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가는 길
고 영 옥
막연하게 꿈꾸어 오던 수필세계에 발은 들여놓았지만, 아직 문학성이나 예술성에는 근접하지도 못한 채 변죽만 울리며 서성이다가 제11회 수필의 날 행사가 강릉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전국수필인들 결속의 장에 참여하여 작품으로만 대하던 저명하신 작가님들과 마주하는 영광을 누려보고 싶었고 자신이 속해있는 수필문학의 현주소를 확인하고도 싶었다. 그런저런 과정에서 영혼을 울리는 수필다운 수필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밤잠을 설치고 길을 떠났다.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는 잘 자란 나무들이 윤기 흐르는 무수한 잎을 흔들며 맞아주었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나무들의 신선한 아름다움은 내게 생동감을 더하여 주었고 눈앞에 펼쳐진 울창한 숲은 잔잔한 평안을 가져오는가 싶더니 알 수 없는 그리움마저 불러냈다. 아마도 수필인 들의 모임에 가는 길이라 이렇듯 다감한 마음이 되나보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뛰어난 여류문인이자 한국 어머니의 역할 모델인 신사임당의 숨결이 깃든 오죽헌을 향하는 길이지 않은가? 거기에다 강릉이 낳은 천재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초당 생가터를 돌아볼 계획이니 그 임들의 예술적 감수성이 내게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눈을 반짝여 본다.
그리고 여긴 꿈 많던 소녀 시절 가슴 설레며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던 길이다.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깔깔거리던 단발머리 소녀들은 산이 주는 넉넉한 아름다움에 한껏 취하여 “산에는 꽃 피네…….” 시를 낭송하고 가곡을 합창했었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두를 꺼내기만 하면 앞다투어 목소리를 합하며 저마다의 감성에 사로잡혀 얼굴들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었지. 저만치 보이는 태고의 숲에서 추억 속의 그리운 얼굴들이 까르르 웃으며 튀어나올 것만 같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때는 비포장도로가 군데군데 남아 있어 차는 한차례씩 털커덩 거리며 춤을 추었고 여기 저기 부딪치면서도 그게 재미있어 한바탕씩 웃음보따리가 터지곤 했었다. 대관령 도로 어느 구간에서는 사고가 났는지 아니면 차가 교차할 수 없이 좁아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무전으로 연락하고 이쪽에서 차를 보내면 저쪽에 차는 기다리곤 하던 일이 전래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추억도 여기에 있다. 젊은 시절 속초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만나려고 벼르고 별러서 가던 길이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처럼 빨리 달려가고 싶었던 마음 그이는 아시려나. 눈길만 마주쳐도 가슴이 설레고 손길이 닿으면 온몸이 떨려오던 살뜰한 이를 그리며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가는 양 마음이 두둥실 떠가던 길이다.
근래에도 가끔 강릉이나 속초에서 모임이 있어 남편과 나란히 앉아 이 길을 지나지만 이제는 손을 잡아도 얼굴을 맞대도 떨림은커녕 감각도 없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체온에서는 자극적인 느낌이 아닌 편안함이 전해온다. 태고의 숲에서나 느낄 수 있는 평화 같은 것이다. 세월의 무계가 내려 않는다는 건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고 보니 강릉으로 가는 길에는 행복이 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러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아예 차를 세우고 동승한 문우님들과 산길을 걸으면서 온 몸을 자연에 담가보면 어떨까? 평탄한 길에서는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고 험난한 곳에서는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허기가 차오르면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음식을 나누며 살뜰한 우정을 나누고 싶다. 친분이 없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금방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되는 산행 동반자! 산만큼 사람과 사람을 친밀하게 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나는 어린이집 꼬마들에게 가끔씩 동시를 들려준다. 들려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 번 반복하여 입에 붙을 때까지 반복시키곤 한다. 이달에는 김용섭 시인의 ‘산’이라는 동시가 선택되었다
“산은 숲을 품고/ 숲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새 둥지를 품고/ 새 둥지는 새를 품고/ 새는, 새는 노래로 온 산을 품고.”
정령, 자기중심의 편협한 마음을 넓게 열어주는 감성이 넘치는 시라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처럼 우리 아기들이 모두를 품을 수 있는 훌륭한 인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다보니 6, 7세 반 아이들은 줄줄 외운다.
수려한 산줄기에 포근히 안기어서 탁 트인 동해바다를 품어 안은 아름다운 도시 강릉! 거기에서 열린 전국 수필인의 잔치는 향기롭고 미래 지향적 이었다. “수필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음성이다”로 시작한 수필의 날 선언문은, 인간과 자연을 향한 포용과 사랑이 수필의 품에 뿌리를 내릴 때 빛나는 미래를 열어 가리라는 기대와 긍지를 심어주었다. 산수가 수려하고, 뚜렷한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있는 축복받은 우리 강토! 거기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강릉 가는 숲길에서 심금을 울리는 향기로운 수필한편을 쓸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2011. 7. 15)
※대관령 자연휴양림에서, 반짝이는 별무리의 속삭임을 눈으로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고 한밤을 지새며 문우님들과 즐거운 향연에 취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두를 뒤로하고 돌아와야 하는 발걸음에는 진한 아쉬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