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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교구장님의 성탄 메시지를 읽어 드렸습니다. 오늘은 교구장님의 성탄 메시지를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성탄의 기쁨이 모든 이에게, 특히 북녘의 동포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순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올해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한반도에는 긴장과 갈등의 골을 메워졌고, 평화와 화합의 기운이 자라났습니다. 교황님께서도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화합은 단순히 폭력이 사라지고, 전쟁이 사라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와 화합은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고, 공동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화로운 세계 질서는 진리와 정의로 건설되고 사랑과 연대로 완성되며 자유가 보장할 때만 실현된다. (지상의 평화 참조)”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습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평화로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더라도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내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어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주신 성탄의 신비에 감사드리며, 아기 예수님이 주시는 은총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 굶주린 이들의 배를 불리시는 곳으로,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일깨우시는 곳으로 오십니다. 흠이 있고, 주름이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진정한 이유입니다.
화려한 궁전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그 기쁨을 찬미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짜별을 본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진실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성탄의 기쁨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던 동방박사들, 오늘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탄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라면 우리 모두도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조재형신부)
2018년 다해 성탄 대축일
<당신은 나만큼 소중합니다>
복음: 요한 1,1-18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김새해 작가의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싯대가 물에 떠내려가자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낚싯대를 잃지 않으려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익사했고, 아들은 다행히 어떤 이에게 구조되었습니다.
아들의 운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흘러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가치가 그렇게 평가절하되어 정해져버렸고 그는 자신이 정한 운명에 맞춰 살았습니다. 술과 싸움과 방탕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실패하였고 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도 파경에 이를 무렵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내가 이렇게 살라고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아버지는 그에게 죄책감을 주시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사람임을 믿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시고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알려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이라 믿든 우리가 그보다 더 존귀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러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어야만 그렇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죄책감으로 계속 우리 자신을 세상 속으로 구겨 넣기도 하고 천사처럼 하늘로 오르기도 합니다. 천사가 되려면 하늘로 오를 수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그런 존재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심어줍니다. 자아는 내 안의 또 다른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 자신을 평가절하합니다. 자아는 우리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냅니다. 자아는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남을 판단하게 하던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외로워지게 만들고, 또 그렇게 평가 절하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면 돈과 명예 등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쾌락에 빠져 모두 잊고 살게 만듭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자괴감뿐입니다.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마약왕’도 결국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자신이 믿는 바대로 인생이 망가지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줄 때, 그의 삶은 변화되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자신을 평가절하 하는 목소리와 싸워야합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이미 자신을 부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품고 있는 구유나 마구간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구유나 마구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천상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를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 하나 주러 오신 것입니다.
세상 몇 위 안에 드는 부자들을 보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타고나서 그렇다고 믿지만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한 사람들만을 연구한 결과를 쓴 책입니다. 그는 먼저 유명 하키 선수들이 거의 대부분 6월 이전 출생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해냅니다. 타고난 실력으로 유명 운동선수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참 성장기에 있을 때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더 특별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빨리 태어났고 몸집이 조금 크다는 이유로 그런 훈련을 받을 기회를 더 제공받았던 것뿐인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큰 업적과 돈을 번 사람들도 천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접할 시간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란 결론입니다. 천재로 태어나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고, 보통으로 태어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것을 믿기만 하면 말입니다. 모차르트도 처음 10년 동안 작곡한 곡들은 거의 평균 이하의 것들뿐이었다는 것도 천재도 노력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믿었고, 하늘은 그 믿음에 운으로 보답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운 때문에 더 노력하게 되어 자신들이 믿는 바대로 된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운도 따르지 않습니다. 믿으면 될 때까지 하고 그런 사람에게 운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경기가 안 좋아서 사업이 안 된다, 나는 흙수저니까!’ 등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변할 수 있는 자신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모셔져 있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보며 내가 하늘의 임금을 모실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아, 나는 내가 믿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구나!’
어떤 아이든 그렇게 될 수 있다고만 믿고 1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다면 김연아와 같은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김연아는 훌륭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할 수 없는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반드시 그럴 수 있고 그런 존재라는 것을 부모가 먼저 믿어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꾸중을 하면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어리석은 부모입니다. 예수님은 짐승들의 먹이통으로 사용되는 구유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오신 것이고, 실제로 그 구유는 금으로 쌓여 최초이자 성모님께 봉헌된 가장 큰 성당인 로마의 쌍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 제대 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먹이통이 성전의 가장 중요한 곳에 모셔지게 된 이유는 그럴 수 있는 가치를 그리스도를 통해 증명해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품은 사람들로써 보통 인간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구유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올렸던 구유만이 지금 대성당의 가장 중심에 모셔져있습니다. 그만큼 믿으면 그 믿는 것이 실현될 수 있는 운이 따르고 그렇게 되면 성공도 하고 명예도 얻고 하느님 자녀도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외치고 계십니다.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나를 만날 정도의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음란한 마음으로 이성을 만난다면 이성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심하게 말하면 고깃덩이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내가 만나는 상대를 높여줄 수도 낮출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돈을 좋아하면 자녀를 그 돈에 온 인생을 걸어야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야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모신 사람임을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이 그 구유를 만나줘야 구유가 자신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습니다. 말로 누군가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는 없습니다. 말이 아니라 상대를 만나고 있는 나의 존재가 이미 상대에 대한 칭찬이 되기도 하고 꾸지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거룩해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며 다가오십니다.
“너는 나를 만나기에 합당한 존재야!”
하느님을 만나야 하느님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어야 누군가를 그만큼 높여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비천한 마구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너는 나를 만나기에 합당한 존재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남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해 주시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주신 주님을 찬미합시다.(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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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새벽 미사 |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