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갯가 사적지를 찾아
유월 하순 금요일이다. 연일 녹음이 짙은 산자락을 누비며 시간을 유유자적 보내고 있다. 빨갛게 익은 제철 산딸기를 즉석에서 실컷 따 먹는 간식 체험은 덤으로 누린다. 어제는 산중의 멧돼지가 산딸기나무를 뭉개서 쓰러트려 놓고 먹잇감으로 삼는 괴이한 장면도 목격했다. 자고 나니 옆구리가 가려워 살피니 벌레 물린 자국이 아닌 옻 알레르기인 듯해 병원을 찾아야 할 사정이다.
아침 식후 아파트단지 이웃 동 뜰에 꽃을 가꾸는 꽃대감과 밀양댁 안씨 할머니를 뵙고 인사를 나누었다. 밀양댁은 여든이 넘은 고령임에도 매일 아침 꽃밭에 내려와 꽃을 돌보는 정성이 대단했다. 초등학교 친구인 꽃대감은 가꾸는 꽃을 유튜브로 소개하면서 시청자에게 꽃씨도 나누고 있다. 엊그제는 이른 봄에 꽃을 피우고 휴면기에 든 자화 부추 구근을 나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나는 친구와 헤어져 원이대로를 걸어 상남동 피부과에 들러 옻 알레르기에 바를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약을 탔다. 이후 진해 용원으로 가는 좌석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 안민터널을 지나 진해구청에서 동진해로 갔다. 대발령과 K조선소를 지난 웅천 성내에서 내렸다. 조선시대 진해현 현감이 근무했던 곳은 지금의 웅천과 진동의 두 군데로 짐작되는데, 둘 다 사적이 남아 있다.
진동에는 동헌의 한옥 구조물이 현존하고 있다. 웅천에는 조선시대 축조된 읍성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일부가 복원되었다. 진해는 대마도와 가까워 왜구가 침탈하면 직선거리로 가장 가깝다. 읍성 기능이 왜구 침략에 대한 방어적 기능보다 조정의 왕실 행정이 지방에까지 미친다는 상징적인 효과가 더 컸다. 복원한 성터의 머릿돌은 당시 인부들의 출신지와 이름이 새긴 흔적도 나왔다.
읍성 성터를 둘러보고 인근의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외양만 바라보고 스쳐 지났다. 주기철 목사는 우리 집안과 같은 신안 주가로 웅천 출신인데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기독교 교우들은 올곧은 신앙심을 가진 주기철 목사를 대단한 분으로 숭앙하고 있다. 주기철 기념관은 오래전 두 차례 답사해 남문지구 세스페데스 공원으로 갔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처음엔 사도마을에 조그맣게 있었는데 남문지구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조선시대 가마터로 옮겨 와 공원으로 조성했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세스페데스는 스페인의 신부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섞여 우리 땅에 잠시 머물렀다. 네덜란드 상인으로 난파선이 되어 표류하다 제주도에 닿은 하멜보다 60여 년 앞선 때였다.
세스페데스 공원에서 제덕만으로 가는 괴정 고갯길 도로변 의미심장한 정려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달성 서씨 문중 호조참의 효행 비각으로 바깥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내부 기록 사항을 모두 알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얼핏 본 한자어에 ‘장헌세자’와 ‘교남 웅천’이 나왔는데 조선 중기 진해 웅천에 살았던 ‘지순’과 그의 아내 재령 이씨 부부 효행을 기리는 정려였다.
쌍효각에서 고개를 넘어간 괴정 일대는 택지가 조성되고 제덕만은 거의 매립이 되어 진해 신항과 골프장으로 바뀌어 갔다. 아파트 건설 공사장 인부들과 함께 한식 뷔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 들어선 건설 현장 인부들은 동남아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심 식후 ‘삼포로 가는 길’의 노래비가 선 해안가를 걷다가 ‘사화랑산봉수대’ 이정표가 보여 산비탈 숲길을 헤쳐 올라갔다.
진해에는 안골포와 웅천에 왜성이 있어 두 곳 다 올라가 발을 디뎌봤으나 봉수대는 가보질 않아 이번에 등정했다. 등산로가 묵혀져 개옻나무에 스칠까 봐 조심스레 숲길을 한참 헤쳐 나아간 개활지 산정이 사화랑산 봉수대였다. 가덕도에서 거제 장목으로 이어진 거가대교 연륙교 구간이 아스라했다. 가덕도 연대봉 봉수가 장복산과 구산 여음포로 연결되는 봉수대가 사화랑산이었다. 2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