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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1754) 즉위
조선의 중흥기를 이룩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수많은 치적(治績)을 남긴 명군이지만, 한편으로는 세도정치의 씨앗을 뿌렸다는 오점도 있는 혼군. 그리고 세자이자 아들을 미치게 만들고 끝내 죽여버리기까지 한 막장 아버지.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유교적이지 못했던 임금.
국왕으로서는 훌륭한 왕일지라도, 가장으로서는 폭군이자 암군.
조선의 제21대 국왕. 묘호는 영조(英祖),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휘는 금(昑), 자는 광숙(光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고, 결정적으로 경종 시대 신임옥사를 거치며 즉위 이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러 야사나 일화에서도 평생 컴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비록 31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조선 왕 재위기간 중 가장 긴 장장 52년을 재위했고,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군주다. 장기간 집권하면서 치적도 많이 남겼지만 말년에는 여러 비판점도 제기된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임오화변(사도세자가 숨진 사건)이다. 영조는 당시 69살(재위 38년째)로 역대 최고령으로 재위한 상태였으나, 그러고도 14년을 더 살았다. 한마디로 정말 오래 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중적으로는 탕평책과 사도세자의 아버지로 유명한 왕이다. 정책, 정치는 크게 성공했지만 가정사는 패가망신했다.이때 영조도 무척 잘못을 했다. 이제는 손자인 정조에게도 평생 상처를 줬다. 과장을 좀 보태면 정조 이후 조선이 크게 흔들리는 씨앗을 남기고 죽었다.
이 왕과 마찬가지로 20세기와 21세기 대중들의 평가가 대단히 달라진 임금 중 한 명인데, 20세기에는 '뛰어난 임금이었지만 사도세자의 일은 '비극'이었다" 정도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21세기, 특히 2010년대 이후에는 임오화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나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임오화변이 각종 미디어매체에서 크게 부각되면서 그 영향으로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영조의 성격 문제가 크게 부각되어 평가가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뀐 경향이 있다. 당장에 나무위키의 본 항목에서도 그런 면이 강하게 드러나며, 심지어는 영조가 뛰어난 왕인지 잘 모르겠다는 시각도 종종 보이는 편.
왕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옷을 재활용한 왕이다. 이게 뭔 소리냐면 임오화변 후의 정조의 세손 책봉식 때 특별히 자신이 세제 책봉식때 썼던 것들을 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종도 옷을 아껴입기도 했다.
2. 영조/생애
3. 치적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파간 세력 불균형으로 직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이고 삼수의 옥을 계기로 노론을 압박한) 소론을 박살내려 했으나 영조의 반대 등으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경드라이브를 걸었고 영조는 이에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시켜버렸다. 물론 등용된 것은 온건파인 완론 소론이었지, 준론 소론은 아니었다. 이후 벌어진 준론 소론과 남인이 합세한 이인좌의 난에서 이 완론 소론은 난을 집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남은 준론 소론 잔당들의 난리법석에 서서히 소론의 세는 위축되었고 결국 노론이 집권하게 된다.
일부 드라마 등에서는 영조가 실권없이 노론에게 떠밀려다닌 군주로 묘사되긴 하지만 이는 실상과 정반대다. 민진원, 정호를 비롯한 강경파 대신들이 죽은 영조 10년 이후로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유척기를 비롯한 외골수들은 끝까지 토적을 외치면서 탕평을 무시했지만 그런 이들의 주장에 혹해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바로 조정에서 대숙청의 바람이 불곤 했다.
영조의 즉위 초반에는 노론이 탕평하자는 영조의 말도 듣지 않고 열받은 영조에게 정미환국 한방으로 날아가고 소론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영조 즉위 중후반부에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으면서 집권 노론이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이 미친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한방에 날아갈 뻔하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결국 영조는 경주 김씨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나머지 명문가들을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 놓았고 영조 말은 당파가 붕괴되고 척신 정치로 귀결된다.
가혹한 형벌을 없애는 데 신경을 써서 압슬형,낙형,자자형과 같은 고문을 없앴으며, 균역법을 실시해 조세제도의 모순을 어느정도 개혁하는 데 성공했고 서원의 중복 설립 금지,청계천 준설공사,서얼들에 대한 차별 완화 등 긴 재위기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통치기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의 재위기에 완전히 수습되어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고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사치스런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한 것도 영조대 부터다. 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순조대쯤에야 사대부나 민가에까지 정착하게 된다.
또한 연과 여(왕과 왕비가 타는 가마)에 원래는 금으로 칠을 하던 것을 주석으로 대체하게 하기도 했다.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수십년 간 금주령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조 본인도 술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 본인은 "오미자차였다"고 변명했다. 또한 말년에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말이 좋아서 차였지. 이것도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사실상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아버지로서는 조선 왕조에서도 손에 꼽을 최악의 아버지상이었다. 즉위 과정 자체도 불안했고 정적들인 소론 강경파들이 전부 소멸된 후에도, 이에 관련된 컴플렉스가 매우 심했다. 결국 아들을 몰아붙이다가, 사이까지 비틀린다. 이 때문에 영조는 뒤주에 아들을 가둬 죽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후에 왕위를 잇는 정조에게도 정치적,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주게 된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물 수는 없는 노릇. 특히 '유교 국가'의 군주가 아버지로서 심각한 결점이 있다는 점에서 단지 '개인적인 단점'으로만 취급할수는 없다. 21세기로 비유를 하자면, 인권 단체의 고위간부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적 아버지라면 결코 '개인적이고 사소한 단점'으로 취급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원리로, 유교 국가의 군주로서 '아버지 영조'는 분명 심각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숙종 시절의 환국,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완전히 금이 간 노소론의 피터지는 싸움에 서 민진원, 정호, 유척기 등의 노론 명문가 출신 거물들이 토적을 외치면서 소론을 모두 죽일 것을 요구하고 탕평을 단호히 거부하자 이들에게 완전히 질린 나머지 말끝마다 떽떽거리는 이들 대신에 말 잘듣는 이들로 조정을 교체하기 위해 유학에서 반드시 금지하는 척신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시작이 홍봉한이었고 종9품 말직에 불과했던 홍봉한은 7년 만에 훈련대장에 임명될 정도로 커졌으며 영조 46년까지 조정을 지배하는 실세가 된다.
나중에는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떠올랐고 종국엔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이 손을 잡고 영조 말년을 지배했다. 이들의 권세가 매우 커서 당대에도 비판이 많았고 가장 강력하게 이들을 배척한 이들이 김종수를 비롯한 노론 청명당의 선비들이었다. 영조 사후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처형되었고 김귀주 등은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홍봉한은 이미 완전히 실각한 상태에서 목숨만은 보전했다. 그리고 이들을 대신하여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역시 정조에 의해 숙청됨에 따라 척신정치는 완전히 청산되었지만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척신정치를 청산했던 본인인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영조의 단점은 주로 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편인데 사실 영조 치세의 업적도 대부분 재위 전반기의 젊었던 시절에 몰려 있으며 이때는 영조의 정통성 문제로 왕권도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들끓던 시기이기도 해서 노년에는 안 그래도 독선적인 모습이 더 강해지는 경향까지 보인다. 게다가 치매와 노환로 고생하는데도 권력욕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된 것.
덕분에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엇갈린다. 명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에 초점을 맞춘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군호인 연잉군으로 부르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사초를 폐기한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 연산군, 영조가 사초를 왜곡 혹은 폐기한 왕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제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 때 호조판서 이정제가 나서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고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시황의 분서와 다를 바 없는 사상초유의 '사초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재위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만약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첫 황제는 고종황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됐을 것이지만 건재했던 청나라가 가만히 있었을지는…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후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영조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5월 12일
또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이에 대한 설명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원본이다.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 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시대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수술을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매부리코와 치켜올라간 눈매 등 두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비슷하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사실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영조 31년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린 다 안다!" 등 대놓고 우릴 죽여라! 라고 개겼다.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 ,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 사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확실히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긴 하다. 경종 독살건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말을 못한바람에 소론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실록에 기록이 되었다.
영조는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것이 많았는지 영조 31년(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에게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당시에도 감과 게장이 상성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영조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의학 서적이 있었는데 그 의학 서적에도 감과 게장의 관계는 아주 잘 나와있다.
7.2. 영조의 노망?
아무래도 조선 왕조의 왕 중에 최장기 집권, 최장수 기록을 세운 왕인데다가 가뜩이나 성격이 왈가닥에 편집증적이었던지라 결국 노망이 난듯 보이는데, 이에 관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그 신하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그 신하가 충신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내면서,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 하며 연못물에 빠져죽겠다 하여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계속 서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 신하를 귀양보내기로 했는데… 영조가 그제서야 연못에서 걸어나오고 궁에 입궐하면서 껄껄 웃으며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하고 그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보낸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를 '노망났나?'하면서 수군댔다고 한다. 당파 막론하고 어머니 사당에 자주 간다고 간하는 신하도 유배, 마누라 죽은 것도 팽개치고 사위 보러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도 유배, 사도세자 운운한 신하는 사형. 사실 영조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면서 닥치는대로 신하를 벌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을 거두는 행위는 젊은 땐 좀 덜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 내내 이랬다. 말년에 영의정만 미친듯이 갈아치우기도 했다. 게다가 세손을 이미 후계자로 삼아 후계구도가 탄탄했고, 영조의 왕권 또한 오랜 세월끝에 굳게 다져졌기에 상왕으로 있던 태종처럼 거리낄 것이 없어 일부러 그런 점도 있다. 사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노망이라기보단 성격파탄.
영조 노년에 신하로 생활하는 것은 매우 고달팠을 법 한데 생각해보자. 장유유서의 유교사회에서 임금이 환갑을 넘어 장수한 노인인데다가 둔하기는 커녕 머리회전과 눈치가 빠른 정치고수이다. 게다가 머리회전만 빠른게 아니라 툭하면 울고 툭하면 화내고 툭하면 짜증을 내며 자기 감정마저 수싸움에서 밀고 들어온다. 나이가 많으니 자연히 경험도 많고 수읽기에도 능한 성격파탄 정치괴물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오죽했으면 임오화변 때도 '저 영감 또 시작이구나. 저러다 곧 풀어주겠지??' 하고 처음엔 궁인들이 뒤주를 열고 세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조는 결단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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