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부터 29일 사이에 부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BIAF가 열렸습니다.
행사는 금요일부터 시작되었는데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 주말에 열리는 상영회에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26회를 맞이했는데 최근에는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고 관심 가는 행사가 없고 생계가 바쁘고 시간이 없는 데다 나이를 먹어가니 감정도 무뎌져 오랫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올해는 SF 특집으로 상영회가 열린다고 하여 그동안 잊고 지내던 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기대하며 개막을 기다렸습니다.
퇴근길에 개막식이 열리는 부천 만화박물관을 들려 개막식 직전의 행사장 밖 풍경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준비가 막 시작될 때여서 박물관 로비에 전시물이 많지 않았는데 명탐정 코난의 등장인물을 전시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관람한 작품은 아키라, 기동전사 건담 역습이 샤아, 공가기동대 3편이었습니다.
모두 비디오로 OTT로 여러 번 감상한 작품이지만 스크린을 통해 감상하는 것에 의미가 있어 서둘러 예매를 했습니다. 공각기동대만 스크린을 통해 감상한 때가 있었는데 22년 전이어서 이번 상영회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몇 년 전에 메가박스에서 아키라 상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를 놓쳐서 아키라도 이번이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첫 번째 기회였어요.
최근에는 오래전에 제작된 영화를 재개봉하는 일이 흔하지만 사이버펑크 SF 애니메이션은 명성에 비해 대중성이 낮아서 수익이 나지 않으니 영화사 입장에서는 꺼리는 작품이어서 다시 스크린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아키라, 공각기동대와 함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와 마크로스, 건담의 극장판이 상영되었습니다.
마크로스 시리즈 중에서는 OVA인 마크로스 제로가 스크린에서 3시간에 걸쳐 상영되었습니다.
마크로스 제로도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는데 공각기동대와 상영 시간이 겹쳐서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25일 토요일 저녁에 아키라가 상영되었습니다.
세 편 모두 부천 시청에서 상영했는데 상영장 입구에 자원봉사자들이 작품을 알리는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여러 상영작 중 공각기동대와 아키라는 영화적인 의미가 큰 기념비적인 작품이어서 상영 전에 영화 전문 기자가 배경지식과 관련된 정보를 설명하는 작품 소개 시간을 20분 정도 가지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키라와 공각기동대는 다른 상업 영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남다른 의미의 역사적인 가치를 지진 명작이니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또 현실적으로 너무 난해해서 처음 보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아키라도 어릴 적부터 여러 번 본 작품이지만 스크린으로 처음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내용의 분석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제 생각에는 절대 에너지 아키라를 데츠오도 고위 인사들도 제어할 능력이 없는데 손에 넣은 것이 화근이라는 내용이 21세기 디스토피아와 확연히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화석 연료의 에너지를 잘 관리하여 사용할 능력이 안 되는데 닥치는 대로 써서 지구온난화의 재앙을 맞이했고 세계 각국에서 권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둔한 자아도취에 빠진 그릇이 되지 않는 지도자가 그러한 국민에 의해 지도자로 선출되어 권력을 잘못 사용하여 세계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AI가 아키라와 같은 절대적인 에너지로 부상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고 통제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일본도 개화기에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할 때 열강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민주 국가인 영국 미국을 롤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 독재 국가인 독일을 롤 모델로 삼는 바람에 독재 국가가 되어 국력을 잘못 사용하여 침략 전쟁을 벌이다 패전국으로 전락했었죠.
그리고 2~30년 만에 재건에 성공해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절정의 호황을 맞이하였는데 넘쳐 들러드는 돈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경제가 기울어 30여 년간 저성장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89년과 2019년에 핵 전쟁이 벌어지고 대폭발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패전 이후 30년 만에 이룬 번영이 오래가지 못하고 90년대 되면서 거품이 무너져 오래도록 힘겨운 세상이 펼쳐지고 21세기가 되어서는 더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봐도 원작자인 오토모 가쓰히로 선생의 선견지명이 대단하다 느껴집니다.
소크라테스가 "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손자병법에서 '지피지기면 백전 불태'라 했건만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어서 자기 객관화가 안 되어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세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아키라는 정말 큰 의미를 가진 명작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또 떠오르는 생각이 80년대에 이미 SF 영화를 통해 핵 전쟁과 환경 오염 등으로 어두운 미래를 전문가들이 충분히 예측해서 영화로도 계속 표현되었는데 3~40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지금의 파국에 이른 것을 보면 인간이 지구상에서 생물 중 가장 어리석다는 겁니다. 아키라 이전에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블레이드 러너 같은 작품들이 나와 디스토피아를 예견하고 표현해서 대중에게 알렸지만 그것을 막지 못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날 역습의 샤아를 보러 상영장을 찾았습니다.
건담과 마크로스 시리즈도 명작이지만 영화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아키라와 공각기동대가 초월적인 작품이다 보니 기대도 적었고 앞에 언급한 대로 작품 소개도 없었습니다.
쉽게 지나칠 수도 있지만 건담 시리즈는 마크로스나 은하영웅전설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SF 작품에는 없는 무중력 상태에 대한 표현을 백미로 꼽고 싶습니다.
할리우드의 실사 영화에서는 기술적인 한계상 무중력 상태를 구현하기 어려우니 표현을 생략한 것이 어쩔 수 없는데 그림으로 가상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고증이자 설정인데 그러지 못한 작품이 많은 것이 과학도로서 아쉬운데 건담은 그것이 충실한 데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도 건담을 마크로스 보다 한 수 위라 꼽고 싶어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 역습의 사야뿐만 아니라 마크로스도 그렇고 80년대의 보수적인 시대상이 반영된 탓에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캐릭터로만 나타나고 그것이 21세기에서도 해소되지 않아 사회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는 것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90년대와 21세기가 되면서 그런 관념이 미디어 안에서 줄어들었지만 오래전부터 고정된 성 역할을 다시 보게 되고 장기 침체와 저성장의 여파로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인 성 역할을 고착시키는 내용이 넘쳐나게 되어 젠더 갈등에 깊어져 인구 절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근심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지브리 애니메이션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런 시절에 소녀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어 남성과 어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일을 주도해 가는 작품을 만든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을 만들어 만인이 평등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생각합니다.
저녁 시간에는 SF 애니메이션 상영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공각기동대가 상영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급작스럽게 작고한 공각기동대의 주연 성우 다나카 아츠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상영관 앞에 세워둔 그림 앞에 꽃 한 송이를 놓았습니다.
이 작품도 상영 전 작품 소개가 있었습니다.
저도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 작품을 분석하는 책을 낸다면 몇 권의 분량도 부족하기에 20분 만에 작품 소개를 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소개를 맡은 기자가 영화 애니메이션 평론가로서 분석하는 것이 과학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의 관점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더 논할 것이 많은 작품이 공각기동대입니다.
특히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형사와 같은 존재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지금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이어서 오히려 21세기에 다시 살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극 중에서 모토코는 자신이 뇌만 빼고 모두 기계로 이루어진 탓에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데 2029년을 5년 앞둔 지금에도 그럴 만큼 과학이 발달하지는 않아 그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고 있죠.
그 대신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자의식을 잃고 집단주의에 휘말려 선동에 넘어가 세뇌당한 사람이 너무 많고 오히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타락하여 전체주의가 더 널리 퍼져나가 독재 정권이 더 늘어나는 국제 정세와 다양성이 부정되어 사회가 획일화되어 전 세계가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객관화가 안 되어 자아도취에 빠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변화하려 하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넘쳐 나서 깊어지는 갈등에 세상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아키라와 공각기동대를 연이어서 보니 두 작품이 어두운 미래를 표현하는 지향점 뿐만 아니라 자기 객관화라는 출발점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에 제작된 작품인데 국내 개봉은 2002년 5월에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온갖 칭송을 다 받지만 흥행에는 실패해서 저주받은 걸작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이다 보니 국내 개봉 때도 관객이 적어 일주일 만에 스크린에서 밀려났었어요.
상영 기간도 짧고 재개봉도 어려울 거라 예측해서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두자!라는 생각에 사회 초년생이어서 지치고 주머니 사정이 어려웠지만 상영하는 동안 일 끝나자마자 근처 영화관으로 향해 4~5번을 매일 저녁마다 연달아 보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작품 속에서 모토코 역을 맡은 아츠코 여사는 제작 당시 33살의 청년으로 젊고 강인한 여전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것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작품 소개할 때 히로인을 연기한 아츠코 여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제작되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에 맞추어 번역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것이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보니 원작 만화는 더 이야기가 난해하고 복잡하며 다양한 사건들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짜임새 있게 재조합하여 8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의 영상으로 재탄생 시킨 각본가의 능력에 감탄하였어요.
9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중년의 관객들이 주류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대를 초월한 명작에 대한 관심은 세대와 무관한 것이어서 청소년과 청년 관객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희대의 걸작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 마니아들이 몰려들어 금방 매진될 거라 마음을 졸이기도 했는데 의외로 객석에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어 이 나이를 먹으니 머리도 녹슬어 감정도 무뎌져 뭔가 큰 감동을 느끼기가 어려워졌는데 마지막 작품인 공각기동대를 보고 나서는 마치 청소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감정을 잠시 나마 느끼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에 보았을 때와 같은 여운에 잠겨 상영이 끝나고도 몇 분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도 영화 속 장면과 대사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영화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것 까지 지켜본 관객들은 박수로 상영회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났는데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제작진이 제기한 의문을 함께 하며 오늘의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많은 의문을 제기해 보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 않고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는 의문으로 이어지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그러기에 영화 속에서 제기하는 의문은 아직 미래의 일이니 잘 준비하면 밝은 미래를 맞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 날이 정말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