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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세월, 신앙·봉사로 나를 지탱해왔다”
[단독인터뷰]
반독재투쟁 하다 ‘의문사’한 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인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사’라는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친 고 장준하 선생의 37주기를 맞아
지난 17일 파주에서 ‘장준하 추모공원’ 개원과 함께 장 선생 묘소 이장식을 가졌다.
이장을 위해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 선생의 두개골에서
원형 함몰과 균열이 발견됨으로써 그간의 타살 의혹 심증이 굳어졌다.
이에 따라 유족과 기념사업회측은 청와대에 진상조사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추모공원 개원식에는
장 선생의 유족과 백기완 선생, 장준하기념사업회 관계자 등이 대거 참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희숙 여사와 장남 호권 씨 등이 참석했는데,
올해 86세이신 김 여사는 지난 시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곱고 단아한 자태로 참석자들을 맞아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김 여사가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셋집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장준하 추모공원에서 열린 장 선생 부조 제막식에 참석한 김 여사와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그로부터 며칠 뒤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응해 주셔서
지난 24일 김 여사님을 만나 뵈었다.
강남구 일원동 한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자
가운데 도로를 기준으로 좌우의 아파트는 모양새부터 확연히 구분이 지어졌다.
왼쪽은 일반분양 아파트,
오른쪽은 임대아파트.
김 여사님은 오른쪽 임대아파트의 꼭대기 층의 동쪽 끝집에 살고 계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따라 가는 도중에
주민들이 내 놓은 화분이 드문드문 있었다.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는
실내에 화분 하나 놓을 자리도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열린 문을 들어서자
김 여사님이 맏며느리 신정자 씨(동아투위 회원)와 함께 마루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먼저 김 여사님께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서너 명이 겨우 앉을만한 거실에서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서쪽 벽에선 액자 속의 장준하 선생이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계신 김 여사님은
추모공원 개원식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단정한 차림새였다.
팔순 연세이고 보니 심장도 좋지 않고 혈압, 당뇨까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귀가 좋지 않으셔서 필자도 소파로 올라앉았다.
다음은 필자 일행이
김 여사님이 살아오신 지난 시절에 대해 한 시간여 나눈 대화를 간추린 것이다.
- 이번에 장 선생님 추모공원을 개장하고 또 이장을 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너무나 행복합니다. 37년 만에 선생님을 만나 뵈니 기쁘기 한량없었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유골 상태가 좋아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색깔도 좋고, 이빨도 고르고…. 선생님 유골을 보고는 다들 놀라워하더군요.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리라 믿습니다.”
- 이전에 선생님이 파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던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습니까?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전에 장례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유해를 모실 곳도 마땅치 않고 또 장례 치를 돈도 없었습니다.
장례미사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집전하셨는데
마땅히 모실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천주교 측에서 파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를 배려해주셨습니다.
그것 말고도 저희 가족들은 천주교 측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 거실에 걸린 장준하 선생 사진을 배경으로 선 김희숙 여사.
ⓒ 진실의길
-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되며, 어떻게 지내는지요?
“3남 2녀입니다.
첫째(호권),
둘째(호성),
막내(호준)가 아들이고
셋째(호경),
넷째(호연)가 딸입니다.
막내는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과 함께 방북선교를 한 것이 문제가 돼
입국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벌써 받을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장준하) 아들인데....’ 하면서 여태 미루고 있답니다.”
(장 목사는 지난 2009년 11월 필자를 통해 박지만 씨에게 ‘공개편지’를 보낸 바 있다.)
[참조-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 씨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 장 선생님께서 졸지에 돌아가신 후 남은 가족들은 그간 어떻게 지내오셨습니까?
“말 그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온 가족들은 흩어져 한동안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지냈습니다.
며느리는 친정으로 가고
저는 제주에 사는 둘째딸(호연) 집에서 한동안 몸을 의탁했습니다.
얼마 뒤 서울로 돌아와서는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지냈습니다.
어떤 이는 쌀집 주인을 시켜 쌀을 몰래 갖다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신문지에 고기를 싸서 담 너머로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주변 분들에게 참으로 많은 빚을 졌습니다.”
- 가족 중에서는 특히 장남 호권 씨가 큰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들은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취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겨우 직장이라고 들어가면 얼마 안 있어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출근한지 한 달도 안 돼 사장이 한달치 월급을 주면서
제발 좀 나가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회사가 세무조사를 당하고 하니까
그 사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큰 애는 서점의 책 감시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직업이 아마 한 100가지는 될 겁니다.
그나마도 국내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말레이시아로 갔다가
거기서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싱가폴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무엇으로 지탱하며 살아오셨는지요?
“지난 40년 세월은 신앙(천주교)과 봉사활동으로 저를 지탱해 왔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저도 죽고 싶었지만
아이들 다섯을 두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평소 상봉동 성당엘 다녔는데 교인 중에 상사(喪事)를 당하면
달려가서 시신을 수습해주곤 했었습니다.
그게 제게는 거의 유일한 외출이었는데요,
그 때마다 성당에서 국수랑 먹을 것을 도와주곤 했었지요.
또 명절 같은 때가 되면 옷 만드는 집에 가서
동정도 달고 주름도 펴주고 하면서
잔심부름을 해서 몇 푼 받아서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어찌 먹고 살았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추석 때마다 20만원씩 보내주셔서 큰 힘이 됐습니다.”
▲ 자택에서 필자 일행과 대화중인 김희숙 여사. ⓒ 진실의길
- 집안 살림살이는 선생님이 생존해 계실 때도 비슷하지 않으셨나요?
“마찬가지였죠. 1년에 이사를 평균 세 번 정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리집엔 가구 같은 게 없고 대신 캐비넷이 세 개 있었습니다.
언젠가 김지하 시인이 선생님 선거유세 때 찬조연설을 하셨는데
‘장 선생 집에 가보니 항공모함만한 구두 한 켤레와 캐비넷 셋뿐이더라’고 해서
화제가 됐던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더러 함석헌 선생님, 법정 스님 등 손님들을
집으로 모시고 오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찬거리가 없어서
겨우 동태와 두부로 전을 부쳐 상에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마나 맛있게들 잡수셔서 감사했지요.”
- 장 선생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 같은 건 없습니까?
“국회의원 하실 때 국방위에 소속돼 있어서
월남까지 국정감사를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현지에 가셔서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적하신 모양인데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집으로 큰 박스가 하나 배달돼 왔습니다.
그 안에는 케익과 두툼한 돈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욕심이 나기도 했었지만
그날 저녁 선생님께서 비서를 통해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또 저의 한 친구가 아들이 군에 갈 때가 됐는데 어느 날 제게
‘남편 명함에 도장만 하나 찍어 주면 집 한 채 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게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우리 남편은 명함이 없다고 했더니
‘그런 영감과 어찌 사느냐’고 타박을 하더군요.
선생님이 국회의원이 되자
이제 월급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사상계> 낼 때 밀린 종이값, 인쇄비로 월급이 차압돼 그 때도 늘 빈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늘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장 선생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방위에서 활동함)
- <사상계> 내실 때의 기억할만한 일화는 없습니까?
“당시 선생님은 기자이자 편집장이셨고 저는 교정 담당이었습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히 사무실도 없고 해서
주로 다방을 이곳저곳 전전하면서 교정을 봤습니다.
또 당시 영도다리 밑에 있던
<리더스다이제스트> 사무실에 가서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새 책이 나오면 리어카에 싣고 부산 광복동 동아서적센터로 싣고 가서 넘겼는데요,
제작 과정에서 종이나 인쇄비는 외상이 되지만 동판값은 외상이 안 돼
한번은 제 오버를 팔아서 대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 미문화원(USIS)에서 종이값을 대줘서 조금 숨통이 틔었지만
책을 펴내는 내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식인 사회의 큰 호응을 얻어서 보람은 컸습니다.”
(장 선생은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賞)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함)
▲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쓰던 안경. ⓒ 진실의길
- 장 선생님께서 약사봉에서 변을 당하실 무렵 무슨 낌새 같은 게 혹 있었나요?
“선생님 본인은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것저것 신변의 정리를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목숨처럼 소중히 보관해오시던,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전에 사용했던 태극기는 두 딸이 다니던 이화여대에 기증하셨고,
망우리에 있는 시아버님(장석인 목사) 묘소도 참배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혼배성사도 해주셨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게 선생님 나름의 주변정리였던 것 같습니다.”
- 사고 당일 선생님의 사고 소식을 전하는 의문의 전화를 받으셨다면서요?
“예, 그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고 당일 오후 1시~2시경 낯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장 선생님에 등산을 하시다가 크게 다쳤다고 하더군요.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때만 해도 전화가 귀했는데
산에서 다친 사람의 소식을 누가 어찌 알고 그 시각에 전화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할 따름입니다.”
-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금 살고 계신 이 집은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20만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정이 어떠신지요?
“정부에서 광복군 출신들에게 13평짜리 아파트를 제공하였으나
선생님은 ‘박정희가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며
아파트는 물론 건국훈장도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선생님 동지들이 국가에서 주는 것이니 받아도 된다며 강권해서
훈장도 1991년에 남들보다 뒤늦게 받았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국가보훈처와 서울시가 국가유공자에게 제공한)
영구임대아파트이며 7~8년 전에 입주했습니다.
또 매달 (독립유공자 유족) 연금도 받고 있는데 그날이 되면
‘영감님,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하곤 합니다.”
- 2007년 대선 무렵 박근혜 의원이 찾아와서 사과를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박근혜가) 돌연 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장 선생님과 제 부친(박정희)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서로 달랐을 겁니다’
그러더군요.
사과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보상’ 운운 하길래 제가 듣다못해 한 마디 했죠.
‘너희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정이 파괴되었고,
또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무엇으로 보상하겠다는 것이냐’고요.”
(이 얘기 끝에 동석했던 김 여사님의 맏며느리 신정자 씨는
2007년 박근혜 의원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아파트 인근 청소를 하는 등 주변에서 부산을 떨었다고 들려줬다)
- 살아오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장 선생님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을 때였습니다.”
(1966년 삼성 재벌의 ‘사카린밀수사건’이 발생했을 때 장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했다가 구속돼 한 달간 수감됐다가
그해 12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는데 이듬해 2월 공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려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당한 바 있다.)
▲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을 문앞까지 나오셔서 전송하는 김희숙 여사.
ⓒ 진실의길
[오마이뉴스] 요즘 내 생각들 2012/08/27 16:55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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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부진 죽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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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보상 운운하고..
나쁘네요.. 아주 나쁘네요.
무릎꿇고 백배 사죄해도 모자랄텐데..
어찌 보상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요
나뻐요... 정말 나뻐요..
시방이라도..
무릎꿇고 백배 사죄하시길요...
푸른송님 오랫만이세요..^^
태풍에 피해는 없으시죠>>
한동안 안보이셔서..
이민 (다른카페) 가신줄 알았어요`
자주 뵙구요.
감동방 많은사랑 주세요...
소중히 올려주신 글에..
잠시 머물러봅니다...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