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erto Ginastera: Concerto per violoncello e orchestra n.2 op.50 (1980):
https://youtu.be/R266BZShxcw
비외탕의 첼로 협주곡
비외탕이 첼로 협주곡을 두 곡이나 작곡했지만, 이 협주곡들은 모두 잊혀졌다. 동시대의 비르투오조였던 '세르베'의 연주는 그에게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William Ⅲ)에게, 첼리스트 '조제프 세르베(Joseph Servais)'에게 헌정된 두 곡의 첼로 협주곡들은 비외탕의 협주곡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기교적이고 섬세한 독주 악기와 파워풀한 오케스트레이션, 느린 악장의 우아함. A 단조의 첼로 협주곡 1번(op. 46)은 1876년 1월에 작곡되어졌고, 그 해 10월 암스테르담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와, 첼리스트 '요제프 홀만'(Joseph Holmann)에 의해 초연 되었다. 작곡가 비외탕에게 있어서 1870년대는 그의 인생에 있어 급격한 변화를 맞는 시기이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왼쪽 마비증상으로 인해 브뤼셀 음악원에서의 교수활동을 포기해야했기 때문이다. 1873년 10월 13일, 비외탕은 한쪽(왼편) 몸 전체가 마비되는 걸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머지 반쪽의 부분 또한 언제 마비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은 음악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작곡을 시작했으며, 두 개의 첼로 협주곡은 그러한 작업의 산물이다.
그가 절망에서 희망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때인, 1879년 또 한차례의 마비증상이 그를 덮쳐왔다. 비외탕은 더 이상 바이올리니스트로 혹은 지휘자로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연주가로서 공식적인 활동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그는 이제 모든 걸 예감하고서, 가족과 함께 알제리의 요양소로 떠났다.
1880년 10월 19일 그의 두 번째 첼로 협주곡(B 단조)의 작곡을 마친 그는 "상상해 보세요, 나는 누구나 아름답다고 하는 첼로 협주곡을 이제 막 끝냈습니다. 그것은 세르베에게 헌정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바로 다음 해인 1881년 6월 6일에 숨을 거두었다.
두 곡의 첼로 협주곡의 레코딩으로는, 첼리스트 '하인리히 쉬프'(Heinrich Schiff)와 네빌 마리너(Neville Marriner)가 지휘하는 슈트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이 협연한 음반이 유일하다. 세계 최초 레코딩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 CD는 쉬프의 유려한 첼로 연주와 마리너의 탄력적인 지휘와 어울려 이 곡에 대한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해 주었다.
하인리히 시프(사진)
오스트리아의 그문덴에서 태어났으며 빈 음악원에서 토비아스 퀴네를 사사했다. 1972년 그라츠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협회 음악제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대역으로 루토스와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콘체르토 데뷔가 되었다.
이후 콘체르토 연주로서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시카고 교향악단,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 모니, 뮌헨 필하모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들과 자주 협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바흐에 의욕적이어서 90년 10월 16일과 17일에 걸쳐 일본의 카잘스 홀 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탁월한 기술을 갖고 있지만 그 기술을 표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흐라면 바흐의 마음을 유지하려 한다. 바로크에 대한 연구심도 있어 바흐 모음곡에서는 바로크적인 필링을 여기저기에 배게 한 것이 인상적이다. CD에서 소품 역시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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