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沿海州)
-행정중심지 : 블라디보스토크
-면적 : 16만5,900 km²
-인구 : 약 200만
-북한과 국경 : 16.93km
-북한과 철도연결거리 : 하산-나진 54km
-고려인 연해주 이주시기 :1863년부터
-연해주 체류 고려인수 : 약4만
프리모르스키 크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 Primorskij kraj)는 러시아 원동 지방에 있는 크라이(주)이며 줄여서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 Primorʹe)라고 한다. 프리모리예는 '바다에 접한'(연해)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한자로 의역해 연해주(沿海州)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빈해변강구(滨海边疆区)라 하며, 영어에서도 더러 번역해 Maritime Territory라 하기도 한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러시아령이라는 뜻으로 노령(露領)이라고 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러시아로[1], 남서쪽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인접한다.
면적은 165,900km², 인구는 195만 6497명 (2005년 기준)이다. 223,348km²인 한반도보다는 작지만 남한 지역 100,210km²보다는 크다.
주도는 동해에 면한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이다. 중심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나홋카 등. 현 크라이 지사는 블라디미르 미클루셰프스키이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러시아의 제1간선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점이자 극동 최대의 항구도시로서 무역,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이곳이 여행유의 지역인 이유는 북한 때문이다. 이 곳은 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이 있어서 여행유의지역이다.[2] 그 외의 위험요소는 네오나치 외에는 없다.
오랫동안 동아시아 지역의 변방으로서 북방 이민족들의 영토였다. 상고시절의 연해주는 숙신인들 같은 퉁구스계 종족의 땅이었다. 이후 고구려와[3]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발해가 멸망하고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의 지배를 차례대로 받았다. 이후 명나라 시기 초기에는 여진족 치하에서 명목상 명나라에 속해있었다가 다시 왕조국가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나 청나라에 의해 다시 왕조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쪽의 원주민은 만주 일대에 걸쳐 사는 여진족-만주족이다.
한편 동유럽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작은 소공국들을 통합하여 성립된 루스 차르국은 점점 세력을 넓혀 시베리아를 넘어 결국 동아시아의 끝자락인 이 지역까지 다다랐고 청나라 역시 자신들의 원류인 만주의 배후지인 이 지역을 쉬이 넘겨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에겐 러시아의 우수한 무기가 버거웠고, 러시아 역시 소수의 탐험대와 변방인들로 청나라의 대군과 싸우는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청과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고[4] 그 끝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백여년이 지나 청나라의 국력이 쇠한 가운데 제2차 아편전쟁의 중재를 하는 와중에 러시아 제국은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요구, 결국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가 연해주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더 나아가 러시아는 의화단의 난에서 20만의 병력을 진주시켜 만주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또 동만철도가 있는 북만주와 하얼빈을 차지하고 송화강과 고비 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여 팽창이 정지되었으며 국공내전에서 동청철도 및 다롄과 하얼빈 조차지에서도 물러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무위키===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일제(日帝)때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이고 연해주로 간 사람들은 고려인이다. 고려인동포는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자 들로서, ‘고려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은 교포들의 총체적 용어로, 러시아어(語)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인 또는 고려족이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했다. 이어 1865년(고종 2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명에 달하는 한인이 이주했다.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고, 대부분이 농업이민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의 근거지가 되었다.
1863년 한인 연해주 이주 시작
1914년 교민 수 63,000명으로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톡)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제 25만 명 이상 거주
1937년 (9월 21일~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 강제이주 당함
1931년 스탈린은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인들을첩자로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구실로 삼아 1937년 고려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에 대한 강제 이주정책을 실시하여 지식인은 처형하고 예고 없이 화물차와가축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어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에 중앙아시아에 버렸다. 낮선 땅에 도착한 이들은 살기 위해 토굴을 파고 한민족의 강한 생명력으로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 집단 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민족으로 뿌리내렸다.
그러나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 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직장에서 추방 당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어 다시 연해주 지방으로 모여 들었으나 연해주마저 어려움에 처하자 조상의 땅 한국으로 입국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
연해주(극동)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들은 구소련의 국경 소수 민족 중 큰 무리에 해당되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은 일본의 강제 점령 하에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가난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주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다.[4] 고려인의 이주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1917년 ~ 1926년에는 고려인들이 거의 170,000명으로 3배로 늘어났고, 블라디보스토크 농촌 인구의 1/4을 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으로 러시아 동부의 고려인 단체에 대한 고려인 자치령이 모스크바에서 논의되었으나, 토지에 대한 경쟁을 우려한 지역 러시아인의 반대와 일본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로 1925년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정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고려인 자치구는 허가되었고, 한국어 학교와 신문이 설립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 노선은 국경 너머의 일본의 속박과 대조되는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모범적인 정책으로서 제시되었다. 한편, 중앙 정부는 1926년 12월 6일 채택된 비공개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는 구소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는 하바롭스크 북부에 거주하는 88,000의 고려인의 절반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정치적, 재정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1930년 이전까지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1930년을 시작으로 충성심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고려인들은 북쪽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초기에는 작은 숫자였으나[5] 이것이 종종 구소련의 첫 번째 민족 청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소련당국은 1935년부터 3년 동안 2,500명의 고려인을 "일본 간첩"이란 혐의로 총살하기도 했다.[6] 대규모의 이주는 일본의 침략의 구실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1937년까지 연기되었다.
1937년 9월에서 10월까지, 구소련 당국은 극동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이주시켰다. 17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계획적인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 국경으로부터 이주되었다. 그 법적 근거는 구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공동 법령, 극동 러시아 국경 한민족의 이주에 대한 것이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하였다.[7] 이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겐리프 류시코프가 로스토프로부터 전임되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위키백과===
사할린 섬
사할린 섬은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섬이자 주이다. 면적 72,492km²의 꽤 큰 섬으로서, 러시아가 영유한 섬 중에서 두 번째로 크다.[4] 러시아의 동쪽 해안, 일본의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50만명(2016)이며 러시아인이 다수이고 한국계가 3만명으로 2번째로 많다. 일본과의 사이의 해협을 라페루즈 해협[5]이라 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러시아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해협은 타타르 해협[6], 섬 북서쪽의 포기비와 대륙측의 라자레프와의 간격이 가장 좁아 불과 7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연륙교를 지을래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너비라는 뜻. 이곳에 스탈린 시절에 사할린 주둔군 보급도 할겸 해저터널을 뚫으려고 공사를 해서 터널 뚫기 시작한 시점에 스탈린이 죽으면서 죄수들이 사면되어서 공사를 포기했다고 하며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의 바다가 얼어 붙기 때문에 썰매를 타고 사할린섬과 러시아 본토를 오갈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무르강 하구에 큰 시장이 열려 사할린 사람들이 러시아 본토에 장을 보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할린 원주민들은 물자를 구하러 겨울에 썰매를 타고 해협을 건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있으며, 쿠릴 열도와 함께 러시아의 사할린 주를 이룬다. 최대도시이자 중심도시는 섬 남쪽의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북위 45~54도 사이에 위치하니 남한의 한참 북쪽에 있다. 남한 최북단이 북위 38도 36분, 남북한(한반도) 최북단인 온성군이 북위 43도이니까(...) 면적 72,492㎢인데 길이는 948km에 달해서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다. 참고로 남한 면적이 100,210㎢, 남한 총 길이가(제주도 제외) 506km 쯤 된다. 사할린 섬은 산이 많은 지형으로서 섬의 2/3는 산지이며, 두 개의 산맥이 나란히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섬이지만 크기가 크다 보니 큰 강도 2개 있다. 그 중 팀 강은 길이 400 km에 달하는 긴 강이다. 서울특별시-부산광역시 거리가 대략 400km쯤 된다.
사할린에는 사할린 한인들이 상당수 살고 있다.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주민의 83%를 차지해서 1위인데, 2위는 바로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30,000명으로 주민 수의 5.5%를 차지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징용된 동포 및 그 후손이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자 일본은 한국계들을 방치한 채 본국으로 무책임하게 철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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