. 우선 왕실내부에는 왕위계승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고 또 재위기간도 짧았으며 걸출한 왕도 없었다. 특히 경문왕(景文王: 861~875)이후 아들 둘이 즉위하지만 헌강왕(憲康王: 875~886)은 재위기간이 불과 11년 이였고, 정강왕(定康王: 886~887)의 경우엔 1년 이였으며, 딸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이 그 자리를 이어 10년간 통치하였으나 완전히 정치를 망쳐 놓았다. 왕실에서는 하는 수 없이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孝恭王)이 위를 이어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기울어진 왕실의 쇠운을 바로 세우기엔 역부족이였다. 신라의 서북지방을 살펴보면 죽주(竹州: 竹山縣. 지금의 용인시)에 기훤(箕萱)이란 자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시)에는 양길(梁吉)이란 자가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때 세달사(世達寺)의 중 궁예(弓裔)가 891년(眞聖女王5)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대우가 좋지 않자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는 895년(진성여왕9) 10여군을 탈취하는 전공을 세우더니 901년 드디어 왕으로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그러다가 세력이 더 커지자 904년(孝恭王8)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수도를 철원(鐵圓: 지금의 鐵原郡)으로 옮기었으며 그 영역은 오늘날의 강원, 경기, 황해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또 진도와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시)을 점령하여 서남해 상권을 장악하였다. 이런 전과로 오만해진 궁예는 포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여 부하들의 신임을 잃었다. 918년(景明王2)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국을 세웠다. 또 한편 서남지방에는 상주 농민의 아들 견훤(甄萱)이란 자가 892년(眞聖女王6) 완산주(完山州: 지금 全州)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무진주(武珍州: 지금 光州)를 습격하였으며 900년(孝恭王4) 10월 견훤이 갑자기 신라왕도 경주로 쳐들어가서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던 경애왕을 잡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고 왕제(王弟)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궁중의 진보(珍寶)와 병장(兵仗)을 털어서 달아났다. 뒤미쳐 신라의 청을 받고 달려오던 왕건은 공산(公山: 팔공산)에서 대전투를 벌렸는데 왕건은 김락(金樂), 신숭겸(申崇謙)을 잃고 겨우 탈신도주할 수 있었다. 견훤은 그 여세를 몰아 다음 해 5월에는 강주(康州: 지금 진주)를 습격하고 11월에는 부곡(缶谷)을 공격하였고, 929년(太祖12) 7월에는 갑병(甲兵) 5,000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 지금의 의성군)를 공격하여 성주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이렇게 연전연패한 왕건은 통곡하며 「나는 왼손과 오른손을 다 잃었다」 라 할 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견훤은 의기백배하여 거침없이 고창성(古昌城)으로 쳐들어 왔다.
3. 고창대첩(古昌大捷)
(1) 경과(經過) 930年(敬順王4, 高麗 太祖13) 정월 병술일(丙戌日)에 후백제 견훤군이 기습적으로 쳐들어 와서 석산(石山: 지금의 安東市 臥龍面 西枝洞)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군이 저수봉(猪首峰)을 넘어서 불과 500보 밖에 있던 견훤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승패가 결정되었다. 양군이 전투를 하고 있을 때에 우리 시조께서는 성주로써 고을사람 김행(一名 幸, 훗날 고려태조로부터 權으로 賜姓을 받았음)과 장길(張吉) 등과 소속 군사들을 거느리고 견훤군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복배(腹背)에 공격을 받은 견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지금 안동댐의 보조댐이 있는 곳으로 퇴각하였다가 도주하고 말았다.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병졸들은 사분오열되어 좌왕우왕하다가 8,000여명이나 사살되었다. 이 전투에 대하여 《고려사》권2 태조13년 정월 병술조에는 「왕(王建)이 몸소 장군이 되어 고창군 병산(甁山)에 진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쳤는데 서로 500보정도 떨어져 있었다. 드디어 전쟁을 하여 저녁에 이르러 견훤이 패주하였다.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고 죽은 사람은 8,000여인이다.」 또, 《영가지(永嘉誌)》에도 「병산은 안동부에서 북쪽 10리에 있으며 고려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이곳에서 싸움을 했는데 그 때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 김악은 사로잡혔다. 죽은 사람은 8,000이라 했는데 시체가 쌓여 개울을 막았고 물은 역수하여 거꾸로 흘렀다.」라 기술되어 있다.
(2) 고창대첩에 따른 논공 태조 왕건은 이 전승의 의의를 깨닫고 전쟁이 끝난 뒤 5일 만인 정월 경인(庚寅)일에 성주인 우리 시조에게는 대광(大匡: 正二品上)을 내리시고 고을 사람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권행과 장길에게는 각각 대상(大相: 正四品上) 벼슬을 내렸다. 이러한 직품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고려건국 후 이 전쟁이 있기까지 귀순(歸順) 귀부(歸附)해 온 자들에게 내린 향품직(鄕品職)을 보면 태조 6년11월 진보성주(眞寶城主) 홍술(洪術)의 아들이 고려에 귀부하였을 때 그에게 원윤(元尹: 正六品)을 내렸고, 태조 11년7월 이찬(伊餐)을 지낸 진경(進慶)이 죽었을 때 그에게 내린 관직이 증대광(贈大匡)이였으며 태조13년 8월에 우릉도(芋陵島)에서 사신으로 온 백길(白吉)에게는 정위(正位: 從七品), 토두(土豆)에게는 정조(正朝: 正七品)을 내렸을 뿐이다. 우리 시조는 삼한(三韓) 통합의 대업이 이루어진 후에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에 책록되어 공신각에 화상을 모시게 되었으며 또한 태조가 우리 시조를 만나면 아부(亞父)로 호칭할 정도였다. 또한 최고의 벼슬인 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를 내렸다.
(3) 고창대첩의 영향 1) 《고려사》에서도 「고창지첩(古昌之捷)」이라 할 정도로 고려의 삼한통일 대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겠다. 그간 후백제에 계속 밀리거나 패하기만 하던 고려군에게 사기를 북돋아준 계기가 되었다. 2) 전쟁이 끝나고 5일이 되던 날 이 대첩의 소문이 크게 퍼지면서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郡縣)이 차례로 항복해 왔다. 이는 고려군의 힘의 우위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며 또한 대군(大郡)인 안동의 향배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3) 김상기(金庠基)는 이 대첩의 영향에 대하여 「이 싸움은 고려와 후백제의 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영안(永安: 豊山)ㆍ하곡(河曲: 安東부근)ㆍ직명(直明: 安東부근)ㆍ송생(松生: 靑松)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복속케 되었으며, 동부연해 지방에 있어서는 명주(溟州: 江陵)로부터 흥례(興禮: 蔚山)에 이르기까지 110여 성이 다 고려에 붙게 되었고 우릉(芋陵: 鬱陵島)도 고려에 내속케 되었다.」고 하였다. (4) 태사묘(太師廟) 향사(享祀) 전술한 바와 같이 930년(太祖13) 신라, 고려와 싸워서 승승장구하던 후백제가 고창성에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고려 왕건 군과 고창성주이신 우리 시조, 고을사람 김행(金幸), 장길(張吉)의 협공에 대패하여 군사 8,000명을 잃고 도주하였다. 그 후 후백제는 가족 간의 내분으로 6년이 채 못 되어 망하고 고려가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창대첩에 공이 많았던 이 세분의 공을 치하하여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 (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으로 서품(敍品) 하고 군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 곳을 식읍지로 하였다. 그리고 이 세분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김, 권, 장의 시조가 되셨다. 안동사람들은 이 세분의 공을 잊지 못하여 삼공신(三功臣) 위판(位版)을 처음에는 부사(府司)에 모시다가 객사(客舍)로 옮겨 모시던 중 1542년(中宗37) 부사로 온 김광철(金光轍)이 지금의 묘(廟) 자리에 묘우(廟宇)를 짓고 위패를 옮겨 모시고 정단(正旦), 단오(端午), 추석(秋夕), 동지(冬至)의 사절사(四節祀)를 지내다가 1585년부터는 춘추로 즉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로 줄여서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1608년(宣祖41) 11월 삼공신위판(三功臣位版)을 개조하였으며 1613년(光海5) 7월 구묘(舊廟)를 증축하고 삼공신묘를 태사묘(太師廟)로 개칭하였다. 1721년(景宗元年) 3월 16일 서문(西門)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 부사청(府司廳)도 타버렸으나 묘우(廟宇)는 무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위판을 길안면(吉安面) 국난계곡(菊蘭溪谷) 깊은 동굴로 옮겨 3년이나 봉향(奉享)하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옮겨 모셨다. 6,25동란 때에는 위판을 성곡동(城谷洞) 안동 장씨의 광풍정(光風亭)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음해 8월 13일 능동(陵洞) 안동권씨재사(安東權氏齋舍) 보판각(普板閣)으로 옮겨 모셨다가 1958년 9월 다시 중건한 묘우로 옮겨 모셨다. 태사묘의 위치는 안동시 북문동 24의 1번지에 자리하며, 대지는 1.229평이다. 건물은 태사묘우(太師廟宇), 숭보당(崇報堂), 경모루(景慕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주사(廚舍), 전사청(典祀廳), 안묘당(安廟堂), 보물각(寶物閣), 전차각(戰車閣) 등이 있다. 이것은 기념물 제15호와 보물 제451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각에 소장되어 있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유물은 주칠탁잔(朱漆托盞), 혁과대(革跨帶), 관(冠), 동인(銅印), 포선(布扇), 옥관자(玉貫子), 은구개합(銀鉤蓋盒), 은시저(銀匙箸), 노국공주(魯國公主)의 가죽신, 고견포(古絹布), 공민왕(恭愍王)의 교지(敎旨) 등 12종 22점이 있다.
(5) 시조묘단(始祖墓壇) 왜 시조산소를 묘단이라 하는가? 그 이유는 고려후기의 오랜 전란과 자손이 번성치 못하여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인조4년(1626)에 비로소 묘단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묘단의 위치는 안동시(安東市) 서후면(西後面) 태장동(台庄洞)이며 천등산(天嶝山) 좌록(左麓) 자좌(子坐) 봉정사(鳳停寺) 동편에 설단하였다. 제향(祭享)은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봉행한다. 시조 산소가 오랫동안 실전되었음에도 찾을 여력을 갖지 못하다가 청음(淸陰) 상헌(尙憲) 상공(相公)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화의를 반대하고 소산 청원루(淸遠樓)에 수년간 기거를 하였다. 이때 공은 시조의 묘소를 찾으려고 천등산 산신에 제사를 올리고 향중의 여러 일가 사람들과 같이 탐문과 답사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1626년(仁祖4) 김연(金縯)공이 시조묘소를 찾으려 다니던 중에 사냥꾼들이 매가 천태암(天台?) 유점리(鍮店里) 김태사 묘골로 날아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대책을 강구하려 향중의 일가들이 의논하였으나 역부족이라서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68년이 지났을 때 안동부중에 살고 있던 호장공파(戶長公派) 시언(時彦)공이 간인(奸人)들의 작변(作變)을 확인하고 상경하여 몽와(夢窩) 창집(昌集) 상공(相公)을 찾아가서 실정을 고하니 몽와공(당시 대사간)이 안동부 동헌에 고발하여 간인들을 문초케한바 태사공의 유해는 작은 궤에 넣어 산북쪽 이일랑(李日郞)의 밭머리에 물고 지석은 깨어서 천태암우물에 버렸다라는 공초를 받아 내었다. 이에 천태암 우물을 준정하여 지석파편과 파쇄지석을 찾았고 유해가 든 소궤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1695년(肅宗21) 10월에 시조 태사부군(太師府君) 묘단을 비로소 완성시키고, 1703년 (肅宗29) 장석을 풍기에서 운반하여 세웠고 그 다음해 묘단전면에 「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金宣平祭壇」이란 묘표(墓表)를 세웠다.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김선평제단)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묘단과 계축을 개수한 일이 있으며 투장(偸葬)이 들어 여러 차례 굴이(堀移)한 적도 있었다. 2006년 11월 30일 시조묘단 대 수축이 있었다. 이날은 시조시향정일이여서 경향각지의 참제한 후손들이 모인 가운데 고유를 하게 되었다. 이번 묘단수축은 현종 중천(中千:의병대장 福漢 증손자)의 제의로 진행되었으며 대종중 회장 형진의 노고가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