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고분벽화 -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벽화고분은 수도 고구려 수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고구려는 수도를 졸본 - 국내성- 평양성으로 3번을 옮겼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평양일대에 처음 그려졌다. 이후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가 4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도였던 국내성 지역과 첫번째 도읍이였던 졸본 지역에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7세기 초가 지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천기의 고구려 고분중 벽화고분은 현재 약120여기 이상이 조사 확인되었으며 중국의 집안,환인,무순지역에 약38기의 고분벽화가 북한의 대동강 하류 유역인 평양과 그 주변 남포일대,황해도 안악군,황해북도 등지에 80여기 이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다.
안악 고분벽화 -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
조성시기 - 357년(고국원왕27)
十三年十月戊子朔廿六日」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영화(永和) 13년 [무자(戊子)가 초하루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현도·대방태수(昌黎玄菟帶方太守) 도향후(都鄕侯)인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幽州遼東平郭都鄕敬上里)의 동수(冬壽)는 그 자(字)가 ▨안(▨安)이며, 69세에 관직[官]에 있다가 죽었다[薨]
덕흥리 고분벽화 -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조성시기 - 408년 (광개토왕18)
「13군 태수」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氏鎭仕」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龍驤將軍遼東太守使持」
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位至矦王」
造萬功日煞牛羊酒宍米粲」
不可盡掃旦食鹽食一椋記」
之後世寓寄無疆」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출신이며) 석가문불(釋加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의 벼슬을 지냈다. 진은 77세에 죽었으니, 영락(永樂) 18년 [초하루가 신유( 辛酉)인] 무신(戊申) 12월 25일 을유(乙酉)에 (무덤을) 완성하여 옥구(玉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정하고, 공자(孔子)가 날짜를 택하였으며, 무왕(武王)이 시간을 가렸다. 그 해와 때가 하나같이 좋아, 장례[葬送]를 마친 후에는 그 부(富)가 7세에까지 미쳐서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을 함에 있어서는 날로 지위가 올라 후왕(矦王)에 이를 것이다. (무덤을) 짓는 데에 1만 명의 공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으니 술과 고기와 쌀밥이 다함이 없었으며, 아침에 먹을 염식(鹽食)이 한 창고나 있었다.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니, (이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이 끊임없을 지어다.
「견우와 직녀상」
개마총 고분벽화 - 평양시 삼선구역 노상동
조성시기 - 5세기
덕화리 고분벽화 -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조성시기 - 5세기말
쌍영총 고분벽화 - 평남 용강군 용강리 안서면
조성시기 - 5세기 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