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님을 추모하며
靑松 박 현 호
지난 2020 2.3일 큰형 부고를 받고 급히 부산으로 내려 가 서면천주교성당 빈소의 형님 영정 앞에 분향 했다. 얼마 전 양정 요양병원에 장기입원 하고 계실 때 문병한 일이 형님과 마지막 대면이었다. 올해 88세로 수년 동안 병고를 치르다 이렇게 가시는 구나’ 생각하니 너무 가엽고 뒷모습이 서글펐다. 무릇 존재는 세월 따라 소멸하는 엄연한 자연의 섭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죽음을 현실로 대하니 슬프고 허전한 마음 금 할 길이 없다. 영원불멸이야 신들이나 구가하는 일, 한낱 범부가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을 대하는 우리 마음은 어찌 이다지도 허전하고 허무한가! 장남으로서 아버님의 가업을 이어 크게 사업을 일으키고자 했지만 고생만 하시다가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노년에는 깊은 병까지 얻어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는 형님 영전 앞에서 울컥 가슴이 메여 눈물을 훔치며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나를 보고 어린 옆에 선 조카가 오히려 나를 위로 한다 “아버님께서 고통도 없이 편안하게 가셨으니 삼촌 너무 슬퍼 마시라고.” 슬픔의 포인트가 좀 벗어났지만 위로 해주는 조카가 고마워 슬픔을 좀 추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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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미 고령에 접어들어 머리엔 흰 꽃 내리고 망팔(望八)의 나이이다. 이 세상 하직하는 날 나는 홀가분하게 행복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까, 아니면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 없다고 서운하게 생각하며 외로운 마음 가득안고 떠날까? 하고 앞으로 올 마지막 날을 상상해 본다. 그건 전적으로 나의 정신수양에 좌우 될 일로 생각 된다. 고인에 대한 나의 감회도 새롭다, 명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로는 인문, 자연계를 통틀어 최고의 인기학과였다. 형님은 나의 멘도가 되어 나도 공학을 전공했다. 언제인가 같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사촌형은 “형님은 한국 산업을 이끌어 나갈 인재로 대학에서도 소문이 났다”고 칭찬의 말을 나에게 전했다. 회고하면 일동화학공업(주)을 설립하여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기초약품인 망초(황산나토륨), 농약(황산구리),석고, 페인트원료로 천연수지인 공업용 정제송진, 테레핀유(구두약원료), 삼성그룹 모기업인 제일모직, 제비표페인트(주) 등지에 납품했다, 내가 중학교 때인가 한국 최초로 프랑스에 약품(테레핀유)을 수출하여 국제신문사 기자가 회사로 찿아와 인터뷰하고 내용이 신문에 개제되었던 일이 자랑스러운 추억이 되었다. .내가 대학생 시절 방학 때 부산 서면공장에 가서 약품 제조 작업을 돕고 부속 화학실험실에서 여직원과 함께 실험기구 청소도 하곤 했다. 회사에 비치된 영어 일어 화학공학 관련 전공서적인 단위조작(unit, operation), 화학사전등 몇몇 원서들은 훗날 내가 (주)유공에 근무할 때 참고서가 되었고 지금도 보유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니 자연히 일어에 능통했다. 일어를 마음대로 읽고 말하는 형님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퇴직 후 복지관 일어교실에 지금도 다니고 있다. 중급수준이 되었는지 자문해본다. 전차를 타고 광복동 외국서적 골목에 가서 일본 잡지‘문예춘추’를 사오는 심부름도 자주했다. 형님이 서울, 대구 등지에 출장 갈 때면 나는 동트기 전 추운 겨울날에도 중앙동 부산역에 나가 통일호 기차표를 예매하는 심부름, 증기기관차가 꽁꽁 얼어 연발하던 혹한의 겨울날 등 향리에서 형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장남인 형과 막내인 나와 나이 차이가 많지만 형제애가 깊었고 같은 엔지니어 출신이니 공감대가 각별했을 것이다.
2.4일 아침 성당 입구에서 영구 주위로 유족이 엄숙히 도열하니 신부님이 미망인에게 고해성사를 하겠냐고 묻고 별실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아마 형수님이 고인에게 서운하게 했던 일, 잘못한 일을 하느님께 고하고 용서를 비는 성스러운 의식이리라.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용서를 비는 과정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 영적인 순화로 인도하는 천주교만 가지는 독특하고 훌륭한 제도로 생각된다. 본당 문이 열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상 앞으로 서서히 운구 되니 교우들의 장송곡 합창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교단에는 가지런히 마련한 대형 촛불들이 흔들리지도 않고 조용히 타고 있다. 고인이 된 형님(세레명:요셉)을 하느님 앞에 바치는 순간이다.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속 신부님의 영결사 내용은 고인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며 유족을 위로하는 말씀이다. 약 50분정도 영결미사를 마치고 영구는 큰 십자가를 던 사제를 따라 밖으로 운구 된다. 간단한 발인 의식을 마치고 영구차는 부산 영락공원 화장장으로 행했다.
화장장에 도착하니 이용하는 다른 유족들로 엄청 붐빈다. 대도시 근방이고 점점 화장을 선호하는 장례문화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옛날 젊은 시절 숙모님 돌아가셨을 때 서울 근교 백제화장장 가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화구에 들어가는 영구를 모니터 스크린으로만 본다. 다른 유족들의 통곡소리도 가끔 들린다. 고인의 이름이 표시된 화구스크린에 “장입완료” 자막을 확인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 후 다시 돌아와 조금 기다리니 “작업완료” 자막이 나온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상주가 유골함을 받고 화장장에서 모든 절차를 끝냈다. 화장은 불교의 다비의식에서 유래, 육신이 부정하여 영혼을 깨끗이 하고자 불을 활용해서 부정을 씻고 정화하는 일이라고 한다.. 사실 내가 눈감는 날 겪어야 할 이승에서 마지막 순간들을 산 사람 눈으로 지켜 본 것이다. 유골함 매장을 위해 선산이 있는 사천으로 영구차는 향했다.
남해고속도로 약 한 시간 반이 달려 선산에 도착했다. 전염병 신종 코로나 폐렴 때문인지 길도 한산하여 정체 구간도 없이 곧장 왔다. 선산은 사천 비행장인근 삼천포로 가는 도로변 야산에 자리 잡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사천박씨 문중 시제를 모시러 오는 제각 바로 뒷산(율전산소)이다. 오랜만에 오니 제각 앞 농로가 2차선도로로 깔끔하게 포장 되어있다. 한국 항공 산업의 요람이 된 사천시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어머님, 아버님 묘소 바로 밑에 평장으로 유골함을 묻었다(비석 설치 예정). ‘흙에서 왔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이 엄연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형님 또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큰조카를 필두로 유족이 번갈아 흙을 삽으로 담아 유골 위로 뿌린다. “형님 좋은 곳으로 가세요. 병고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좋은 곳으로......!” 하며 흙을 뿌리는 나의 눈가에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돌아오는 남해고속도로 저편 너머 불게 타는 저녁노을이 외롭다.
에필로그: 고인에 대한 필자의 극히 개인적 회고담과 함께 장례식 르포형식으로 엮은 기행수필 입니 다. 군데군데 좀 생소한 전문용어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자의 다른 문예작품 시, 수필과 함께 편집하여 훗날 산문집으로 출간 예정임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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