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요가의 지[갈래 혹은 단계]들은 무엇입니까?
금계, 권계, 좌법, 조식, 지감, 집중, 명상, 그리고 삼매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1. 금계 : 이것은 비폭력(불살생), 진실, 불투도(훔치지 않음), 독신과 무소유와 같은 선행의 원리들을 계발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2. 권계 : 이것은 청정(심신의 청결), 만족, 고행, 경전 공부, 신에 대한 헌신과 같은 선행의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3. 좌법 : 여러 가지 자세 중에서 84가지가 주요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다시 네 가지, 즉 사자좌, 행복좌 , 연화좌, 달인좌가 수승하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것은 달인좌입니다. 요가 경전에서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4. 조식 :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분량법에 따르면, 생기를 내쉬는 것이 호식이요, 들이쉬는 것이 흡식이며, 그것을 심장 안에서 멈추는 것이 지식입니다.
‘분량’(measure)에 관해서 보자면, 어떤 경전에서는 호식과 흡식은 분량이 같아야 하고, 지식은 그 분량의 두 배가 되어야 한다고 하며, 다른 경전에서는 호식이 1분량이면 흡식은 2분량이어야 하고, 지식은 4분량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분량’이란 것은 가야뜨리 진언을 한 번 할 때 걸리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처럼 호식, 흡식,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조식은 각자 자기 능력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매일 수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움직이지 않고 행복 안에 안주하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에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지감을 수련해야 합니다.
5. 지감 : 이것은 마음이 외부의 이름과 형상들 쪽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음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다른 데로 빼앗기던 마음이 이제는 제어됩니다. 이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방편이 (1) 쁘라나바(‘옴’ 소리)에 대한 명상, (2) 주의를 양미간에 고정하는 것, (3) 코끝을 바라보는 것, (4) 소리를 관하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하여 일념이 된 마음은 한 곳에 머무르기에 적합해집니다. 그 뒤에는 집중을 수련해야 합니다.
6. 집중 : 이것은 마음을 명상하기에 적합한 한 장소에 고정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는 심장과 범혈[머리 꼭대기에 있는 혈입니다. 이 수련자는 이 장소에 있는 여덟 잎 연꽃의 한가운데서 진아인 신, 즉 브라만이 마치 불꽃 같이 빛나고 있다고 관하면서 마음을 그 안에 고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명상을 수련해야 합니다.
7. 명상 : 이것은 ‘내가 그다’라는 생각을 통해서, 자기가 앞에서 말한 불꽃의 성품과 다르지 않다고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설령 수련자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를 한다 하더라도, 경전에서 선언하는 것처럼 ‘도처에 두루한 브라만이 심장 안에서, 지성을 지켜보는 자인 진아로서 빛날 것’이며, 수련자는 그것이 심장 안에서 ‘나-나’로서 빛나는 신성한 진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의 관법이 가장 뛰어난 명상입니다.
8. 삼매 : 앞에서 말한 명상이 결실을 거둔 결과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나는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 하는 관념을 마음에 품지 않게 되는데, ‘나-나’라는 생각마저 사라지는 이러한 미묘한 상태가 삼매입니다.
만약 수련자가 잠이 덮쳐오는 것을 주의하면서 이것을 매일 수련하면, 신이 그 사람에게 마음이 소멸되는 지고의 상태를 하사해 줄 것입니다.
28
지감에서 쁘라나바(pranava)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쁘라나바에 대해 명상하라고 하는 의미는 이러합니다. 쁘라나바는 세 개 반의 음량, 즉 a, u, m과 반음량으로 이루어지는 ‘옴’소리입니다. 이 중에서 a는 생시의 상태와 일반적 영혼과 거친 몸을 나타내고, u는 꿈의 상태와 밝은 영혼과 미묘한 몸을 나타내며, m은 잠의 상태와 지혜로운 영혼과 근원적인 몸을 나타냅니다.
반음량은 진아, 즉 ‘나’-성품인 뚜리야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뚜리야띠따, 곧 순수한 지복입니다. ‘나’-성품의 상태인 네 번째 상태는 명상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묘사되는데―세 개의 음량, 즉 a, u, m을 포함하는 무음량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서―무언음절[침묵의 음절]이라고도 하고, 무염송[염송하지 않는 염송]이라고도 하며, 5음절어(옴 ‘나마 쉬바야’)와 같이 모든 진언 중의 핵심인 비이원적 만뜨라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진아의 진리에 대한 관법으로 이루어진, 헌신의 성격을 지닌 명상입니다. 이 과정의 결실은 삼매이며, 여기서 위없는 지복의 상태인 해탈이 옵니다. 존귀한 스승들도 해탈은 진아의 진리에 대한 관법의 성격을 갖는 헌신에 의해서만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29
‘내가 그다’라는 생각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의 불꽃같이 빛나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실재와 다르지 않다는 진리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 자기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실재와 다르지 않다는 관념을 계발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경전에서는 명상을 이런 말로 정의합니다. 즉, ‘모든 것의 성품을 지니고 있고, 까일라사, 바이꾼타, 빠라마빠다라고도 불리는 여덟 꽃잎의 연꽃 한가운데에, 엄지손가락 만한 크기의, 번개같이 번쩍이며 불꽃같이 빛나는 실재가 있다. 그것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인간은 불멸을 얻는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그런 명상을 할 때는 이러한 오류 즉, (1) ‘나는 별개다. 저것은 별개다’ 하는 식의 분별의 생각, (2) 한계 있는 것에 대한 명상, (3) 실재가 유한하다는 관념, (4) 그것이 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 등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 ‘내가 그다’(soham)[=sah aham. 즉 sah-지고의 진아, aham-‘나’로서 나타난 진아]라는 생각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즉, 쉬바 링가인 개아(jva)는, 몸 안에 있는 브라만의 도시(신의 왕국)인 심장 연꽃의 옥좌에 살고 있고, 에고성의 성품을 갖는 마음은 자신을 육체 따위와 동일시하면서 밖으로 나갑니다. 이제 마음이 심장 안에서 해소되어야 합니다. 즉, 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는 느낌 따위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수련자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하면서 번뇌 없이 머물러 있으면, 그 상태에서 진아 성품이 미묘하게 ‘나-나’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 진아 성품은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니고, 안팎의 구별이 없이 일체처에서 지고의 진아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의 불꽃같이 빛나는데, 이는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만약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명상하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면, 무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일성 명상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련자가 오랫동안 번뇌 없이, ‘내가 그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부단히 진아에 대해 명상하면―이것이 진아관법의 기법인데―, 심장 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과, 무지의 결과에 불과한 온갖 장애들이 제거될 것이며, 전반적인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브라만의) 도시, 즉 몸 안에 있는 심장동혈 안에서 실재를 깨닫는 것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을 깨닫는 것과 동일합니다. 아홉 개의 문이 있는 이 도시, 즉 육신 안에는 현자가 편안히 살고 있습니다.
몸은 사원이고 개아는 신[쉬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내가 그다’라는 생각으로 숭배하면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다섯 껍질로 된 이 몸이 동혈이며, 여기에 살고 있는 지고자가 동혈의 주(Lord of the cave)입니다. 경전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진아는 모든 신들의 실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인 진아에 대한 명상이 모든 명상 중에서 최고입니다. 다른 모든 명상법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명상법들을 제시한 것은 이것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상법을 얻게 되면, 다른 명상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진아를 아는 것이 신을 아는 것입니다. 명상하는 자신의 진아를 모르고, 대신에 별개의 어떤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위대한 성인들이 비유하기를, 자신의 발로 자신의 그림자를 재려고 하는 행위와 같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던 무가보를 내버리고 하찮은 소라고둥을 찾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30
제자: 심장과 범혈 ��Brahmarandhra)만이 명상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할지라도, 만약 필요하다면 여섯 군데의 신비한 중심들에 대해 명상할 수도 있습니까?
명상의 장소라고 하는 여섯 군데의 신비한 중심(짜끄라) 따위는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 요가의 초심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섯 군데의 중심에 대한 명상에 관해 쉬바 요기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이원적이고 완전한, 의식-자아의 성품을 가진 자인 신 v이, 우리 모두를 나타나게 하고, 유지하고, 해체한다. 실재에다 가나빠띠, 브라마, 비슈누, 루드라, 마헤슈와라, 사다쉬바 등 온갖 이름과 형상들을 덧씌워 그것을 망치는 것은 큰 죄이다.”
그리고 베단따 학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일체를 아는 의식의 성품을 가진 진아를 알면, 우리는 일체를 아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하나를 그 자체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모르고 있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여러 가지 생각에 걸려 있는 우리가 진아인 신에 대해 명상하면, 우리는 그 하나의 생각에 의해 온갖 생각들을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한 생각마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진아를 아는 것이 신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앎이 해탈입니다.
31
진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진아는 어둠도 빛도 없이 스스로 빛나고 있으며, 스스로 드러나는 실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이런 것이니 저런 것이니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한다는 생각 자체가 속박을 가져옵니다.
진아에 대한 명상의 의미는, 마음으로 하여금 진아의 형상을 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심장동혈의 한가운데는 순수한 브라만이 ‘나-나’의 형상으로, 진아로서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을 앞에서 말한 대로 알지 않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무지가 있을 수 있습니까?
32
브라만은 ‘나-나’의 형상으로 심장 안에서 진아로서 드러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깊은 잠이 들었을 때나 기절했을 때와 같은 경우에는 전혀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즉 자기도 알지 못하고 다른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 아닙니까?
그런 다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거나 ‘나는 기절에서 깨어났다’ 하는 경험이 있을 때, 그것은 분별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특수한 앎의 한 형태 아닙니까? 이 특수한 앎을 명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아와 관련해서나 아니면 비아와 관련해서만 드러나지,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아와 관련될 때 그것을 진지라 하는데, 이것은 그 대상이 진아인 그러한 마음의 상을 가진 형태의 지, 즉 그 내용으로서 유일자[진아]를 가지고 있는 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아와 관련될 때, 그것을 무지라 합니다.
진아와 관련되어 진아의 형상으로서 드러날 때의 이 명지의 상태를 ‘나’-나툼이라고 합니다. 이 나툼은 실재하는 것[즉, 진아]과 별개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실재에 대한 직접 체험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이 이러한 나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실재인 상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나툼이 거기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그것이 근본적 실재이며, 완전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단따 문구인 ‘완전의식이 브라만이다’도 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경전에서 말하는 의미인 줄 아십시오. 스스로 빛나며 모든 것을 주시하는 자인 진아는 명지각(지성의 껍질) 안에 거주하는 자로서 스스로를 나툽니다. 치우침 없는 마음의 상으로써, 이 진아를 그대의 목표로 꽉 붙잡아 그것을 자기(진아)로서 즐기십시오.
33
내적인 숭배 혹은 ‘속성 없는 것’에 대한 숭배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리부 기따> 같은 책에서는 속성 없는 것에 대한 숭배가 (하나의 별개의 원리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신에게 산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것), 보시, 고행, 맹세의 준수(묵언의 맹세 따위), 염송, 요가, 예공 등 모든 수련 행위들은 사실상 ‘나는 브라만이다’ 하는 형태의 명상 방식들입니다.
따라서 모든 수련 방식에 있어서, 수련자는 ‘나는 브라만이다’ 하는 생각에서 자기가 벗어나지 않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속성 없는 것에 대한 숭배의 의미입니다.
34
지의 8지는 무엇입니까?
8지는 이미 말한 대로 금계, 권계 등입니다. 그리나 여기서는 다르게 정의됩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1. 금계 : 이것은 감각 기관들의 집합체를 제어하면서, 육체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 현존하는 결함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2. 권계 : 이것은 진아와 관련되는 마음의 상들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그와 상반되는 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것은 지고의 진아에 대해 부단히 일어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3. 좌법 : 그것의 도움을 받아 브라만에 대한 부단한 명상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좌법입니다.
4. 조식 : 내쉼은 세계, 육체 등을 구성하는 대상들로부터 이름과 형상이라는 두 가지 비실재적 측면들을 제거하는 것이고, 들이쉼은 그러한 대상들 안에 항상 있는 세 가지 실재적인 측면들―존재, 의식, 지복―을 붙드는 것이며, 멈춤은 그와 같이 붙든 그 측면들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5. 지감 : 이것은 제거한 이름과 형상이 다시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6. 집중 : 이것은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심장 안에 머무르게 하여, 자기가 존재-의식-지복인 진아 자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7. 명상 : 이것은 ‘나는 오직 순수 의식이다’ 하는 형태의 명상입니다. 즉, 다섯 껍질로 이루어진 육체를 젖혀두고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하여, 그 결과 진아로서 빛나는 ‘나’로 머무르는 것입니다.
8. 삼매 : ‘나’-나툼도 그칠 때, (미묘한) 직접 체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삼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식 등을 하기 위해서는, 요가와 관련하여 이야기한 좌법 같은 수련법들은 필요 없습니다. 지의 8지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수련할 수 있습니다. 요가와 지 중에서 수련자는 어느 것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하면 되고, 아니면 여건에 따라서 두 가지를 다 해도 됩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잊어버림(진아망각)이 모든 악의 뿌리이며,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수련자는 마음을 자신의 진아 안에 쉬게 해야 하며, 결코 자기(진아)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마음을 제어하면 다른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요가의 8지와 지늬 8지간의 구별은 경전들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러한 가르침의 골자만 이야기했습니다.
35
요가에 속하는 조식과 지에 속하는 조식을 동시에 수련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마음이 심장 안에서 쉬어지지 못하는 한, 절대지식을 통해서건 탐구를 통해서건, 내쉼, 들이쉼 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습(예비적 수련) 기간 중에 요가의 조식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지의 조식은 항상 수련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수련해도 됩니다. 만약 요가의 조식을 수련한다면, 그 기량이 절대지식을 할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충분합니다.
36
왜 해탈에 이르는 길을 서로 다르게 가르칩니까? 구도자들의 마음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겠습니까?
베다서에서는 자질을 갖춘 구도자들의 상이한 수준에 맞게 몇 가지 길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해탈은 단지 마음의 소멸일 뿐이기 때문에, 모든 수행은 마음의 제어를 그 목표로 합니다.
비록 명상 방식들은 서로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이 점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의 성숙도에 맞는 길을 선택하면 됩니다.
기의 제어는 요가이고, 마음의 제어는 지인데, 이것들은 마음의 소멸을 위한 두 가지 주된 방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자가 쉽게 보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후자가 쉽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는 거친 황소를 푸른 풀로 유인하여 길들이는 것과 같고, 요가는 힘으로 제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이들은 말하기를, 세 등급의 자질을 갖춘 구도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은 베단따적 탐구에 의해 실재의 성품을 판단하여 마음을 진아 안에 확고히 자리잡게 함으로써, 그리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실재의 성품을 가진 것으로 봄으로써 목표에 도달하고, 중간 정도인 사람들은 절대지식이나 실재에 대한 오랜 명상을 통해 마음을 심장 안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목표에 도달하며, 가장 낮은 등급의 사람들은 호흡 제어 등을 통한 점진적인 방법으로 그런 상태를 얻는다고 합니다.
무지의 형상을 띠고 심장 안에 살고 있는 ‘나’라는 생각이 소멸될 때까지는, 마음을 심장 안에서 휴식하게 해야 합니다. 이 자체가 지이며, 또한 이것이야말로 명상입니다. 그 나머지는 단지 말을 이리저리 벌여놓은 것이며, 책을 이리저리 써놓은 것일 뿐이라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수련자가 이런 저런 방편을 통해 마음을 자신의 진아 안에 붙들어두는 기술을 터득하면, 그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대한 스승들도 헌신가는 요기보다도 훌륭하며, 해탈에 이르는 방편은 자기 자신의 진아에 대한 관법의 성격을 갖는 헌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심공지, 범지, 진아지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브라만을 깨닫는 길인 것입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추론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경전에서는 상이한 길들을 가르칩니다. 위대한 분들은 이 모든 길들을 분석해 본 뒤에, 이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뛰어난 방편이라고 선언합니다.
37
위에서 가르치신 수련법들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마음 안에 있는 무지, 의심, 과오 등과 같은 장애들을 제거할 수 있고, 그에 의해서 마음의 가라앉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마음이 심장 안에서 해소된 뒤에는 절대적 실재로서 빛나는 의식만이 있습니다. 마음이 이처럼 진아의 형상을 취할 때는, 탐구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한 탐구는 자기 숭배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내내 자기 어깨 위에 있는 양을 찾아 헤매는 목동의 이야기나 마찬가지겠습니다!
개아 자체가 쉬바이고, 쉬바 자신이 개아입니다. 개아가 다름 아닌 쉬바라는 것은 진실입니다. 알곡이 껍질 속에 있으면 벼라 하고, 껍질을 벗기면 쌀이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업에 속박되어 있는 동안은 개아로 남아 있지만, 무지의 구속이 해소되면 쉬바, 즉 신으로서 빛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인 개아는 실제로는 순수한 진아입니다. 그러나 개아는 이러한 진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하나의 개인적 영혼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이라는 형상 안에 속박됩니다. 따라서 바로 자기 자신인 진아를 찾는 것은 마치 목동이 (자기 어깨 위에 있는) 양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 자신의 진아를 잊어버린 개아는 단순히 그러한 앎을 명상한다고 해서 진아가 되지는 않겠지요. 전생에서부터 쌓아 온 잔류 인상들이 야기하는 장애에 의해, 개아는 거듭거듭 진아와의 동일성을 망각하고, 속아서 자신을 육체 따위와 동일시합니다.
우리가 고위 관리를 단지 쳐다본다고 해서 고위 관리가 됩니까? 그러한 방향으로 부단히 노력해야 고위직의 관리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육체 등과의 심적인 동일시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 개아는, 진아에 대한 관법의 형태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소멸되었을 때, 개아는 진아가 될 것입니다.
부단히 수련하면 이 진아에 대한 관법은 마음을 소멸시킬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마치 송장을 태우는 장작에 불을 붙이는 막대기처럼 그 자체도 타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해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8
만약 개아가 성품상 진아와 동일하다면, 개아가 자신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참된 성품에 대한 개아의 망각입니다. 이것이 은폐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9
개아가 그 자신을 잊어버린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나’-체험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가림막은 개아를 완전히 숨기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아 성품만을 숨기면서 ‘나는 육체다’ 하는 관념을 투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인 진아의 존재는 숨기지 않는데, 이것은 실재하며 영원합니다.
40
생존해탈자[생존 중에 해탈한 자]와 무신해탈자[죽으면서 해탈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진아로서 드러나는 브라만이다. 절대적 실재인 내 안에서, 육체 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마치 하늘의 푸름과 같은 단지 하나의 겉모습일 뿐이다.’ 이처럼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생존해탈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한, 그에게는 발현업에 기인한 대상들과의 연관으로 인해 어떤 불행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지복의 체험이 없겠지요.
진아의 체험은 지속적인 명상의 결과로 미묘하고 움직이지 않게 된 마음에게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미묘해진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진아의 체험을 가진 사람을 생존해탈자라고 합니다. 속성 없는 브라만으로, 그리고 뚜리야로 일컬어지는 것이 생존해탈의 상태입니다.
미묘한 마음마저 해소되고 자아의 경험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지복의 바다에 잠겨 어떠한 차별화된 존재도 없이 그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런 사람을 무신해탈자라 합니다. 초월적인 속성 없는 브라만으로, 그리고 초월적인 뚜리야로 일컬어지는 것이 무신해탈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들이 겪는 불행과 행복의 정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깨달은 자인 생존해탈자와 무신해탈자들은 모두 네 가지 범주―브라마비드, 브라마바라, 브라마바리얀, 브라마바리쉬따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진지를 통해서 얻은 해탈에는 아무런 구분도 없습니다.
< 敬 禮 )>
위대한 쉬바 자신이시면서 또한 인간의 형상을 하신 스승님,
라마나의 발이 영원히 번영하시기를!
.
모든것인 지고자(the Supreme)를 앙모함에 있어서, 그것(That)으로 확고히 안주하는 것 외에 어떤 길이 있단 말인가!
1.
제자: 스승님! 언제나 불행을 벗어나 있는 영원한 지복의 상태를 얻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스승: 몸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있다는 베다의 말을 논외로 하면, 이 지복의 상태는 또한 모든 사람들이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몸이 없는 자신의 참된 성품(true nature)을 탐구해야 하고 그러한 성품으로서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그 상태를 얻는 수단입니다.
2.
제자 : 우리가 자신의 성품을 탐구하고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스승 : '내가 갔다. 내가 왔다. 내가 있었다. 내가 했다.'와 같은 경험들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나'라는 의식이 그러한 여러가지 행위들의 주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 의식의 참된 성품을 탐구하고 자기 자신으로서 머무르는 것이, 탐구(enquiry)를 통해서 자신의 참된 성품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3
제자 :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은 어떻게 탐구해야 합니까?
스승 : '감'이나 '옴'과 같은 행위들은 육체에만 속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갔다. 나는 왔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육체를 '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나'라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런가하면 육체는 그것이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고, 다섯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죽으면 시체가 되기 때문입닏.
마치 하나의 나무토막 같이 지각 능력이 없는 이 육체가 '나-나'(I-I)로서 빛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육체에 관하여 맨 처음에 일어나는 '나'라는 의식은 我慢(tarbodham), 我相(egoity, ahankara), 無知(nescience, avidya), 마야(幻, maya), 때(垢, mala) 그리고 個我(jiva)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가 그것을 탐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모든 경전에서 '아만'의 소멸이 해탈(mukti)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탐구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도록 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시체-몸을 하나의 시체인 채로 두고, '자, 나라는 이제 "나"로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그러면 심장( the Heart)안에서 '나-나'라는 형상이 일종의 말없는 광명(illumination)이 빛날 것입니다.
즉, 한계있는 것과 많은 생각들이 사라지고, 한계없고 하나인 순수의식이 저절로 빛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체험]을 내버리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에고성, 곧 '나는 육체다'하는 형식의 개인적 느낌이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후의 생각, 즉 '나-형상'(I-form) 또한 장뇌(camphor)를 태운 불처럼 꺼져 버릴 것입니다.
위대한 진인들과 경전은 이것이야말로 해탈이라고 선언합니다.
4.
제자 : '나'라는 형상인 '아만'의 뿌리를 탐구해 들어가면 온갖 다른 생각들이 무수하게 일어난 것 같고, 어떤 별개의 '나'라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승 : 제1격인 주격이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다른 격들이 나타나는 문장들은 제1격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심장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생각들은 최초의 '나'라는 마음의 상(mental mode), 즉 '나는 육체다'라는 형태의 지각인 에고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처럼 에고성이 일어나는 것이 다른 모든 생각들이 일어나는 원인이자 근원입니다.
따라서 만약 윤회계(samsara)라는 환상의 나무의 뿌리인, 에고성의 형상을 한 아만이 소멸되면, 다른 모든 생각들도 마치 뿌리 뽑힌 나무처럼 아주 죽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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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심장은 육체의 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심장을 말합니다
영적심장이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